ococ 여름청?춘?

글터디 4주차

글터디 by 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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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여름이 유난히도 더웠다. 하얀 하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개중에서도 특히나 하복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곧게 뻗은 허연 목덜미가 두드러지는 사람이 있었다. 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해보일 것 같은 사람. 지금 뿐만 아니라 전에도 교내 행사 중에서 재학생 대표로 선언이나 선서를 했던 것도 같은데, 워낙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마치 각인되듯 박혀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외꺼풀이며 새초롬해보이는 눈매. 얇으면서도 색이 진한 입술이나 높은 코 같은 이목구비가 그랬다. 염색 한 번 해본 적 없어보이는 새까만 머리는 주변 이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하필 유독 하얀 피부를 가진 그여서 더 눈에 띄었다. 제법 멋을 내어 앞머리를 살짝 넘겨 누구에게나 웃어주는 모습이 아무 이유 없이 퍽 우스웠다. 무심코 풀어놓은 사고가 거기까지 멋대로 흘렀을 때에는 스스로에게 놀라기까지 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한 불쾌감을 가진 적이 지금까지 있었던가. 

신입생 대표, 이경백.

 

퍼뜩 정신을 차리자, 마침 그 남자가 무대 위에서 일종의 쇼와 같은 재학생 선언을 마친 직후였다. 그래, 꼭 저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

 

 

 

 

이름을 알게 되자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은 따로 찾아볼 것도 없이 들려왔다.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된 지 몇 주만에, 성운은 학교 내에서도 그를 둘러 싼 유언비어가 아주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경백. 재벌 3세잖아. 화엽 둘째 아들이라던데. 3학년 이규호 선배랑 형제래. 근데 엄마가 다르다던데? 진짜 드라마야 뭐야? 다음 달부터 학생회장 재임하잖아. 저번에 운동장에서 반대항 축구한다고 펄펄 날아다니는 꼴 못 봤어?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또 서글서글하니 인기는 좋은데, 알고 보면 성격이 그렇게 나쁘대. 저번 달에 XX여고에서 사람 찾아와서 울면서 물건 던지는 거 봤어? 그런데 경백 선배 정도면, 난 그래도 한 번은 연애 해볼 것 같은데.

 

성운은 영 관심 없는 척 창문 밖을 보며 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들을 주워섬겼다. 그러면서도 성운은 속으로 그 소문들의 진위를 진지하게 가늠했다. 제가 그 남자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얼굴뿐이었는데, 스스로 그에 대한 무언갈 판단하려고 한다는 점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는 것만 같은 제 모습이 불쾌했다.

 

창문가에 달려있는 커튼이 팔락대며 쏟아져 들어오는 점심시간 끝물의 여름 햇빛이 특히나 더 강렬했다. 5교시 시작 15분 전이었다. 미화부장으로서 학교 뒤 쪽에 미리 쓰레기봉투를 내놓는 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학교 건물 뒤 쪽은 교사들이 주차장으로 쓰는 공간과 쓰레기봉투를 내놓는 공터 밖에 없어 한적하기도 한적했지만, 몰래 누군가의 감시를 피해 비행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기온이 부쩍 높아지며 특히 학생들이 실외 활동을 기피하고 있는 요즈음은 특히나 더 그랬다. 마주치는 이가 있다면 점심시간의 끝물을 틈타 비행을 즐기고 있을 몇 질 나쁜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성운의 예상은 빗나갔다. 학교 건물 뒤 쪽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코너를 돌던 중 마주친 이는 멀끔하게 잘생긴 3학년이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인상적인 남자는 슬쩍 성운의 명찰 색을 확인해 학년을 확인하더니 픽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곤 유유히 코너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이었고, 다가오던 방향이 방향이었던지라 성운은 남자의 명찰은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 있을 법한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

 

 

 

 

 

 

씨발.

 

불쾌해진 성운이 코너를 돌자마자 귓가에 꽂힌 목소리는 최근 성운이 가장 많이 곱씹었던 목소리였다. 성운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선언문의 마지막 줄 – 재학생 대표, 이경백. – 이 수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잠시 몸을 멈추자, 이윽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여지는 소리가 나더니, 제법 익숙한 호흡으로 담배 연기를 마시고 뱉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진짜 미친 새끼……. 이규호만 아니었어도, 씨발. 내가 이런 꼴은…….

 

담배 연기와 함께 내뱉는 말들은 지금껏 성운이 들어왔던 남자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들은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반박할 여지없이 그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질감이 들어야 마땅하건만, 그것이 마치 남자의 본래 모습 같게만 느껴졌다. 설명할 수 없는 이 향수와 그리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제 심장 소리가 고막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걷던 몸을 멈추는 바람에 양지와 그림자 사이에 몸을 걸치게 되어 오후의 여름 햇빛을 받게 된 성운의 등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주춤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넋을 놓은 듯 허공을 주시하며 비슷한 말들만 중얼거리던 경백이 고개를 팩 돌려 성운을 시야에 담았다. 동시에 경백의 몰골이 성운의 눈에도 담겼다.

 

항상 잘 정리되어 있던 머리는 정돈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하얀 하복 셔츠가 흐트려져 있었다. 새초롬했던 눈가는 의아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고, 아까 전만 하더라도 물기가 맺혀있었을 것만 같은 눈매가 말라 버석거렸다. 담배를 무느라 약간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혀가 유독 붉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처음에도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목 쪽으로 넘어갔다. 칼라에 애매하게 걸쳐 자세히 보아야 겨우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자국이 그 곳에 있었다. 이로 잘근잘근 씹어 흡입해, 누군가 만들어낸 키스 마크가 그 곳에 있었다. 그 존재를 파악한 성운의 동공이 좁게 조여들었다. 난잡했다. 그 누구도 이 이경백이 2학년 중 제일 기대 받는 영재이며,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고, 또 여럿 차례 대표로서 많은 이들 앞에 선 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경백은 낱낱이 분해되어 바닥의 본질을 강제로 드러낸 채였다. 누군가가 쏟아낸 욕망을 반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무능한 제물이었다. 혐오감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을, 심지어는 대상 역시 정의할 수 없었다.

 

조용히 시간이 흐름에 경백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크게 떠졌다가, 잠시 흐릿해졌다가, 이제는 성운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경백의 시선을 성운은 굳이 애써 피하지 않았다.

 

봤어?

 

경백은 길게 묻지 않았다. 그래서 성운 역시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뇨.

하.

 

기껏 솔직히 한 대답이 헛웃음으로 받아쳐지는 것은 평소와 같다면 불쾌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성운은 썩 그렇지 않았다.

 

왜, 너도 이제 내 꼴이 우스워? 어떻게, 화엽 반푼이한테 협박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네 것도 빨아달라고?

 

경백이 신랄하게 말하는 사이 담배 불이 끝까지 타들어가 경백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타올랐다. 성운은 가만히 그 꼴을 보고 있다가 경백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과 지금 당장이라도 저 말을 입에 담는 저 남자를 경멸하고 싶은 양가감정이 심히 충돌하고 있었다. 더러운 동시에 욕심이 나기도 했다. 저 남자의 약점을 잡아 내 손 위에 올려놓는 기분은 어떨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되지만 언젠간 꼭 그런 것을 바랐던 날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닳고 닳은 사람처럼 굴지 마요.

……못 봤다며.

 

경백을 사납게 노려보며 성운이 천천히 말을 짓씹자, 경백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성운을 훑었다. 그런 경백의 시선을 무시하며 경백의 손에서 담배를 꺼내간 성운이 건물 벽에 담배를 문질러 껐다.

 

곧 5교시 종치겠어요. 들어가 봐야죠.

시발, 뭔 개소리야.

 

성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본래 목적이었던 쓰레기봉투를 처리하고, 코너를 돌자 경백이 급하게 성운을 붙잡았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도 모르는 상대한테 빨아준다는 소리나 한다니, 성운으로서는 코웃음 칠만 한 일이었다. 그래놓고선 제가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쌓아올린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첫 만남부터 묘하게 가슴에 그득그득 찼던 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숨이 막힐 정도로 짙었다. 아무 대꾸 없이 성운은 아무 말 없이 제 명찰을 가리켰다.

 

잊지 말고, 꼭 찾아오세요.

 

단단히 당신에게 나를 새겨놓아야겠다. 무의식이 성운을 그렇게 부추기고 있었다. 땀방울이 경백과 성운의 목과 뺨을 타고 흘렀다.

 

그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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