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잎 클로버로 치는 꽃점 첫마디는 사랑해

MPC 도로시 19세 프로필

시데레우스 by 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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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 曰 “… 그 시절의 경험 때문에, 나는 어디에도 쉽게 적응하지만 결코 스며들지는 않는 사람이 되어갔던 것 같다. 언젠가 떠날 곳이라는 인식은 사람을 방관자로 만든다. 그리고 다른 어딘가를 그리워하거나 동경하는 몽상가로 만든다.”

도로시 DOROTHY 道鷺提

프로미스나인 이서연

3-3 반장 여자 167cm 『갈매기』 (2018)

자연주의적 모험심이 강한 외유내강

나는 첫눈에 도로시와 막역한 사이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2012년 초입에 산양읍의 인구는 고작 오천 명을 웃돌았고 그중에서도 우리 동네는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도 아니라 외지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다. 중학교 막바지부터 외제 헤드셋을 끼고 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나는 어른들이 다 같이 정다워서 좋지 않으냐고 그럴싸하게 꾸며댈 때마다 폐쇄적인 공동 사회겠죠, 하고 반박한 후 유유히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당시엔 내 머리가 덜 자라서 십몇 년이 지나도 가게 하나가 바뀌지 않는 동네에 뭘 바라겠냐는 빈정거림을 거듭할수록 스스로의 격만 깎아내리는 셈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마을 외곽에 커다란 양식 주택이 건립되기 시작했을 즈음 누구보다 열렬한 각광을 내비친 장본인 역시도 나였다.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일부러 샛길로 방향을 틀어 건축 부지 옆을 지나가는 등굣길은 일상이 되었다. 지면 위에 얹혀만 있던 구조물이 공작되어 날이 갈수록 당당한 위풍을 드러내는 과정을 모조리 지켜본 나의 시선은 한 편의 멋진 타임랩스였을 테다. 저 이 층짜리 벽돌 집에 이사 올 사람은 과연 누구일지에 관한 이야기는 완공 날까지 듣지 못했다만. 정답을 모르기는 마을의 어떤 누구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내게 일말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설비 기사 아저씨들한테 귀찮게 들러붙어도 뭉뚱그려 한 가족이라는 말 외에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수학 교과정을 예습해야 한다 뭐다 하며 정신없이 겨울을 지내고 나니 나도 어느새 벽돌 주택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기가 가시고 풀잎이 돋기 시작한 초봄에 나의 열일곱을 시작할 곳이 영랑고등학교라고만 알았다. 여기도 사립이라는 것만 다르지 아는 이름만 줄지었으므로 어디 중학교에서 왔냐는 질문은 진작에 생략하고 주말에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겠거니. 어렵지 않게 짐작하며 교실 앞문을 열었던 3월 2일. 나는 첫눈에 발견했다. 창가 맨 앞자리에 홀로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소녀를. 내가 그토록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벽돌집 딸내미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 놀라운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싹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내가 장장 일 년간 한마디를 못 건네고 걔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걔는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헤이즐넛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걔의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짙었는데 피곤하다는 인상보다는 어쩐지 화려한 느낌을 자아냈다. 티브이에서 강세를 차지하는 달걀형 한국 여자들과 달리 웃을 때 광대가 도드라져 각진 얼굴형이 세련되어 보였고,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는 아주 살짝 턱을 쳐드는 습관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티가 났다. 나처럼 도로시네 가족이 이사 오기 전부터 관심을 가졌는지 뉴 페이스에 흥미가 당겼는지 모르겠지만 학기 초부터 도로시의 곁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다른 애들이 도로시를 가지고 이야기할세라면 그게 험담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나는 노래를 듣는 척하면서 헤드셋의 볼륨을 0으로 줄여 무슨 말이 오가는지 남김없이 주워 담았다. 그리하여 수집한 도로시의 정보들. 하나, 걔는 닮지도 않은 빨간 머리 남자아이와 같은 집에 산다. 나도 우리 동생이랑 하나도 안 닮았으니 문제없다. 둘, 도로시는 진짜로 미국에서 왔다. 성이 한자 써서 도道인지 Dorothy가 미국 살 적 이름이라 라스트 네임이 따로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 게일일까? 셋, 도로시는 배우 지망생이고 연극과 영화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특히 책상 구석에는 분홍색 표지의 희곡이 항시 놓여 있는데 나 같은 경우 단 한 번도 내가 아는 제목을 발견한 적이 없다. 1학년 끝 무렵엔 ‘갈매기’라는 제목의 희곡을 가져왔길래 일전에 놀러 갔던 부산에서 갈매기들한테 새우깡을 모조리 털린 기억이 나서 표지에 시선을 오래 두었더니 도로시가 처음으로 다섯 어절 이상으로 구성된 질문을 던져 주었다.

이 책 읽은 적 있어?

아니. 갈매기살 맛있겠다고만 생각했어.

동의해. 갈매기살, 그거 진짜 갈매기 고기라며?

누가 대체 그런 말로 너를 속였어?

안녕이나 너 바닥에 지우개 떨어뜨렸다, 프린트 뒤로 넘겨줘가 아닌 갈매기살에 관한 짧은 단상을 시작으로 도로시와 나 사이의 대화다운 대화가 비롯되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겨울씩이나 돼서 하교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열 달이나 헤드셋 너머로 들었던 도로시보다 더 진정성 있는 도로시를 삼십 분 남짓한 하굣길에서 매일같이 터득했다. 벽돌 집이 완공되기 전부터 한국에는 도착해 있었으나 속초부터 쭈욱 해안선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서 전국순례길을 도느라 늦었다고 했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죽음들을 기리기 위하여 백 명 이상의 시민들이 위아래로 검정 옷을 맞춰 입고 끈을 서로의 목에 연결한 채 걸으며 종종 희곡 ‘안티고네’의 대사를 외쳤다는데 난 당시 찍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도로시는 크리에이티브 극단의 최연소 단원으로서 광화문에서 빨간 구두를 신고 노란 소파를 옮기는 퍼포먼스를 통해 도시 이동 연구에 참여했다고도 알려 주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유튜브에 검색하니 정말 길거리에서 소파를 옮기느라 낑낑거리는 도로시의 영상이 존재했다. 심지어 조회수도 꽤 높았고, 소파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데 성공한 순간마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두드리는 도로시의 표정에는 비장함을 넘어선 숭고함 비스름한 감정이 깃들어 있기까지 해서 몇 번이나 돌려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묘한 기시감을 느낀 까닭은 1939년작 <오즈의 마법사>의 주디 갈런드가 연상되도록 차려입은 복장과 소품 때문이었다. 당사자에게 단장의 제안이었다는 설명을 듣고서 얘는 이름 갖고 고생 꽤 하겠네 싶어서 남몰래 혀를 찼다.

가뜩이나 도로시는 숫기 없는 편인 동시에 부정의한 결함을 절대로 보고만 있지 않는 피곤한 성격이었으니까, 그야. 도로시가 함께 사는 어른들을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르는 모습을 누군가 목격하고선 딸내미가 아니라며 뒷얘기를 퍼뜨려 놓을 때도 걔는 불편한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과일 가게 아저씨가 로씨야 그럼 가족이 아니라 생판 남이가? 물어볼 때 나 같았으면 톡 쏘아붙이기라도 했겠지만 도로시는 빙그레 웃으면서 청사과 네 알을 결제하는 게 다였다. 뙤약볕 아래에서 아이보리색 롱 원피스를 입고 쪼그려 앉아 잡초 이파리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길래 답답해서 세잎 클로버 네잎 클로버가 무더기로 자라난 밭에 데려가 주었더니 도로시는 다음 날 반의 학우 수만큼 세잎 클로버를 코팅해서 가져왔다. 모두에게 나눠 주며 수줍게 웃는, 걔는 그런 애였다.

아쉬웠다. 이제야 친구가 된 것 같은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겨우 도로시를 지켜 줄 수 있는 사이가 된 와중에 이 애를 놔두고 통영시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 당시 항공대학교에 진학하려는 목표로 관련 학원을 다니고 싶어 한 나의 바람과 부모님의 이직 시기가 맞아떨어진 덕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수도권에 이사 가게 되었다. 우리는 분명 서로의 절친한 조우가 아니거니와 내가 도로시를 지켜본 만큼 도로시는 나를 관찰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를 특별하다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점까지 사고가 다다르면 나만 마냥 우울해지곤 했다. 겨울이 지날수록 우중충해진 나를 달래는 듯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준 도로시는 나를 기억할 수 있게 마지막 선물을 남겨 달라 부탁했다. 영원히 미국에 살 줄 알았던 도로시 워커, 돌연한 결심으로 인해 두 개의 여권을 지니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 아직 한자 이름이 없댔다. 언젠가 한자 능력 검정시험 1급을 땄다고 자랑했던 나를 기억하고 작명을 해 달란 저의인가.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늙을 로와 윗사람 죽일 시밖에 모르겠는 내 입에서 갑자기 그럴싸한 작명이 튀어나왔다.

해오라기 로鷺와 떼지어 날 시提.

도로시, 너는 이제 정말 갈매기로 사는 거야.

그녀에게 알맞은 작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로시가 여느 때보다도 밝게 웃어 주었으므로. 그게 내가 기억하는 도로시라는 배우의 전부다.

영랑고등학교 연극부 소속 도로시

2012-1 ‘왈가닥 여자’ 무대팀 및 조연

2012-2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소품팀 및 조연

2013-1 ‘안티고네’ 의상팀 및 안티고네 역

2013-2 ‘율리에 아씨’ 음향팀 및 율리에 역

2014-1 ‘갈매기’ 조명팀 및 니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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