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끝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엄마와는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교 근처 꽃집에는 사람이 많을 것을 예상해 집 근처 꽃집에서 미리 사 왔지만 그 곳에도 손님이 없진 않아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그러나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나왔기에 아직은 괜찮았다. 양달로 나가면 햇살이 따끔했으나 아직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바람에 손이 시렸다. 꽃다발을 든 손을 바꿔 들고선 저 멀리 보이는 교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아라는 여유 있게 걷다가 그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 도도도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용."

"아이참,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

"이게 익숙해서용. 아라가 불편한 건 아니에용."

태섭은 집에 있기 보다는 밖으로 쏘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 운동을 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집에서 가만히 사색하면서 휴식하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활동하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타입인 것 같았다. 아라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 것치고는 집으로 데려오는 친구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여행을 갔다가 폭설에 갇혀 새해가 지나 돌아온 태섭은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로 가족들에게 미리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기에 동행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명헌을 처음 봤을 때 아라는 적잖이 놀랐다. 친구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같은 학교인 적도 없단다. 정황상 이 오빠랑 여행을 갔다 온 것 같은데 태섭보다 한 살 많으니 친구는 아니고 출신지도 이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학도 다르다고 했다. 전국대회에서 한 번 만난 게 고작인데, 뭐, 지난 1년 동안 대만 오빠를 따라 자주 방문했었다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나? 싶었다.

아라는 명헌이 마음에 들었다. 태섭이 처음으로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했던 그 해부터 태섭의 학교생활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농구부에 제법 정을 붙이더니 진로도 그 쪽으로 결정했다. 무단결석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낙제 과목도 없었다. 주장이 되었는데 낙제를 하면 자기 면이 안 선다나.

새로운 곳에 잘 정착한 아라와 달리 상처 난 얼굴에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정처 없이 쏘다니는 작은 오빠를 많이 걱정했었다. 아라는 그간 태섭을 지켜보며 운동부 선배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게 되었다. 태섭에겐 고난의 시간이 길었다. 한 번 생긴 편견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태섭이 이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경계도 격의도 전혀 없이 스스럼없이 대했다. 호칭만 형이었지 손윗사람보다는 친한 친구처럼 대하는 모습이 좋았다. 성격도 어쩐지 밝아진 듯했다. 좋은 일이었다. 그런 것 말고도 독특한 말투가 흥미로웠고, 말을 붙여보니 은근히 대화도 잘 통하고 재밌었다.

“엄마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렇군용.”

눈치가 빠른 아라는 아주 약간 뻣뻣해진 목소리를 감지하고 명헌이 들고 있는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어른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고, 살짝 긴장한 것 같은 기색의 명헌을 아라는 그렇게 이해했다. 거창한 선물까지는 무리지만 꽃다발이라도 괜찮은 것을 주고 싶어서 큰맘 먹고 용돈을 털어 소박하다고 할 수는 없는 그런 꽃을 준비했는데, 명헌이 준비한 이 꽃다발은

“누가 보면 청혼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정말 과하다.

“그럴 리가.”

당황했다, 당황했어. 송태섭이랑 아는 언니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아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크고 화려한 꽃다발… 그 언니 것일까. 하나인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래도 예의상 두 개는 들고 오지 않나. 그 언니 꺼, 송태섭 꺼.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또 생각했다. 그 언니는 2학년이라 오늘의 주인공이 아닌가 보지. 잠깐, 이 오빠는 작년에도 대학생이었고 올해도 대학생인데… 양심이…?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추측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한 번 씨앗을 틔워 뿌리를 내리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뿌리는 땅속으로 깊어지고 줄기는 하늘 높이 치솟는 것처럼 생각의 뿌리도 줄기도 그렇게 제멋대로 깊어지고 뻗어갔다. 엄마와 만나 강당으로 향할 때 쯤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라의 머릿속에서는 난데없이 수많은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얼굴도 모르는 2학년 여학생에게 고백을 하는 명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진짜 명헌이 알면 통탄할 일이었다.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건 아라의 단점이었다.

강당에 들어가니 열을 맞춰 서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명헌은 그 속에서 어렵지 않게 태섭을 찾을 수 있었다. 혼자 줄을 이탈해 긴 곱슬머리 여학생과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담임 선생님이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머쓱하게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북산 매니저다. 태섭을 보러 북산 농구부에 왔을 때 봤었던 기억이 난다. 확실했다. 그땐 온 신경이 태섭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북산의 매니저인 건 확실했다. 왜냐면 태섭이 매니저를 볼 때마다 유독 얼굴이 풀어진 채 잘 웃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여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명헌과 눈이 마주친 채 서로를 잠시 바라보던 그 여학생은 명헌을 향해 살풋 웃더니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교장 선생님이 단상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졸업식이 시작됐다.

강당에서 본격적으로 졸업식이 거행되기 전, 교실에서 미리 졸업장과 상장을 받았다. 성적 관련 상은 애초에 생각도 안 했고 -양심은 있어서- 출석도 성실하게 꼬박꼬박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장 외 다른 것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섭에게 주어진 상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해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기에 이에 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의 공로상이었다. 앞으로 걸어 나가 쑥스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상장을 건네받을 때 가장 크게 박수를 쳐준 건 달재와 한나였다. 책상에 상장이 몇 장씩 놓인 모범생이면서 가장 크게 박수를 쳐주니 쑥스러웠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강당에서 먼저 한나에게 다가간 건 태섭이었다. 조용히 따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어째서 어떤 의미로든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항상 끝의 끝까지 피하게 되는 걸까? 다행히도 모두들 신나 있었고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도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나야.”

“송태섭, 축하해.”

“응, 너도 졸업 축하해.”

“아니, 상 받은 거 말이야.”

“놀리는 거지 지금? 네가 받은 상장이 몇 갠데.”

“난 진심인데. 섭섭하네.”

전혀 섭섭하지 않은 얼굴로 환히 웃었다. 태섭은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한나에게 말했다.

“어찌 됐든… 정말 고마워, 한나야. 네 덕분이야.”

“내가? 왜?”

“난 사실 고등학생이 되면 농구를 그만두려고 했거든. 더는 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태섭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백호에게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다면 한나에게도, 명헌에게도 실례가 되고 태섭도 불편해지는 상황이 될 것이다. 모든 사정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고마운 마음은 솔직하게 전했다.

“너는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거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에겐 그게 농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어. 그래서 난 항상 네게 감사하고 있고, 앞으로도 감사할 거야.”

“그거 참 의외네.”

“어떤 점이?”

“넌 항상 농구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널 설명하려면 농구를 빼놓고선 설명할 수가 없어. 난 네 그 점이 항상 좋았어. 날 설명하려면 농구 말고도 다른 것이 많겠지만, 내게 있어선 농구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너였어.”

한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갔다가 오히려 덕담을 듣게 된 태섭이 멋쩍게 소맷자락을 만지작댔다. 아마 1년 전에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와닿았을 것 같다. 그러나 한나에 대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또 다른 시작을 한 지금, 한나의 말은 태섭에게 찬사로 와닿았다. 태섭이 방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준 동료이자 친구로서 남기는 찬사. 그건 태섭에게는 북산의 명예를 드높였다며 받은 상보다 더 큰 영광이었다. 한나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어떤 의미로 고맙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아. 하지만 태섭아, 그거 알아?”

“어떤?”

“그건 다 너 스스로 결정하고 이뤄낸 거야. 다 네가 한 거라고.”

한나 앞에서는 바보처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나보다. 태섭은 고장 난 것처럼 고맙다는 말을 더듬더듬 반복해서 말했다. 한나는 한 번 크게 웃어버리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 R대학이라고 했지?”

“응.”

“잘됐다, 난 T대학이야.”

“뭐가 잘된 거야? 나랑 다른 학교잖아.”

“대만 선배가 다니는 학교잖아.”

“아, 그건 그렇네.”

“그리고 명헌 선배도 다니고 있고.”

“어? 그렇구나, 한나 너에겐 이제 선배겠구나.”

“잘해봐.”

“뭐?”

“선생님이 우리 쪽을 보시는데 너,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한나가 웃으며 등을 떠밀었다. 뭘 잘해보라는 거지? 무슨 뜻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담임 선생님이 이쪽으로 다가올 기세였다. 물음표만 남긴 채 태섭은 자리로 돌아갔다. 곧 시작한 졸업식에 오늘 외식 메뉴가 무엇일지 추측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뎠고, 한나가 뭘 잘해 보라고 한 건지는 조금 생각하다가 금방 잊었다.

강당에서 졸업식이 끝나고 건물을 나온 태섭은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사진 기사는 명헌이 자처했다. 가족들과 한 컷, 달재와 한 컷, 농구부 부원들과 한 컷씩. 

불평없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셔터를 눌러대던 명헌은 한나와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사라졌고, 한나와의 사진은 달재가 대신 찍어 주었다. 정말로 명헌이 화장실이 급해서 자리를 비운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자마자 별로 생각이 없어졌다며 다시 나타나자 조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뭘 알고 저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명헌이 약간은 우습고 유치하다고 여겨졌고 동시에 귀엽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친구들과 충분히 인사를 나누고 오라면서 어머니와 아라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가족들의 배려 덕분에 태섭은 졸업식에 참석해준 농구부원들과 함께 체육관에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윈터컵의 마지막 경기가 곧 태섭의 고교 마지막 경기였고, 그 이후 은퇴식도 했었다. 주장 자리는 지난 여름 전국 대회 이후로 진작에 넘겨 주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마지막이라는 것이 그리 크게 와닿지는 않았는데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앞에서 주장이라고 또 거들먹거리고 있는 백호를 보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수없이 봐 왔던 바보짓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다니… 일부러 더 크게 백호를 핀잔 주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대만이 그랬었듯이 자신도 여기에 찾아와야겠다고.

“오늘 못 올 줄 알았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 형.”

“졸업식이니까, 당연히 와야지용.”

“대만 선배는 오늘 못 온다고 해서 형이 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온 태섭은 명헌과 함께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어머니와 아라가 기다리는 카페로 향하기로 했다. 태섭이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명헌은 뜨끔했다. 그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는데… 집안에 경사가 있다며 가족을 팔아넘긴 대가로 태섭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명헌은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멋진 모습으로 태섭에게 기억되고 싶은데 책임감 없어 보이게 땡땡이 치는 남자친구로 보이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태섭의 졸업식을 놓치기도 싫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송태섭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지금 당장 농구의 신이 나타나 졸업 선물로 태섭이 원하는 능력을 선물해주는 일이 벌어져 오늘이 인생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확률 같은 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그때 그랬었지 하는 지나간 추억 중 하나가 되겠지, 졸업식은. 하지만 중요한 날이든 중요하지 않은 날이든 송태섭의 인생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나간 추억 속 대단치 않은 에피소드로 남는다 해도.

“뭐, 정대만은 정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나보지용. 춥지 않아용?”

들뜬 기분에 몸에서도 열이 나는지 교복 위에 입고 있던 겉옷을 훌렁 벗어제꼈는데 가방에 넣으면 구겨지고, 손에 들자니 품에는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어 옆에서 태섭의 겉옷을 들고 곁에서 걷고 있던 명헌이 말했다. 

"춥진 않고요, 잠깐만 이것 좀."

태섭이 명헌에게서 겉옷을 다시 돌려받고 대신 품 안 가득 들고 있던 꽃다발을 명헌에게 넘겼다. 태섭이 들고 있을 때는 한 아름이었는데 명헌의 품 안에 있는 꽃다발들은 여전히 풍성했지만 그리 가득해 보이지는 않았다. 명헌은 마주 선 태섭을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하는 걸까 하고 지켜보니 태섭은 가방을 뒤적여 아까 명헌이 열심히 셔터를 눌렀던 카메라를 꺼내고 있었다. 

"웃어봐요."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태섭인데용."

"난 형 졸업식에 못 갔잖아요, 그러니까요."

적당히 거리를 벌린 태섭이 한쪽 눈을 찡긋 감고 뷰 파인더로 명헌을 들여다보았다. 태섭이 주문한 대로 활짝 웃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태섭에게 항상 보여주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길과 미소 지을듯 말듯한 입가를 한 표정이 마음에 들어 웃으라고 다시 재촉하지는 않았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ㅡ"

찰칵, 셔터음이 터지고 명헌은 입꼬리가 어색해 볼을 매만졌다.

"우리도 같이 찍어야지."

"응? 아까 운동장에서 같이 찍었는데."

"그러면 또 찍어용."

"찍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손짓하는 명헌에게 카메라를 넘겼더니 명헌은 카메라를 반대로 돌려 잡고 렌즈를 얼굴 쪽으로 해서 높이 치켜 들었다.

"이리와용."

명헌이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태섭은 명헌의 곁에 바싹 붙어섰다. 명헌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을 때, 태섭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태섭은 온 힘을 다해 명헌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명헌이 당황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더 이상 활짝 웃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태섭의 얼굴을 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명헌이 비슷한 표정을 지으려던 찰나에 셔터음이 찰칵 울려 퍼졌다.

"꽃다발 다 망가지겠어용."

"참나, 지금 꽃다발이 중요해?"

"태섭 때문에 나 못생기게 나오겠네용."

"뭐 어때요."

내 눈에만 잘생겨 보이면 됐지. 낯간지러운 말은 꿀꺽 삼켰다. 으!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의문이었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간지러운 말들이 척척 떠올랐다.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원래 연애를 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걸까?

"아직 더 있어요."

걸음을 재촉하려는 명헌을 태섭이 다시 붙잡았다. 교복 끝자락을 만지작대는 태섭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명헌은 두 번째 단추를 쥐어뜯는 태섭을 보고 소리내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주고 싶어서…"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명헌은 많이 부끄러운지 순식간에 귀 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눈에 담았다. 얼굴을 숙이고 뒷목을 긁적이는 것 까지 모두 담고 싶어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섭, 나 봐용."

"싫어요."

"이런 건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고 줘야지."

"하…"

한숨을 폭 쉰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빛으로 물든 얼굴을 보니 교복 속에 숨겨진 살결의 빛깔도 궁금해졌지만 애써 눌렀다.

"설마 멋 없게 그냥 주는 건 아니겠지용."

"재촉하지 말아봐요."

태섭은 다시 한숨을 한 번 쉬고 방금 교복에서 뜯어낸 단추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좋아합니다. 앞으로도요. 쭉."

"나는 안 좋아하는데."

"예?"

명헌이 태섭의 손바닥에 올려진 단추를 소중히 집어들고 말했다.

"나는 너 사랑하는 거 같아용."

"젠장,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불타는 얼굴을 한 태섭이 명헌을 뒤로 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래봤자 금방 따라잡혔지만.

"왜? 태섭은 나 안 사랑해용?"

"조용히 해요."

"웃는다, 웃었어."

낯간지러운 생각이 전에 비해 늘었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명헌에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화끈거리는 볼을 두 손으로 꾹 누른 태섭이 명헌을 재촉했다. 그래... 즐거웠는데… 즐거웠었는데.

지금 태섭은 명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눈치를 보게 됐다. 명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까지 태섭을 데려다주고 헤어지려 했으나 명헌 학생도 같이 식사하자는 어머님의 권유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족 모임인데 냉큼 끼는 것이 조금 눈치 없었나 싶기도 했지만 어른이 권하시는 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발단은 아라였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용했다. 태섭과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다 어머니가 그만하라며 중재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고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참을 조용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라를 제외한 모두는 살짝 들뜬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만 통학하는 쪽으로 생각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많이 힘들지 않을까용.”

“하지만 더 먼 곳에 사는 학생들이 많을 테니까…”

대화 주제는 태섭의 거취였다. 통학하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기숙사에 지원했지만 태섭의 집이 학교에서 그렇게까지 먼 것은 아니었다. 더 먼 곳에서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을 테니 태섭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헌은 그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아라가 바라보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아라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명헌은 태섭을 따라왔던 몇 안 되는 친구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씩씩한 것처럼 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작은 오빠가 많이 의지하는 듯한 사람. 아라에겐 친구가 많았지만 이런 느낌의 친구는 없었다. 남자인데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운동부라 그런가 생각도 해봤지만, 여태 태섭이 데려온 친구들도 죄다 운동부였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확실히 알고 싶기도 했고, 짓궂은 장난도 치고 싶어졌다. 아라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태섭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도 있는데 이런 얘기 말고 재밌는 얘기하자.”

“무슨 얘기?”

“저번에 그 언니랑은 어때?”

마침 물을 마시던 태섭이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재채기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컥컥대는 태섭을 진정시키며 휴지를 뽑아주고선 아라를 바라본 명헌이 말했다.

“무슨 언니용?”

“주말마다 거울 앞에 한참을 붙어있다가 나가던데… 오빠는 모르세요?”

송아라 헛소리 하지 마라… 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꾸 기침이 나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런 태섭은 안중에도 없이 아라와 어쩐지 재밌어하는 목소리의 명헌이 대화를 이어갔다.

“태섭이가 그런 얘긴 나한테도 잘 안 해서 몰랐네용.”

“아, 정말요? 친해도 그런 얘긴 잘 안 하나 봐요. 송태섭이 은근 음침한 구석이 있어서 그래요.”

“다 들린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 없으니까 헛소리 작작 해라.”

“대학 가선 그만 좀 차이고.”

“호오, 많이 차이고 다녔나 봐요. 송태섭 씨.”

나직하게 태섭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태섭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났다. 이거 위험하지 않나?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너나 잘해라. 그건 그렇고 너 저번에 초콜릿 만들더니 어째 소식이 없다?”

“아, 그런 얘긴 왜 하냐고!”

태섭은 눈치가 빠르고 사교성이 좋은 아라가 왜 오늘따라 안하던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화제가 넘어간 것에 안도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정작 자기 망한 연애 사업 이야기가 나오니 금방 페이스를 잃었고 대화는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명헌의 눈치를 계속 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아라는 확신했고 기대했다. 운동부 선배나 친한 형 같은 게 아니라고, 언제쯤 진짜로 소개해 줄까, 하는 기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기로 했다. 아는 척 할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척 하며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졸업식까지 찾아와 줬으니 역까지 배웅해주겠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집에 먼저 보냈다. 아직은 해가 짧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석양을 향해 날으는 비행기가 마치 혜성 같았다. 태섭은 명헌과 함께 걷고 있는데 어쩐지 명헌이 조용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해가 완전히 떨어졌고 바람이 쌀쌀해서 코 끝이 시렸다. 푸른색이 섞인 오렌지빛 하늘이 금방 어둑해지자 반짝거리는 별인지 비행기인지 모를 것들이 이따금씩 보였다.

태섭 답지 않게 명헌의 팔을 먼저 살며시 붙잡았다. 명헌은 힐끔 내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명헌의 겉옷 주머니 속으로 태섭의 약간 서늘한 손이 들어갔다. 그래도 명헌은 가만히 있었다. 조금 더 용기내어 따뜻한 맨 손을 어루만지자 명헌의 큰 손이 태섭의 손을 감싸 쥐었다. 힐끗 올려다보자 명헌도 태섭과 눈을 맞춰 주었다.

“왜 그렇게 눈치를 보나용.”

“그런 적 없어요.”

“아니면 말고용."

태섭이 명헌의 손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명헌도 태섭의 손을 꾹꾹 누르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태섭은 꽤 안심이 됐다. 

"아까 아라가 한 말 때문에 그래요?"

"아라가 한 말? 10명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거? 아니면 예쁜 언니 만나는 거용?"

"아니, 정말 그런 적은 없고요. 걔는 왜 그런 말을 해서. 진짜 가만 안 둬."

응? 잠깐, 아라가 숫자를 말한 적은 없는데.

"10명이라고요? 10명인지 11명인지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11명이구나…"

명헌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기겁한 태섭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아야야, 아파용."

"아니라고! 아니, 그걸 형이 어떻게 아냐고요. 정대만이지?"

"뭐가 정대만이에용."

뒤졌다, 정대만 니는 진짜… 선배고 뭐고… 태섭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죄목,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림.

"정대만은 아니에용.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용."

"그게 말이 돼?"

"내가 왜 정대만 편을 들겠나용?”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난 학기에도 지지난 학기에도 조별 과제를 하드캐리한 명헌이 이제 다시는 정대만과 같은 과목을 듣지도 같은 조도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러나 같은 과에 같은 종목이라 쉽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뭐 하러 편을 들겠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마침 내 얘기를 하고 그걸 딱 형이 들어…? 미심쩍은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지금은 태섭이 그럴 입장이 아니었기에 꾹 눌렀다. 

“그런데 내가 정말 짜증 나는 건."

태섭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화난 거 맞았네. 그런데 바꿔 생각해 태섭의 입장이었어도 충분히 짜증 날 만한 일이었다. 만약에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태섭의 이야기를 했고 마침 명헌이 들은 게 진짜라고 가정했을 때에 태섭이 그런 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여자애들이 태섭을 멋있다고 했었단 말이지."

"하?"

태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처음엔 신경이 많이 쓰였던 게 맞지만 이젠 태섭이 10명을 만났든 11명을 만났든 아무 상관 없어용. 날 만나면서 동시에 만난 게 아니라면. 중요한 건."

"중요한 건?"

"내 눈에 예쁘고 귀여운 건 남들 눈에도 예쁘고 귀엽다는 뜻이지용. 어떡하지용… 큰일 났네."

"나는 가끔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태섭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입술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거 다 옛날 일이에요. 걔네랑 사귄 적도 없고, 형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도 없어요. 그리고 아라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라가 말한 언니는…"

“언니는…?”

명헌의 표정에 아주 약간 그늘이 생겼다. 태섭이 조금 더 힘을 주고 입술을 꼬집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명헌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삐죽 나온 도톰한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우물거렸다.

"형이에요."

명헌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데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른뺨 위쪽이 아주 살짝 패였다가 다시 매끈해진 것을 보았다. 평소였으면 만져 보았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형 만나러 갈 때 누구 만나러 가냐고, 어떤 언니냐고, 예쁘냐, 농구 잘하냐, 뭐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제대로 말을 안 해줬더니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명헌의 입술을 꼬집은 손가락에 힘을 좀 더 주었다.

"그 예쁜 언니가 형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요."

명헌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계속 입술을 우물거려 잠깐 풀어주었다.

"나 예뻐용?"

다시 입술을 꼬집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태섭이 납작하게 모인 명헌의 입술을 앞니로 살짝 깨물고 명헌을 풀어주었다.

"바보같이 정말."

정말 바보 같은 건 태섭인데용. 태섭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태섭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아래쪽은 까끌하고 위쪽은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복수하는 것처럼 태섭의 아랫입술을 똑같이 깨물고 입을 맞춰 주었더니 금세 입술이 맞물렸다. 태섭이 명헌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자 명헌이 좀 더 고개를 숙여 뒤통수를 감싸 쥔 손으로 뒷목을 받쳐주었다. 태섭의 들어 올린 발바닥이 서서히 내려와 땅에 완전히 붙었다. 가로등 불빛으로 길게 생긴 그림자에 빈틈이 없었다.

"태섭, 혹시 말인데."

짧지도 길지도 않은 키스가 끝나고 벤치에 앉아 태섭의 손을 조물조물하던 명헌이 말했다.

"자취 생각은 없어용?"

"음, 그럴 수 있는 상황까지는 아니고요… 기숙사는 힘들 것 같으니 통학을 하려고 했어요. 어쩔 수 없죠."

난감한 듯 웃는 태섭을 바라보던 명헌은 잠시 뜸을 들였다.

"룸메를 구하는 건?"

"음,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하지만…"

"나랑은 어때용?"

"어?"

태섭이 명헌을 돌아보았다. 이젠 서늘한 기운이 가셨는데도 여전히 손을 조물대는 명헌이 말했다.

"위치도 나쁘지 않고. 태섭 학교와 우리 학교랑 딱 중간에 있어용."

"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재빠르게 집안 사정이 태섭의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럴만한 상황까지 되나? 그러나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말끝을 약간 흐리며 얼버무렸다.

"잘 생각해봐용."

"같이 살면… 재밌겠어요."

"그치. 재밌을 거야."

"우, 느끼해. 빨리 용용뿅뿅해용."

"용용뿅뿅…용."

"웃겨 정말… 아무튼 고마워요, 좀 더 생각해보고 답해줘도 될까요?"

"충분히 고민해봐용. 나쁘지 않을거에용."

명헌이 태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빠른 속도로 두근두근 하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뛰는 이 남자와 같은 코트에서 상대 팀으로 만날 날이 머지않았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얼른 태섭과 붙어보고 싶어용."

"하하… 언제가 될 지 모르겠네요. 열심히 해볼게요."

"금방이에용."

"긴장 바짝 하고 있으라고요."

명헌의 손을 태섭의 손이 찾아와 마주 잡고선 깍지를 꼭 꼈다. 밤은 깊어가고 바람은 싸늘했지만 어둡지도 춥지도 않았다. 함께하는 미래라면 계속 그럴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을까? 손안에 느껴지는 온기가 달아나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고 싶어 틈 하나 없이 맞물리도록 손가락을 쭉쭉 잡아당겨서 단단히 움켜잡았다. 절대 놓치지 않도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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