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1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태섭이 진학할 학교는 의외로 수월하게 결정됐다. 그 과정이 쉬웠다는 건 아니고, 바로 윗 선배인 정대만이 농구로 대학을 가기 위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각오한 것치곤 수월했다. 정대만은 방황 시기가 길어서 그랬지. 알고는 있었지만 옆에서 피가 말라가며 손톱을 씹어대던 것을 지켜봐서 그랬다.

하지만 그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 다시 정대만의 대학이 결정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본다.

정대만은 지망했던 학교보다 상향으로 대학 문턱을 넘었고, 태섭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한 번쯤 들어본 전국 유수의 고교 주전들이 대만의 동기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은 평생을 농구 해도 어려운 일을 가장 중요한 고교 시기에 2년이나 쉬었는데도... 무릎을 꿇고 엉엉 우는 대만에게 '간신히 농구로 대학가 놓고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라고 잔소리를 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북산 농구부를 넘어서 북산고교의 경사인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망칠 수는 없었다.

태섭은 그가 목표로 한 대학을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향을 뚫은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신은 자기가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시련을 주고 그것을 견뎌내고 쟁취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나? 수많은 신화에서도 그랬다. 안타깝게 좌절한 사람들과 반대로 결국엔 이겨내고 모든 것을 얻은 영웅들... 농구의 신이 태섭을 사랑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대만은 확실히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태섭이 농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을 볼 땐,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자기를 모른 척 내버려 두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섭은 한발짝 더 나아가 생각했다. 내가 만약 신이라면... 내가 아끼는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살도록 해줄 텐데.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태섭은 지우개로 종이를 지우는 것처럼 생각을 박박 지웠다. 머리는 가볍게, 발은 빠르게.

대만은 그 이후로 북산에 틈이 나면 찾아왔다. 후배들의 길을 자기가 이끌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있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잘 헤쳐 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평을 주로 들었지만 태섭이 자신을 평가할 땐 능숙하게 길을 열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얼렁뚱땅 해내고 있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치 호수 위를 잔잔하게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 밑에서 치열하게 발장구를 치고 있는 백조처럼. 그렇게 위태로웠다.

그런 상황에서 대만의 방문은 심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농구 명문 고교들은 종종 농구로 성공한 졸업 선배들이 찾아온다더니 북산에도 그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직 대만은 대학 리그를 뛰는 아마추어 선수에 불과했지만, 그런 농구 명문 고교의 대열에 한발짝 걸치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많이 좋았다.

그런 대만의 뒤를 가끔 동기들이 따라왔다. 이 인간은 대학 가서도 사람을 몰고 다니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중 매번 따라오는 사람은 정말 의외였는데 그는 지난번 방문 때 태섭의 연락처를 받아 갔다. 태섭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는 이유였는데, 태섭은 의아했다. 이미 고교 시절에 전국 최고의 가드로 명성을 떨쳤고 지금은 신입생이면서도 선배들의 견제를 한 몸에 받고 있다면서 내게 얻어갈 것이 있나?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너무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연락처를 내주었다. 태섭이야말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주장으로서도, 가드로서도.

북산고교 농구부는 지난해 전국대회 출전까지는 운이 따라줬다는 평을 받았다. 농구 명문 고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산왕공고를 꺾고 올라갔을 때, 경기를 본 사람보다 결과만 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섭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북산 농구부가 그저 운이 좋아서 결과를 낸 것만이 아니란 건 태섭이 제일 잘 알았다.

그리고 그 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윈터컵에서 태섭이 이끄는 북산고교 농구부는 준수한 성적을 내며 그저 운이 따라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떠오르는 지역의 강호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반대로 태섭의 어깨에 놓인 짐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북산이라는 이름에 무게가 생겼기 때문에 주장 송태섭은 반짝하며 그칠 것이 아니란 것을 또 다시 증명해내야 했다. 단순히 팀 뿐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장래가 결정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조금 미안하지만 그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건 부주장도, 에이스도, 감독님도 아닌.

[그럴 땐 본보기를 보여줘야 해용.]

"아무래도 그렇죠?"

[태섭은 마음이 너무 약하네용.]

"제가요? 저 호랑이 주장인데."

최근 들어온 1학년 녀석 중 태섭의 작은 키를 은근히 무시하는 녀석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했고, 피지컬도 됐고, 아무튼 좀 하던 녀석이었나보다. 그 녀석의 이력을 들어 볼 것도 없이 건들거리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태도부터가 딱 그랬다.

[당근과 채찍도 좋지만 말 안 듣는 녀석은 논외지용.]

"그래도 센터가 없는데, 잘 타일러 볼게요."

[나한테 데려와용.]

"왜요, 혼내주게요?"

[쉿, 태섭 모르게 때려줄게용. 태섭에겐 비밀로 해용.]

"듣는 태섭이가 웃어용."

[좋아, 이제 자연스럽게 잘쓰네 뿅.]

"이제 제가 쓰니까 또 바꾸는 건가용."

[나만 쓸수있다 뿅.]

"그건 도저히 못 따라 하겠어요. 졌어요, 제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마용.]

명헌과 이야기하는 건 항상 즐거웠다. 연락처를 받아간 이유는 그저 농구 관련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명헌과 대화하다 보면 농구에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시시콜콜한 일상 잡담을 하게 됐다. 둘 다 매일 밥 먹고 공 튕기는 게 일과의 전부라 농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밥 먹었니, 오늘은 어땠니 같은 수준으로 가볍게 지나갈 때가 더 많았다. 원래 연락처를 받아갔을 때 기대한 건 진중한 내용이었으나,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잡담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사실 거의 잡담만 하다 끝난다. 그래도 즐거웠고, 그래서 중요했다.

"조금 떨려요."

[나는 많이 떨리는데용.]

"거짓말. 형이 떨릴게 뭐가 있다고요."

[합숙훈련이 아니라 지옥훈련이에용.]

"난 지금 그거 너무 부러운 거 알죠. 나도 하고 싶어요."

[1년 후에 도망가면 안돼용.]

"일단 들어가고 나서 생각할게요. 그러려면… 성적 잘 나와야 해요. 우리 이제 그만 자요."

[잘할거야 태섭.]

"도망은 치면 안 돼요, 명헌이 형."

전화를 끊고 누워 생각하니까 또 심장이 쿵쾅댔다. 너무 거세게 뛰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새어 나오는 헛구역질을 억지로 참아낸 태섭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호흡을 참았다. 야광별 세 개가 천장에서 윤곽만 간신히 보였다. 아라가 어릴 때 붙여준 거라 이제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창밖의 가로등 불빛에 아주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태섭에겐 아주 가까운 미래가 그렇게 느껴졌다. 존재하는 건 알고 있지만 손에 닿지도, 명확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해내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다. 너무 좋아해서 괴로워할 수도 있다는 것을 태섭은 오래전에 깨우쳤다. 그런 생각을 할 때보다는 좋아하니까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비교할 거리도 못됐다.

야광별을 째려보며 숨을 참던 태섭은 숨을 파하 내쉬고선 눈을 감았다. 곧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애는 착했지만 다소 시끄러웠던 강백호와 달리 착하지도 않으면서 시끄럽기만 했다. 태섭의 키가 작다고 은근히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거슬리긴 해도 찍 소리 못하게 눌러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후로는 몇 번 장난도 쳐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줘 보고 면담도 해보고 그랬지만 녀석의 태도에 별로 변화는 없었다. 터질까 봐 아슬아슬한 폭탄을 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백호는 알려주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 녀석은 뭐... 싸움을 하고 다녀서 어머니 속을 썩인 업보를 이렇게 치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내해야 했다. 그게 주장의 자리라면 어쩔 수 없지.

의외로 태웅이 그 녀석에게 눈을 부라리고 다녔다. 만약 2학년이 나서서 기강을 잡게 된다면 그건 백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신라중 주장 출신 다웠다. 분위기를 흐리는 녀석은 참을 수가 없나보다. 그런데 기강... 기강이라.. 태섭은 스스로 기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자신이 우스워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기강이라니, 북산에.

나중엔 저들끼리 뭔가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백호도 그 녀석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미 태섭이 찍 소리도 못하게 짓밟아 버린 이후였기 때문에 2학년들이 나서서 뭘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조용했다. 적어도 백호가 저 혼자 낙제를 받아 버린 바람에 재시험을 치르러 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선배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참견 마세요!”

기합 넣는 소리와 공 튕기는 소리로 시끄러웠다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진 순간에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 쪽을 돌아보느라 이후에는 공이 힘없이 텅텅 굴러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자율 연습을 하며 1학년의 드리블 자세를 봐주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돌리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의 소연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요, 태섭 선배.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가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간만에 경기 외 일로 전투력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태섭이 천천히 다가갔다.

요지는 이거였다. 기초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고 화려하고 눈에 띄는 기술 위주로만 익힌 녀석에게 소연이 이런 저런 충고를 건넨 것이다. 뻔했다.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었다.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오르는 듯 한 느낌이었지만,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려 애썼다.

“그만, 됐고. 너는.”

태섭이 잠깐 말을 멈췄다. 상황 파악을 하자마자 녀석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는 생각해 두었는데, 이게 맞는 결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전국 대회를 향해 떠나야 하는데 이게 정말 맞는 일일까? 당근과 채찍도 좋지만 말을 안 듣는 녀석은 논할 가치가 없다는 명헌의 말이 생각났다. 이 녀석을 회유하고 어르고 달래보려 노력하던 지난 날의 노력도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그때 그냥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나…

백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백호는... 백호는 말을 잘 들었지. 어쨌든 백호는 한참 후에나 올 것이고, 태섭은 지금 당장 선택을 해야 했다. 전국구 농구 명문 고등학교의 주장이었던 명헌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사실 선택지를 놓고 고른다기 보다는… 그냥 명헌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앞으로 3일 동안은 연습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

“주장.”

“지금부터다.”

“후회하실 텐데요.”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네가 더 후회할 텐데.”

마지막 말은 태섭의 그 어떤 후회와 미련도 담기지 않은 진심이었다. 백호가 오면 저 녀석을 죽일지도 몰랐다. 그 전에 빨리 내보내야 했다. 그러면 일이 커진다. 

태섭을 노려보며 체육관을 빠져나간 1학년은 그 길로 퇴부 신청서를 작성했고, 그 이후에도 가끔 교내에서 태섭을 마주칠 때면 죽이겠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뭘 어쩌지는 못했다. 무섭지도 않았다. 무서울 리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저 녀석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백호를 진정시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뒤로도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며 태섭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을 몇 번 보았다. 한심하면서도 태섭은 나름 뿌듯했다. 백호도 얌전히 있었다는 증거고, 태섭의 악명도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 이제 착실한 학생인 건가? 하지만 이건 한참 후의 일이다.

소연은 괜히 자신이 분위기를 흐렸다는 생각에 미안해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부원은 아무도 없었다. 잘못한 쪽은 소연이 아니라 매니저의 충고를 무시해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인 그 건방진 녀석의 잘못이니까. 남은 부원들끼리 으쌰으쌰 단합하는 분위기가 되어 더욱 파이팅 넘치게 되었다. 좋은 기세였다.

하지만 태섭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었다. 정말 후회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명헌의 충고는 그냥 충고로만 받아들이고 그냥 불러다 혼내고 잘 타일러 보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사실은 명헌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마음이 아주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명헌은 지금 합숙 훈련을 떠나 있어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섭은 애써 누르는 수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 담담해졌고, 정해진 순서와 규칙에 따라 기차를 타고, 개회식에 참석하고,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가볍게 몸풀기를 하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서 경기를 하고… 그렇게 3일을 보냈다. 북산은 작년과 같은 성적을 냈다.

괜찮은 센터가 있었다면 조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문제가 있었던 녀석은 언제고 문제를 일으켰을 거라고 태섭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분했지만, 사실 태섭이 1학년 시절엔 꿈도 못 꾸는 무대였다, 여기는. 저 위가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태섭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 나아갈 미래를 상상하며 만족하기로 했다. 그 편이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복도를 걸으며 태섭은 태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더 위로 올라가야지.”

“...아쉽네요.”

“우리가 여기까지라서?”

“주장이랑 끝까지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여간 은근히 귀염성 있는 녀석이라니까 라고 생각만 한 태섭이 태웅의 등짝을 팡 소리가 나도록 쳤다. 태웅이 태섭을 힐끔 내려다봤다.

“겨울에는 그래보자.”

“네.”

“형, 오랜만이에요. 아직 합숙 훈련 중인 거로 아는데요.”

[집에 전화하라고 시간을 주셔서 전화했어용.]

“하하, 집에 전화하셔야지 저한테 전화를 주시고.”

[궁금하니까용.]

“아, 전국대회요? 이걸 아쉽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잘했다고 해야 할지… 잘한 것 같은데 아쉽고, 아쉬운 것 같은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건가요? 선수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전국대회 말고 다른 게 궁금했다는 말이었는데, 뭐 전국대회 이야기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용.]

“전국대회 말고?”

집에 와서 이틀은 잠만 잤다. 그 동안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여독이 더해졌더니 한창 때의 운동부 남학생마저 당해낼 수 없었다. 가끔 일어나 밥도 먹고 산책도 했는데 이틀 동안 밤잠을 8시간 꼬박 채워 자고 낮잠도 잤다. 세 시간씩 잤는데 이걸 낮잠이라고 할 수 있나?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에 태섭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태섭이 기다리던 전화였다.

[전국대회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어용.]

“네? 어떻게? 아... 북산도 들은 거에요?”

역시 명문 고교 출신은 다른 가보다. 소식이 이렇게 빠르다니, 정대만 이 인간은 소식을 들었으려나?

[산왕보다 더 먼저 들었어용.]

“뭐야… 형네 학교도 아니면서.”

[...]

명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태섭이 화제를 돌려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더 먼저 말했다.

[당연히 북산이 더 궁금하죵.]

태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왜요? 이유가 뭐죠?”

[그야 당연히 태섭이 다니는 학교인걸.]

“내가 다녀서?”

[네가 이것만 생각니까 나도 당연히 궁금하지.]

“뭐야... 형은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해요.”

잠깐 태섭에게 이상한 어떤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애써 모른 척 하며 농담 던지듯이 말했다. 그럴 리가.

[당연히 좋아할 수 밖에 없죵.]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왜?]

“그럼… 그럼.”

태섭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전화 선을 잡고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방금 명헌이 한 말로 머리 속이 가득 차서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아닐수도? 착각이면 너무 창피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태섭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용기 내서 말했다. 다행이다, 가족이 집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명헌은 지금 합숙 중인데? 그럼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중요한 말을 다 하고 나서였다. 그건 명헌이 신경 쓸 일이지 태섭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지금 태섭은 자기 앞에 닥친 문제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거세게 쿵쾅대서 그 소리가 시끄러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었다.

[무슨 생각?]

“형이, 형이…”

[음.]

“아니에요, 됐다. 너무 이상한 생각이라…”

[널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

“아니, 말하면 어떡해요! 나 안 말하려고 했는데!”

소리를 꽥 지르고 제풀에 깜짝 놀란 태섭은 사과했다.

“아니,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근데 진짜 저 좋아해요? 왜? 나를 왜? 나는…”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돌파하지용. 그리고 귀엽고용.]

“형, 지금 내 얘기 하는 거 맞아요?”

태섭은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땅거미가 내려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진 창문 너머에서 풀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왔고, 낡은 선풍기가 덜덜 소리를 내며 회전 모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귀에 단단히 붙인 수화기와 피부 사이에 자꾸 땀이 배어 나와 미끄러졌다. 손에서 나는 건지, 얼굴에서 땀이 나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인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소리가 태섭에게로 쏟아져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맞아. 내가 태섭을 많이 좋아해용.]

“근데 형은 무슨 이런 얘기를 합숙소에서 전화하다가 해요.”

[아, 그만 가봐야겠네용. 우리 만나서 더 이야기해용.]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주 제멋대로였다. 고작 한 살 더 많은 것 뿐인데,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든 태섭이 신호음만 울리는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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