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2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명헌과의 통화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태섭이 알게 된 사실은 단 한 가지 뿐인데, 그게 태섭의 모든 걸 바꿔 놓았다.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태섭의 몫이었고 상대방은 태섭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하기만 하고 그쳐야 하는데 틈만 나면 생각이 나니 그게 문제였다.

2학년 한 명이 '요새 선배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라고 해서 태섭은 그제야 이 기분을 분류한다면 좋은 감정 쪽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라는 대놓고 기분 나빠했다.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다닐 거면 길거리에서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톡 쏘아 말했다. 이제는 다 커서 어릴 때처럼 몸싸움을 하거나 꿀밤을 먹일 수는 없었고, 마지막 계란말이를 한입에 넣어버리는 것으로 복수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내가? 그런데 기분이 좋으면 안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또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잖아. 그런 말을 한 건 그 형이지, 내가 아닌데. 그런데 왜 자꾸 이 생각을 하고 있지, 이거 참 이상하네... 그래, 누가 날 좋아하고 많이 생각한다는데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한 거지.

누군가가 날 좋아한다는 거, 원래 이런 기분인 건가? 그러면 내가 고백했던 여자애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나도? 그런데 그 애들은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나랑 내가 좋아했던 애들이랑 다른 점이 대체 뭐지?

태섭은 입을 뾰족하게 쭉 내밀어 연필을 얹고선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방향이 잘못됐다. 그것을 짚어 줄 사람이 없으니 아무리 정답을 찾아 헤매보아도 나올 리가 없었다.

그 통화 이후로 명헌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태섭은 명헌의 합숙 훈련이 언제 끝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만 선배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생각했다가 둘이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농구부원이면 같이 합숙 훈련 중이라는 것을 또 깨달았다. 한심했다. 도대체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온종일 마음이 붕 떠 있는 이런 상태가 며칠 동안 지속됐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건지... 돌아오는 날을 모르니 명헌의 자취방에 찾아가 볼 수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찾아갈 명분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명분을 따져? 지금 당장 일이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는데. 아니, 그렇지만 좋아한다고 던진 건 그 쪽인데 내가 먼저 찾아간다고? 어디 사는 지는 알고 있나? 대만 선배네 근처인 건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가본 적도 한번 없었다.

"아! 모르겠다."

일단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것 부터가 잘못됐다.

그래서 사람을 구워버릴 기세로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태양에도 개의치 않고 무작정 나가서 공을 튕겼다. 그랬더니 10분도 안되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거의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라 햇빛이 오렌지색으로 변해 있는데도 굉장한 열기였다. 학교 체육관으로 갈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이건 부족한 부분을 향상시킬 목적이 아니라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저 달리기를 하는 것 뿐인지, 공을 튕기면서 움직이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3점 슛 라인에 서서 공을 던지고 나서 후회했다.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던졌다고, 저건 안 들어가.

"여전히 외곽슛이 약해용."

누군가를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던 이유는 명헌을 만날 수가 없어 초조했기 때문이었는데 명헌이 들이닥쳤다. 예고 없이 나타난 명헌이 퉁- 소리 나도록 백보드에 맞아 힘없이 떨어지는 공을 잡아채 태섭에게 패스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막상 나타났는데 태섭은 빤히 바라보다가 서운함을 약간, 아주 약간만 담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어용."

명헌이 너무 솔직하게 말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 놓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공을 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거짓말하지마요저집에다여기온다고말도안했는데어떻게여기있을줄알고정확히나타나요?"

“숨은 쉬고 말해용.”

태섭이 씨근덕댔다. 아무리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사람이어도 10분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면 숨이 차는 건 인간이니까 당연한 거지.

"보고 싶은 사람이 태섭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용."

"...!"

눈썹을 치뜬 태섭이 아주 감정적으로 힘을 실어 명헌에게 패스했다.

"어이쿠."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공을 받았으면서 괜히 힘든 척 하는 게 굉장히 얄미워서 태섭은 등을 보이고 휙 돌아섰다. 미련 없어 보이길 바라면서.

"미안해용, 뻥이고 태섭 때문에 온 게 맞아용. 태섭이 보고 싶었어용."

"어떻게 여기 있는 거 알고 왔냐고요."

망했다, 잔뜩 미련 있어 보이겠지. 뒤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여기 와 보고 없으면 그때 생각해 보려고 했지용."

"..."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을 잘해서 더 짜증이 났다.

태섭은 등 돌린 그대로 걸어가 코트를 나가는 대신에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명헌이 그 뒤를 따라오다가 한 켠에 서 있는 자판기로 방향을 틀었다.

"전 별로."

툴툴거리는 말투에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해서 말했다. 명헌은 종류가 다른 이온 음료 두 개를 뽑아와 고르라는 듯 얼굴 앞으로 나란히 내밀었다. 먹을 거 주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던데.

"골라용."

명헌은 원래도 태섭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좀 곤란한 사람이었다. 태섭은 레몬 맛 음료와 자몽 맛 음료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자몽 맛 음료로 손을 뻗었다.

"그냥 이거 마셔용."

"아니, 뭐에요?"

"주는 대로 마셔용."

지가 고르라고 해놓고... 

자기도 모르게 위아래 없이 말을 뱉을 뻔한 태섭이 숨을 한 번 삼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속으로 밀어 넣고 명헌이 내미는 레몬 맛 음료를.

"아니, 근데 이 사람이?"

"...뿅."

...태섭 옆에 내려놓더니 자몽 맛 음료의 캔을 딴다. 뽁- 경쾌한 소리가 났다. 찰랑거리는 시원한 이온 음료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눈을 뾰족하게 뜬 태섭이 냉기를 뿜는 캔을 낚아채려다 사준 사람이 명헌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곱게 받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상한 장난만 치고."

"나 많이 기다렸나용."

"내가 왜? 요?"

점점 위아래 없이 말이 나오려고 해서 태섭은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렇지 않은 것 치고 지나치게 빠르게 대답했다는 건 명헌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고 깨달았다. 차라리 이온 음료로 신경을 돌리자… 무더운 날씨에 금세 표면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가는 캔을 꾹 쥐고 한 모금 마시자 갈증이 확 일었다. 꿀꺽꿀꺽 마시자 조금 나아졌다. 순식간에 텅 빈 캔을 손에 쥐고 힘을 줘 찌그러뜨렸다.

"다시 만날 날을 많이 기다렸어용."

"하, 그렇겠죠."

"왜 이렇게 화가 났나용?"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명헌의 표정이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신경 쓰였나용?"

발끈해서 말을 하던 태섭은 명헌이 정말 몰라서 그런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제 정말 짜증이 난 태섭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그냥 수돗가로 가서 물을 최대로 틀고 머리를 들이댔다. 태양열에 잔뜩 익은 머리칼이 차가운 물에 적셔지며 그제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물이 고루 적셔지도록 하는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용, 미안해용."

소리 없이 바로 옆에 와서 지켜보고 있는 명헌 때문에 깜짝 놀란 태섭은 수도꼭지에 머리를 찧어 버렸다. 명헌도 덩달아 놀라 태섭이 찧은 부위를 살펴보려 애썼는데, 태섭이 거절했다.

"저리 가요. 아,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이건 진짜로 의도한 게 아니에용. 정말로 미안해용, 태섭."

두툼한 일자 눈썹이 팔자가 되도록 미안함을 최대한 얼굴로 드러낸 얼굴을 보니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다 태섭의 마음이 붕 떠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거니까…

"됐어요. 괜찮아요."

"미안해."

"괜찮다니까 왜 또 미안해 해요. 이상한 용용체도 안 쓰고. 빨리 그거 써요."

"그런 말 해놓고 연락도 없어서 미안해."

“쫌."

태섭은 그제서야 오렌지빛 석양이 드리워진 명헌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날 좋아한다고…? 그런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정말로 그랬다. 반년 만에 다시 만난 명헌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와 지금 태섭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걸 깨닫자 또 다시 주변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귀가를 재촉하는 어머니와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목소리,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저 멀리서 해변을 맴돌고 있을 솔개 우는 소리. 그중에서 제일 크게 들리는 건. 근데 지금 너무 가까운 거리 아닌가? 의식하자 마자 태섭은 명헌을 밀어냈다.

"따, 땀 냄새."

"뭐?"

"땀 냄새 나요, 저리 가요."

"나 냄새 나나용?"

자기 옷깃을 끌어 킁킁대는 명헌 때문에 태섭은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내가, 나한테서, 아니 저한테서, 지금 운동했으니까, 저한테서 땀 냄새 나니까…"

그 말을 들은 명헌이 고개를 숙여 태섭의 어깨 끝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태섭은 또 숨을 참는데, 명헌은 금방 떨어졌다.

"좋은 냄새 밖에 안 나는데. 괜찮으니까 옆에 있어용."

"..."

"진짜 땀 냄새 난대도 좋아하는데 싫을 리가 없잖아용."

"그만 좀 해요!"

"왜? 내가 태섭을 좋아하는 게 싫어용?"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안 싫어?"

"미쳤나 봐 진짜…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에요?"

"의외로 단순하다니까용."

아놔.

"아니, 어디 가는지는 알고 가야죠."

"안 따라온다는 말은 안하고용."

미치겠네.

"...잠깐만 공 좀 챙기고 올게요."

후다닥 뛰어가 코트를 구르는 공을 가방에 담고 명헌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가 같이 걸었다. 명헌이 멈춰 선 곳은 라멘 가게였다. 집 근처 인데도 태섭은 있는지도 모르는 가게였다.

"의외네, 여기 로컬 맛집이라던데용."

"진짜 처음 봐요."

태섭은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라멘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는데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더욱 평가할 수가 없었다.

"아, 내가 먹은 건 내가 계산할 수 있어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사장님."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오세요."

자기 몫을 계산하겠다고 으르렁대는 태섭은 아예 무시하고 사장님께 덕담까지 건넨 명헌이 앞서 나갔고, 태섭은 뒤에서 명헌을 노려봤다. 아무리 내가 한 살 어려도 말이야, 얻어 먹을 수만은 없지. 후식 음료는 꼭 내가 사겠다.

"..."

"..."

명헌이 산 오렌지 에이드를 나란히 쪽쪽 빨면서 걸었다. 해가 떨어졌지만 아직 군청빛이 남아 있는 하늘을 흘끔 보았다.

"또 어디 가는 건데요."

"배부르니까 산책이용."

"아니, 오늘 진짜 뭐 하러 왔어요?"

"태섭 보러 왔고, 지금 태섭 보고 있잖아용."

"저번에 전화 했을 땐…"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러면 당장 자기도 속내를 털어놔야 하는 분위기가 될 거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머리가 팽팽 굴러가야 하는데 삐그덕삐그덕 녹슨 톱니바퀴처럼 덜그럭댔다.

난, 난 아직 잘 모르겠는데. 형이 날 좋아하는 게 싫지는 않지만, 난 잘 모르겠어. 싫지 않으면 좋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잖아. 이건 자몽이 좋다, 레몬이 좋다 같은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만약에 좋다고 치자. 그러면... 그렇다고 말하면... 우리 사귀는 건가? 사귄다고…?

"머리 굴러가는 소리 다 들려용."

부정하려다가 아니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기에 태섭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명헌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오늘은 그냥 얼굴만 보고 싶었던 거니까 불편해하지 말아용. 사실, 날 이제 보고 싶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용."

"왜요?"

"놀라서, 이젠 날 보기 싫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용."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명헌은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건, 놀랍다기보다는... 그래, 충격에 가까웠다.

"아니요, 뭐… 놀란 건 맞는데,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라…"

태섭은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태섭은 정말 편견이 없네용."

"편견이 왜 없어요? 전 형한테 편견 왕창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요. 산왕 주장이라고 하면 오는 느낌이 딱 그렇잖아요. 경기 전에 분석 하면서 부담스러웠거든요. 이 사람이 내 매치업 상대라고? 하면서요. 정말 긴장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용.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니까용."

"싫어하는 타입이라고요?"

언젠 좋다며.

"작고 재빠른.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용."

태섭은 합, 입을 꾹 말아 다물었다.

발길 닿는대로 왔더니 해변이었다. 평소에 태섭이 자주 왔던 곳이었다. 가족과 함께 온 적도 있었고, 혼자서도 가끔 왔었다. 삐익 — 하고 솔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용. 여전히 바글바글하지만용."

"아, 오늘 여기 말고 좀 떨어진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나봐요. 그럼 그 쪽에 갈 걸 그랬나. 거기로 갈까요?"

"조용하고 좋은데, 그냥 여기 걸어."

"아, 이상해요. 그렇게 하지 마요."

"뭘용?"

"그래요, 그렇게 하라고요. 진지하지 마요."

“진지하면 안돼?”

“네, 안 돼요. 그거 안 돼요.”

완전히 생떼인 것은 태섭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억지를 쓰는 이유를 태섭도 몰랐다. 자꾸 자기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태섭은 안절부절 못하는 속내를 숨기기에 지쳐 다른 쪽으로 주의를 끌어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저기 보이죠? 깃발 꽂힌 거. 저어어어어기요.”

“보여용. 엄청 작게.”

“우리 저기까지 먼저 도착하기 해요.”

“이기면 뭐해주나용.”

“그건 하고 나서 생각해보죠.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달리기라면 태섭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모래사장이라면 더더욱. 명헌도 인정한 재빠른 타입이니까.

“준비…앗!”

카운트다운을 마치기도 전에 명헌이 튀어 나갔다. 태섭은 이를 갈며 뒤쫓아갔다. 

조금 더 멀리 있는 동상까지 뛰자고 할 걸… 이 치사한 인간아! 속으로 투덜투덜대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조금만 더 뛰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때 시야가 뒤집혔다.

“괜찮아?”

“어…”

상황 파악이 얼른 되지 않았다. 굴러다니는 유리병을 밟고 모래사장에 처박혀 버린 태섭을 명헌이 얼른 달려와 일으켜 주었다.

“다친 덴 없고?”

“잠깐만요.”

목, 어깨, 손목, 허리, 무릎, 발목 전부 괜찮다. 약간의 타박상 외에 다친 곳은 없었다. 이 정도 타박상은 전력 질주하다 바닥에 처박힌 것을 감안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모래사장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넘어진 곳에 아무런 물건이 없었던 것도 천운이었다.

“아, 창피하다. 나 모래사장에서 달리는 건 정말 자신 있는데.”

“앞으로 환경 파괴하는 새끼는 내가 죽여버릴게용.”

명헌이 진지하게 말했다. 태섭은 그만 아프고 짜증 났던 것도 잊고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그 사이에 명헌이 태섭이 미처 털지 못한 옷자락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그 때 완전히 까맣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폭죽이 터졌다.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태섭은 피부가 쓰라린 것도 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넋 놓고 밤하늘을 밝히는 화려한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명헌이 곁에 바짝 다가와 섰다.

"예쁘다."

"예뻐용."

“오늘 카메라 가져올걸.”

“그러게용. 사진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이런 날을 딱 맞춰 왔어요, 형은?”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색색깔의 불꽃과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덩달아 즐거워진 태섭이 활짝 웃으며 명헌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명헌과 태섭의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태섭을 보고 있었을까? 태섭이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까만 밤하늘을 밝히는 다양한 색의 불꽃이 명헌과 태섭의 얼굴에도 비쳐 불꽃과 같은 색깔의 여러 가지 빛이 아른거렸다. 세금을 정말 아낌없이 쏟아부었는지 가끔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대낮같이 밝아지기도 했다. 폭죽이 계속 아름다운 빛을 그리며 터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영원같던 시간이 흘러가고 나자 하늘에는 불꽃이 터지고 난 잔해만 남아 연기가 아주 천천히 뿌연 자국을 남기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태섭은 여전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명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섭을 마주보던 명헌이 말했다. 

“갈까, 태섭.”

“응, 그래요. 가요.”

둘은 대화 없이 조용히 걸었다.

태섭은 왜 예쁜 불꽃이 방금전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는지 계속 생각하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머리 속이 시끄러웠고, 명헌은 방금 전의 태섭의 모습을 곱씹어보고 태섭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태섭에겐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명헌은 태섭이 지금 자기를 보지 않고 있다고 확신했고, 시간이 흘러 태섭의 결심이 서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고도 확신했다. 그래서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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