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3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전국대회가 끝난 후 한 대학에서 태섭에게 연락이 왔다. 태섭이 지망하던 학교 중 하나였다. 작년부터 태섭을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했다. 태섭만 좋다면 진학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싫을 리가 없었다. 감사하다고 삼보일배를 올리면서 캠퍼스를 한 바퀴 돌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스카우터는 전국구 규모의 대회에서 8강 진출 이상의 실적을 요구했다. 출전 시간도 조건에 있었으나 그건 태섭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북산은… 

기분이 한껏 들떴지만,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1지망은 대만과 명헌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러나 모두가 원하는 학교인 만큼 조건이 까다로웠고 경쟁도 치열했다. 태섭은 조건이 간당간당해서 반쯤은 놓고 있던 상태였다.

[태섭이 그 학교로 간다면 우리 다시 제대로 붙을 수 있겠네용.]

통화도 이제는 매일 할 수가 없었다. 태섭은 전국대회 이후로 주장 직을 내려놓았지만 예전보다 더 바빠졌고, 명헌은 명헌대로 학점 챙기랴, 운동하랴, 주전 경쟁하랴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명헌은 중간고사가 막 끝난 참이었다. 그 동안은 전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명헌은 이 소식을 가장 늦게 전해 듣게 되었다.

태섭은 명헌과 함께 불꽃놀이를 봤었던 날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자기를 쥐고 흔드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명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명헌이 다시 한번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땐 나도 좋아하고 있다고 제대로 대답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어떻게 될 지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서로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그땐 정말로 사귀게 되는 건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건지, 둘 중 한 명이 먼저 그러자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에 둘 중 한 명이 먼저 말 하는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해야겠다고 태섭은 다짐했다.

다짐은 계속 늘어 가는데 막상 전해야 할 사람에게 전하지 못해 매일 쌓여만 갔고 점점 무게가 커져 갔다.

그러나 명헌은 그 이후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언제쯤 다시 이야기해 줄지 기다리던 태섭도 이제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먼저 좋다고 했으면서, 시간이 지나도 좋다는 대답을 받지 못했으니 이제는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태섭은 아직도 자기가 명헌을 좋아한다는 것을 명헌이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명헌과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데다가 (고작 1주일이다) 진로 문제로 은은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밝고 희망찬 미래보다는 부정적이고 암울한 생각이 더 자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방금도 그랬다. 명헌이 제대로 붙을 수 있겠다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깨달았다. 아쉬워 해주길 바랐다는 것을. 명헌과 같은 대학에 가면 가장 먼저 경쟁해야 할 상대가 명헌인 건 태섭도 알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호승심이 일기도 했고, 막연한 환상 속 캠퍼스 라이프를 명헌과 함께 보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헌이 먼저.

“아직 그 학교 확정 난 것도 아닌데요. 뭘 벌써.”

너무 날카롭게 말한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뾰족하게 말해놓고 아차 싶은 태섭이 황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확정이나 다름 없긴 하죠. 저한텐 말이에요.”

[태섭…]

명헌이 한숨을 쉬었다. 태섭은 뜨끔해서 또 다시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급하게 입을 열었는데,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용.]

“아.”

태섭은 약간 뭉클해졌다. 방금 전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빠져 아무 잘못도 없는 명헌에게 짜증을 냈는데, 심지어 명헌은 태섭과 경기 할 생각을 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명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섭을 달래주고 있었다. 코 끝이 찡해졌다, 미안해서.

“미안해요, 방금 제가 좀 날카로웠죠. 정말 미안해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이해해, 나도 작년 이 맘때에 그랬었으니까용.]

하지만 태섭,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쉬어야 해용. 태섭이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응원해용, 정말로...

태섭은 다음엔 전화할 때에는 녹음기를 켜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공기 중으로 흩어지게 두기엔 참 아까울 정도로 힘이 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다정함이 수화기를 내려놓고서도 한참 동안 태섭의 귓가를 맴돌았다.

응,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그리고 좋아해요.

누워서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야광별을 보며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이 자리에 없는 상대에게 건네 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은 아주 깊게 잠이 들었다.

"뭐냐?"

"뭐가?"

"진짜, 길에서 나 보면 아는 척 하지 마라."

"왜 또 그래, 아라야…"

외출 준비로 분주한 태섭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라가 그랬다. 태섭은 또 마지막 소시지를 아라가 집으려고 하면 뺏어 먹겠다고 다짐했다. 아라는 얼마 전에 키가 쑥쑥 자라더니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로 진입해 버렸다. 까불기를 잘 하고 웃기도 잘했던 에너지 넘치는 동생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의 모든 불만과 짜증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저 시기에 어땠는지 잘 알고 있는 태섭은 아라에게 찍 소리도 못하는 중이었다. 대신 마지막 반찬을 뺏어 먹거나 이상한 말장난을 치는 걸로 아라를 살살 약 올려 소심하게 복수했다.

"며칠 내내 먹구름 낀 얼굴이다가 지금은."

아라가 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뜬 아라와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아라가 샐쭉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떤 언니야?"

"뭐?"

"이뻐? 키 커? 농구 좋아해?"

"뭔 소리야, 너나 잘해."

"호오… 진짜 연애 하나 보네."

눈을 가늘게 뜬 아라가 두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킥킥 웃었다. 언니 아닌데…  이쁘다기 보단 단정하고… 키 크고… 농구… 좋아하지… 그리고 연애도 아닌데...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티는 나는데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아라는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고3이 연애 한대요-."

"시끄러워!"

"오, 연애는 아니고 썸?"

"눈썹도 못 움직이는 게."

태섭이 아라 보란 듯이 눈썹을 한 쪽만 치켜올렸다. 송 가 사람들은 다 되는데 아라만 안 되는 거. 아라가 달려와서 태섭을 찰싹 소리 나게 팔뚝을 때렸다. 태섭이 아야, 아파- 하면서 아픈 척을 했다. 더 열받게. 그러나 건 수를 잡은 아라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설마 썸도 아니고 짝사랑이냐?"

"뭐래,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러나 목소리가 조금 달라진 것을 귀신같이 캐치한 아라가 쯧쯧 혀를 차며 태섭의 반대편으로 돌아 얼굴을 쑥 내밀었다.

"만년 짝사랑."

"가라."

"불쌍해… 이번엔 좀 성공해라."

태섭은 대꾸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잽싸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태섭의 등 뒤로 태섭 열받으라고 일부러 더 활기차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화이팅~!

명헌은 약간의 걱정 섞인 마음을 안고 태섭의 동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태섭의 목소리가 어쩐지 좋지 못했다. 늘 밝은 목소리였는데,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라 명헌은 들떠 있었는데 태섭은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도 밝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음 고생을 제법 할 시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시에 한창이어야 할 태섭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태섭, 성실하니까 평소에 열심히 하겠지, 너무 열심히 해서 힘든 나머지 목소리가 그랬던 거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가면서 숨 쉴 틈을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판단일 거야. 명헌은 보고 싶은 마음과 방해가 되면 안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렇게 합리화했다. 

다행히 오랜만에 만난 태섭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같이 활기찬 얼굴이었다. 아니, 같지는 않고, 더 귀여워졌다. 이럴 땐 감정이 얼굴에 잘 표출되지 않는다는 타입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태섭은 체육관에 두고 온 것이 있다며 잠깐 교정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명헌은 가을날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화단에 서 있는 나무는 절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드문드문 떨어졌고,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졌다. 얼마 전에 머리를 잘랐던 것 같은데 벌써 바람이 불면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자란 모양이다. 머리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은데… 밤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보다.

그 때 명헌이 비워둔 벤치 옆자리로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올랐다. 멋진 고등어 무늬 옷을 입은 그 녀석은 명헌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햇빛이 잘 드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몸을 웅크리더니 금세 고롱고롱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명헌은 한참 고양이를 바라보다 용기 내서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명헌의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고양이는 고롱고롱 울림을 멈추고 슬그머니 눈을 뜨고 명헌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허락받았다! 명헌은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갈색이 많은 고등어 무늬는 마치 명헌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생각나게 했다. 비록 그 애의 머리칼은 곱슬곱슬했고, 항상 멋지게 머리를 만지고 다녀서 명헌이 쓰다듬어 본 적은 없었기에 감촉도 몰랐다. 하지만 태섭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손길이 부드러워졌는지 고양이는 다시 기분 좋게 고롱고롱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참을 고양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명헌이 손을 뻗을 새도 없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학교의 학생인지 여자애 둘이서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고양이는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가 버린 듯했다.

명헌은 다시 한번 가을 햇살을 만끽해 보려 했지만 그 여자애들의 대화를 듣고선 자기도 모르게 그 대화에 집중하게 됐다. 절대 듣고 싶어서 듣게 된 것이 아니었다.

"아, 공부하기 졸라 싫다."

"나두…"

"수시 붙은 애들 부럽다."

"니네 반에 송태선인지 송태석인지 걔도 수시 붙었다며?"

“아... 옛날에 너한테 고백했다던 송태섭? 걔 아직 붙은 건 아니라던데? 왜? 궁금하냐?”

“뭐래."

“저번에 어쩌다 경기하는 거 한 번 보러 갔었거든? 좀 멋있더라. 아, 그때 내가 확 고백해 볼걸.”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 까지 듣고 주머니에서 황급하게 이어폰을 찾았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꺼낸 이어폰은 줄이 잔뜩 꼬여 있었다. 꼬인 줄이어도 그냥 귓구멍에 끼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쳤나 봐, 그런 애랑 왜.”

“왜, 네가 못 봐서 그래. 좀 멋있었단 말이야.”

“니는 1년 동안 10명한테 고백한 애랑 사귀고 싶냐?”

“아씨, 짜증나게 하지 말라고.”

결국 깔깔깔 숨이 넘어가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대화를 고스란히 들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절대로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었다. 북산에... 농구를 하고 이름이 '송태섭'인 학생이 또 있는 거겠지? 대학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3학년이겠고?

“그랬었단 말이죵.”

그럴리가 있나. 명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명헌이 모르는 태섭을 하나씩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어떻게 10명이나… 한창 때 나이에 머리를 빡빡 민 남자애들만 모아놓은 곳에서 3년 동안 단체 생활을 한 명헌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숫자가 주는 느낌은 조금 충격이었다.

그동안 봐온 태섭은 명헌이 물꼬를 터 준 이후로는 좋다고 당겨도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두어도 허우적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저히 연애에 능숙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10명이나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태섭에 대한 마음이 변한 건 절대 아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누가 좋아하는 사람의 과거 연애사를 원치 않게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까. 

여학생들이 걸어간 길에서 명헌이 기다리던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달리기가 정말 빨라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 정도라면 아마 그 여자애들을 스쳐 지나왔을지도. 사귈까, 어쩔까 하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나서 명헌은 점점 심기가 불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속이 들끓었다.

“형,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물을 엎질러서 치우고 오느라 늦었어요."

바로 옆까지 뛰어온 태섭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며 명헌은 생각했다.

태섭, 여기도 엎질러졌어용. 이 난봉꾼.

"뭐? 네가 좋아한다고 말한 지가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대답을 안 했다고?"

"제발 조용히 좀 말해…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 보잖아…"

쩌렁쩌렁 목청 좋은 친구 덕에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연애사가 까발려진 여자가 이를 꽉 깨물고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까지 모두 들렸다. 하필 바로 뒤가 태섭과 명헌의 테이블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과 다름 없이 적당한 크기의 소음으로 가득 찬 매장이었지만 이제 다들 안 그런 척 하면서 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미친 새끼 아니야? 그 뒤로 만난 적 있어?"

"응, 그저께도 만났어."

"근데도 대답을 안 해줬단 말이야? 그럼 그저께는 뭐 하러 만난 거야?"

"그냥 밥 먹고, 산책하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고."

태섭은 점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어갔다. 이거… 왜 찔리지? 

"이거 완전 미친 또라이 새끼 아니야! 넌 그런 놈을 왜 좋아하냐?"

"내 맘대로 되냐고, 그게."

분노한 앞자리 친구가 사자후를 내지르자 변명하듯이 조그맣게 읊조린 여자는 말끝을 흐리다 복받쳐 오는지 약간 울먹거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말이 심했다. 근데 그 사람 너무."

어느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태섭은 헛기침 하는 소리에 초점을 또렷하게 맞추고 명헌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앞에 놓고 다른 것에 한눈을 팔다니… 기분 탓일까, 명헌의 표정이 묘하게 굳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방금 전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태섭은 여태까지 명헌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정말로. 그럼 나도… 미친 또라이 새끼…?

"태섭은 연애해 본 적 있어용?"

마시던 주스를 코로 뱉을 뻔한 태섭이 간신히 진정했다.

"아니요."

"짝사랑은용?"

태섭은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깐 뜸을 들였다. 지금 이것도 짝사랑인가? 형이 먼저 좋다고 했으니까. 나는 아직 좋다고 못했지만. 그러면 형이 날 짝사랑하는 건가? 근데 용기내서 고백했는데 나는 줄곧 아무 말도 안한 거고… 정말 미친 또라이 새끼 맞네… 태섭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어떡하면 좋냐, 어떡하면 좋냐고.

명헌은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는데, 무엇에 대한 질투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헌이 생각할 땐 태섭도 분명 같은 마음이지만 굳이 급하게 확인하고 싶지는 않아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태섭에게 중요한 시기인데 부담 주고 싶지 않았고, 허둥지둥 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아 그런데 좋아하는 거 다 티나는데 자기만 모르는 것도 귀여웠지...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던 명헌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지금 명헌의 머리속은 굉장히 어지러웠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느라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카페 안에서 앞 테이블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태섭이 들은 것을 명헌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태섭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봤다면 태섭의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봤을 텐데. 다른 테이블에서 하는 대화를 듣고 태섭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금방 눈치챘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부글부글 대다가도 태섭을 보면 오늘 입은 자켓이 귀엽다, 머리 세팅이 잘 되었다, 내리고 오는 날은 없는 걸까 지난 번에 수돗가에서 머리 감아서 세팅 풀린 거 귀여웠는데, 이렇게 귀여우니 아무래도 연애가 끊이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생각은 원래 다 그렇다.

"음… 있어요."

"그렇군용…"

평소였다면 서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을 텐데, 지금은 그 누구도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해가 떨어지니 가을밤의 바람은 쌀쌀해졌다. 마지막 힘을 다해 우는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으로 깔고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조금 스산한 것 같기도 했다. 둘 사이에 대화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어떻게든 말을 해야…'

'무슨 말이라도…'

각자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태섭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게 꼭 오늘이어야 하는 건지, 하지만 명헌에게 너무 못할 짓을 했다는 자책감에 도돌이표를 돌고 있었고, 명헌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의 굴레를 먼저 끊은 건 명헌이었다.

"태섭, 그."

"아니요, 내가 먼저 말할래요."

그러나 결심을 굳힌 건 태섭이 먼저였다.

"그래."

"근데 잠깐만요."

명헌은 오렌지색 가로등에 비쳐 밝게 빛나는 태섭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최근엔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조금 더 단단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용. 예전엔 마주 보고 있으면 정수리가 조금 보였는데, 이젠 더 조금밖에 안 보이는 걸 봐선 키도 좀 자란 것 같고은데, 내 키는 이제 다 자랐나봐용. 혼자 생각이 분주해보이는 태섭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어느 새 명헌을 뒤흔들던 부정적인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명헌은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태섭, 그."

"아니, 잠깐만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용? 명헌은 혈액 순환이 잘 안되기라도 하는 건지 연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폈다가 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태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자켓이 딱 핏 되는 것이 귀엽긴 하지만 혈액 순환에는 좋아 보이지 않는군용. 근력 운동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에용. 

"그냥 내가 먼저…"

"아니에요, 좋아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내가 먼저 말할 거니까!"

급히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이미 쏟은 물과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태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망했다. 허탈함에 태섭은 주저앉아 머리가 망가지든 말든 쥐어뜯으며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명헌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음… 그럼 가만히 있을게용...?"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태섭의 반응을 보니 잘못 들은 게 아닌 것 같았다. 활짝 웃는 명헌의 얼굴을 바닥에 털썩 쭈그려 앉은 태섭은 보지 못했다. 명헌의 운동화 앞 코가 태섭의 운동화 코 끝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가만히 있는다면서요."

"가만히 있는거에용."

"망했어, 망했어요."

"태섭.”

“저리 가요.”

“송태섭.”

“몰라, 나 망했어.”

“송태섭 선수.”

갑자기 단호해진 명헌의 목소리에 태섭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무게감 있게 불렀던 것과 달리 명헌은 웃는 얼굴로 태섭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바닥이 차가워용.”

불퉁한 얼굴로 명헌이 내민 손을 바라보던 태섭이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잡았고 명헌이 태섭을 번쩍 일으켜 주었다. 태섭이 일어나 명헌과 마주 섰는데도 잡은 손은 놔주지 않았다.

“태섭, 왜 바닥만 보고 있어.”

“진지하게 말하지 마요. 빨리 그 말투 써요.”

“나 안 보면 계속 진지하게 말할 거야.”

“그러던가.”

명헌이 태섭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태섭의 붉어진 얼굴이 고스란히 명헌의 눈에 들어왔다. 태섭은 고개를 휙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흘끔 명헌을 바라보고 말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가 없어서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맞잡은 두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시 말해줘.”

“진지한 말투 안 쓰면.”

“다시 한 번 말해.”

“안 할래.”

“태섭, 좋아해.”

“반칙이야.”

태섭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잠깐 멈췄다. 바람이 더 이상 스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어서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명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황빛 가로등에 비친 명헌의 미소 띤 얼굴이 좋았고, 맞잡은 손이 참 따뜻했다.

“좋아해요.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

“그런데 아까 말하려던게 뭐였어요?”

“그런게 있어용.”

“뭐야, 말해줘요.”

"비밀이에용."

"그런 게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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