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4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북산은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거뒀다. 정확히는 태섭에게 필요한 실적에 미치지 못했다. 버저가 울리자마자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뚝뚝 떨어지는 백호에게 어깨동무하며 태섭은 의연하게 말했다.

“야, 네가 왜 우냐. 잘했어, 강백호.”

“그렇지만, 송태섭…”

백호가 꺽꺽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백호가 미처 하지 못하고 삼킨 말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자식. 이제 보니 날 사랑해도 보통 사랑하는 게 아니구만.”

“주장 대학 못 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

이게 욕인지 걱정인지 모르겠다.

"이 자식이."

마음이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태섭이 아쉬웠다. 하지만 후배들 앞에서, 관중들 앞에서 울거나 실망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관중석 어딘가에 있을지도 그 사람 앞에선. 오늘 오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이 고등학교 농구 은퇴구나.”

정렬해서 상대 팀과 인사를 나누고 코트에서 퇴장하며 아무도 듣지 못하게 태섭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앞길이 좀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붓고 나서 오는 탈력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피곤하다, 쉬고 싶어. 하지만 쉴 새가 없었다. 그 대학은 물 건너갔으니 이제 실기 시험을 보러 다닐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산타는 실존했다. 며칠 후 스카우터에게서 온 전화는 뜻밖의 소식을 담고 있었다.

내걸었던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간 태섭을 지켜봐 온 결과 입학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자 베란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볼을 꼬집어도 보고 눈을 깜빡여도 보고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눈발 날리는 바깥에도 나가서 발이 얼어붙을 때까지 있어도 봤다. 아무래도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직장에 계신 어머니께 이 소식을 전했다. 기쁜 소식에 어머니는 당신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질러 버리셨고,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태섭은 웃었다. 그런데 약간 눈물이 나왔다. 

"에이씨, 좋은 날 왜 울어."

아라는 집으로 돌아오면 놀라게 해야지. 하지만 아라에겐 별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입시는 아직 먼 얘기니까. 그래도 축하해주겠지. 

그리고, 그리고…

급작스럽게 열린 축하 파티가 끝나고 가족이 모두 잠든 아주 늦은 금요일 밤에 태섭은 수화기를 들었다. 아까 낮에 내린 눈은 너무 금방 그쳐 쌓이지도 않아 모두 녹아 사라졌다. 어두운 방 안보다는 조금 밝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신호음이 끊기고 여보세요 라는 음성이 들리기를 기다렸다.

[...]

"..."

[...]

"...?"

태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

"...??? 혹시 이명헌 씨 댁이 아ㄴ.."

[틀렸다뿅.]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이러는 거에요."

[전화 예절이 틀렸다뿅.]

아니,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나 유리창에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이 보여 태섭은 얼른 정색했다.

"전화 예절이 틀린 건 내가 아닌데."

[...]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태섭은 황당해져서 뚜... 뚜.. 울리는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건 무슨 전화 예절이지? 아니, 누가 누구에게... 전화를 다시 걸기 위해 수화기를 잠시 내렸다 다시 올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가족들이 깰세라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 아닌데뿅]

"미친거에요?"

[여보 아니고 자긴데뿅]

미쳤나봐… 어떻게 그런 말을.

"진짜 싫다…"

온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태섭이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창문에 비친 얼굴이 활짝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정색했다.

"장난치지 말아요. 나 진짜 중요한 소식 말할 거 있어요."

[서운하네용.]

“아, 정말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다고요.

[듣고 있어용.]

태섭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형이랑 같은 학교가 아닌 건 아쉽게 됐네요.”

[...오.]

“뭐에요, 그 반응은.”

생각보다 싱거운 반응에 태섭이 입을 삐죽댔다. 요란스럽다기 보다는 무게감 있고, 호들갑 떨기 보다는 가만히 툭 던지는 한 마디가 골 때리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쁜 티를 내면서 축하해 주길 바랐는데. 태섭은 벽에 등을 기대고 전화선을 신경질 적으로 꼬아댔다.

“별로 안 기쁜가 보네?”

[난 태섭이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용. 당연한 거에용.]

“...치.”

태섭의 입가가 씰룩댔다. 아직도 축하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순순히 축하한다고 평범하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지만 전화선을 마구 꼬아대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축하해, 태섭. 진심으로.]

“고마워요.”

[무슨 표정 짓고 있어?]

“갑자기?”

뚱딴지 같은 명헌의 말에 눈을 바닥으로 내리 깐 채 살짝 미소 짓고 있던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표정이긴요. 그냥, 표정이죠.”

[궁금한데.]

“어… 잠깐만요. 거울이 없는데.”

[전화기 앞에 베란다 창문 있다면서.]

“지금 내 표정은…”

태섭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내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명헌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쑥스러워진 태섭은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직하게 말해주기 싫었던 태섭은 얼버무렸다.

“그냥 형이랑 얘기할 때 짓는 표정이죠, 뭐. 지금 대화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용. 보고 싶네요.]

“어…”

태섭의 사고가 정지됐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걸까? 태섭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뭐… 저도 조금은요.”

[조금만?]

“조..조금 더..?”

수화기 너머에서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창문에 비친 태섭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빨갛게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너무 쿵쾅대서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잠깐 가슴팍을 부여잡고 습관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잠시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뭐, 어쨌든 당장은 경기에서 만나는 건 힘들겠지만 기다려요. 내가 또 꺾어 줄 테니.”

[맹랑하네용.]

“나랑 경기하고 나면 그런 소리 못할걸요.”

[기대할게용.]

마음에 안 들어. 태섭이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 눈이 잠깐 왔다 그쳤어요.”

[여기도 잠깐 왔다 그쳤지용.]

“그러고 보니 형이 원래 살던 곳은 원래 눈이 많이 오지 않아요?”

[말도 못 하게 많이 오지용. 고등학교 때 나야 기숙사에 살았으니까 그럴 일은 없었지만, 통학하는 친구들은 눈이 많이 오면 결석하기도 했어용.]

“어, 잠깐만. 근데 학교과 원래 집 근처라고 하지 않았나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런데도 기숙사에 살았다고요?”

[농구부 주전은 기숙사 필수 뿅.]

역시 농구 명문 학교는 다르구나, 하고 생각한 태섭은 소리 없이 놀랐다.

“저는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본 적이 없어?]

“아니, 내 말은. 눈이 그렇게 학교도 못 갈 정도로 많이 오는 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많이 내릴 땐 많이 내리기는 하지만요. 아, 거기보다는 아니고요. 아마도?”

고향에 살고 있을 때에는 눈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주 어릴 때, 한 번 눈이 온 적이 있었지만 태섭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른들이나 TV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그 동네에서는 눈이 온 것이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남아 있긴 하지만, 배경 속에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진흙이 많이 섞인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군데군데 보이긴 하지만 그걸 눈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래도 사진 속 어린이 태섭은 꽁꽁 싸맨 옷차림이긴 했다.

태섭에게 있어 눈은 딱 그 정도 추억이었다. 많이 오면 교통 상황이 나빠지니까 짜증 난다, 적게 오면 왜 오다 말지 하는 기억. 눈을 맞으면 차갑고, 체온에 금세 녹아 축축해지고,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멍해져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눈이 오면 들뜨니까 태섭도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 그냥 자연 현상.

[우린 정말 지긋지긋하다 싶을 정도로 눈이 많이 왔어. 말 그대로 지긋지긋하게. 그래도 난 눈이 오는 게 좋더라고용.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건 힘들지만, 하늘에 구멍이 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오면 신기하고 재밌어용. 눈사람도 만들고.]

“눈사람, 나도 만들어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손도 차갑고 재미없어서 조그맣게 만들고 말았어요. 형은 눈이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꽤 좋아하는 것 같네요.”

[싫어할 이유가 있나용?]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태섭은 공감할 수 없었다. 태섭의 말을 듣고 난 명헌은 

[그러면, 태섭.]

“네.”

태섭을 부르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태섭은 숨을 죽이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사실, 내일 태섭과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딘데요?”

[태섭이 같이 가 줄지 모르겠네용.]

“당연히 같이 가야죠.”

태섭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든지, 같이 1대1을 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함께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이 있다든지. 그런 대답을 예상하면서.

[눈이 오는 곳으로 같이 가자.]

어디를 향해 가는지, 짐을 얼마나 챙겨야 할지 알려주지도 않은 명헌은 잘 자라는 인사를 던지더니 수화기를 끊었다. 

그날 밤 태섭은 어린 시절 소풍 가기 전날로 되돌아 간 기분으로 야광별을 한참 쏘아보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다.

다음 날 태섭은 목적지도, 일정도 모르는 여행길에 올랐다.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친구 집에서 며칠 자고 오겠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아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유심히 바라보는 건 애써 무시했다.

이랬는데 하루 만에 돌아오면 어쩌지… 어쩌긴, 즐거운 여행한 사람이 되는 거지. 태섭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하자 벽에 기댄 명헌이 보였다.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진 태섭은 명헌의 시야가 닿지 않겠다 생각이 드는 구석으로 이동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러나 명헌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에.

“태섭.”

“아! 뭐야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에요?”

명헌을 놀라게 하려다 되레 당한 태섭이 툴툴거리며 명헌을 뒤로 한 채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태섭을 명헌이 금방 쫓아왔다.

“목적지도 모르면서 어딜가용.”

“어딘데용.”

“안 알려주지.”

“아, 정말!”

태섭이 창가에 앉고 명헌이 복도 측 좌석에 앉았다. 둘은 카트에 가득 담긴 간식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서 몇 개 샀고, 시중 판매가보다 비싼 가격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표정에서 다 드러났지만) 그리고 판매원이 다음 칸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다가 소곤소곤 너무 비싼 것 같다고 흉을 봤다. 

기차에 타기 전 미리 사 온 샌드위치와 우유는 진작에 다 까먹고 도시락까지 사 먹었다. 아마 식당에서 이런 밥을 먹었다면 다시 안 왔을 것 같지만 기차 안에서 먹는 것이라 그런 건지 여행을 떠나는 중이라서인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명헌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던 태섭은 문득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옆자리를 흘끗 봤더니 명헌의 고개가 미약하게 꾸벅거리고 있었다. 살짝 감긴 눈꺼풀 끝에 촘촘한 속눈썹을 바라보던 태섭은 새까만 머리카락 결 사이에 걸린 흰 티끌을 발견했다. 곱슬곱슬한 살짝 갈색빛이 도는 태섭의 머리카락과 달리 새까맣고 직모라 윤기가 나는 명헌의 머리카락 사이에 걸려있는 흰 티끌.

지금 떼어주면 졸고 있는 명헌이 일어날까 봐 잠시 망설였지만 너무 거슬렸기 때문에, 그래. 조금 이따가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자세히 보니 이 티끌이 조금 크고 흰색이라 눈에 잘 띄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많이 거슬리니까. 그래서 머리카락 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죽이고 검지와 엄지로 집게를 만들어 티끌을 살살 떼어냈다. 떼어내고 보니 도톰한 겉옷 안감에서 빠져나온 솜이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태섭은 눈앞에 있는 까무잡잡한 자신의 손등과 뒤에 있는 명헌의 흰 피부가 대비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밥 먹고 체육관 안에서 농구만 해서 그런가? 그런 것치고도 흰 빛을 띄는 명헌의 얼굴과 그 옆에 있어서 그런지 한층 더 까무잡잡한 빛깔의 손등 피부를 바라보았다. 나도 농구 실내에서 열심히 하는데… 여름에 해변에 가도 잘 그을리지 않는 피부인가 생각하다 티끌을 후 불어내려고 하는데 명헌과 눈이 마주쳤다. 착한 일을 해주려고 했던 건데 어쩐지 못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태섭은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떠들었다.

“아니, 머리카락에 뭐가 묻어 있길래요. 봐요, 여기. 형 머리카락은 까만데 이건 흰색이잖아요.”

명헌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무겁게 깜빡대는 속눈썹 하나하나에 졸음이 가득했다. 명헌은 태섭의 손을 잡고 그대로 태섭의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미처 불어내지 못한 하얀 솜털이 공중을 부유하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명헌은 태섭의 어깨에 머리를 뉘었다. 곧 편안한 소리로 깊게 숨을 쉬었다.

하지만 태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눠 낀 이어폰에서 들리던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연주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됐다. 미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섭은 고조되는 경쾌한 드럼 소리에 혹여라도 명헌이 깰까 봐 천천히 볼륨을 내렸다. 줄어드는 볼륨조차도 거슬려서 명헌이 깨어날까 봐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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