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5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기차는 계속 달렸다.

한 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 오랫동안 자세가 굳어 있어 몸이 뻐근했지만 답답한 것 보다는 무게감이 좋았고 이 순간이 소중했다. 그래서 한쪽 귀로는 아주 작은 소리로 나오는 음악을 들었고 다른 한쪽 귀로는 열차가 달리며 내는 소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생활 소음과 명헌이 내는 편안한 숨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명헌은 짧은 낮잠인데도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건지 손 끝이 가끔 움찔거렸다. 

창 밖으로 무채색 톤의 도시가 보였다가 메마른 나뭇가지로 갈색 일색인 산이 보였다 하기를 반복했다. 목적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인지는 알 것 같았다. 태섭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고, 명헌도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환기가 잘 되지 않은 객실 안은 끊임없이 나오는 온풍으로 건조했다.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줄기 사이로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태섭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풍경도 바뀌고 태섭의 자세도 바뀌어 있었다. 나른하고 평화롭고 따뜻하기까지 하니 밀려오는 졸음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머리가 창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뜨니 정면으로 고개를 세우고 있었고, 또 눈을 뜨니 어깨를 베고 있는 명헌의 머리 위로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새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일까, 옷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 향일까 생각하다 졸음이 몰려와 귀찮아져버려 그만두었다. 어쨌든 좋으니 그걸로 됐다 라고 얼른 결론을 내버리고서 태섭은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명헌이 먼저 깨어나 부스럭대다 태섭과 나란히 기대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깨닫고 불편한 자세 그대로 머물러있기로 결정할 때까지도 태섭은 눈을 뜨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자 찬 공기가 폐부까지 순식간에 훅 밀려들어 왔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추웠다. 따뜻한 객실 내 온도에 익숙해져 있던 태섭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명헌은 익숙한 곳이라 망설임 없이 척척 걷고 있는데, 바로 옆에 바짝 붙은 태섭은 양옆, 위아래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바빴다.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명헌이 이 곳에서 쭉 살아왔다고 하니 무언가 새로웠다. 목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운 바람이 자꾸만 불어와 명헌의 까만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고, 태섭의 손 끝은 빨갛게 얼어 붙었다.

“눈 온다고 해서 따라왔더니 눈은 하나도 없어요.”

“겨울이라고 해서 내내 눈이 내리는 건 아니니까용.”

“실망이에용. 속았어용.”

“사실 오늘 온다고 했는데… 뿅.”

눈이 온다고 태섭을 꼬드겨 여기까지 데려온 명헌은 할 말이 없었다. 명헌이 머쓱해 하는 것을 본 태섭은 웃으며 명헌을 팔꿈치로 살짝 건들며 말했다.

“생각보다 더 춥네요.”

“태섭이 따뜻한 기차 안에서 노곤노곤 졸다 와서 그렇잖아용.”

태섭이 고개를 휙 돌려 명헌을 바라보았다. 명헌이 빙글거리며 태섭을 바라보았다.

“왜 나만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 거에요?”

“너만 그랬는데용.”

“이리 내요.”

말도 안되는 모함에 말랑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삐딱해진 태섭은 명헌이 들고 있던 자기 가방을 뺏었다. 그러자 명헌이 가방을 다시 뺏어 태섭이 다시 가져가려고 손을 뻗기도 전에 반대편 어깨에 척 걸쳐 버렸고, 다른 손으로는 빨갛게 얼어붙은 태섭의 손을 잡아채 자기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해 지겠다, 빨리 가자.”

“이거 하지 마요.”

태섭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주머니 속에서 명헌의 손이 차갑게 얼어붙은 태섭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싫어용?”

“아니, 내 손 차가운데, 형 손도 추울 텐데. 그러면…”

명헌이 못 들은 척 혼잣말에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렸다. 저녁은 뭘 먹여야 잘 먹였다고 소문이 날까용.

“아저씨같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붙인 태섭은 명헌의 손을 꼭 쥐고 잠자코 걸었다. 자기 운동화 한 번, 명헌의 운동화를 한 번 바라보고 보도블록 한복판에 있던 돌멩이도 괜히 한 번 뻥 차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좋아한다고 말도 했고, 서로 좋아하는 것을 확인도 했지만 사실 그 이후로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명헌은 대학 생활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바빴고, 태섭도 진학 준비로 분주했다. 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명헌이 태섭의 집 앞으로 찾아와 같이 밥도 먹고, 농구도 했다. 가끔은 함께 영화도 봤다. 전화는 매일 할 수 없었지만 틈나는 대로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에도 이전과 같았다. 

딱 하나 달라진 건 어두운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가끔 손을 잡거나 1대1을 하고 나서 그대로 드러누워 뻗어 있으면 명헌이 옆에 와 나란히 누워 슬그머니 손을 포개놓는 정도였다. 그리고 방금 전처럼 서로에 어깨에 기대 함께 낮잠을 자는 것 같은 가벼운 스킨십.

그래, 손 잡는 거 좋지. 그런데 명헌은 손 잡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 조차 떨리고 어색해서 쉽게 할 수 없었던 태섭은 명헌과 함께 하는 그 이상의 것이 점점 궁금해졌다. ‘명헌과 함께’라는 전제 조건으로. 

가족 구성원이 많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제 연마한 것이지만 그 덕에 해서는 안 될 것, 해도 될 것 까지도 잘 구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명헌과 함께’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것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었다. 원래 다들 그러는 거잖아. 나는 형을 좋아하고, 형도 나를 좋아하고. 그런데 계속 손만 잡고. 스킨십을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원래 이런 건가? 일단 난 아닌데. 

그래서 한 번은 큰마음을 먹고 바래다 주고 뒤돌아 걸어가는 명헌을 불러세웠었다.

"형."

“태섭, 왜 안 들어가고.”

그러나 명헌의 얼굴을 바라보니 역시 용기가 나질 않았다. 꼭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망설이던 그때 같았다. 주머니에 찔러 넣지 않은 다른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흔들어 주었다.

“아뇨, 그냥. 조심히 들어가라고요."

"그래용, 도착하면 전화할게용."

"안 자고 기다릴게요."

"졸리면 자도 돼용."

"진짜요?"

"뻥이에용, 꼭 기다려줘용."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명헌의 뒷모습을 앞에 두고 태섭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는 집 앞에 데려다주면 그 앞에서 키스하던데,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는데. 다수의 무리와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만 했을 때도 이렇게 용기가 없진 않았다. 없는 용기까지 박박 끌어모아 보려고 해도 명헌의 앞에만 서면 쫙 펼친 손바닥 위의 모래알처럼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바보, 찌질이, 용기 없는 녀석아… 다음 번에 또 망설이다 못하면 넌 송태섭이 아니라 송… 송…. 송충이다. 

그러나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바람이 차가워지고, 갈색으로 말라붙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첫얼음이 얼고 첫 눈 예보가 뉴스에서 흘러나올 때까지 송충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제 송충이도 명헌을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형은 왜? 원래 만나는 사이에는 다들 그런 게 하고 싶은 거 아닌가? 나는 하고 싶지만 형 얼굴을 보면 차마 할 수가 없는 거고, 그런데 형은 뭐야?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여보세용 자기세용 이러는 걸 보면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스킨십을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틈만 나면 손을 잡는 걸. 지금처럼. 

태섭은 명헌과 그런 사이가 되고 나서부터는 머리는 가볍게, 발은 빠르게가 잘 되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그걸 깨닫고 나서도 생각을 마음먹은 것처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몸이 생각을 따르지 않았고 생각도 생각처럼 되지 않아 답답했다.

태섭이 생각에 잠겨 명헌을 따라가는 동안 둘은 역 앞의 넓은 대로를 따라 걷다가 작은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명헌이 어느 집 대문 앞에 우뚝 섰기 때문에 태섭도 멈춰섰다. 명헌은 태섭의 가방을 들고 있던 쪽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왜?”

“난 형 집이 여긴 줄 몰라서 아무것도 못 사왔잖아요, 좀 더 멀 줄 알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 앞에서 편의점이라도 들어가는 건데.”

요지는 부모님도 계시는 집에 어떻게 아무것도 사지 않은 빈손으로 들어가냐는 거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명헌이 문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태섭의 등 뒤에서 몸으로 밀어댔다. 신장, 무게, 부피 모든 면에서 밀리는 태섭은 명헌이 온 몸으로 밀어대면 버틸 재간이 없었고, 치열하게 버텨내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경기 중에 만났다면 모를까, 지금의 명헌은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니까. 태섭은 얼떨결에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들어온 낯선 집 안은 저녁 시간인데도 어둡고 깜깜한 채로 텅 비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

“왜 아무도 안 계시죠? 어디 가신 건가요?”

“이 시간에 그럴 리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내비친 명헌이 중얼거렸다. 주인이 없는 집 안에 멋대로 들어와도 되는가를 잠깐 고민했지만 명헌이 성큼성큼 들어가는 것을 보고 태섭도 발을 내딛었다. 명헌은 식탁 위에 놓인 쪽지를 읽고 있었다.

“...지중해로 크루즈 여행을 가셨다네용.”

“왜 형은 그렇게 멀리 여행 가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요.”

“어제 통화했을 땐 그런 말씀이 없으셨다... 뿅… 오늘 온다고도 했는데.”

“평소에 통화 자주 안 해요?”

“이틀에 한 번씩은 꼭 하는데…”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새파란 바다 위를 유영하는 커다란 배 위에서 리본이 휘날리는 밀짚모자를 쓰고 흰 원피스를 나풀거리는 중년 여인, 그리고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중년 사내가 나란히 서서 눈부신 태양 빛을 만끽하며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 어렵지 않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이렇게 당황한 표정의 명헌은 처음이었다. 이게 이렇게 당황할 일인가 싶었지만, 아니 놀랄 일은 맞았다. 어쩌다 한 번 통화하는 것도 아니고 자주 통화를 했는데 부모님이 여행 계획도 알려주지 않았다면… 놀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명헌은 지나치게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형. 좀 놀랍긴 한데 왜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요.”

“뿅…”

엇, 그렇다는 건.

“크... 크루즈 여행이면 오랫동안 계시겠죠?”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절어버린 태섭이 목에 무언가 걸린 척 헛기침을 했다. 그 새 진정했는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헌의 시선에 태섭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집이 좀 건조하네요.”

“그래?”

“내 말은, 집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 겨울이니까, 겨울엔 원래 다 건조하잖아요.”

수상할정도로 횡설수설 말을 덧붙이는 태섭을 바라보던 명헌이 방을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여기가 내 방이고, 옆 방은 손님 방이에용. 태섭은 여길 써.”

명헌이 그러라길래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방이라고?

침대에 누운 태섭은 이게 맞나? 하고 생각했다. 

손님방 침대에 홀로 누워서 이게 진짜 맞나? 하고 생각했다.

저녁을 뭘 먹여야 잘 먹였다고 소문이 날까용 하고 노래 부른 것이 무색하게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명헌은 집을 떠난지 오래되어 낯설었고, 부모님은 상하기 쉬운 식재료는 모두 비우고 여행을 떠나셨기에 집에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정말 진짜 매우 배가 고팠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해결했다. 

식당을 나와서는 산책했다. 배가 불렀는데 산책을 하기엔 너무 추워서 그냥 집에 들어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명헌이 자기 겉옷을 둘러주려는 것을 기겁하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태섭의 목도리 위로 둘둘 둘러주었다. 태섭은 정말로 꽁꽁 싸맨 모양이 되었다. 목도리를 두 개나 칭칭 감아 찬바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앞만 보고 걸어야만 했다. 명헌이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는데 옆을 볼 수가 없어서 방어도 공격도 전혀 할 수가 없어서 씩씩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서 먹을 간식거리와 당장 내일 쓸 간단할 식재료를 구매했다. 

낯선 곳에 여행을 왔는데 명헌과 함께여서 좋았고 길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저 들뜨기만 했다. 그래서 손을 잡고 크게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 정말 다른 방에서 따로 자는 건가? 원래 이런 사이에는 같이 잠들지 않나? 침대가 너무 좁아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명헌이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고 먼저 씻으라고 욕실로 들여보내서 말끔히 샤워하고 나오는 동안 태섭은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머리를 말리고 명헌이 준 옷을 입고 나온 태섭을 힐끔 본 명헌은 자기가 씻겠다며 욕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태섭은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며 아까 하던 생각을 마저 이어갔다.

발냄새가 심하다거나,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난다거나… 하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혹시… 잠잘 때만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서 창피해서 그런 걸까? 농담인가? 진짜 따로 자나? 

명헌이 샤워하고 나와서 옆에 앉을 때까지도 생각의 굴레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약간 떨어져 앉아 있었 정말로 좀 서운해지려고 했다. 그래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자겠다며 방문을 닫고 들어오는데 말리지도 않았다. 잘 자라는 인사가 따라올 뿐이었다.

진짜 이게 맞나?

태섭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집에 갈까… 사유, 남친이 단 둘이 여행 왔는데도 손만 잡아요. 심지어 잠은 따로 자요. 그래서 손만 잡고 잘게 라고 하지도 않아요. 웃긴가? 아니 웃기고 자시고 내가 서운하면 그만 아닌가… 이딴 고민을 하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 

그제서야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납득이 됐다. 손을 잡거나 어깨에 기대 자거나 몸을 맞대는 것 같은 가벼운 스킨십 까지는 괜찮겠지만 옆에서 잠을 잔다는 건 조금 더 깊은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우리 같은… 그런… 사이에는… 

태섭은 아직도 ‘남자친구’, ‘애인’ 같은 단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금 울렁거렸다. 조금 우스웠다. 관계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파도타기를 하는 기분이면서 스킨십이니 손도 안 잡고 자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명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준비가 안 된 건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태섭의 생각엔 그랬다. 명헌과 태섭은 같은 이유로 준비가 되지 않은 건가 라고 한다면 그건 같을 수도, 아닐 수도. 태섭의 문제는 둘째치고, 어쨌든 명헌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어제부터 온다고 했었는데…”

“오늘 원래 뭐 하려고 했었는데요?”

“온다고 했던 눈이 안 오니 나가서 시내를 좀 돌아다녀 볼까 했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와서는…”

일전에 명헌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마치 하늘 위의 누군가가 바구니에 담고 있던 눈을 엎은 것처럼 쏟아지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태섭은 말했다.

“그래도 나가요, 우리.”

시내까지는 무리여도 가까운 곳은 나갈 수 있잖아요. 나가요, 우리.

정말 고요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눈이 내리는 바깥은 정말 고요했다. 주택가를 지나는데 이미 크고 작은 눈사람이 마당에 서 있었다. 가끔 예술혼을 불태워 만든 것 같은 캐릭터 모양의 눈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며 명헌과 함께 이건 정말 예술 작품이고, 저건 귀엽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소리 지르고 덩달아 신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와 결코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은 어쩐지 고요했다. 벌써 제설 작업이 한창인 도로를 따라 가까운 공원에 도착했더니 이미 곳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여긴 원래 호수였는데... 뿅.”

과연 호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꽁꽁 얼어붙어 위에 눈이 쌓여 있었지만 말이다. 곳곳에 발자국이며 길게 쓸린 자국들이 보였다. 보아하니 지금 호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썰매를 타고 있는 아이들이 남긴 흔적 같았다.

“위험하지 않나요?”

“그렇지용.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만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서 열심히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어른들도 보였다. 이미 하나는 완성했고, 옆에 하나를 더 굴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나란히 세울 목적인 듯했다.

“가보자, 태섭.”

“자, 잠깐만요.”

정말 이래도 되나? 위험하지 않나? 깨지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이미 위에 올라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헌은 이미 앞서가고 있었다. 태섭은 조심스레 빙판 위에 한 걸음을 내딛어 보았다.

“이거 정말 신기해요.”

첫 발자국이 두려웠지, 그다음부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새 빠른 걸음으로 명헌을 따라잡은 태섭이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그래도 조심해용. 빠지면 큰일 나요.”

이제 거의 폴짝폴짝 뛰고 있는 태섭에게 주의를 주며 명헌이 말했다. 하지만 명헌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갓 내려 보들보들해 보이는 눈을 손 안 가득 담아 하늘 높이 뿌려보았다. 이미 내리고 있는 눈 사이로 태섭이 뿌린 눈이 섞였다. 즐거워하는 태섭 옆에서 명헌도 따라 해 보았다. 마치 온 세상이 눈으로만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우리도 눈사람 한번 만들어 볼까요?”

“태섭 눈사람 만들어 보자 뿅.”

“내 눈사람?”

“그냥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자는 뜻이에용.”

“아하, 엄청나게 커다랗고 멋진 눈사람을 만들자는 거죠? 이해했어요.”

먼저 싸움을 걸어왔겠다? 태섭은 얌전하게 대답하고 눈사람을 만들 첫 눈 뭉치를 굴리는 척 하다가 뒤돌아서서 얍! 하고 명헌에게 던졌다. 명중!

어깨에 정통으로 명중해 까만 겉옷에 눈이 묻은 것을 보고 태섭이 소리 내서 크게 웃었다. 무서운 얼굴로 주변의 눈을 모두 쓸어 모으는 명헌을 보고 곧 도망쳤지만. 빙판이 미끄러웠고, 혹시라도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빠르게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명헌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금방 태섭을 따라잡았다.

“으아악!”

목도리 안으로 차가운 눈이 한가득 들어왔다.

“아, 정말 이러기에요?”

“태섭이 먼저 시작했어용.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봐줄게용.”

“해보자 이거죠.”

열심히 걸어서 빙판을 벗어나자 이제 본격적으로 눈싸움이 시작됐다. 눈싸움도 아니고 사실상 개싸움에 가까웠다. 이제 더 이상 웃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거라곤 눈 뭉치를 만들어 상대에게 날리는 것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눈뭉치를 만들 시간조차 없어 그저 주변에 쌓인 눈을 쓸어모아 상대방에게 뿌리는 행위로 변질됐다.

“힘들어요, 힘들어.”

“뿅…”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바닥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고 눈 위로 털썩 누워버렸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도 눈은 처음처럼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놀던 사람들도 이젠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는지 주변은 정말 고요했다. 

그렇게 눈을 쓸어 담아 뿌리며 놀았는데도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은 금세 빈 곳을 다시 채웠고 원래 쌓여 있던 곳에는 더욱 더 쌓여 이제 눈을 밟으면 발목까지 푹 빠졌다.

태섭은 옆에 누운 명헌의 손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어보았다. 명헌은 고개를 돌려 태섭을 바라보고 태섭의 손 밑에서 자기 손을 빼 다시 태섭의 손등 위로 자기 손을 포개 얹고는 태섭의 손을 꼭 잡았다. 불현듯 간밤에 태섭이 했던 고민이 다시 기어 올라왔다. 역시, 명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형.”

“왜용.”

하늘을 향해 아- 하고 입을 벌려 눈송이를 맛보고 있던 명헌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만 했다. 태섭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형.”

“왜, 태섭.”

그제서야 명헌이 태섭을 돌아보았다. 며칠 전 전화를 하며 태섭의 지금 표정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물었던 명헌이 떠올랐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떤가요?”

“즐거워 보여용.”

“정말요?”

“아주 즐겁게 활짝 웃고 있어서 나도 좋아용.”

“그런 표정이에요?”

“그게 날 보고 웃는 거라서 좋아용.”

“지금 형 표정이랑 비슷한 걸까요?”

“태섭 표정이랑 똑같아?”

“저는 제 표정을 모르니까.”

“태섭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표정도 똑같지 않을까.”

“있죠, 나 생각해봤는데,”

내일 돌아갈게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꺼낸 말에 명헌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즐겁게 웃고 있던 표정이 약간 무표정에 가까워졌다. 아쉬운걸까.

“그렇게 해, 그럼.”

그러나 표정과는 다른 말을 한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지만 명헌은 이유를 묻지 않고, 태섭은 묻지 않은 이유를 말했다.

“새해는 아무래도 엄마랑 아라와 함께 맞이해야 할 것 같아요.”

“나도 딱히 태섭과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용.”

“거짓말.”

“이건 정말.”

어젯밤 생각한 것처럼 스킨십을 해주지 않아서 같은 한심한 이유는 절대로 아니었다, 정말로. 하루종일 눈이 왔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처음보다 더 많이 눈을 쏟아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쩌면 눈이 계속 이렇게 온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눈이 내리는 지역으로 손 꼽히는 곳이기도 했고,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교통이 마비되어 옴싹달싹 할 수 없다는 속보 같은 것을 봤었다. 그 때 태섭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그저 어디에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며 흘려 버렸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가족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돌아가 버리면 형은 혼자서 어떡하지?

“같이 갈래요?”

“같이?”

“우리 가족이랑 같이 새해를 맞이하는 거에요.”

“그래도 될까용.”

“내가 돌아가 버리면 형은 여기 혼자 남아 새해를 맞이하게 되잖아요.”

“내가 왜 여기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용.”

“형 자취방에 가도 혼자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네.”

명헌이 조금 웃었다. 태섭도 웃었다.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이게 정말이면, 그럼 거짓말인 건 뭐에요?”

“내일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말.”

“왜?”

“보내고 싶지 않아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태섭은 일어나 앉아 여전히 누워있는 명헌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체온에 눈이 녹아 명헌이 둘러준 빨간 니트 목도리가 조금 축축해져 있었다. 태섭은 고개를 숙였다. 겨울 날씨에 노출된 뺨이며 볼은 차가웠다. 그러나 명헌의 입술은 조금 말라 있었고, 여전히 따뜻했다.

“형, 명헌이 형.”

입술을 살짝 붙였다 뗀 태섭이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들리길 바라며 명헌의 이름을 불렀다. 명헌은 무언가 말을 해보려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촘촘한 속눈썹 위로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태섭은 명헌의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태섭도 눈을 감았기 때문에 그 눈송이를 볼 수는 없었다. 아마 체온에 녹아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너무 많이 내린 눈에 차들이 도로에 갇히고 안전상의 이유로 철도 운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긴급 속보가 아침 뉴스의 메인을 장식했다. 명헌의 본가가 있는 바로 그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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