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명헌태섭] 불법 속도의 사랑 여행 6

대학생이 된 이명헌과 고등학교 3학년 송태섭이 간질간질한 기류를 탑니다.

"응, 미안해요. 복구되는 대로 바로 갈게요. 미안해요."

프라이팬에 올려진 계란의 상태를 살피고 있자니 통화 내용이 들려왔다. 

"응, 그리고, 음… 아니다. 출발할 때 다시 전화할게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 

근데 내일은 사람이 많을 거 같아서 좀 힘들지 않을까요… 상황 봐서요, 응.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 미리 인사하는 거죠. 응, 응. 아라도 새해 복 미리 많이 받으라고 전해줘요."

써니 사이드 업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조심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놓자 태섭이 다가와 수저와 물컵을 식탁에 옮겼다.

"앉아 있어. 손님이잖아."

명헌 딴에는 태섭을 앉히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태섭에겐 그렇게 들리지가 않았다. 하마터면 그래서 계속 손님방에서 재우냐고 빈정거릴 뻔한 태섭이 입을 꾹 다물고 하라는 대로 식탁에 앉았다.

"이거 먹고 눈 치우러 나가야해용."

"정말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오네요. 언제까지 오는 걸까요?"

"내일 오후 쯤이면 그친다고 하니까."

"새해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은 건 처음이에요."

"나는…"

명헌의 부모님은 금슬이 좋아 자주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래서 아주 처음은 아니었다. 

"아쉽네용, 태섭의 가족과 새해를 보내지 못하게 된 건."

"대신 형이랑 나랑 보내게 됐네요."

뽀뽀까지 해놓고 따로 자는 바람에 손만 잡고 잔다는 말도 할 수 없게 하는 형이랑. 신경질적으로 젓가락 끝으로 노른자를 쿡 찌르자 덜 익은 노른자가 주르륵 흘러 내렸고 하얀 접시가 노랗게 물들었다. 익다 만 노른자처럼 이도 저도 아닌 찝찝한 기분이었다.

한가득 쌓인 눈을 넉가래로 쭉 밀어놓고 눈가루만 남은 길을 싸리비로 쓱쓱 쓸어냈다. 빗자루와 달리 싸리비로 쓸어내는 소리는 굉장히, 뭐라고 해야 할까. 쓰는 맛이 좋아지는 소리였다.

"윽."

싸리비로 쓱싹쓱싹 눈 쓸리는 소리에 무아지경이 되어 있던 태섭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넉가래 손잡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넉가래로 눈을 쭉 밀어내던 명헌이 손으로 하기 귀찮다며 배로 끄트머리를 밀고 있다가 삐죽 모나게 튀어나온 곳에 넉가래가 걸려 멈춰버린 것이다. 명치에 제대로 타격이 있었는지 명헌은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그러게 그냥 손으로 하지."

"진짜 아픈데."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요."

저건 태섭도 교실 바닥을 대걸레로 밀다가 많이 당해봤다. 금방 괜찮아지니까 신경 안써도 된다. 무심하게 대꾸한 태섭이 다시 쓸던 곳을 쓸어낸다. 싸리비질에 재미를 붙여서 일부러 더 쓱싹 소리가 크게 나도록 큰 동작을 했다.

"호 해주면 더 빨리 괜찮아질 거 같아용."

"눈이나 빨리 쓸어요. 형이 제대로 해야 제가 쓸어내죠."

"뽀뽀 한 번 하더니 이제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건가용."

명헌이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속으로 흥 하고 대꾸한 태섭은 무아지경 싸리비 삼매경이다.

“뽀뽀가 뭐요. 그럴 수도 있지.”

“태섭…”

난봉꾼이에용.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명헌이 지나간 길을 싹싹 쓸어냈다. 밟기 전에 빨리 쓸어내야만 눈이 발자국 모양으로 땅에 얼어 붙지 않는다. 미처 쓸기도 전에 밟아버려서 눈 발자국이 남아버리면 땅에 그대로 붙어 얼어버리고 미끄러워진다. 그러면 모래나 흙을 뿌리는 번거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미관상 좋지도 않다. 그런 생각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태섭은.

어제 송태섭은 첫 키스를 했다. 이명헌도 첫 키스를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태섭이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키스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명헌이다.  명헌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을 명헌이 받아주어서 괜한 고민을 했다고 여기고 안심했다. 그리고 내심 오늘 밤은 조금 다르겠지 기대도 살짝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대는 무너졌다. 그날 밤에는 명헌이 먼저 피곤하다며 자리를 피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태섭은 망연자실했다. 

왜…? 왜? 어째서… 당장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러고 보니 태섭은 명헌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 해봤다. 이럴 수가 있나? 내일 간다고 하길 잘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태섭도 손님방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는데 너무 지나치게 세게 닫혔다. 깜짝 놀란 태섭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미안해요, 바람 때문에 문이 세게 닫혔네요 하고 외쳤다. 그러자 괜찮아 뿅.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다시 잘 자라고 인사를 하려다가 태섭은 그냥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조용히.

문이 닫히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이게 무슨… 차라리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데.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집 안에서… 현관문도 아니고.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태섭은 내일 떠난다고 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절대 이런 이유로 떠나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태섭은 아직 폭설에 갇힌 것을 모른 채였다.

넉가래로 눈을 한 곳으로 모아 밀어 쌓고 있던 명헌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태섭을 흘끔 바라보았다. 싸리비질에 재미를 붙였는지 굉장히 열심이다. 쓱싹쓱싹 눈을 쓸어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태섭이 가끔 뾰족하게 구는 이유를 명헌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명헌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정한 규율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향이 쓸데없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지만 아예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인지해버린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도착한 집이 텅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 땐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명헌은 아무도 없는 집에 태섭을 옆에 두고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태섭이 성인이 되려면 겨우 며칠 남은 시점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태섭의 기분이 상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마지막 남은 양심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이것을 태섭에게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설명을 했다 치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발할 수도 있다. 그러면 서로 기분만 상하겠지.

솔직히 명헌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양심이 자꾸 명헌을 쿡쿡 찔러댔다. 그깟 양심, 언제부터 있었다고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명헌을 괴롭히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눈을 좀 치우고 나니 눈발이 약해진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오전 내내 힘을 뺐으니 오후에는 조용히 보내자는 의견은 둘 다 일치했다.

점심을 먹고 명헌이 앨범을 꺼내 와서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레코드 모으는 것이 취미라는 아버님의 콜렉션을 뒤져 은은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며 어린 시절 사진 같은 것을 구경했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용."

"저도요."

"그렇다고 태섭도 그렇게 말하면 나 상처받아용."

"이것보다 실물이 더 나은데."

"취소."

"쉽다, 정말."

고등학교 앨범에선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이 몇 보였다. 그중에서도 꽤 익숙해진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오 형은 이런 사진도 정말 잘생겼네요."

"동오야, 나야?"

정말로 진지하게 물어오는 명헌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앨범을 얼굴 옆에 나란히 두고 다시 물어보는 명헌에게 대답해주었다.

"그야 당연히."

"역시."

"동오 형이죠."

"동오네 집에 가지 왜 여기 있어?"

명헌이 팩 돌아앉았다. 태섭은 본체만체 하며 일어나 다 돌아간 레코드 판을 뒤집어서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게요. 갈까, 지금이라도."

"진짜 갈 건가용."

"동오 형네 집 여기서 가까운가요."

"절대 안 알려줘."

"할 수 없다, 몰라서 못 가네요."

태섭이 뒤 돌아앉은 명헌의 어깨에 턱을 걸치며 말했다. 그 순간 명헌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태섭을 피해 슬쩍 자리를 옮겼다. 하,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잘 가다가 또 다시 기분이 꽁해진 태섭은 소파에 올라가 앉아 눈을 감았다.

주섬주섬 앨범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한숨 소리도 들렸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지. 삐딱한 마음이 너무 커져서 태섭은 아예 자는 척을 해버렸다. 척만 해야 했는데 다시 눈을 떠 보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명헌은 소파 밑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재생이 끝난 지 오래인 레코드는 소리 없이 턴테이블 위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그래도 올해의 끝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서 둘은 마당에 나가서 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뚫어져라 보았더니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태양의 잔상이 남아 한참 동안 눈을 깜빡깜빡했다.

둘 중 누구도 오늘은 일찍 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태섭은 기분이 좋지 않아 오늘은 보란 듯이 먼저 들어가서 잔다고 하고 싶었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새해인데, 서로와 함께 맞이하는 새해가 눈앞에 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티비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다가 명헌이 문득 말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는 말인데.”

폭설이 오고 도로가 마비되었어도 그건 이 지방만의 일이지 수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번화가에 몰려든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고 연예인들이 축하 공연을 하고 있었다. 명헌이 뜬금없이 꺼내는 이야기에 태섭의 귀가 쫑긋 섰다. 

“사실 올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해였어용.”

“왜요?”

“태섭을 만났으니까용.”

“하지만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인데요.”

“맞아용, 좋아한 건 그 때부터지만.”

“잠깐만.”

태섭이 명헌의 말을 끊었다. 작년의 만남은 첫 만남이 곧 마지막 만남이었다. 경기 중이 전부였다. 이후에 만난 적도 없었다. 

“잠깐만, 언제? 도대체? 경기 중에요? 왜?”

"맞아용, 경기 중에. 도대체,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명헌이 말끝을 흐렸다. 눈이 도르륵 굴러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듯했다. 명헌의 얼굴이 살짝 미소를 띈 채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이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태섭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저런 얼굴이 된다는 걸 송태섭 당사자가 지켜보는 건. 작년 여름에 제가 어땠더라 하고 역시 회상해보지만 태섭은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헌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후반 내내 존 프레스를 당했었지용."

"정말 지독했어요."

아직도 그때의 절박함이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지독했었다.

"보통은 그 정도로 마크 당하면 선수를 교체하지용, 하지만 북산은 그러지 않았고…"

"윽."

주전과 벤치의 실력 차가 큰 건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였다. 그러나 꾸준히 개선하려고 노력했고, 북산도 떠오르는 지역의 강호가 되었으니 좋은 후배들이 들어오며 차차 해결될 것이다. 태섭이 떠난 이후에.

"그 상황에서 두 번을 뚫고 나갔었지용. 빠른 건 둘째치고 두 번째 돌파에서 정말 오랜만에 어떤 감정을 느꼈어용. 그 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건 위기감이었어용."

태섭은 생경한 눈빛으로 명헌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데도 그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버텨낼 것 같은 굳건한 해변의 절벽 같은 얼굴을 해서는 위기감을 느꼈다니. 바로 송태섭에게 말이다.

"그래서 무리한 파울로 경기의 흐름을 넘겨주는 실책을 했고, 그 다음에는."

명헌은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태섭은 잠자코 듣다가

"멋있었다 뿅."

"엥."

황당한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설명 잘 하다가 뜬금없이."

"박력 있고, 침착해서 그때 반해 버렸던 것 같아용, 지금 생각하면."

명헌이 한 쪽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살포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놀리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진짜 얼굴이 살짝 핑크빛이었다. 

"대체 뭐가!"

"그런 게 있어용. 태섭은 설명해도 몰라용."

"정말 웃겨, 사실 나는 그때…"

태섭은 심호흡했다.

"토하고 싶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고, 무서워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아직 승기가 완전히 넘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역전도 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산왕이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한 골만 더 넣어보자고 동료들을 침착하게 다독일 수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아용."

"산왕 앞에서 그럴 수 있는 팀이 흔치 않았겠죠. 맞아요. 하지만 북산은 언제나 그래왔어요. 흔한 상황이었다는 거에요."

태섭이 씩 웃었다.

"1년이나 지난 후에야 패인을 하나 더 알아 버렸네용. 그리고... 경기 후에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서로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용."

그랬었지, 그 쪽이나 우리 쪽이나 그랬었지.

"그래서 우리 둘 다 농구를 한다면 언젠가 또 마주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잠깐, 연락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았어요?"

"물론 그렇지용. 하지만 당시 나에겐 진로 결정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있었고."

"아."

"태섭이 반드시 농구를 계속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용. 훌륭한 자질을 갖춘 선수인데,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의 손실인걸용."

태섭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명헌 같은 선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데 이건 인정이라기 보다는.

"태섭 같은 선수가 농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손실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그만, 그만 해요!"

태섭이 다급하게 명헌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자 명헌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계속 생각해왔던 서운함과 의문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 형은."

태섭은 인지하지 못한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지금 반드시 해야만 했다.

"왜 형은 집에 둘이 있으면 나를 피해요?"

"..."

"이런 말 나도 하기 좀 그런데, 집에서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 형이 나랑, 큼. 나랑 접촉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드디어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을 드디어 꺼낸 태섭은 약간 시원해졌다. 어디, 뭐라고 하나 보자. 명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마른세수를 했다.

"태섭, 그건,,,"

말하다보니 괜히 북받쳐 흥분한 태섭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뭐요. 말을 해봐요. 내가 착각한 거라고 말해봐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한숨을 내쉰 명헌이 마른세수를 연신 해댔다. 그럴수록 태섭의 인내심도 짧아졌다. 원래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내가 얼마나,"

"네가 어리니까."

"뭐라고요?"

이게 뭔 소리야.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뭔 소리냐고."

어이도 없고 화가 나기도 한 태섭이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섞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미성년자고… 나는 성인이니까."

"미친 거 아니야?"

"그래서 여태까지 참았어."

그 때 티비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태섭이 기가 차서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형, 명헌이 형."

"..."

"이명헌 씨."

5

4

3

무대 위의 연예인들이 잔뜩 들뜬 얼굴로 카운트 다운을 하는 것이 들렸다. 명헌이 손을 내리고 태섭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너 진짜 최악이야."

2

1

폭설을 뚫고 거리에 운집한 시민들이 기쁜 얼굴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태섭이 명헌의 옷깃을 잡아챘다. 너무나도 쉽게 끌려왔다. 살며시 내려앉은 어제와 달리 태섭은 그냥 되는대로 부딪쳤다. 그러자 명헌이 성큼 다가와 앉았다. 이 폭설 속에서도 어디선가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티비에서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위엄있는 신년 종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됐다. 명헌의 무게에 떠밀린 태섭의 머리가 딱딱한 소파 팔걸이에 닿았다. 윽... 아파서 신음을 흘렸지만 그마저도 명헌에게 먹혔다. 명헌이 팔 위에 태섭의 머리를 얹어주어 팔걸이보다는 부드러운 사람의 피부 감촉에 뒤통수에 닿은 충격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잠깐 떨어진 틈을 타 태섭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명헌이 다시 입술을 삼켰다. 명헌의 코 끝이 태섭의 콧망울에 닿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냄새를 풍기며 따뜻하고 다정하게 손을 잡아오던, 눈을 맞으며 서투르게 입술을 붙였을 때 가만히 받고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태섭을 집어삼킬 것처럼 입술을 사탕처럼 빨아댔다. 숨을 쉬기 힘들어서 태섭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자 그때부터는 혀가 섞였다. 

힘에 부친 태섭이 어깨를 밀어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명헌이 태섭의 손을 잡아 채 소파 위에 짓눌렀다. 손목을 비틀어 벗어나려고 시도하자 더욱 더 세게 짓누르는 손길에 힘을 빼고 순응했다. 그러자 명헌의 손아귀에서도 힘이 빠졌다.

"정말 싫어."

헉헉 숨을 몰아쉬던 태섭이 풀린 눈을 억지로 명헌에게 맞추려 노력했다. 어느 새 태섭을 아래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던 명헌이 태섭의 머리 뒤 쪽으로 팔을 넣어 품에 안았다. 여전히 티비에서는 신년을 맞이한 사람들의 기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

명헌이 머뭇거렸다. 몸이 뜨거웠지만, 태섭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나는 성인인데, 태섭은… 아니었지.”

더 이상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태섭이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던 것을 그만두고 명헌의 눈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주 약간 눈물도 나는 것 같아서 참으려고 코를 찡그렸다.

“싫다… 진짜.”

“나도 힘들었다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자기도 성인 아니었으면서, 그게 뭐라고 대체…”

“하지만 작년에는 아니었잖아용.”

“진짜 미워요, 정말 밉다고.”

명헌이 태섭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안기려 들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동안 약간, 아주 약간, 정말 약간 속을 끓였던 것이 생각나 태섭은 명헌을 밀어내려 했다. 명헌이 안기려는 동작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품에 갇혀 있는 건 태섭이었기에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앞으론 이런 거 많이 해용.”

“싫어요, 안 할 거야. 진짜 싫어.”

“정말?”

“너랑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정말? 안 할 거야?”

명헌이 태섭의 얼굴에 마구 입 맞췄다. 볼에 한 번 쪽 소리 나게 입 맞추고선 이래도? 태섭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그래봤자 명헌의 품 안이었다. 다른 쪽 볼에 한 번 쪽 소리 나게 입 맞추고선 이래도? 이마, 콧등, 콧망울, 윗입술, 턱, 관자놀이, 눈 밑…

“그만, 그만!”

“정말 이래도 안 할 거야?”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있던 명헌이 귓가에 소근대자 머리카락 끝까지 오싹해지는 것이 느껴져 태섭은 움찔했다.

“정말? 진심으로용?”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태섭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자 태섭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소리를 흘리듯이 낸 것을 깨닫고 태섭이 움찔 놀랐다. 어느 새 명헌의 손이 태섭의 허리께를 지분대고 있었고 티셔츠 자락이 반쯤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잠깐만요, 여기선...”

“지금 바쁜데용.”

“아니, 안돼. 여기선 싫어. 저거 시끄러워요.”

집중이 안 되잖아. 그 말에 명헌이 리모콘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소파 틈으로 밀려들어 간 건지 아니면 밑으로 떨어진 건지. 다급해진 명헌이 태섭을 냅다 들쳐 안았다.

“읏차.”

“아, 그냥 내가 걸어갈게요, 내려놔요. 무슨 사람을 짐짝처럼.”

“가만히 있어봐용, 급하니까.”

“뭐가 그렇게 급한데… 진정해요.”

급할 거 없잖아요, 오늘만 성인일 것도 아닌데… 웅얼거리며 덧붙이는 태섭의 말에 명헌은 이게 진정하라고 한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을 지었다. 문고리를 거의 부술 것처럼 비틀어 연 명헌이 방문을 쾅 닫아 버리고 태섭을 침대 위에 눕혔다. 더 이상 새해를 축하하는 티비 속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집 밖의 먼 곳 어디에선가 가끔씩 들려오던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혀가 섞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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