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울 땐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가비지타임 박병찬 드림 | 뱅선
최근의 야외 데이트는 8할이 캔슬이다.
체감 온도 40도. 실제 기온도 35도 안팎을 심심찮게 넘나든다. 집은 천장이 높아 쉽사리 열이 가시지 않는다. 24시간 내내 에어컨을 틀어도 실내 온도가 24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하나는 겨우 내린 실내 온도를 장시간의 외출로 올리고 싶지 않단 이유로, 또 하나는 애인 옆에서 쉬는 날까지 땀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단 이유로, 예매를 취소하고, 티켓을 양도했다. 끝내 처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인스타를 뒤졌다. 이 날씨에도 기력이 죽지 않고 돌아다니는 친구들에게 헐값에 자리를 넘겼다.
병찬의 지갑에는 두 개의 열쇠가 있다. 하나는 과방 앞 사물함 열쇠, 하나는 선오의 집 열쇠다. 오늘로 235일, 채 1년이 되지 않는 연애 기간에도 불구하고 애인의 집 열쇠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건 특례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가족에게도 건네주지 않는, 세상에서 딱 세 개뿐인 열쇠라면 더더욱. 물론 선오의 집은 열쇠 구멍 외에도 키패드가 달려있고, 애인은 귀찮다는 이유로 집 밖을 나다닐 때 문을 잘 잠그지 않았으나 병찬은 열쇠의 상징성이 좋았다. 집의 보안장치를 기꺼이 넘겨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랑받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허나 열쇠가 있고, 보안 키패드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고 한들 병찬은 언제나 선오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 관계가 좋았다. 좋은 만큼 선을 넘지 않은 채 오래 지속하고 싶었다
누구세요.
낯선 이에게 흘리는 애인의 한 톤 낮은 목소리도 좋긴 했다. 누구긴,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거. 돈? …… 아니, 살아있는 것 중에. 고양이? 아, 나 집에 가라고? 더운데 어딜 또 걸어 다니려고. 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허옇게 색 빠진 머리가 병찬의 눈앞에서 나풀거린다. 어흐, 문만 열어도 더워. 문을 열고 도망가는 꼴이 물 끼얹은 고양이처럼 잽싸다. 바깥과 비교하면 천국 같은 공기다. 찬 공기가 더 빠져나가지 못하게 문부터 닫는다. 달궈진 아스팔트를 걷던 발이 뜨끈했다. 얼굴 빨간 거 봐, 밖에 엄청 덥지. 엉, 살아서 못 오는 줄 알았네. 문을 닫으니 그제서야 선오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맘 같아서는 시원한 몸을 부둥켜안고 더위를 나누고 싶다. 얼추 세 걸음이면 닿을 거리를 남기고 병찬은 팔을 뻗는다. 스탑, 나 지금 땀 엄청 났거든? 우리 이 정도 거리를 유지했으면 해. 오느라 고생했다고 껴안고 싶은데. 누나는 이럴 때만 애정 표현이 격해지더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그래서, 씻는다고? 니 옷 아직 건조기에서 돌아가고 있을 텐데. 지금 누나가 입고 있는 건 누구 옷인데. 니 거, 벗어줘? …… 아냐, 나 옷 챙겨왔어…….
샤워기 아래 찬물이 반갑기만 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벌겋게 달아오른 안면과 끈적한 목덜미를 차례대로 적신다. 더는 바깥이 덥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짧은 샤워가 아쉽지는 않다. 병찬은 몸을 씻어내고 이리저리 튄 거품을 물로 쓸어낸 뒤 수도꼭지를 잠갔다. 푹 젖은 앞머리가 시야를 가린다. 엉성하게 뒤로 넘기고 수건걸이로 손을 뻗는다. 빈 수건걸이로 손을 뻗으려다 만다. 변기 위 찬장도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누나, 수건 없는데?
욕실 문틈 사이로 빼꼼 내민 얼굴이 말갛다. 몇 달 전에는 씻고 나오면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었는데. 미리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고 있던 참이었다. 선오는 개어놓은 수건 더미를 들고 일어선다. 깜빡했다, 내가 씻는 게 아니라. 병찬이 문 뒤로 몸을 숨긴 채 팔만 내밀면, 팔 위로 수건 더미를 올렸다. 땡큐. 말을 마친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애인의 ‘잘생긴’, 그리고 ‘물기에 젖은’ 낯이 시야에 오래 머무른다면 달가운 일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잘생겼단 말이지. 당사자는 지겨울 감상을 속으로 되풀이하던 찰나 반질거리는 낯이 움찔거린다. 한눈을 찡긋, 감더니 입술을 쪽 내밀고는 마찰했다. 서비스. 병찬은 애처럼 장난스레 웃는다. 멀뚱한 표정으로 두어 번 눈을 껌벅거리던 선오는 싱겁게 웃었다. 예상과는 퍽 다른 반응에 애인은 고개를 기울이다 문고리를 꽉 잡는다. 반대쪽 문고리를 선오가 잡은 탓이었다. 누님, 지금 문을 여시면 병찬이가 좀 곤란한데. 내용과 다르게 낯짝이 실실거린다.
“야, …… 자극하지 마라. 나 방금 문 열고 들어갈 뻔했다.”
“그 힘으로 열 수는 있고?”
“욕실에서 나오기 싫어?”
아이고, 그건 좀. 장난기가 말에 그득그득 묻어난다. 옷 벗어준다니 뒤로 물러났던 연하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절 이겨먹고 싶어서 맘이 간질거리는 능구렁이가 욕실에 있다. 허탈한 웃음 뒤로 손을 내저으려던 선오는 문득, 문고리를 쥔 손을 본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게 느슨해진다. 당기는 대신에 도리어 조금씩 문 사이 틈을 벌린다. 고개를 드니 문틈 사이 뺀질거리던 낯이 사라졌다. 손을, 놨나? 당기지도, 밀지도 못한 채 문고리만 쥐고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병찬이 말을 건다.
진짜 들어올래?
선오는 곧장 문을 닫았다. 닫는다는 얌전한 표현보다 문고리를 내팽개친 김에 문도 닫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문 너머 병찬이 숨넘어가게 웃는다. 미안하지만 사양이었다. 저런 꾐에 빠졌다가 하루를 통째로 날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진짜 미안한데, …… 더워서 의욕이 없다. 병찬의 웃음이 뚝 멎는다. 슬그머니 문이 다시 열린다.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나 지금 더위한테 진 거야? …… 진짜? 농담이지?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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