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부평초

개인서고 by 새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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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은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정말로 현실감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라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멍하기만 했고, 가끔은 머리가 아팠다. 이건 정말로 이상했다. 세상과 자신이 동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유리되어 있는 감각. 어쩌면 이는 기억을 잃은 이 특유의 부유감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열두 살의 렌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민했고, 곧 답을 내렸다. 글쎄? 기억을 잃은 지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딱히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자신은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에도 이렇게 세상과 떨어진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끝도 없는 불확실함, 그리고 불안감과 외로움 탓에 열두 살의 그는 이불 속으로 숨어서 몸을 웅크렸다. 어제 밤에 읽었던 책 내용만 머릿속에 둥실거리며 떠다녔다.

 

아, 외로워.

그래서 가끔은 뿌옇게 비치는 저 햇살에 녹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부유감이 사라질 일은 그저 요원해 보여서…….

 

“렌. 뭐하고 있었니?”

“…….”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오늘도 책을 두고 가려나. 렌은 창밖을 바라보며 이어 나가고 있던 상념을 관두고 고개를 돌렸다.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탓에 야시로는 항상 혼자서만 책을 들고 들어왔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된 사람과……처음 보는 남자가 같이 있었다. 렌은 어쩐지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질문을 했을까?”

“…….”

“…….”

“……그냥, 그냥……생각을…….”

 

부드러운 목소리와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 차분하기만 한 시선에 렌은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시선을 드르륵 굴렸다. 아, 눈이 붉은색이었다. 붉은 눈이 강렬해서 잠시 시선이 머무른다. 문득 하나 남은 이전의 기억이 떠올라 렌은 몸을 떨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본 그는,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자신에게 적의가 없는 것 같자 몸에 힘을 풀었다. 과민한 생각이었나. 렌은 곧 관심을 거두고 다시 웅크린 채 이불을 덮어쓰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게도 알려주지 않겠니?”

“…….”

 

야시로는 자신을 아꼈고, 아버지라고 여기라고 말해줬지만 렌은 이해하기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저와 당신은 피가 이어지지 않았고,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가진 추억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아들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어……. 고개를 저으며 렌을 조금 더 이불을 깊게 끌어 덮어썼다.

 

“그래……알겠다. 책은 두고 가마. 렌, 이쪽은 아카보시 토오야란다. 가끔 내가 너무 바쁘면 토오야가 나 대신 너를 보러 올 거야.”

“……응.”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에게 인사를 했던 것도 같다. 렌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햇살에 부신 눈을 찡그렸다. 아, 세상이 온통 하얗게 번졌다. 빛이 너무 강해서 눈이 아렸다.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부유감이 또다시 발끝부터 잠식했다.

머릿속에서 웅장한 음악이 들려온다. 이게 무슨 곡이었지?

아, 니콜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중 마지막 곡이었지.

 

 

**

 

 

시간이 몇 주 흘렀고, 렌의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그래, 그것만이 유의미한 변화였다.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들보다도 그 하나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으므로, 아마도 유의미한 변화는 이 두 사람일 것이다. 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쿠로다 야시로가 소개해 준 사람이라서 그런가, 그 사람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이걸 책에서는 초록동색이나 유유상종이라고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보다가 흘금, 다시 흘금, 또 흘금…….

 

“며칠 전부터 계속 그렇게 보네. 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관찰하던 대상의 말에 화들짝 놀란 렌이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눈을 끔벅였다. …이런. 너무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꿩이 머리만 풀에 감추는 꼴이었다고 생각한 렌이 슬쩍 책을 내리고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평소 ‘응’ 내지는 ‘네’ 외의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더니 생각하는 바를 입으로 뱉는 것이 힘들었다. 그치만,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니니까…….

 

“……아카보시 씨.”

 

침대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던 토오야가 잠시 멈칫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이 렌을 훑는다. 렌은 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윽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얼굴 위로 떠오르자, 소년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거 아이가 쓰기에는 너무 딱딱한 호칭 아냐?”

“그럼……혀, 형님?”

“그것도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뭐, 좋아. 무슨 일이야?”

“왜, 왜 굳이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서……재미, 없지 않으십니까? 저……계속 책만, 보고, 말도 안 걸…고……. 형님은 제가 어, 떤 애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쿠로다, 아버지가 부탁 하셨더라도……물론 쿠로다…아버, 지도……왜, 저를 챙겨주시는지 모르겠, 지만……형님도. 이해, 도 안되는 어린, 애를 굳이……시간을 내서, 보살펴 주는 이유를……모르겠습니다…….”

“쿠로다 씨는 너를 정말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는 모양이던데. 그리고 나도 너를 돌봐야 할 이유가 있고.”

 

저를 돌봐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를 소중하게 여길 당위성은 없지 않나요? 렌은 작게 중얼거렸다.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토오야는 웃고 있었다. 혀가 뻣뻣했다. 말이 자꾸만 뚝뚝 끊겨 알아듣기 힘들 텐데도 눈 앞에 있는 남자는 답답하다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말을 끊지도 않았다. 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그 붉은 눈을 바라본 그는 조금 더 용기를 쥐어 짜냈다.

 

“두 사람은, 가족이에요?”

“항상 고마운 분이시지.”

 

시선을 굴렸다. 여전히 세상은 뿌옇고 흐렸다. 기억의 단절로 인해 이곳과 유리된 감각은 너무나도 선연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 발 붙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이건 무슨 감정일까? 당장이라도 새빨간 혈향이 자신을 맞이할까 싶어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지만 렌은 토오야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저……아버지까지, 오시면……밖에, 나가 보고 싶어요…….”

"……."

"같이, 가주실래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해 보고 싶어졌다.

저 사람들이 타인에 불과한 자신을 친절히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

 

 

햇빛이 강하게 비쳤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를 바라보던 토오야는, 아이가 손수 내려준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야시로는 경시청에 출근해서 없었고, 가벼운 적막만이 함께 했다. 렌은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맞은 편에 앉은 토오야가 차를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학교를 그만뒀다고? 쿠로다 씨가 네가 집에 있으니 하루만 부탁한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분명 퇴원하고 나서 학교에 다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말이야.”

“네. 굳이 다녀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들은 지나치게 미숙해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다……형님이나 아버지 같지는 않더군요…….”

 

렌은 퇴원하고 나서 확신했다. 몰이해는 확실히 이해보다도 쉬운 감정이다.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이를 배척하는 것은 포용하는 것보다 쉬웠다. 그렇기에 렌은 항상 배척당하는 존재였고, 렌 또한 타인을 배척하는 존재였다. 그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딱히 타인이라고 해서 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혹자는 사고를 당한 것을 두고, 혹자는 어머니가 없는 것을 두고, 또 혹자는……. 렌은 생각을 관두었다. 확실한 것은, 렌은 기억을 잃기 전이나 후나 자신을 배척하는 존재까지 이해해 볼 정도로 마음 넓은 이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계를 그렇게 무서워한다고? 이상해! 앳된 목소리 하나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그 또한 그 아이는 겪어보지 않았기에 생기는 간극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 미숙함은 저 또한 마찬가지이나, 이런 상황에서의 쿠로다 렌은 보통 아픔을 조롱당하는 쪽이었지 조롱하는 쪽은 아니어서.

아마 앞으로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고 같은 공포를 공유하는 이들은 앞으로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고독이 불현듯 간에 찾아왔지만 그는 그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삼키기를 택했다.

 

“하긴, 렌짱은 혼자서 배워도 잘하겠지.”

“감사합니다, 형님.”

“하하, 그 호칭은 언제 들어도 낯설다니까.”

 

렌은 차를 마시고는 곁눈질 했다. 찻잔 안의 물이 아직 줄어들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생각했다. 다음 번에는 형님이 좋아하는 차를 물어보고 바꿔야겠네. 아니면 다른 음료를 들여놓던지. 짧게 잘린 단발이 고갯짓을 따라 하늘거렸다. 사락거리는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긴 렌은 손에 여전히 익지 않은 머리카락 길이에 잠시 멈칫했다. 기억의 편린이라고는 안드로이드의 손이 자신에게로 뻗치던 그 장면 뿐인데, 이상하게 이 머리카락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선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기계가 무서워서요. 학교에는 이미 꽤 많은 숫자의 기계가 도입이 됐고……그래서 학교에서 제대로 된 일상생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조금 더 침묵이 이어진다. 렌은 토오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표정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겁쟁이처럼 보였을까?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봐 무서워서 그는 입술을 몇 차례 우물거렸다.

 

“나 참, 그런 걸 나한테 그렇게 다 털어놓아도 되는 거야? 쿠로다 씨가 사람 경계하는 법은 안 가르쳐 줬나 보네.”

“그, 치만 어차피 형님은 제가 기계를 무서워하는 것도 다 보셨고, 제가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도와도 주셨고……아버지도 형님을 믿으시고……제가, 제가 적응을 못했지만……. 그, 그리고 처음에 제가 형님을 좀 많이 경계도 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포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저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온기가 식어 미지근한 찻잔이다. 렌은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어서 가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형님은 정말 제 가족 같아요……. 눈도, 똑같은 빨간색이고! 저는 제 눈이 빨간색이라서 좋습니다…….” 렌은 귀를 만지작거리고는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모호한 얼굴이 비춘다.

 

“……아하, 그래서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말이지? 쿠로다 씨처럼?”

“그, 그건…….”

 

당황하는 아이를 보며 토오야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햇살 아래 뿌옇기만 했던 색깔이 선명했다. 둥실거리는 것 같았던 부유감이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 항상 그랬다. 아버지와, 토오야가 같이 있을 때만큼은 마치 맨땅에 발을 붙이고 선 것과도 같은……. 그런, 그런 안정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희는 혈연도 아니고, 통상적인 가족과 거리가 멀잖습니까……. 그럼, 그럼 이렇게라도 가족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렌,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란다. 머리 색이나 눈 색, 생김새와 혈연 따위가 너와 나의 가족을 정하는 것이 아니야. 너는 내 소중한 아들이란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세상 모든 것이 보편적인 것들로만 돌아가지는 않나 봐. 소중해야 할 당위성이 굳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고작해야 곁에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지.

 

전부 그것 때문이었다.

열두 살의 렌은 그래서 그들을 가족이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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