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

마지막 주周 4

후일담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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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제후요?”

“출발하기 전에 일거리를 얹는 것도 주나라 방식인가?”

“재상을 제가 죽였으니 일거리가 자꾸 생기겠죠. 말하세요. 선제후라니요.”

“송에서 칙서를 보냈습니다. 주를 자치구로 정하는 게 어떻느냐고 그러는데요.”

“거절하세요. 송의 자비엔 감사하나 중원에 송을 제외한 다른 국가를 만들 생각은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요?”

“… 수사법까지 제가 적어드려야 하는 건 아닐테고.”

“여기로 돌아오실 겁니까?”

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말에서 내려 대화를 나누는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폐하, 하고 참지정사가 되묻자 희는 그제야 환상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폐하가 아닙니다. 제후 작위를 받을 생각도 없으니, 그냥…. 음, 부를 말이 없군요. 죄인을 부르는 것처럼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추방령은 복건과 하남에 유효하니까요.”

“그럼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조심히 가세요.”

“… 예.”

희는 참지정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안장에 올랐다. 더 할 말이 없냐 묻는 말에 고개만 조용히 내저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칭하는 것이 익숙해지려면 몇 년 동안 자학하며 지냈을테니 반응이 크게 돌아오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맹가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의 투레질과 함께 편자가 땅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불탔던 황궁도, 짐승처럼 흐느꼈던 외부 객청도.

주에서 공림까지는 말을 타고 일주일이면 되었다. 승마를 해 본 적이 몇 번 없다더니 멀미도 없고 산길 타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순황이 몸을 기울여 천전에게 속삭였다. “황제도 말 잘 탔어.” 천전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그냥 적응력이 좋나 보죠.” 고작 스물두 살 된 어린 것에게 다시 황제를 씌우고 싶진 않았다.

공림에 도착하자마자 넷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오래 자리를 비운 맹가 대신 사당을 지킨 하곡이 그들을 반겼다. 순황과 천전이 짐을 내리는 동안 맹가는 희를 이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방향을 보니 위패를 모셔둔 곳이었다.

“같이 안 가봐도 돼?”

“… 아, 저요?”

“천전은 볼 장 못 볼 장 다 봤는데 그럼 얘겠니.”

“아니, 뭐…. 저보단 맹자께서 같이 있는 게 더 낫겠죠.”

하곡이 어색하게 웃었다. 새 관계를 쌓으려면 갈 길이 멀었다.

다행스럽게도 하곡은 선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친화력이 제일 좋았다. 불행이라면 희가 지나치게 바빴다. 맹가가 처음 그를 소개한 날 이래로 희는 아침마다 위패가 모셔진 사당 앞을 쓸고 곳곳에 이어진 길도 쓸어내더니 아침을 먹고서는 바로 서고로 가 구석에 틀어박혀 점심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맹가가 식사하라며 부르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가끔이지 평소엔 점심을 자주 걸렀다.

“너 끼니 제대로 안 챙기면 혼난다.”

“얼마나요?”

“맛 없는 약 줄 거야.”

“…….”

협박이 통했는지(정작 희는 그런 게 익숙하단 낯이었다) 그 이후로 점심은 꼬박꼬박 먹으러 오긴 했다.

식사가 끝나면 순황이 희를 붙잡고 의약당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오후에도 말을 건넬 틈은 없었다. 희는 진료가 끝나면 다시 서고에 틀어박혔다가 해가 질 즈음에 제일 먼저 잠들었다. 강박적인 습관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잠은 다른 유학자들보다 더 오래 잤고, 그러면서도 종종 잠을 설쳐 새벽마다 등을 들고 선산을 돌아다녔다. 낯도 창백한 치가 흰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새벽마다 놀라는 이가 한두 명씩 나왔다. 그러면 희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다 죄송하다 고개를 숙이며 소리 없이 물러났다. 황제로 십 년 넘게 살아온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와중에 날아오는 편지란 또 얼마나 많은지! 하곡은 중원에 전서구를 떼로 키우는 부자가 이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서고에만 박혀있던 희가 식사하러 밖으로 나올 때마다 온갖 새들이 몰려들어 희의 위로 돌돌 말린 편지를 떨어트리고 갔다. 답장은 받지 않겠단 의지 표명만이 확실했다. 몇 개는 은장도가 동봉되어있었다. 구구절절한 내용도 함께였다.

“와, 이게 다 뭐람.”

“… 답장을 붉은색으로 써서 보내면 예의에 어긋날까요?”

“투서처럼 보일 것 같은데.”

“은장도 칼집에서 꺼내지 말고 그대로 넣으세요, 희. 이건 맹자께 고해야 할 것 같으니.”

“말 놓으셔도 됩니다.”

“말 놓는 것보단 이게 더 중요한 것 같은데, 희야.” 귀신같이 나타난 맹가가 편지랑 은장도를 뺏어갔다. 편지를 간략하게 훑자 미간에 줄이 생기는 게 영 심상찮은 내용인 것이 분명했다. 하곡과 천전은 눈치껏 바닥에 널린 전서를 주워담았다. 아마 전부 비슷한 내용일테니 맹가가 보고 격노하기 전에 치워버리는 게 속 편했다.

“숨기지 말고 가져와.”

“혼나겠다.”

“혼나겠네.”

“은장도 칼집은 왜 벗긴거야? 너 설마 네 피 내서 쓰려고 했니?”

“… 자결하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네게 명령할 사람이 온 중원에 어디 있다고? 다시 집어넣어라.”

“네.”

엉망진창이었다.

맹가가 한바탕 중원을 뒤집어엎는 동안 선산으로는 꽤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온 추밀사라던가 -자결하라는 편지를 보냈던 사람- , 전 금위대장이라던가 하는 이들. 마침 또 금위대장은 추밀사와 같은 날에 찾아왔다.

“주희 선생께서는요?”

“‘주’도 버려서 그냥 희라고 부르면 될 걸요. 지금 서고 안에 있는데 불러드릴까요?”

“나올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서 식사까지 하고 가셔야 해서.”

“괜찮습니다. 일반인이 선산에 올 일은 많이 없고.”

남자가 생긋 웃었다. 건장한 사내인 추밀사를 단숨에 제압해 마을에 있던 상군에 넘긴 사람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하곡과 두 시진 가량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희가 서고에서 나오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순황이 중얼거렸다. “하곡보다 친화력 좋은 사람 처음 봤어.” 천전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궁에서 봤을 땐 무뚝뚝하고 말없는 군인인 줄만 알았다. 그는 희가 안내한 객청에서 한 시진 정도 대화하고 나와 하산했다.

“뭐라고 하시덥니까?”

“말 놓으셔도 됩니다. … 그냥, 경호와 숙헌의 거처 이야기를 조금 했어요.”

“그러면 편히. … 애들 거취는 재판 전에 정했다고 하지 않았나?”

“휘국공 아래에 오래 있던 아이들이었으니까요.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걸 금위대장-… 관평이 제안한 모양입니다.”

희는 아주 오래간 금위대장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재판 전부터 그가 해둘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두었다. 황궁 안에 제 세력을 한 명이라도 늘려두고, 경호와 숙헌에게 돌아갈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고, 임시적으로 복건성을 이끌 후계자를 지정해두고, 휘국공이 진행하던 종교 탄압 정책을 중지시키고, 공신들에게 과하게 부여된 땅을 회수해 공령으로 전환하고, 소림에게 사죄 보상을 주고, 법제를 개편하고, 가례를 재편찬하고, 성리학을 다시 고쳐쓰고…. 배동이 붙은 열여덟 살부터 정변을 벌인 스물한 살까지 사 년 동안 전부 끝낼 분량의 일은 아니었다.

아마 희가 세워뒀던 수많은 계획 중 몇 가지는 끝끝내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누가 와도 사 년 만에 모든 걸 할 수는 없었을테지만 끝마치지 못한 것이 희의 눈에 자꾸 밟히는 것 같았다.

“희.”

“……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런 게 아니라, 맹자께서 했어도 다 못 했을 테니 자책하지 말라고.”

“…….”

희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시야 끝에 걸쳐진 검은 옷자락이 느릿느릿하게 공중에서 흔들렸다.

“조사전이다.”

“… 조사전이요?”

“새로 들어오는 이들에겐 선학이 조사나 다름없으니까.”

벽면에 위패가 빼곡히 들이차있었다.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것을 보니 누군가(아마 맹가일 것이다) 매일같이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것이다. 희는 맹가에게 손이 붙잡힌 채 걸음을 옮기며 위패의 이름을 읽었다. 안쪽에 있을수록 오래 전 사람이었다. 몇 명의 ‘증자’, ‘안자’, ‘자사자’, 그리고….

시선이 가장 바깥에 가 닿았다. 그 방향을 안 맹가가 말을 덧붙였다.

“다산은 올라온 지 몇 년 안 됐다.”

“… 혁명이 끝나자마자 이름을 올린 줄 알았습니다.”

“생전엔 본인이 원하지 않았어. 사후에 천전이 학문을 정리해 발표해서 유학자로 올려둔 것 뿐이다.”

위패에는 본관과 고향,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유독 덜 닳아진 위패가 밀려들어온 햇빛을 받아 어둑하게 반짝였다. 양명 왕수인, 다산 정약용, 상산 육구연, 손경자…. 희는 그 이름들을 알았다. 황제와 희를 포함해 ‘주희’가 죽인 이름들이다. 저도 모르게 몸을 피했는지 도망가지 말라는 듯 맹가가 아까보다 그의 손을 좀 더 세게 붙들었다.

“희야.”

“… 예, 맹자님.”

“자책하지 마라. 누군가는 했어야 했을 일이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 말입니까?”

“전생과 현생은 동일시 할 수 없어. 불법이 그리 말하고 우리도 긍정하지 않는다. 확실히, 주희朱熹의 폭정은 많은 유학자의 숨을 거둬갔다. 그러나 그걸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너는 ‘주희’가 아니니까.”

“…….”

정말? 희는 벽을 가득 채운 위패를 바라보았다. 기백 명의 숨을 취해 산 이가 ‘유’의 산에 들어올 수 있냐며 제게 일갈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희는 그저 시선을 피했었다. 그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자였다. 희는 유학자도 아니었고 ‘유’와 함께 행동하는 군졸도 아니었으므로.

“…… 선생님!”

“… 아, 미안합니다.”

“피곤하십니까?”

“간단한 대화 정도는 괜찮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긴다는게 너무 깊게 몰두했다. 고개를 내젓자 금위대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희는 기억을 더듬어 금위대장의 이름을 떠올렸다. 관평關平이라고 했다. 관성대제를 모시는 산서성 출신의….

“관평입니다.”

“… 예, 관 장군.”

“갈충왕(*관평의 시호)과 같은 함자를 쓰긴 합니다만, 마을 관례가 그렇습니다. 아비 없는 미혼모의 자식에게는 관성대제의 성을 내려주었거든요. 그러니 관 장군은 좀 과하고…. 그래요. 그냥 평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평이라 부르셔도 좋고.”

“… 금위대장이 저보다 여덟 살 위 아닙니까?”

“서른이긴 하죠.”

“그런데 제가 왜 금위대장을 아평이라고 부릅니까?”

“농담을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됐습니다.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 없을테니. 저도 여전히 금위대장인지라.”

주는 해체되지 않았나? 희는 눈을 깜박거리다, 곧 참지정사의 말을 떠올렸다. 송이 먼저 ‘주’의 영토를 자치구로 정하자고 제안했었다. 희는 거절했으나 복건성에서 쫓겨난 마지막 황제의 간청을 송이 들어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관평이 마저 말을 이었다.

“중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닙니다. 일전에 맡겨주셨던 일을 끝냈다 보고하러 온 것뿐이라서요.”

“정변 이후에 따로 뭘 맡긴 적이 없습니다만.”

“그 전에 맡기셨었습니다. 경호와 숙헌의 거취요.”

“… 아. 어떻게 됐습니까? 입양처를 따로 찾았는지요.”

“제가 데리고 살기로 했습니다.”

“금위대장이요?”

“소혜도 같이요.”

“……?”

소혜? 그런 이름의 관리는 없었는데.

“아, 참지정사 말입니다.”

“참지정사의 이름은 서혜일텐데요.”

“급하게 혼인신고만 올린 터라. 정식으로 식을 올리진 않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관평의 왼손 약지에 옥가락지가 껴 있었다. 낯 위로 다정한 웃음이 번졌다. 희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이럴 땐 축하 인사를 먼저 건네야 하나? 경조사를 챙겨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겨우 더듬거리며 축하 인사를 건네자 관평이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행복해보였다.

… 다행인 일이다. 그 서늘한 황궁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할 줄 알아서. 관평은 한참 제 부인의 자랑을 늘어놓다가 과하다고 느꼈는지 멋쩍게 웃었다. 제 앞에선 어른스러운 면만 보여주던 것과 영 딴판이라 희도 따라 약하게 웃었다.

관평은 그에게 경호와 숙헌의 안부도 전해주었다. 각각 희와 열 살, 열세 살 차이가 났다. 끝을 빼앗긴 그에게 이제 나이란 무용한 것이 되었으나 처음 배동으로 들어올 땐 여덟 살, 다섯 살이었던 아이들이 벌써 열두 살 언저리가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은 소학을 읽히고 있다며 전해주는 이야기가 달가웠다. 이러니저러니, 그 배동들이 감시 목적으로 들어오긴 했어도 저도 모르게 정을 준 모양이었다.

저녁은 먹고 가라는 하곡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한 관평은 서고를 슬쩍 구경하다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희는 마을로 향하는 목책의 정문 앞까지 배웅을 나섰다. 바람결에 옷자락이 흩날렸다.

“아침마다 조사전에 들른다면서요?”

“… 예?”

“정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천전을 말하는건지 하곡을 말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인사는, 올리셨습니까? 원체 그런 걸 어려워하셨잖아요.”

“… 너무 많은 걸 보셨군요, 금위대장.”

“이런. 말을 삼가겠습니다, 폐하.”

“이만 가세요. 복건성까지 가야하지 않습니까.”

“역참에서 말을 빌려왔으니 얼마 걸리진 않습니다. 그럼, 평안하십시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 난세에 뵐 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관평은 생긋 웃고는, 그를 등지고 산을 내려갔다. 희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서 있었다.

… 인사? 생경한 말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조사전 앞마당으로 향하면서도 그 짧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무슨 인사? 주희가 죽인 사람들의 앞에서 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긴 한가? 선산에서 처음 제대로 된 인사를 할 때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애먹었었는데. 하남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성은 없고 이름 한 자 뿐이라는 말도 목 어딘가에서 걸린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었다. 그런 주제에 위패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조사전의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본디 맹가가 관리한다던 것을 거의 빌다시피 해 이어받았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희는 푸르게 물든 사당 안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주변과 길에 쌓인 낙엽을 쓸어내고 먼지를 닦아냈다. 가장 앞렬에 세워진 위패의 이름이 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청소를 끝내고 창문을 닫자 사당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희는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희, 입니다.” 그냥, 그렇게 말이 나왔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왜 선산에 왔는지, 그런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문틈새로 기어들어온 햇볕이 희의 발목을 죄였다.

희- 그러니까, 아직 주희나 황제 폐하 따위로 불렸던 시절에. 주도 어쩔 수 없이 중원의 국가였던지라 명절마다 제사를 지냈다. 희가 모르는 사람의 위패가 한가득 차려진 제삿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주희는 그게 휘국공이 말하던 황태후임을 금방 깨달았다. 그날은 희가 준비한 경문을 읊어야 할 때였고, 그건 희가 고작 열 살 때 처음 접하고 읽은 말들이었다. 과하게 긴장했던 탓에 짧은 문장을 읊는 데 말을 두 번이나 절었다. 휘국공은 제사가 끝나고 희의 경문을 작성한 두 가신을 매질했다. 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그만하라고 ‘명령’하고 나서야 매질이 끝났으나 그들은 의관으로 이송된 지 세 시진만에 죽었다. 희는 그 이후 공식 석상에서 말을 절지 않았다. 관평이 말한, ‘인사를 어려워한다‘는 말은 아마 그때를 가리킨 말이었을 것이다. 12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그게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지. 아니면 그날 황제가 무능함을 깨달았거나…….

“… 축시에 예서 뭐하는게야?”

맹가가 화등을 들어 희의 낯을 비췄다. 잠을 설쳤는지 창백한 낯 위에 진 그늘이 선명했다.

“자러 안 가고. 조사전엔 무슨 일로 왔어.”

“… 조사전인가요, 여기?”

“가는 길이지. 그 앞마당은 아니고.”

시선을 피하고 그늘 속에 제 몸을 숨기는 게 퍽 익숙해보였다. 맹가는 시선을 내리깐 희를 바라보다 손목을 붙잡았다. 낯이 엉망인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제게도 그렇고 천전이나 순황에게도 속을 터놓고 말할 성정이 아니다보니 캐묻기도 어려웠다. 맹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희가 입을 열었다.

“꿈에… 어머니가 나오셨는데.”

“그래.”

“왜 제게 얼른 오지 않느냐고 여쭤보시더라고요.”

“그래서?”

희는 또 오래간 침묵했다. 긴 숨을 내뱉더니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이것도 불효인가요? 제때 죽지 않고, 부모를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부모를 두고 먼저 죽는 것같은 불효입니까.”

삼년상도 치러주지 못한 게 마음 한 구석에 돌처럼 얹힌 모양새였다. 표정 없는 창백한 낯 위로 화등의 붉은 빛이 일렁였다. 맹가는 손목을 붙잡은 손을 슬쩍 내려 희와 손깍지를 끼곤 제 쪽으로 끌고 왔다. 그제야 당황한듯 서늘한 낯이 무너졌다.

“축시에 할 말은 아니로구나.”

“… 죄송합니다.”

“됐다. 놀이라도 하면 잠이 덜 오겠지. 바둑은 배웠나?”

“아뇨. … 헌데 조사전에서 그런 걸 해도 괜찮습니까?”

“나보다 잘 두는 이가 선산에 없으니 거기서 해도 된다. 장기는, 안 배웠어?”

“예.”

“휘국공은 뭐 했는데?”

촛불을 켜자 사당을 가득 채우던 새벽 공기가 일순 물러나며 희뿌연 연기를 남겼다. 바둑돌이 담긴 통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면류관에 달렸던 주렴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슷했다. 희는 눈앞을 가리는 연기를 손으로 치워내며 대답했다.

“성리학만 가르쳐줬습니다.”

“병법 놀이는.”

“그런 것도 있습니까?”

“… 병법은?”

희는 잠시 고민했다. 독학한 것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야하나.

“안 배웠습니다.”

“그 치는 대체 뭘, …… 아니다, 말하지 마.”

“눈앞에서 목이 잘려도 동요하지 않는,”

“말하지 말라고.”

“예.”

창문을 열자 창틀 너머로 새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선산은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별이 잘 보였다. 황궁에서도 이 정도로 맑은 하늘은 본 적이 없었다. 점점히 박힌 하얀 별들이 꼭 은실 같았다.

“논어는 다 읽었나? 여기 오고 나서 계속 서고에만 있던데.”

“읽는 중입니다. … 생각보다 제 독서 속도가 많이 느려서요.”

“정무 처리는 빛보다 빠르더니.”

“그렇게 안 하면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그래…. 순황이 불같이 화내겠군. 어디까지 읽었어?”

“안연 편 읽고 있습니다.”

극기복례 쪽인가. 맹가는 기억을 더듬어 공자께서 무어라 말했는지 떠올렸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고. 맞은편에 앉은 희가 흑돌을 만지작거렸다. 먼저 하나 놓아보라는듯 고개를 까닥이자 고민하듯 미간을 좁히는 게 그래도 바둑의 규칙 정도는 아는 성싶었다. 촛불을 가까이 끌어오는 것과 동시에 흑돌 하나가 중앙에 놓였다.

“가운데 두지 말고.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을 가운데 두더냐.”

“그러면….”

“가장자리에 두어야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옮겨갔다. “그래, 거기. 남의 땅을 빼앗고 내 집을 올린다는 점에선 병법과 바둑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기보 중 하나를 그대로 재현하자 희의 시선이 판 위를 여기저기 휘돌았다.

“어디로 먼저 공격하겠느냐?”

“… 모양새가 꼭 진법 같네요.”

“병법서에 나온 걸 응용한거니까 그렇겠지.”

“이쪽에… 두겠습니다.” 우측의 비어있는 곳에 흑돌이 올라왔다. 두어 번 수를 주고받자 진 한쪽이 완전히 무너졌다. 좋은 수였다.

“나라면 이 모퉁이에 두었을거다.”

“여기 두면 집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네 집의 절반을 무너트릴 순 있겠지. 진의 원본 되는 것 이름은 아나?”

“… 팔문금쇄진 아닙니까?”

“병법 안 배웠다면서 알 건 아는군.”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요. … ‘주희’는 책사로 일했다기에.”

흰 돌이 무너진 우측방 가운데에 올라왔다. 혀를 차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 걸 보니 또 한동안은 잔당을 소탕하느라 여념이 없으실 게 분명했다.

“헌데 이게 효와 무슨,”

“네가 요절하는 것보단 오래 사는 게 충효다.”

“그렇습니까.”

“잠 설치거든 이리로 와서 혼자 복기나 해 봐. 서고에 기보책 있다.”

“조사전에서 이런 걸 해도 괜찮습니까?”

“가위 눌릴 일은 없으니까. 다른 아해들도 몇 번 여기서 잤었다. 난세엔 선산까지 피난민이 몰려들거든.”

기백 년 전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희는 대꾸하는 대신 맹가를 도와 판을 정리했다. 흑돌과 백돌이 담긴 통까지 들고 일어선 맹가가 손짓 한 번으로 사당의 불을 꺼트렸다.

“네가 주희를 떨쳐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희로 선산에 정 붙이지도 못 하니 이런 걸로라도 붙잡아둬야지.”

“…….”

“‘유’에 이름 올린 학자들이 너랑 폭군을 오도하기야 하겠니? 하곡이나 천전이 대하기 어려우면 여기 와서 토로라도 하고 가거라. 어차피 나나 순황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거 속에 쌓아두면 나중에 병 난다.”

조사전에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무어라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희는 느리게 고개만 끄덕였다. 티가 다 났나보다. 황궁에 있을 땐 제 심리 파악할 줄 아는 치가 휘국공밖에 없었다. 맹가가 사택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희도 제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달빛이 그 뒤를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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