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

마지막 주周 完

살아가야 하는 이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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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의 우려와 다르게 조사전은 꽤 괜찮은 도피처였다.

황실의 문장을 단 사자가 강제집행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외지인 취급을 받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맹자께서 잔당 소탕을 위해 이산 장군과 타지로 향하고 다른 셋은 마을로 내려간 탓에 강제집행당하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희는 한껏 비아냥댈 각오로 천자를 오시했다. 이제 와서 사형을 논하려고?

“… 복건성의 사람들을 송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간청한 칙서가, 정무대신을 불러모은 자리에 저를 압송시킬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었습니까?”

고작 길 잃은 사람들의 안내를 부탁한다는 말 하나 때문에?

“많은 걸 고려해야 하는 짐의 입장도 이해해주게. 고민을 오래 했어.”

“이 상황이 말입니까?”

“필요한 일이었지. 아니 그런가.”

“참지정사와 금위대장을 필두로 한 백사십 명의 궁인들이 전부 주 황실 복권파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닐 이유도 없지 않나?”

무슨 이유? 희는 속에서 터져나오려는 말을 꾹 삼켰다. 주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감정이 격해지는 건 그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그는 백사십여 명의 목숨줄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 반대편엔 송이 있었다. 희는 백사십을 대표해 송이 그 줄을 놓지 않도록 애걸해야 하는 위치였다.

“… 참지정사는 몇 달 전까지 관직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금위대장은 주에서 가장 천대받는 관직이었고요. 그들이 어찌 복권파가 된단 말입니까?”

“백사십 명의 궁인들 모두 자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더군. 자네가 명령하면 들을 사이 아닌가?”

긴밀한 관계? 개도 안 웃을 이야기다. 끝의 끝까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 궁인들이 휘국공의 인장 없인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명령은 안중에도 없었던 이들이 저와 무슨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단 말인가?

“휘국공의 인장 없이는 궁에서 물러나지 않던 이들이 저와 긴밀한 관계요? 황상, 스스로 말씀하시면서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에선 천자가 휘국공이고 휘국공이 곧 천자였습니다. 저는 단지 군주의 위가 가지는 책임을 다하려 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 위가 허명뿐이었다고 해도요.”

“관 모는 자네의 명을 따라 두 ‘이’들을 보호하고 있던데.”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했다. 희는 소매 속으로 숨긴 손을 세게 말아쥐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적이 없어-”

“그럼 간접적으론 가했단 말이군.”

하늘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짙은 색의 구름이 정전政殿 앞 광장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어두운 것은 익숙해지지 않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일렁일 붉은색이 더 싫었다.

“휘국공은 그 아이들을 제 감시역으로 사용했습니다. 미행과 은밀행동에 능하도록 훈련한 태가 났습니다. 그 아이들로 하여금 제가 받은 부담감도 해라고 한다면, 그게 간접적 가해일겁니다.”

희는 짧게 시선을 굴렸다. “… 지학도 되지 않은 이들을 어찌 죽인단 말입니까. 무지한 것을 벌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무지를 핑계로 벌을 주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송은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갑의 위치였다. 유의 선산에서 강제집행이라는 무리수를 둘 만큼 다급하고 위중한 일도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간단한 괴롭힘 같은 거였다. 朱에 생을 의탁했다는, 그때는 그것 말고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 이게 주와 무어가 다르지? 살기 위해 온갖 기술과 학문을 접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것과 이게, 무슨 차이를 보여주고 있길래? 송은 무슨 대의명분이 있어 이런 짓을 벌이지? 유학을 숭상하는 국가가 아니었나? 빌어먹게도 명석한 희는 금방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제가 개봉에 제 사람들을 잠입시켜 송을 내부부터 흔들까 걱정이시군요.”

광장에 깔린 청강석이 점점히 물들었다. 궁인들이 부산스럽게 광장에 도열한 정무대신들 위로 천막을 드리웠다. 가느다란 것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작금의 송이 주와 무어가 다릅니까?”

검은색 기와단청의 그림자 아래 황제가 조소했다.

“그리 걱정이시라면, 저를 차열하여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목을 긋고 손을 자르셨어야지요.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게 눈이라도 뽑으셨어야죠. 하물며 이 모든 걸 행하고 나서도 아무와도 접촉할 수 없게 위리안치라도 시키셔야 했습니다. 제 신분을 맹자께서 보증하신단 이유가 송의 국가안보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새하얀 빗줄기 속 붉은 머리칼만이 선명하다.

“살기 위해 뭐라도 붙잡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적어도 송에선 그들을 포용하는 자비라도 보여주셨어야죠!”

그 분노 역시 불길처럼 선명하다.

“재판과 무관하게 송이 저를 죽일 기회는 차고 넘쳤을 터입니다. 이제 와서 제 목숨으로 저들을 묶은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황상. 단지 성리학을 숭상하는 국가에 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들이 죽어야합니까? 제가 반란을 일으킬 것 같았으면 저를 우선 죽이셨어야지요, 이딴 식으로 사람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사형을 청할까요? 명하신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집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고 망나니를 부르셨잖습니까. 태천관이 오늘 날씨에 대한 보고를 올렸을텐데도 부러 오늘을 기하신 이유 역시 피가 비에 쉽게 씻겨나가도록 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그리 해야만 이들을 구하실 요량이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황상. 유학을 숭상하는 국가에서 이런 식으로 백성의 생명을 같잖게 여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금세 아물어가는 손바닥 상처 위로 빗물이 스며들어 짙은 통증을 남겼다. 그는 부드러운 비단과 화려한 금장에 휩싸여 살았지만 낯익은 것은 쇠의 서늘한 온도와 새빨갛고 뜨거운 피였다.

생명이란 것은 유학에서 가장 으뜸되는 가치를 지니거나 혹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이었지만 대의 앞에선 어쩔 수 없이 형체를 가졌다. 인간은 그만큼 객관적이지 못했다. 용정의 궁인이 피를 치우기 편하도록 비가 오는 날을 골랐지만 추위에 얼어죽을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는 황제처럼.

희는 광장을 덮은 청강석 한 장을 넘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포가 길게 늘어져 청강석 위로 눈에 띄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물자욱이 곧 희의 생명값이고 주희의 이름값이었다. 태조의 이름은 그가 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천하와 같은 무게를 가졌다. 백사십여 명의 목숨과는 비견할 수 없는 것이 저울 위에서 흔들렸다. … 그는 군주의 생리를 안다. 정의廷宜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정의는 타고난 천자였다. 이미 기록에서 말살된 자의 이름 하나만으론 만족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앞으로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용상으로 향하는 계단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계속 말할까요?”

목숨 위에 충성을 얹을까요? 삼킨 말을 인지했는지 황제가 나른하게 손을 까닥였다. 개새끼…. 희는 시선을 굴렸다. 머리카락을 잘랐던가? 비에 젖어 늘어지는 붉은 것이 꼭 피를 닮았다. 천막 아래로 새까만 시선이 닿을 때마다 마주친 이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천하에 천자는 하나 뿐이다. 송의 대신이란 작자들이 폭군에게 고개를 숙여?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서 경우의 수에 대한 결과값이 스쳐지나갔다. 희는 천막 아래서 대신을 꺼내와 보란듯이 죽여버릴 수 있다. 단신으로 고관대작 일흔을 죽인 자다. 개중에 무관이 정말 없었겠는가? 망나니 노릇이야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려울 일 없었다. 아, 비록 그는 일흔 한 번째겠지만. 픽 웃는 소리와 함께 입꼬리가 비틀리자 누군가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건 황제의 직접적인 칙명이 없기 때문이다. 희는 비에 흠뻑 젖은 겉옷의 옷매무새를 갈무리했다.

“송의 참지정사 열, 어사태부(*관료 감찰 기구인 어사태의 책임자), 동중서문하평장서(*재상부의 재상)는 전원 ‘주’의 대신들입니다. 성학십도에 속해있지 않았으나 휘국공 치하의 가신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댔습니다. 계속할까요?”

빗소리 사이로 금속성이 뒤섞였다. 피가 튀지 않을 뿐 정변이나 다름없었다. 천막 아래 곳곳에서 비명과 애걸하는 곡성이 겹쳐 들렸다.

황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영리한 치다. 일부러 제게 ‘주’의 명단을 읊게 만들어 복수의 대상을 주희로 한정짓고 있었다. 연좌제의 시행 가능성을 재는 사이 황제가 다시 손을 까닥였다. “연좌제를 적용한다면?” 적용하는군.

“삼사(*재정 담당), 심형원, 대리사(*재판 담당)의 대부분은 주 대신의 후손입니다. 의절한 이도 있다 들었으니 명징히 파악하여 상벌을 내리심이 옳습니다.”

관용을 바라는 절규와 친위대의 발소리가 뒤섞였다. 빗소리도 덮을 수 없는 소리였다.

“주가 송과 같은 직제를 사용하는 이유는 송을 무너트리고 관료를 흡수할 때 그 적응 기간을 짧게 두기 위함입니다. 휘국공은 재정과 인사권에 깊게 관여했으니 아마 대다수의 분가가 송의 인사부와 재정부에 있을 겁니다. 제가 직접 대조할까요?”

목숨도 걸었다. 가치를 깎아내려 칼자루도 쥐여주었다. 백사십을 살리기 위해 주 태조의 이름까지 걸었으니- 정정하자. 고작 백사십을 살리기 위해 천하와 같은 값인 이름까지 걸었다. 정의가 외면할 수 없는 것. 끝내 손을 뻗고야 마는 것.

인정하자. 주희란 이십여 년 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칠 년 난세에서부터 사람이 눈돌릴 수 없도록 붙잡는 힘이 있었다. 그런 걸 송의 맞은편에 올렸으니 군주가 붙잡지 않고서 배기겠는가? 그 주희가 송의 아래서 번견 노릇을 하겠다는데, 권력자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그는 천하의 삼천 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충실한 번견이 될 터였다.

“아니, 이 정도면 거래가 성립할 것 같군.”

송에겐 손해 볼 것 없는 거래다. 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숨결에 비가 엉켜 아래로 떨어졌다.

“…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 그는 그제야, 답잖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주에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감정부터 앞서는 건 고쳐야 할 버릇이었다. 재판에선 일전에 있었던 정변 때문에 기력을 죄 소모해서 조용했고 선산에 있었을 땐 유의 사람들 사이에 있어 조용했었는데. 다음에 또 황실에서 부르거든 대리인께 동행을 부탁드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이름은 일부러 피휘했나?”

그 정도로 태조를 의식하는 편은 아닌데요. 황상께서는 의식하십니까? 희는 비아냥거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가 군주와 봉건제를 동반한 모든 사회적 계약에 익숙해지려면 기백 년은 더 있어야 했다.

“저는 ‘주’가 아니고 ‘황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부모가 주신 이름을 버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먹구름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는 물러가라는 신호와 동시에 걸음을 돌려 정전을 벗어났다. 주 대신들의 저주가 발꿈치에 진득히 늘어붙었다.

“아니 왜 죽어요?”

“목소리 잃고 손 잃는 것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수지맞는 장사라고 생각하는데요.”

“책 안 읽을 거에요?”

“정말 그렇게 되면 자진하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은요?”

“복건성에 있죠. 다른 군사들이 봐주고 있습니다.”

앞서가는 걸음이 빠르다. 다른 군사들이란 말을 들어도 말을 얹지 않는 것이 기이했다. 언제 왔는지, 왜 둘만 왔는지,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몸은 괜찮은지, 어디까지 들었는지, 비는 안 맞았는지…. 평소라면 둑이 터지듯 쏟아나왔을 질문이 하나도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도록 길러진 자가 뒤따르는 이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몰려있단 방증이었다.

서혜가 희의 손목을 붙잡고 나서야 축축하게 젖은 몸이 휘청이며 멈춰섰다.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탓에 혜가 올려다보고 희가 내려다봐야했다. 한참 침묵하던 희는 표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렸다.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이 이어졌다.

“… 하남성 쪽으론 당분간 오지 말라고 하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후폭풍을 전부 계산하고 정변을 일으킨 사람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겠다고?

“조급해하네요.”

“숙청에 휘말려서 죽으면 어찌합니까.”

이쪽이 본심인가. 걱정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까만 눈 사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혜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손목을 놓아주었다. 대신 도망가지 못하게 머리 위로 지우산을 드리웠다. 희는 순순히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기름을 먹인 종이에 빗방울이 부딪히며 뭉툭한 소리를 냈다.

“자기를 거열형에 처하라고 간언을 올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 미안합니다. 걱정되어서- …… 잠깐, 회임했습니까?”

“아니 재판 때 그렇게 피곤해했으면서도 눈썰미는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둔해졌지?”

“…….”

“지금 내 앞에서 험한 말 한 거 후회하고 있어요?”

“그런 것 같은데.” 지금까지 침묵하던 관평이 덧붙였다.

“내가 미친다 정말.”

황제 앞에서 실컷 빈정대던 자세는 어디 가고? 이렇게 당황할 일인가? 혜는 당황한 낯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어린 선생을 바라보다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가끔은 스물 둘이 아니라 노회한 장수처럼 굴더니 지금은 약관도 되지 못한 청년처럼 보였다.

기실 희는 타인에 비해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경우였으므로 따지고 보면 지금의 반응이 더 걸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쑥스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혹은 둘 다인지 붉어진 목덜미를 매만지던 희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일단, 축하드립니다. 이름은요?”

“아니 이이가 관 씨를 쓰기 싫다잖아요.”

“애를 관성대제의 자식으로 만들 생각이야?”

“왜, 멋진데.”

“네.”

“아무튼, 그래서 제 성 쓰기로 했어요.”

“네.”

“서서徐庶 하자던데.”

“예쁜 이름이네요.”

“지금 정신 놓고 있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진짜요?”

“…… 괜찮습니다.”

“안 괜찮은 얼굴로 괜찮다 말하는 것도 재주긴 하네, 응.”

지우산 면적이 작은 탓에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셋의 어깨가 젖어들었다. 희는 우산의 대를 밀어 그늘을 서혜 쪽으로 기울였다. 임부에게 추위는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배려를 눈치챘는지 서혜가 눈을 깜박이더니 느닷없이 (또) 폭소했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아가며 허리 젖히고 웃는 게 퍽 즐거워보였다.

“아, 아하하…. 어떻게 이런 사람이 방금 대전에선 그렇게 화를 냈담. 아하하하…….”

“부끄러운데 저 먼저 가도 됩니까?”

뺨이 붙잡힌 탓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덜미부터 뺨까지 올라온 열기 탓에 낯이 온통 새붉었다.

“어딜 가요, 씻고 옷 갈아입고 가야지. 그렇게 젖은 채로 마차 탈 생각은 아니죠?”

“선생이라면 그럴 법 해… 그래도 옷은 갈아입고 가십시오, 선생. 그대로 가면 감기 걸릴 겁니다.”

“괜찮대도요.”

“원래 살다보면 아픈 거 하나하나가 다 서러워져요. 게다가 선생은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 아, 그렇지. 희는 불현듯 깨달았다. 백사십의 목숨과 그의 충성을 맞바꿨으니 주의 궁인들이 모두 사망하기 전까지 희가 죽을 순 없었다. 희가 ‘죽으면’ 그 궁인들은 다시 바람 앞 촛불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잡은 서혜의 손을 타고 흘렀다. 희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그러네, 살아야 하구나. 눈앞의 상냥한 부부가 천수를 누릴 때까지 살아있어야 하구나. 그 자식이 대성하고, 이름을 날리고, 다시 백골이 되어 진토로 돌아갈 때까지, 그리고 그 후손이 다시 대성할 때까지 살아있어야 하구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자 자연스레 뺨에 얹혀있던 손도 떨어졌다. 관평이 우산을 건네받는지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얼핏 들렸다가, 곧 제 목덜미에 덜마른 천이 엉겨붙었다.

“아이고, 우리 선생이 아직도 덜 커서 아무것도 모르고.”

“… 저 약관 넘었습니다, 서 선생.”

“제대로 된 가정환경이 아니었던 건 맞잖아요.”

그걸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겠지…. 희는 품에 안긴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깨 너머로 관평이 나직히 웃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들렸다.

“번견 노릇을 하겠다면서요.”

“언제 들었,”

“이걸 이제 물어보네. 아무튼, 한동안 여기저기 불려다닐 것 같은데 그래도 연락은 자주 해요. 우리 걱정시키지 말고. 집은 복건성 외곽에 있으니까 몰래 와도 괜찮고.”

주희의 추방령은 주나라 영토와 송의 수도령에 한한다…. 머릿속에서 재판 결과가 떠다녔다. 다만 희는 그걸 입밖으로 내뱉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목적 없는 애정이 기꺼웠다.

“그런데 여기 온 거 말은 했어요?”

“… 강제집행이라고 하긴 했는데 황상께서 염치가 있으시면 연통을 남겨두셨겠죠.”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달려오는 거 맹자님 아닌가.”

“안 남겨둔 것 같은데요.”

“하…….”


어떤 생명들은 너무 쉽게 버려진다. 특히나 이런 난세에서는.

하루가 허다하고 시체가 쌓였다. 그날도 볏짚 깔개에 덮힌 시체가 서너 구 정도 들어온 날이었다. 익주에서 제일가는 염장이인 장 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시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 위로 수의를 입혔다. 작금의 국가는 대부분의 무연고자 시신마저도 괴상한 곳에 사용하려 했으므로 그 전에 화장시키는 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무연고자입니까?”

“수의 입힌 시신은 못 쓴다고 법에 적혀있지 않소.”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낯선 이가 그렇습니까, 하고 짤막하게 긍정했다. 멱리를 써 얼굴을 가린 사내는 근래 익주에서 자주 보이는 외지인이었다. 금사로 짠 황실의 문장이 옷에 박혀있었지만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동원령을 내리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사내는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장터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예전엔 여기가 사천이라고도 불렸었는데요.”

아주 오래 전 이야기 아닌가. 장 씨는 수의의 옷고름을 단단히 묶고 몸을 일으켰다.

“요즘도 다 사천이라고 부르지. 행정구역을 13주로 개편하긴 했다만.”

“불편하죠?”

“이럴 땐 사는 게 더 불편하지. 행정 문제야 어차피 사천으로 쓰인 종이 들고 가도 다 받아주는데.”

“요즘은 하남을 사례라고 하던가.”

개편된 지도 칠십 년이 넘었는데 말하는 꼴은 꼭 그 시대를 살다 온 것처럼 보인다. 장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쳐다봤다. 바람에 멱리의 천이 흔들리며 그 사이로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 짙은 남청색 옷과 대비되는 붉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탁한 색을 냈다.

“뭐……. 됐습니다. 시체 가지러 온 것도 아니고.”

“뭐야? 황실의 옷을 입고 온 주제에. 황명 아니었남?”

“황명이어도 내어줄 사람은 아니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 그리고… 옷에 금사를 쓰는 곳은 황가 말고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착각하신 것 같군요.”

그가 사늘하게 웃었다.

“‘유’의 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떻더냐.”

한 시진마다 날아드는 전서구로는 만족하지 못해 선산을 뛰쳐나온 대리인은 인사도 없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희는 눈을 깜박이며 할 말을 고른 끝에 입을 열었다. 기실 말을 고를 정도로 귀한 정보는 아니었다.

“매일 시체가 두 구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대부분 무연고자고- 버려진 옷들을 보니 군복이 다수였어요. 국가가 전사자 처리를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을 일찍 끝낼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민간인 대피 구역은? 불가침 조약을 걸어둔 곳이 있잖아.”

“이런 시대에 그런 게 통하긴 합니까?”

“가끔은. … 신장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내 선에서 끝내고 싶었는데. 분쟁은 쉽게 조정되는 법이 없군….”

뒷말은 거의 넋두리에 가까운 소리였다. 선산에서도 불길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맹가가 그런 식으로 중얼거리는 횟수가 늘었다. 희는 그림자처럼 행동하기를 잘했고 때때로 맹자마저도 그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희는 못 들은 척 -맹자도 희가 그렇게 구는 걸 알았다- 전국의 피해 양상을 정리한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예주의 상군이 긴급 훈련을 하는지 북소리가 관사 너머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주는 괜찮은 모양입니다.”

“양주楊州 건안?”

네. 황궁 바닥을 들어내서 대형 대피소를 만들었는데 그게 효과가 꽤 좋습니다. 산서도 생각보다는 피해가 덜하고요.”

“관제묘가 있으니까?”

“신당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죠.”

거짓말이다. 관제묘가 있는 산서성 운성시는 이미 초토화되었다. 숲과 산으로 둘러쌓인 관제묘만 멀쩡했다. 사상자가 적으니 피해가 덜하다는 말을 썼을 뿐이다…. 생명은 귀한 것이었다만 어떤 생명들은 수치화되면 평가절하되곤 했다. 특히나 난세엔 더 그랬다.

동티난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신당이나 종교 시설은 건드리지 않는 경우가 잦으니 아마 하남에서는 숭산이 가장 안전할 것이고 산동에서는 선산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유와 불의 권역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합의였다. … 광기는 언제나 이성을 이긴다. 들불처럼 번져나갈 광기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점령할지는 수많은 난세를 거쳐온 대리인도 알 수 없었다.

“산서로 가 봐야겠다.”

“동행할까요?”

“아니, …… 예주도 금방 무너질거다. 다 선산으로 몰려올테니 네가 질서 유지 좀 해야겠다.”

“진심이세요?”

“안 괜찮을 건 또 뭐고?”

말은 잘 하시지. 희는 선산 아래 마을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줄을 통제하며 속으로 투덜댔다. 그가 일방적으로 맹자를 불편해 한 탓에(대국은 잘만 두면서 낯을 가리냐고 황당해했다) 붙어지낸 세월이 허송하여 둘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희는 재주껏 맹자의 의도를 이해했고 -기실 그는 질문하는 법을 몰랐다- 맹자는 구태여 저보다 한참 어린 것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했다. 배려가 서로의 거리를 멀어지게 한 셈이다.

이제 와서 다시 친목을 도모할 생각은 없긴 하다만. 그래도 이대로 평생 대화를 안 하며 살 순 없다. 산서에서 돌아오시거든 피난민의 거취 문제라도 다시 상담해볼까…. 막 대열 사이에서 빠져나온 어린아이를 다시 줄로 돌려보내며 고민하던 찰나 그 아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희는 아이를 살피기 전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보호자인 것처럼 보이는 치는 없었다.

“무슨 일이니. 보호자가 없거든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데.”

“북소리가 계속 들려서요……. 훈련 중인가요?”

“… 훈련?”

북소리? 그럴리가. 사람들의 과한 경계와 긴장을 막기 위해 전쟁을 연상시키는 소리는 자제해달라 부탁드린 참인데. … 대리인도 없는데 난세가 벌써 깨어난다고? 진짜로? 신장을 맞이하는 일에 대리인이 없어도 되나? 이런 상황은 전달받은 바가 없는데. 다만 시대를 맞이하는 일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없으면 곤란하다는 건 알겠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만 희는 애써 웃으며 아이를 관군에게 맡겼다.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하늘에 붉은 빛을 흩뿌리고, 그리고….

… 우레와 같은 북소리. 스물한 살의 희가 바라마지않던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추어 쿵, 쿵 하고 느리게 뛰었다. 한달음에 산을 뛰어오른 탓에 숨이 가파오고 있었으나 당장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만산이 시대의 주인을 맞이하느라 기이하게 움직였다. 공기가 따끔거리고 사당 옆 대숲이 잎을 떨었다. 희는 사당의 메마른 문이 열릴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렸다. 바람이 불다가, 이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끊긴다. 희의 가픈 숨소리마저 멎은 듯 사위가 고요하다. … 사당의 문이 열렸다.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킨 신장의 주변으로 새붉은 햇빛이 들이쳤다.

실로 괴이한 일이다. 희가 영생을 얻은 것이 스물 두 해, 그 전에 집권한 주의 치세가 약 스무 해, 그리고 다시 백 년이다. 그가 목숨과 이름을 걸어 구해낸 궁인들의 수만큼 기울어졌을 해의 내내 붉은 빛이 드리운 이들은 모조리 불행해지거나 이르게 죽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을만큼 인의를 잃거나, 드물게 셋 모두를 하거나 하지 않고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숲의 그림자와 노을을 모두 받은 신장은 그런 빛을 받고도 홀로 고아했다. 그렇기에 신장이고 시대였나…. 사史는 필주筆誅일 뿐이다. 그러니 신장 역시 필주였다.

“너는, 주로구나.”

오래간 침묵한 끝에 신장이 입을 열었다. 서늘하고, 거칠고, 그럼에 인애가 있는 성음이었다.

“주씨 성의 책사. 너를 기억하고 있단다.”

“… 파문된 자와 겹쳐보신다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희希일 뿐입니다. 부족한 몸으로 아성의 곁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신장은 말이 없었다. 하여 희도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일들과… 또 그 뒤에 따라올 죽음들을 생각했다. 그릇된 신앙으로 생이 꿰메어져 살아가는 영생자에게 생사는 무용했으나 그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었다. 불의에 분노하고 선의에 기뻐할 줄 알았다.

생명엔 귀천이 없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천한 식견으로 불요한 죽음을 막는 것뿐이다.

“외로우니?”

“…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하지 않으셨습니까.¹ 일시적인 것이겠지요.”

그리고 필히, 유학자다.

희가 부정하고 맹자께서 공인하지 않아 그건 무명의 이름으로 나돌았다. 희는 언젠가 맹가와 순황에게 고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주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성리학은 무명의 학문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제가 무슨 학자가 된답니까? 학문의 배움엔 분별이 없고 ‘주자’는 오래도록 공석일테니 추후 성리학을 극한까지 익힌 이에게 주자의 이름을 주십시오. 허명으로 인해 해석이 일원화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주희’는 죽었고, 희는 그 뒤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없었으나 성리학을 고쳐 쓴 시점부터 이미 그는 유학자나 다름없었을거라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신장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소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했다. 희는 맹가가 어느 정도 왔을지 가늠했다. 대리인이 이걸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을테니 지금쯤이면 산동에 막 들어섰을 것이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신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 널 모르는 것이 안타깝구나. 네가 바라는 것을 쥐여줄 수가 없겠어.”

“… 저도 신장을 모르고, 신장께서도 저를 모르시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억울해하지도 않을거고요.² 기억하시는 모습으로 대하셔도 됩니다. 제가 그 틀에 맞출 터이니-”

“아직도 죽고 싶나?”

… 죽고 싶냐고?

“아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습니까?”³

백여 년 전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다만 희는 살아가야만 했다. 백사십여 명의 궁인들이 죽고 나서도 그가 지켜야하는 백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다시 태어났으니까.

“아성의 곁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거울 따름입니다.”⁴ 긴 바람이 분다. 태산 너머로 사라지는 붉은빛을 마주하며 희가 흐리게 웃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신장님. ‘유’의 희입니다. 이번 난세를 종식하고자, 신장을 마중하러 나왔나이다.”

¹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 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

²불환인지불기지 환불지인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³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⁴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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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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