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2018~2023)

여름에 먹으면 맛있는 복숭아 조림을 만드는 법

堀司書 탓쨩+특무사서 논CP (20.05.17)

차였다. 눈물도 안 나왔다.

여름 비가 지독하게 쏟아진다.

우산도 쓰지 않고 걸어가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슬쩍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얽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지독했다. 지독하다… 그럭저럭 나름대로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한순간에 마음을 끊어내고 이제 끝났으니 안녕,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관계에 안정을 느끼고 있던 것은 내 쪽이었고, 그러니 아마 방심하고 있던 것도 나였을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짓무르기 쉬워서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안정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너무 좋아서. 그 속에 어떤 흔들림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해가 진 여름의 거리, 예정에 없던 소나기에 과일 가게 주인이 바깥에 둔 과일들을 급하게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복숭아를 샀다. 이 날씨에 우산도 안 쓰고 혼자서 들고 가기는 힘들 거라고 만류하는 그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양팔 가득 복숭아 봉지를 안고 뒤뚱뒤뚱 걸었다. 짐이 있으니 차라리 좀 나은 기분이었다.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언젠가 그와 함께 걸었을 거리를, 혼자서 걷고 있다. 의외로 로맨스 소설만큼 감상적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배신감이라던가, 절망감이라던가, 그런 것들.

비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는다. 익숙한 현관에 몸을 부딪치듯이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폭풍 같던 바깥이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이 밀려왔다. 주말 저녁이라 나갈 사람들은 다 나갔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야. 지금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문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가방과 복숭아 봉지를 팽개쳤다. 바닥에 내려놓으며 조금 닿았는지 들고 오면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는지 봉지에서 굴러나온 몇 개는 군데군데가 선명하게 갈색으로 짓물러 있었다.

복도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걸음을 알고 있다. 손끝이 야무진 사람. 타주는 차도 커피도 늘 맛있고, 의지가 되는 사람. 사서 씨, 하고 부르는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에 어쩐지 이제서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젖어서는…. 미리 연락해 주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

"탓쨩, 나…."

배신감이나 절망감을 느끼는 것과 눈물샘이 반응하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물 범벅이었으니 조금 울더라도 그렇게까지 티가 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조금 울고 말았다. 탓쨩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와 바닥에 흩어진 복숭아 봉지를 번갈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곧 조금 넉넉한 사이즈의 숄이 어깨를 감쌌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복숭아 조림을 만들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가린 내 손에서는 살짝 짓눌린 복숭아의 향기가 났다.


따뜻한 물에 담갔던 몸이 딱 기분 좋게 따끈따끈했다. 욕실에서 나오니 탓쨩은 흐르는 물에 복숭아를 씻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볼 양으로 싱크대 쪽으로 조금 고개를 숙이자 덜 마른 머리끝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감기 걸려요. 흐르는 물에 복숭아를 씻으며 그가 말했다. 주방 한쪽에는 열탕 소독한 빈 병들이 늘어서 있다.

"됐어. 걸릴 거면 진작에 걸렸겠지."

"여름 감기는 독하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요전에 난키치 군이 감기 걸려서 큰일이었잖아요. 여름 감기는 늘 독하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심한 것 같아요. 야무지게 복숭아를 문지르는 그의 손끝을 본다. 비가 오는데도 풀벌레는 운다. 물소리와 말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조용한 밤의 바깥으로부터 들려온다. 나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복숭아, 많이 사셨네요."

"응, 싸게 팔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정말로 저렴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에 샀는지도 모르겠다. 짐을 만들고 싶어질 때에 사는 물건들이란 대개 그런 것들인 법이니까.

"가벼운 것도 아닌데, 들고 오는 것도 일이었겠어요. 역시 미리 연락해 주셨으면 좋았을걸..."

"반쯤 충동적으로 산 거라서 어쩔 수 없었는걸."

마지막 복숭아를 씻은 탓쨩이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에 묻은 물을 탈탈 털어냈다. 투명한 그릇 안,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흔들리는 복숭아의 모습이 어쩐지 이름 모를 인상파 화가가 그려낸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많은 양이긴 하네요."

"만든 다음에 자주 간식으로 내면 되지 않을까?"

"작게 깍둑썰기해서 만들고 콩포트로 할까 했는데, 어떠세요?"

"콩포트 좋지. 그대로 먹어도 될 거고, 요거트랑 섞어도 맛있고, 타르트 같은 거 구워서 올려 먹어도 맛있을 거고…."

완성되면 다음 간식은 복숭아 치즈 타르트가 좋겠어요. 탓쨩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만들자.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것을 잊을 수 있다. 절차가 정해진 작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탓쨩의 이런 부분을, 나는 늘 상냥하다고 생각했다. 새삼스럽게 그가 영리하고 사려 깊은 사람임을 느낀다. 지금부터 여름에 먹으면 맛있을 복숭아 조림을 만들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복숭아 조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복숭아의 껍질을 모두 벗겨야 한다. 어차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칼로 이등분을 낸다. 복숭아의 홈이 파여진 부분을 따라 칼집을 낸다. 칼날이 복숭아의 씨 부분까지 닿아야 한다. 손을 따라 과도가 둥글게 움직였다. 반달 모양으로 복숭아를 잘라 껍질을 하나하나 벗겼다.

말랑한 복숭아의 과육이 잘릴 때마다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한여름의 사랑을 그대로 그린 것 같은, 달고 시고 상큼한 향기.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향기를 느낀다. 복숭아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콤한 향이 나고, 모양만 봐서는 단단한지 물렁한지 알 수가 없으며,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힘을 주어 누르면 곧 상해버리고 만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모른 척했구나. 손가락을 움직여 둥근 모양새를 쓰다듬는다. 손끝에 닿는 복숭아 솜털이 이질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

"…장마가 시작되는 걸까요?"

"응?"

"왠지 비가 거센 것 같아서요."

탓쨩은 손을 멈추고 불투명한 유리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들을 보고 있다. 타닥, 타닥, 소리가 창문에 부딪히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멈춰있다가, 곧 흘러내린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대답한다.

"이게 지나가면, 진짜 여름이 찾아오는 거겠지."

탓쨩이 살짝 웃었다. 그렇네요. 곧 진짜 여름이 올 거에요. 이번 여름도 분명 덥겠죠? 그럴 거야, 아마. 빗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진짜 여름을 맛보지 못한 이른 복숭아들이 손안에서 둥근 반달 모양으로 잘려나간다.

껍질을 벗긴 복숭아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타르트에 올릴 거라, 과육의 크기는 너무 크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씹히는 미묘한 선을 추구하기로 한다. 설탕과 물의 비율을 모르겠어서 도중에 서가에서 요리책을 가져와 확인해야 했다. 2:1이었다.

"콩포트 용으로는 말랑한 복숭아보다는 단단한 복숭아가 더 좋다나 봐."

"끓이면서 물러지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나는 요리책을 팔랑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계량컵에 설탕을 넣던 탓쨩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번에 잘 안 된다면, 다음에 또 만들면 되잖아요."

이번이 안 되면, 다음이 있다. 맞는 말인데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조금 망설였다. 대답을 바라지 않은 문장이었는지 탓쨩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량컵에 설탕을 마저 부었다.

"설탕이랑 물, 2대 1 비율이었죠?"

"응. 넣은 설탕의 절반만 넣으면 될 것 같아."

"그럼 물은 이만큼만…."

설탕 넣은 것의 딱 절반만큼만 물을 넣으려니 왠지 좀 적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을 더 넣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맛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니 섣불리 더 넣을 수도 없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도 한순간 조금 후회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1.5 대 1이 나았을까요?"

"글쎄…. 하지만 이젠 무를 수 없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운명…."

"운명."

우리는 비율 앞에서 왠지 비장해졌다. 비장한 마음으로 계량한 물을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다. 설탕물이 끓어오를 때까지 잘 저어준다. 곧 달콤하게 끓어오른 시럽의 향이 온 부엌에 퍼졌다.

"복숭아, 넣을게요?"

"아, 응."

"말랑해질 때까지 끓이면 되나요?"

"응. 책에는 20분에서 40분 정도라고 되어 있네. 잘 조절해야겠다."

물러지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그것도 맛있을 거야. 그렇겠죠? 응, 그럴 거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복숭아를 냄비에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럽이 졸아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의자를 가져와 탓쨩과 나란히 불 앞에 앉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옆자리의 탓쨩이 아까 가져온 요리책을 훑어보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나는 다리를 모아 의자 위로 올리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굴거나, 방 안에 처박혀 몇 날 며칠을 울고 나서 일상생활로 돌아오거나, 누군가에게 그의 험담을 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떤 기분인가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텅 빈 방 안에서 한참 혼자 있다 오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슬픔이며 외로움 같은 감정을 파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복숭아를 사 와서 다행이었다. 탓쨩과 함께 손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고 손끝을 코에 가져다 대자 아까 썰었던 과육의 남은 향기가 느껴졌다. 진짜 여름을 맛보지 못한 과육만이 가질 수 있는, 조금 덜 달고 시큼하고 상쾌한 향기였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 싶었더니 탓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숭아 조림이 완성되면, 제일 먼저 맛을 보는 거에요."

"응."

"물러져도 맛있을 거에요. 딱딱하면 조금 더 끓이면 돼요."

"응."

"잘 안 되면, 또 다음이 있어요."

"…응."

그게 탓쨩이 말한 전부였다. 그가 걸쳐줬던 숄이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렸다. 비밀을 들추지 않는 상냥함. 나는 흘러내린 숄을 손으로 잡아 다시 제대로 걸치고 고개를 들어 탓쨩과 마주 봤다.

"지금 끓이고 있는 복숭아 조림 말인데."

"네."

"분명 이번 여름에 먹는 복숭아 조림 중에 제일 맛있을 거야."

"그럴까요?"

"그럴 거야. 왜냐면…. 여름 복숭아를 썼잖아."

내 말을 들은 그가 배시시 웃었다. 왠지 뜬금없는 타이밍에 뜬금없는 말을 꺼낸 것 같아 조금 머쓱해졌다. 차 마실 물을 끓이겠다며 탓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냄비를 지켜보기로 한다. 냄비 안에서 복숭아 조림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났다. 물 끓는 소리와, 빗소리와, 복숭아 조림 소리. 아무리 무른 복숭아라도 조림으로 만들면 맛있어진다. 원래 어떤 맛이었던 간에, 충분히 졸인 복숭아는 말랑말랑해진 속에 시럽이 잘 배어들어 여름을 덜 맛본 풋풋함 대신 따뜻한 달콤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름에 먹으면 맛있는 복숭아 조림을 만드는 비법은 여름 복숭아를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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