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해결 대행사무소

4. 신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 막간

 

믿거나 말거나

 

자주 보던 잡지에, 이런 정정보도문이 적혀 있었다.

 

[정정보도문] 20XX년 X월 XX일자

본지는 해당 일자에 발간된 제 49호에 <스피리츄얼! 파워 아이템>이라는 특집 기사를 낸 바가 있습니다. 당 기사에 기록된 파워 스폿 및 파워 스톤, 파워 아이템의 제작법에 대해 독자분들의 많은 문의가 들어와 확인해본 결과, 해당 기사에 적혀 있던 것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당 기사를 작성하고 검수한 직원들은 모두 현재 저희 회사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사 편집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자세한 사건 경위를 파악 중입니다. 독자분들께 고개 숙여 사죄를 표하며, 혹시라도 해당 기사에 실린 것을 그대로 따라 하시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B급 잡지에서 꽤나 본격적인 정정보도문을 낼 정도라니. 게다가 오컬트 잡지에서 오컬트를 부정하는 정정보도가 나왔다. 그래서 그게 도대체 무슨 기사였지, 하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문득 팟 떠올랐는데, 이건 과연 정정보도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야, 파워 스폿으로 희대의 엽기살인범이 시체를 해체했던 곳이라는 소문이 도는 장소를 추천하거나, 파워 스톤을 만드는 법이랍시고 깨끗한 문스톤을 직접 죽인 사람의 피에 3일간 담가 두라는 것은 말도 안 되잖아. 그나저나 기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좀 섬뜩한걸.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기사를 넣었던 걸까?

 

믿거나 말거나


4. 신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첫눈의 기억은 대개 흐릿하기 마련이다. 언제 내렸는지도 모르게 슥 내렸다가 슥 녹아버리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떤가. 슈세이는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목에 잘 감고 싸리 빗자루를 쥐었다. 첫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사무소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목길에 있었다. 겨울에 접어들고 나서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눈이 쌓여서 얼어버리면 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더 쌓이기 전에 쓸어둬야 했다. 슈세이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스윽,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쌓인 눈이 가볍게 쓸려나갔다. 하늘이 온통 흐린 청회색인 것을 보니, 한참은 더 퍼부을 모양이었다. 어차피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으니, 일단은 들어가 볼까. 대강 정리되기도 했고. 이따 나올 때는 장갑도 끼고 나와야지……. 슈세이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조금 녹이며, 나무 계단을 걸어 올랐다. 겨울이라 그런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예전보다도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는지 또각, 또각, 하는 낮은 굽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이 추운 날에 구두라니, 발 시렵겠군.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슈세이는 계단을 올랐다.

“…슈세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응? 이 목소리가 절대 여기서 들릴 리가 없는데. 들리면 안 되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잘못 들었을 거다. 그러니까 확인해봐야 한다. 슈세이는 불길한 예감을 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연을 뽑으라면 슈세이는 주저않고 이 사람을 고를 것이었다. 이즈미 쿄카,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고요 선생님의 밑에서 함께 배운 동문의 제자, 결벽증, 잔소리쟁이……. 슈세이는 그를 지칭할 수 있는 타이틀이란 타이틀을 모두 떠올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되다니, 정말 최악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슈세이는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여기 왜 여기 있는 건데?”

일상의 평화가 바사삭 깨져버린 것 같다. 미닫이식 유리창을 드르륵 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도손이 창틀에 턱을 괴고 흥미로운 눈으로 슈세이와 쿄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쿄카도 시선을 눈치챘는지, 잠시 창문 쪽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건 올라가서 설명해도 될까요.”

“…….”

슈세이는 말없이 먼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쿄카가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삐걱이는 소리가 점점 크게만 들렸다. 손에 잡히는 난간이 차가웠다.

 

* * *

 

“자, 여기 따뜻한 물. 우유로 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확실한 쪽이 더 좋지?”

“아, 감사합니다.”

도손이 내민 머그컵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쿄카는 머그컵을 받아 양손으로 쥐었다. 기분 좋은 온기가 차갑게 언 손에 퍼졌다. 쿄카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코코아를 훌쩍이던 도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내준 자료는 모두 읽어 봤어. 이제 사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자료에 적어두지 않았나요.”

“그래도 직접 입으로 듣는 것과는 달라. 나는 날것을 맛보고 싶은 거야.”

“슈세이는…….”

“생각할 게 있는 것 같아서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네가 원한다면 이쪽으로 불러서 같이 이야기를 듣게 해도 딱히 상관없고.”

“아뇨,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 그도 그 나름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럼 이제 이야기를 부탁할게. 가능하면 최대한, 느꼈던 감정까지 포함해서 그대로 말해줘.”

쿄카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쥐고 있던 머그컵을 테이블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말할 거리를 정리하려는 참인지, 이야기를 곧바로 생각하지는 않고 머그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너머, 창문 밖 흐린 하늘이 눈을 쏟아내고 있었다. 도손은 눈발이 날리는 창밖 풍경을 가만히 보며 쿄카가 보내준 자료들에 대해 생각했다. 뒤죽박죽인 키워드 사이에서 어떠한 실마리를 대강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야기를 먹어치우고 싶었다. 슈세이가 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조금 가셨다고 생각했는데, 저번의 뱀 사건 이후로는 조금 조급하게 행동해버릴 정도로 갈증이 심해졌다. 슈세이에게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쿄카의 의뢰를 덜컥 받아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양질의 이야기가 더 급한 일이었다. 신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그만큼 누적된 이야기가 필요하다. 뱀신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비어버린 이야기를 채울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무엇보다도, 무엇이든 좋으니 이야기를 탐하는 것이 먼저였다. 할 말을 대강 정리했는지, 맞은편에 앉은 쿄카가 가방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조잡한 표지디자인의 B급 오컬트 잡지. 도손도 잘 알고 있는 잡지였다.

“월간 오컬트 랜드.”

“알고 있는 잡지인가요?”

“보내준 자료를 읽어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구독하고 있거든.”

“그럼 이야기가 빨라지겠군요. 49호의 그 기사 정정보도문 사건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나요?”

“정정보도문이라면 읽었어. 인터넷에서도 논란이었잖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그런 기사를 작성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었다는 점이려나.”

“네. 49호의 정정보도문 이후로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런 기사를 의도적으로 적는 것 같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런 것은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창간호부터 49호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쿄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손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꽂이 쪽으로 가더니, 품에 한 아름 조금 손때가 묻은 잡지를 들고 왔다. <월간 오컬트 랜드>의 창간호였다. 표지에는 커다랗게 그 호의 특집 기사 제목이 적혀 있었다. 「충격 실화! 귀신 들린 집 후기」.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아래에 적힌 작은 기사였다. 도손은 가독성이 좋지 않은 폰트로 적힌 제목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발음했다.

“「신을 불러내는 방법」.”

“이 잡지는 창간호부터 이상했어요.”

“맞아. 세상에 어떤 오컬트 잡지가 강신 의식의 순서를 적어두겠어. 오컬트 단골 소재인 귀신도 아니고, 본격적인 신을 말이야.”

그 점에 끌려 구독을 시작한 거지만. 사실 시마자키 도손의 출발과도 다름없는 잡지가 바로 <월간 오컬트 랜드>였다. 도손은 뒷말을 삼키고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쿄카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이 잡지를 3호부터 구독하기 시작했어요. 같은 학과 대선배가 제작에 참여했다며, 다른 선배가 그 아래 후배들한테 한 권씩 사라고 강요하다시피 말해서 어쩔 수 없이 구독 신청까지 해 버렸죠.”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럼 이 잡지가 처음 발행될 때는 대학 동아리 잡지였던 건가?”

“아마 그랬을 거에요. 정확히는 민속학 연구 동아리에요. 꽤 역사가 깊은 동아리고, 대대로 이상한 사람도 많이 내보냈죠. 동아리의 성격도 사실 민속학이라기보다는, 지역 오컬트 탐방에 가깝기도 하고요.”

“음, 그건 흥미로운걸. 그 대선배라는 사람, 알고 있어?”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그런 사람이 존재했다, 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죠. 소문은 많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베일에 싸인 인물이 만드는 잡지, 수상하지 않나요?”

“응, 충분히 수상해… 여기, 기사 찾았어.”

도손이 내민 페이지에는 조잡한 구성과 가독성이 애매한 폰트로 대문짝만하게 「신을 불러내는 방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쿄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머그컵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목을 축일 모양이었다.

* * *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감이 잘 잡히지 않기는 해요. 길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간결하게 말하도록 해 볼게요.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일은 이거에요. 실종된 사람 한 명을 좀 찾아주세요. 경찰에 부탁하지 않은 이유는 대충 알 거라고 믿어요. 경찰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실종이에요.

실종자의 이름은 나카지마 아츠시. 그에 대해 미리 설명을 해 두자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에요. 저와는 동급생이었고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나카지마 아츠시라는 사람은 세상에 둘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둘은 쌍둥이고, 이름도 같아요. 아,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요. 출생신고를 할 때 전산 오류로 두 이름이 모두 똑같이 올라가서 나중에 한자만 슬쩍 바꿨다나 봐요. 아무튼, 찾아줬으면 하는 쪽은 두 명의 나카지마 씨 중에서 형인 쪽이에요. 편의상 그, 혹은 형 쪽이라고 칭하도록 하죠.

저와 나카지마 씨와 그는 같은 대학의 같은 동아리 소속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민속학 동아리요. 우리 셋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월간 오컬트 랜드>를 구독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 정도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잡지에서 찾아낸 이상한 부분에 대해 모두 기괴하다는 점에 동의했기 때문에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어요. 원래 나카지마 형제는 정말 순수하게 민속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동아리에 들어온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동아리의 성격은 오컬트 쪽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하고, 함께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는지 종종 함께 동아리에서 주도하는 지역 오컬트 탐방에 참가하기도 했었죠. 그렇게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제가 동아리 총무, 나카지마 형제가 나란히 부회장과 서기로 임명된 것이 최근의 일이에요. 동아리에서는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오컬트 체험 활동 비스무리한 것을 계획하는데, 슬슬 소재가 떨어져 갈 때였죠. 뭘 하면 좋을까, 회장을 포함해 넷이서 잡담을 하다가 발견한 것이 <월간 오컬트 랜드>의 창간호였습니다. 지금 펴놓고 있는, 바로 이 페이지요.

「신을 불러내는 방법」. 정말 흥미로운 소재죠. 콧쿠리상이라던지, 귀신을 불러내는 방법이나 강령에 관한 오컬트는 차고 넘치도록 있지만 본격적인 신을 불러내는 방법에 대해 다룬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요. 관심을 보인 것은 회장이었어요, 나카지마 씨는 걱정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것 같은데,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면서요. 형 쪽의 나카지마 씨도 어쩐지 찜찜하다며 이 소재는 관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장은 ‘그래봤자 B급 잡지인데,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정 무서우면 시험해보면 된다’라고 말했어요. 원래도 기가 센 사람이기도 했고, 별로 두렵지 않았던 것이겠죠. 저요? 저는… 문자에는 힘이 깃든다고 믿는 편이라서, 적혀 있는 것이면 언제든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아무튼 다른 주제를 찾지 못한 채로, 회장의 강한 의견에 밀려 의식을 시험해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고, 일정은 일주일 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에요.

의식은, 사람이 많을수록 효과가 있다고 했어요. 권장 인원은 4명이었고요. 필요한 것은 관악기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 아니면 훌륭한 관악기 연주. 한 번도 태우지 않은 양초 여러 개. 음, 의식의 내용은 생략할게요. 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일정을 잡은 뒤로, 회장은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약속 당일이 다가오는데 전화고 메일이고 한 통도 받질 않으니 걱정이 되어 셋이서 회장의 자취방에 찾아갔죠. 문은 열려 있었어요. 그리고 문이 열리고 본 것은, 엉망이 된 방. 심지 끝까지 타들어 불이 완전히 꺼진,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 양초들과 이곳저곳에 흩어진 막대한 양의 종이. 종이에는 무엇인지 모를 언어가 연필로 무언가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어요. 구석의 작은 CD 플레이어에서는 플롯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요. ‘G선상의 아리아’였습니다. 반복 재생을 설정해 두었는지 계속해서 그 안온하고 어딘가 성스럽고 평화로운 곡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의 중앙에는, 이 며칠 사이에 그렇게 살이 빠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하게 바짝 말라 쓰러진 회장이 있었습니다. 회장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아직 의식은 없다고 해요. 그날 방에서 본 광경은 충분히 충격적인 광경이었어요. 아무래도 정황상 먼저 의식을 시도해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차피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본인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저희가 알 수는 없겠지요. 회장을 입원시키고 돌아가는 길에, 저희 셋은 방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엉망인 풍경, 종이에 적힌 문자의 이야기, 녹아버린 양초… 단 한 가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G선상의 아리아’였어요. 저와 나카지마 씨는 분명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들었다고 했지만, 그는 혼자서 다른 곡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곡은, 토랸세였다고요.

아시겠지만 두 곡은 비슷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어요. 게다가 그 곡은 분명히 G선상의 아리아였습니다. 다른 클래식 음악과 헷갈린 것도 아니고, 토랸세와 헷갈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그때는 그냥 그가 잘못 들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사건 뒤로 오컬트 활동은 뜸해졌고, 우리 셋은 그냥 가끔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의 만남만 유지했습니다. 물론 체험활동 준비를 하긴 해야겠지만 회장이 의식불명인데 더 진행할 생각도 들지 않았고, 동아리 부실에 가도 어쩐지 사람이 뜸해져서 다들 조금씩 시들해진 것이었죠. 그가 이명과 환청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성이겠거니, 하면서 가볍게 넘겼던 그였지만, 그것이 계속되고 점점 구체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더 이상 가볍게 넘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요. 환청의 내용은 대개 토랸세의 가사였습니다. 삶은 좋아요 좋아요 돌아가는 것은 두렵죠 두려워 하면서도 지나가세요, 지나가세요……. 영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 그는 근처 신사에 가서 상담해보기로 했고 신사로 향하던 도중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네, 맞아요. 건널목의 신호등 앞에서요. 사람이 드문 시간대도 아니었는데 그 시간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목격자도 없고, CCTV도 확인할 수 없다고 해요. 당연히 일단 경찰에 신고를 넣어뒀지만 진척이 있을 리가 없고.

그 와중에 회장의 집을 정리하다가 종이에 적힌 문자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그 문자들은 전부 같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서툰 히라가나로, 나카지마 아츠시, 라고. 알아챈 순간 소름이 확 돋으면서, 왜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는가 하는 마음과 함께, 무언가 의식이 잘못되어 무엇인지 모를 것이 불려 나왔고 그것이 그를 원했고 그래서 데려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사람이 불러낸 무언가가 사람을 데려가버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카지마 씨가 자꾸 어쩐지 자기는 그가 살아 있을 것 같다고, 비상식적인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쌍둥이의 감 같은 거라고 하니까……. 아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믿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 여기서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 하고 있을 일도 없었겠죠.

아무튼, 이런 사건입니다.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꼭 부탁드려요. 실종 이틀째에요. 더 늦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부디.

 

* * *

 

이야기가 끝난 모양인지, 한동안 들리던 말소리가 끊기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목조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슈세이는 방문을 열었다. 도손은 언제나처럼 소파에 앉아 무언가 자료를 뒤적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슈세이는 입을 열었다.

“시마자키.”

“응.”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미안.”

도손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상대가 순순히 사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슈세이는 살짝 당황해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곧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쿄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

“응.”

“그럼 나한테 쿄카에게서 의뢰가 들어왔다고 말 한마디 정도는 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도대체 왜 한마디도 안 했어? 내가 의뢰를 거절하자고 할까봐?”

“그런게 아니야, 슈세이.”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건데?”

슈세이는 테이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도손과 눈을 마주쳤다. 마주친 눈동자는 여전히 속을 알 듯 모를 듯한 색으로 빛나고 있어서, 슈세이는 오히려 어딘가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슈세이는 이 상황이 정말 별로였다. 개인의 문제를 이유로 친구에게 따지고 드는 것도 별로였고, 시마자키를 몰아세우는 상황도 별로였고, 결국 여기까지 오고 나서도 쿄카에게 품고 있던 묘한 열등감을 버리지 못한 자기 자신도 별로였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마음이 그 고등학교 시절에 갇혀 있다면 무슨 소용인지. 그런 생각들이 폭풍처럼 흘러들어 슈세이의 신경을 긁어놓았다. 대답해, 시마자키. 그렇게 다그치자 도손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미안…….”

그리고 그것이 도손이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작게 덧붙여서, 내가 말해도 슈세이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라며, 말꼬리를 흐리고. 그 대답을 들을 즈음에 슈세이는 이미 한계였다. 빙글빙글 돌 뿐인 대화 아닌 대화를 이어가다가는 크게 화를 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슈세이는 그냥 대화를 잘라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내가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조금 진정되면 이야기하자.”

“슈세이.”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해.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나는….”

슈세이는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도손은 읽던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의뢰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뿌리’가 되는 것만 찾아내면, 지금껏 찾아왔던 것을 한 번에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 생각하면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손가락 틈새로 얕은 한숨이 빠져나왔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미움받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도손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닫혀 있는 슈세이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쩐지 질척하게 녹아내려 잔뜩 피곤한 기분이었다.

 

* * *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세이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소리가 난 문쪽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로 슈세이, 하고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들어와.”

“문 열어줘.”

“…?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

“열어줘.”

묘하게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슈세이는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괴담을 생각했다. 한밤중에 문을 열어달라고 보채는 친한 친구, 남편, 부인.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열어줄 때까지 문을 두드리며 열어줘, 열어줘, 라는 말만 반복한다. 아침이 되면 그 소리가 그치지만 나중에 밖에 나가 보면 <똑똑한 녀석.>이라고 적힌 쪽지 한 장과 함께 죽은 이의 시체를 두고 간다는, 유명한 도시괴담…. 아니, 지금은 대낮이고 문밖에 있는 이는 오늘 이 사무소에서 나간 적 없는 동거인이다. 시마자키와 함께 지냈더니 나도 어떻게 됐나… 슈세이는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떠다니는 괴담을 지워내고 버릇처럼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문밖의 목소리가 슈세이? 하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대로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양손으로 쟁반을 들고, 도손이 슈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지? 들어갈게. 가볍게 말하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온 도손이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과연, 저걸 들고 있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했던 건가. 슈세이는 순간이나마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던 자기 자신에게 조금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쟁반 위에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우유가 담긴 머그 두 잔과, 끝이 조금 탄 프렌치토스트가 올라간 접시가 있었다. 그것이 도손 나름의 사과라는 것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 삐뚤삐뚤하게 자른 식빵 모양이 어쩐지 귀여웠다. 도손은 아무 말 없이 슈세이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이 마주쳤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슈세이 쪽이었다.

“아까, 몰아세워서 미안.”

“괜찮아.”

“이건 그냥 나 자신의 문제인데, 너에게 강요해서-”

“슈세이, 사과해야 할 건 나야.”

도손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여기서 더 사과하다가는 꼬리에 꼬리를 문 사과가 이어질 것임을 직감한 슈세이는, 사과하는 대신 아까부터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이야기를 들려줘. 대화의 다음은 없었다. 시마자키가 화사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안 어울리는 미소를 짓고. 슈세이가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자 도손이 쿡쿡 웃었다. 다 식겠다, 저거. 얼른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프렌치토스트는 조금 식었지만 맛있었다. 아직은 뒤집는 타이밍을 잘 모르겠어. 도손이 그렇게 말했고, 나중에 같이 만들어 보자. 가르쳐줄게. 슈세이가 그렇게 대답했다.

 

도쿠다 슈세이는 시마자키 도손의 화사한 웃음을 모른다.

* * *

 

불어오는 바람에 슈세이는 몸을 떨었다. 해가 진 후 기온이 더 떨어져서 그런지, 아무래도 코트 한 겹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털 목도리를 두른 아츠시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슈세이를 바라봤다. 아직 칼바람이 불어온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한겨울의 낯선 공원은 제법 추웠다. 도손은 펜 뚜껑을 입에 물고 붉은 펜으로 지도 위 여기저기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푸른 색 펜으로 여러 번 덧칠해서 그려진 두 군데의 동그라미 주변 곳곳에 붉은색 동그라미 몇 개가 그려졌다. 사건이 발생한 현장과, 회장의 자취방 주변에 있는 사당과 신사를 모두 체크하는 것이었다. 두 장소 모두 사무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 근처라서 다행이었다.

인간에 의해 불려 온 무언가가 인간을 원하는 것 같다는 쿄카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그것이 있을 만한 장소를 탐색해서 무사히 대상을 구해오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설령 이것이 괴이 현상이 아닌 실제의 납치라고 해도, 나눠서 찾아보면 뭐라도 걸리겠지 하는 것이 도손의 생각이었다.

“다 됐어.”

도손이 지도를 내밀었다. 두 사람씩 나눠서 이 근방을 탐색할 거야. 공원의 놀이터를 중심으로 해서, 절반씩 나누는 거야. 한 팀은 동쪽을, 다른 팀은 서쪽을. 아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씩 나눠야 한다는 말에 슈세이는 도손을 힐끗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쿄카와 도손 중 어느 쪽과 팀이 되어도 곤란한 일이었다. 전자는 대화하다 보면 말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자신이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았고, 후자는 물론 암묵적인 화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전에 싸웠던 일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팀을 나눠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시마자키를…

“그럼 슈세이랑 나카지마 씨가 한 팀을 맡아줘.”

“엥.”

그리고 도손의 말에 슈세이는 조금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슈세이를 쳐다본 도손이 살짝 웃으며, 왜? 나랑 같은 팀 하고 싶어? 라고 말하자 열이 살짝 올랐다. 그런거 아니거든?! 괜히 큰 소리를 냈는지, 바로 옆에 있던 쿄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슈세이, 근처 주민분들게 민폐에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울렁울렁 열 받게 하는 놈들뿐이다. 차라리 나카지마 씨가 낫겠어…. 슈세이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아츠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유쾌한 친구들을 두셨네요. 유쾌한 게 아니라 유해한 거라고 수정해 주고 싶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정도는 됐다.

“확실히 그렇게 나누는 편이 훨씬 좋겠네요. 지리를 아는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저랑 나카지마 씨가 각각 다른 팀이 되는 게 좋겠어요.”

“응, 그런 것도 있고 하니까.”

쿄카가 도손의 말을 긍정했다. 도손은 다시 한번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계획을 설명했다. 슈세이랑 나카지마 씨는 동쪽을 맡아 줘. 한 군데씩 조사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면 바로 연락하고, 우리도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면 그쪽으로 연락할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도손은 등을 돌려 쿄카와 나란히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 너머 그림자가 점점 멀어졌다. 저희도 출발할까요. 침착한 듯 말하는 아츠시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형제를 잃어버렸으니 누구보다도 불안하겠지…. 슈세이는 그러죠, 라고 짧게 대답하고 반대쪽으로 걸었다.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의 증거를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 * *

 

서쪽의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신사와 사당을 포함하여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마지막 장소인 작은 사당을 유심히 둘러본 쿄카가 여기에도 아무 흔적도 없어요. 라며 조사가 끝났음을 알렸다. 전부 허탕이군. 도손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나카지마 씨랑 슈세이가 뭔가를 발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응, 어쩔 수 없네…. 돌아갈까.”

“그래요.”

구두 또각거리는 소리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발 시렵지 않아? 아직은 참을만해요. 영양가 없는 대화. 도손은 그렇게 생각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불빛에 가려져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덜 찬 달이 환하게 밤길을 밝히고 있었다.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어 목을 한번 가다듬자, 앞서 걸어가던 쿄카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쳐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자 쿄카는 다시 발을 돌려 앞을 향해 걸어갔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밤 공기가 차가웠다. 곧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도손은 양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쿄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직 찾지 못한 ‘뿌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도손이 찾는 ‘뿌리’는, 말 그대로 뿌리였다. 그것은 <월간 오컬트 랜드>의 뿌리이기도 하며, 모든 괴담의 뿌리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마자키 도손이라는 존재의 뿌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괴이가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져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러한 만들어진 괴이들이 모이는 지점 역시 존재하리라는 것이 도손의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시작 같은 존재인데, 도손은 그 뿌리, 그러니까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고 싶었다. 그것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번 궁금하다고 생각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던 간에 끝을 보고 싶었다. 어느 날 문득 시작된 의문 하나가 시마자키 도손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느려졌는지, 쿄카와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쿄카는 멈춰 서서 도손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걷다 보니 어느새 사고가 발생했던 현장의 횡단보도 근처까지 와 있었다. 육교로 걸어요. 쿄카의 말에, 도손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는 필시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보고 지인의 실종을 다시 한 번 떠올렸으리라. 계단의 양 끝에는 아직 다 녹지 않은 눈이 조금 쌓여 있었다. 나선형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육교 아래로 신호에 걸린 자동차 몇 대가 줄줄이 멈춰 섰다. 육교를 건너던 쿄카가 멈춰 서서 말했다.

“사실 좀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당신들 둘은, 전혀 반대 성향이니까요.”

“무슨 의미야?”

도손이 고개를 돌려 쿄카를 바라봤다. 시선이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쿄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슈세이는 손에 잡히는 것을 좋아해요. 물건은 되도록이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일상은 편안하게 반복되는 편이 좋죠.”

“잘 알고 있네.”

“그리고 당신은, 손에 잡히는 것을 잡히지 않게 만드는 걸 좋아하고요.”

내가? 도손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반문하자 쿄카도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답했다.

“일상을 깨뜨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나요?”

“조금 다른데.”

“어쨌든 평범한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잖아요.”

“그건 맞아.”

다리 밑의 차들은 다시 신호에 걸려 정지선에 멈춰 선다. 도손은 난간에 팔을 얹어 턱을 괴고 그 일련의 반복을 내려다봤다. 차가운 바람이 바사삭 귓가를 스쳤다.

“그래서 의외라고 말한 거예요. 고등학교 때도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에 봐도 꽤나 새롭네요.”

“슈세이랑 내가 같이 지내는 게 싫어?”

“그를 너무 괴롭히지는 마세요. 일단은 기수로 따지면 제 동생이니까.”

“괴롭힐 생각은 없는데.”

“뭐어, 그런가요.”

오히려 슈세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쿄카 쪽이라는 것을, 도손은 딱히 말하지 않았다. 상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뭐, 애당초 슈세이의 마음이 어떨지 도손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 모르지, 그가 시마자키 도손을 적당히 불편하지만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아니면 그냥, 무언가의 의무감을 느껴 지켜봐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때맞춰 코트 주머니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둘은 동시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놀이터 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아츠시에게서 그쪽 근처로 와 달라는 메일이 와 있었다. 시마자키 씨, 일단 놀이터 쪽으로 갈까요. 응. 도손은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쿄카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코트 자락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오히려 소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방금 뭔가 말했나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두 사람은 육교를 건넜다. 저쪽 어딘가의 신호등에서 익숙한 곡조가 흘렀다. 토랸세 토랸세 하는 곡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슈세이와 아츠시가 발견한 것은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아 낡은 사당 안 지장보살의 머리에 난 부자연스러운 흠집이었는데, 확실히 이상한 것이기는 했지만 도손은 흠집의 크기와 패인 정도를 보고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그날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해산하고 사무소에 들어온 이후로 며칠간 조사에 매진했지만,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도손은 피곤한 눈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벌써 날짜도 꽤 지나버린 데다가, 지금까지 수많은 자료를 닥치는 대로 뒤졌지만 단서 한 톨도 찾을 수 없었다. 다 식은 홍차를 홀짝이자 쓴맛이 입에 감겼다. 차는 식으면 쓴맛이 나는구나. 찻잔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가 설탕을 크게 세 스푼 정도 떠서 휘적휘적 녹인 후 그대로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덜 녹은 설탕 알갱이들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씹혔다.

“…달아.”

“설탕을 그렇게 넣으니까 그렇지.”

뒤에서 보고 있던 슈세이가 가볍게 태클을 걸어왔다. 도손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입 안에 남은 단맛을 음미했다. 어차피 상대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언가 놓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꼴이 영 별로였다. 의자에 앉아 필요한 자료를 골라내고 있던 슈세이도 피곤한 듯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손은 찻잔을 개수대 안쪽에 넣어놓고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아무렇게나 흩어 놓은 책들이 가득했다. <월간 오컬트 랜드>도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슈세이는 손을 뻗어 자료를 차곡차곡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이라도 깔끔하면 생각이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확인 안 한게 몇 호였지?”

“거의 다 봤을걸….”

도손의 물음에 슈세이가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쯤 되면 정말 오컬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슈세이는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그냥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영 진전이 없으니 답답해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애초에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은 사건이라고.”

“맞아. 일단 인원수가 많을수록 효과가 좋은 의식인데 혼자 시행한 것부터가.”

“그것도 이상하고, 나는 G선상의 아리아가 마음에 걸려.”

“그렇지, 왜 그 곡이어야만 하는 걸까?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실종된 쪽의 나카지마 씨에게는 토랸세로 들렸다고 한 부분도. 게다가 토랸세를 듣고 횡단보도 앞에서 실종된 것도 이상하지 않아?”

슈세이가 노트에 적어둔 의문점에 마구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도손은 의미 없는 동그라미가 종이 위에 마구 그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왜? 라고 한 박자 늦게 질문이 터져나왔다. 슈세이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도손을 바라보았다.

“왜냐니, 그야 당연히 토랸세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교통신호음이잖아?”

“아.”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도손이 창고 방 쪽으로 달려갔다. 슈세이는 얼떨결에 같이 의자에서 일어나 창고 방 쪽으로 달려갔다. 도손은 불도 켜지 않고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슈세이가 불을 켜자 여름에 쓰고 집어넣은 선풍기며,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손은 찾았다, 라고 한마디를 내뱉고는 무언가 천에 싸인 긴 막대 같은 실루엣의 물건과 종이 박스를 꺼냈다. 슈세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활이었다. 하지만 궁도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닌데 활은 왜? 물어볼 틈도 없이 도손이 바쁘게 손을 움직여 연 상자에서 먼지가 날렸다. 도손은 상자에서 흰 종이와 금색 밧줄을 꺼냈다. 종이는 쪽지 모양으로 접었고, 금줄에 쪽지를 동여매서 화살에 묶었다.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지나가고 난 뒤에야 슈세이는 겨우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무언가가 불려 나왔을 것이라는 말에만 너무 집중했어. 진짜는 횡단보도에 있었을 거야.”

“횡단보도에?”

“토랸세!”

활과 화살을 챙겨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며 도손이 소리쳤다.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뛰쳐나가다시피 현관문을 열었다. 어디 가?! 슈세이가 소리치자 도손이 덩달아 소리치며 대답했다. 그 횡단보도에! 그 목소리에 어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감정이 묻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슈세이는 옷걸이에서 제 코트를 내려 걸치고 목도리를 하고 시마자키의 목도리도 들고 도손의 뒤를 따라 사무소를 뛰쳐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차가운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춥기는 했지만, 어딘가 청명한 공기였다. 슈세이는 밟을때 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목조 계단을 있는 힘껏 달리듯 뛰어내려와 벌써 저만큼 거리가 벌어진 도손의 뒤를 따라 달렸다. 어두운 밤길에 구름 낀 보름달이 떠 있었다.

 

* * *

 

오전 3시의 10분 전. 실종 장소인 그 횡단보도 앞에 도착하자 지금까지 거세게 불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도손은 추리가 맞았음을 직감했다. 여분의 화살을 챙겨왔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한 발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끝내야만 한다…….

어느 새 도착한 슈세이가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뢰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 저기서 나올 거야. 도손은 그렇게 주어 없는 문장을 말하는 대신 화살에 묶인 금줄을 더욱 단단히 동여맸다. ‘뿌리’를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전 3시의 5분 전. 주변의 가로등이 천천히,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빛이 모두 사라지고 달빛만 청아하게 남은 거리, 횡단보도 너머로 무언가가 일렁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애송이가 겁도 없이 찾아왔구나.

그것은 흰 털을 가진 거대한 짐승이었다. 호랑이인지, 사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종인지 모를 모습을 한 짐승의 긴 털 사이로 흉흉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달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며 빛나는 몸뚱이가 어쩌면 살벌하게 아름답기까지 했다. 도손은 입맛을 다셨다. 저것은 분명 그가 찾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 혹은 그 자체일 것이었다. 말에 대답이 없자 짐승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도손은 횡단보도를 향해 성큼 걸어나가며 물었다. 무언가의 욕구가 불에 올려놓은 스프처럼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입버릇처럼 읊고 다녔을 문장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잠깐 질문 괜찮을까?”

뒤에서 슈세이가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도손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눈앞의 상대를 마음껏 취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짐승은 흥미로운 것을 보는 눈으로, 혹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도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처음 뿌리에 도달했을 때 딱 너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

“당신이 뿌리야?”

그러자 짐승이 제자리에서 한번 크게 뛰더니 공중제비를 한번 돌았다. 거대한 털짐승의 그림자가 달을 한 번 가리더니, 무언가 작은 인영으로 변해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켜보고 있던 슈세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땅에 가볍게 착지한 그것은 이제 이름 모를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어린아이는 꺄르륵 웃더니 말했다.

나는 화장실의 하나코상이기도 하고,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 돌아 다시 한번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리고 비단으로 된 옷 열두 겹을 겹겹이 겹쳐 입은, 흑단과도 같은 긴 머리카락의 키가 큰 여인의 모습이었다. 손에는 대나무 살을 붙인 종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너희들이 한번쯤 기도를 올렸을 어느 이름 모를 신이기도 하며,

여인은 들고 있던 우산을 접어 바닥에 두어 번 내려쳤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봄꽃들이 닿는 자리마다 송이송이 피어올랐다. 우산을 펼쳐 한번 돌리니 형체는 우산 안에서 사라져서, 연기가 되어, 다시 바뀌었다. 나타난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너희들이 찾고 있는 쪽의 나카지마 아츠시이기도 하지.

횡단보도의 건너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슈세이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이제 의뢰인, 나카지마 아츠시와 완벽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의뢰인이 찾아달라고 부탁한 사람, 그러니까 아츠시의 쌍둥이 형과 같은 얼굴이었다. 존재는 도전자를 맞이하는 눈으로, 혹은 무언가를 지키는 수문장의 눈으로 도손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카지마 아츠시의 몸으로 말했다.

나는 이야기의 집합, 모든 괴이의 뿌리가 되는 존재.

어디선가 희미하게 등나무 꽃향기가 났다. 존재의 뒤에서 계절감도 없이 등나무가 솟아올라 달빛을 받으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도손은 손에 잡은 활을 꽉 쥐었다. 원하던 답을 얻어낸 눈동자가 알고자 하는 욕구에 젖어 반짝거렸다. 등나무(藤)는 내 건데. 내 이름은 시마자키 도손이니까.

농담 따먹기는 그만두지.

그것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끌수록 저것에게는 손해였다. 아무리 인간의 몸을 입어 이곳에 실재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버티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해가 가까워질수록 이쪽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 사이에 저것과, 사로잡힌 쪽의 나카지마 씨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이 도손의 작전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카지마 아츠시를 돌려줘.”

나는 이제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괴이로 살아가는 것에 지쳤다.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괴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는 그 시작이 되었을 뿐이야.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뭐야? 당신이 괴이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 괴이 그 자체인 주제에, 더 많은 이야기를 탐해서 뭐 어쩔 건데?”

아츠시의 몸을 한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은 성큼성큼 도손에게 걸어와 한 손으로 턱을 꾹 누르듯 붙잡았다. 오묘한 각도에서 눈이 마주쳤다.

괴이를 탐하는 사람인 주제에 말이 많군. 너도 이해하고 있을 거 아냐?

“나는 당신과 달라. 적어도 무고한 이를 납치하지는 않으니까.”

아니, 너는 나와 같은 족속이야.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까지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종족.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주인의 것이 아닌 노란 시선이 도손을 꿰뚫었다. 턱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흰 목을 훑었다. 그의 양손이 도손의 목에 감겼다. 조금만 힘을 주면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도손의 뒤쪽에서 슈세이가 다급하게 시마자키! 하고 이름을 불렀다. 도손은 대답하는 대신 한쪽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거래를 하고 싶은데.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듯 도손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어디 말이나 해 보라는 듯이 그것이 고개를 까딱였다. 도손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카지마 아츠시를 놓아주는 조건으로,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당신에게 줄게.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니야?”

이야기를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겠지?

도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작성하며 살아간다. 삶은 곧 한 권의 책이자 하나의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 어쨌든 한 명 분의 인생을, 쌓아올린 이야기를, 도손은 지금 그것을 전부, 뿌리에게 넘기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거래로군. 뿌리는 도손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계속해서 웃었다. 그 웃음은 이제 아츠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도손은 뿌리에게서 두 걸음 멀어졌다. 한참을 웃던 그가 한참 하찮은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도손을 바라보았다.

당돌한 제안이었지만, 동시에 멍청한 제안이었다.

눈 앞의 상대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도손은 쥐고 있던 활과 화살을 땅에 굴리듯이 슈세이 쪽으로 던졌다. 기기기긱, 하는 마찰음이 나며 활과 화살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냈다. 슈세이는 눈앞에 굴러온 것을 얼떨결에 움켜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잡아보는 활과 화살이었다.

“슈세이, 쏴!”

도손이 다급하게 외쳤다. 뭘 쏴야 하냐고 되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존재는 이제 나카지마 아츠시가 아닌, 처음의 거대하고 흰 털짐승으로 변해 도손을 덮쳤다. 덮쳤다고 하기에는, 앞발 하나만으로 전신을 제압하고 있었다. 슈세이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고 잡는 화살의 감촉이 낯설었고, 살아있는 데다가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을 겨냥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동작을 머릿속에 새긴다. 화살은 한 발 뿐이다. 정확히 명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건너편에서 화살을 활시위에 물리고 있는 슈세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것은 도손에게 명백하게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빼앗으면 그만인 것을, 내가 뭐하러 손해 보는 제안에 응해야 하지?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흥미로운걸.”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여유가 없는 목소리였다. 짐승의 노란 눈동자밖에 볼 수 없었지만 도손은 상황에서도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있을 슈세이를 생각했다. 슈세이의 그 모습은, 몇 번이고 보아 알고 있다. 항상 수수하다고 타박받는 것 치고는, 단정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눈을 끄는 모습. 도손은 그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준비가 끝날 것인지 정도는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도손은 머릿속으로 슈세이의 모습을 그렸다. 타이밍을 잰다. 발톱이 장난치듯 목을 긁었다. 그것이 앞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꿰뚫리기 직전이었다. 3, 2, 1…

“슈세이!”

“알고 있어…!”

슈세이는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화살이 슈세이의 손을 떠나 날아감과 동시에 짐승이 앞발을 도손을 향해 내리꽂았다. 어느 쪽이 먼저지?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짐승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도손은 급하게 몸을 굴려 떨어지는 앞발을 피했다. 한쪽 눈알에 화살이 박힌 짐승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화살이 박힌 자리부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마자키!”

건너편의 슈세이가 도손을 부르며 달려왔다. 도손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걸었다. 그러나 몸이 향하는 곳은 슈세이 쪽이 아니라 짐승 쪽이었다. 짓눌리면서 땅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조금 어질어질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쓰러져 불타고 있는 짐승에게 다가간 도손은 손을 뻗어 그것의 눈알에 박혀있던 화살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화살이 완전히 뽑혀 나옴과 동시에 짐승의 육체에서 아츠시의 육체가 분리되어 떨어졌다. 도손은 아츠시를 받아 안았다. 정신을 잃은 인간의 육체의 무게가 온 몸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고, 그 탓에 조금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위험했네.”

“고마워.”

뒤에서 도손을 받아준 슈세이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슈세이, 잠깐 맡아 줘… 도손은 아츠시를 슈세이에게 맡기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시마자키 도손이라고 해도, 방금은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건…방진… 애송이…….

화염에 휩싸인 짐승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손은 소리가 난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숨을 한번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슈세이가 만류하려 했지만, 도손이 걸음을 옮기는 것이 더 빨랐다. 도손은 바닥에 착 달라붙어 타들어가는 짐승을 응시했다.

“뭐.”

나는…너를 저주할 것이다…….

짐승이 몸을 비틀며 도손과 눈을 마주쳤다. 상대를 직시하던 노란 눈동자는 깨진 거울처럼 잔뜩 금이 가고 망가진 채 회색으로 타들어갔다. 도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꼭, 다 꺼져 가는 양초 같았다.

너는 남은 일생을 외로이, 괴이의 뿌리로서 지내게 될 것이다….

너는… 영원히 너의 이해자를 구하지 못할 것이며…

영겁의 시간 속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초월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저주를 말하며 짐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장난 알람시계처럼 기분 나쁜 소리로 낄낄 웃어댔다. 그 소리를 들은 슈세이는 작게 몸을 떨었다. 타인의 파멸을 바라는 원념의 목소리에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도손은 담담한 태도로,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그 저주를 경청했다. 짐승의 웃음이 점점 사그라들고 형편없이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남자, 도손은 완전히 타들어가 온 몸이 새까맣게 된 짐승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깨진 거울이 도손을 힘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도손은 속삭였다.

“그 말을 기다렸어.”

 

도손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슈세이는 마지막 순간에 그 이름 모를 짐승이 살짝 웃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불탄 육신이 힘을 잃고 폭삭 가라앉은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저 먼 곳에서부터 거리의 가로등이 천천히 점등되기 시작했다. 겨울의 청명한 바람이 꺼진 촛불과도 같은 향을 싣고 날아갔다. 다시 켜진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고, 보행자 교통신호음이 흘러나왔다. 토랸세, 토랸세, 하는 곡이었다.


막간

 

 

 

예의 그 횡단보도 사건 이후, 사무소는 잠정적 휴가에 들어갔다. 연말이기도 했고, 아무렴 큰 사건이기도 했으니 시마자키도 조금 쉬고 싶을 것이라고 슈세이는 어림짐작했다. 사라졌던 쪽의 아츠시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의뢰한 쪽의 아츠시로부터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받았다.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최고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같이 책을 읽었고, 같이 장을 보고, 같이 밥을 먹었다.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일상이 흘러갔다. 이상적인, 평온한 일상. 슈세이는 이 연말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하루하루. 그런 날들이 계속되다가, 도손이 갑자기 같이 자자며 슈세이를 자기 방으로 부른 것이 오늘 밤의 일이었다.

“수학여행 온 것 같고, 좋잖아.”

…사람은 두 명인데 바닥에 이불을 하나만 깔고 자는 수학여행 같은 건 없다. 좁은 이불 속에 들어가 눕자 마주 보고 누운 꼴이 되었다. 확실히 수학여행… 수학여행의 묘한 두근거림 정도라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눈이 감기질 않았다.

“잠이 안 와?”

“으응, 아니…괜찮아.”

거짓말이다. 잠이 올 리가 없다. 슈세이는 눈을 애써 꼭 감았다. 그야 이렇게,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베갯잇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좀 더 이쪽으로 붙어 봐, 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서 더?

슈세이가 움직이지 않자 도손 쪽에서 붙어왔다. 숨결이 부딪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저기, 너무 가깝지 않아?”

“그치만 이 정도 거리는 되어야 이야기할 수 있어.”

거리의 탓인지 묘하게 긴장한 슈세이와 달리, 도손은 여느 때 보다도 훨씬 차분했다. 김이 서린 창문을 통해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비쳐 들어왔다. 흐릿한 빛은 하나, 침묵은 둘. 도손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있지, 계속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을 기다려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하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끝의 끝에 와서야 잡아채다니. 너에게 고백할 게 있어.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고해성사 같네.”

미안해, 나는 너를 이용했어.

어디선가 곤충의 얇은 날개가 펄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비닐로 포장된 사탕 껍질이 바스락거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한순간 점멸했다 완전히 사라져 방 안에 어둠이 녹아들었다. 슈세이는 문득 도손이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너의 상냥함에 기대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너를 이용했어. 사실은 온전히 내가 떠안아야 하는 것들이었는데도.”

점점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세이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웠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잡히게 두지 않는 것들이, 하필 그것이 시마자키 도손인 것도. 불안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런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손은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 이야기 속에서는 괴이가 태어나고, 다른 괴이가 사라지고… 나는 언제나 그게 궁금했어. 언젠가 닿을 수 있다면, 그 탄생과 끝을 보고 싶었어. 닿기 위해, 수많은 이야기를 모아왔어. 언젠가는, 놓고 가는 편지 한 통도 놓지 않고 조용히 끝을 보기 위해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실수했던 거야. 그 마지막에, 편지를 놓고 간 것이 정말로 실수였던 거야.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마는데.”

그런데 네가 있었던 거야.

너만이 나를 기억하고 찾아냈던 거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도손이 복잡한 시선으로 슈세이를 바라봤다. 슈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에서, 붙잡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울렸다.

“시마자키.”

“있지 슈세이, 나 긴 여행을 떠나. 떠나있는 동안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슈세이도, 나를 잊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계속 기억한다면, 나는 네게 짐을 지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내가 바라던 거야.”

다음 순간에 손을 대지도 않은 방의 전등이 밝게 두어 번 점멸하고 꺼졌다. 다시 한 번 어둠만 내려앉은 자리에는 슈세이 혼자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 좁았던 이불의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손으로 빈자리를 더듬어도 온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마자키 도손은 편지 한 통 놓지 않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괴이한 이야기가 하나 늘어나고, 또 다른 괴이한 이야기가 끝을 맞이했다.

이것은 여전히 바깥이 현실인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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