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하게 된 일은 그 해 내내 하게 된다
문호사서 : 秋司書 도쿠다 슈세이X특무사서 (2018)
연초에 하게 된 일은 그 해 내내 하게 된다
욕조에 붙은 수도꼭지를 돌려도 물이 나오질 않았다. 사서는 혀를 찼다. 어쩐지 아침에 뭔가 빼먹은 것 같더라니 이런 실수를 했다니. 물을 안 틀어놨으니 당연히 수도관이 얼어버리지… 사서는 고양이의 조언을 듣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깡촌도 아닌데 수도관이 얼어? 하고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날이 이렇게 추우니 수도관이 얼어버린다는 게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수도관이 얼어버렸으니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의 개수는 줄어들어버렸다. 하나는 포기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도관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심야에 굳이 인기척을 내며,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공용 욕실까지 가서, 물을 틀고, 씻고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후자는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거의 버리는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고려대상에 넣은 이유는 연초임에도 연이은 초과근무에 이게 알케미스트인지 일개미스트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린 자신의 상태 때문이었다. 따뜻한 물, 따뜻한 물에 푹 잠겨있으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았다.
아무튼 목욕이 절실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따뜻한 물에 푹 잠겨있고 싶었다. 그 뒤에는 적당히 구겨져서 쪽잠이라도 자면 그만이었고. 아무튼 심야, 사서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하필 사서실 수도관이 얼어버리다니 이게 무슨 봉변이람. 얼지 않는 수도관이나, 사서실 안에 새로 욕조 같은 걸 설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깐, 욕조.
사서는 지난 가을 내장금화를 써서 들여왔던 가구를 떠올렸다. 사서실에 설치하자마자 피어오르던 따뜻한 김에 가구를 변경하는 과정을 보고 있던 조수문호와 함께 어처구니없음을 경험했던 일도. 그래, 사서실에 설치할 수 있는 가구에는 욕조가 있었다. 그때는 도대체 이걸 왜 설치 가능하게 해둔 건지, 업무는 포기하고 목욕이나 하라는 큰 그림인지 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 큰 그림은 큰 그림이었다. 이건 수도관이 얼면 이거라도 쓰라는 배려가 틀림없었다. 아니라도 딱히 상관없다. 원래 사람이 무언가 절실한 것이 있으면 남의 의도 한두 개 쯤은 멋대로 곡해할 수 있는 법이다. -라고 사서는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한번 결심한 후라면 실행하는 것은 금방이다. 사서는 사서실의 다른 가구들을 정리한 후 조명과 바닥재를 바꿨다. 원래 업무용 책상이 있었던 자리에는 곧 노란 장난감 오리가 둥둥 떠다니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가 들어섰다. 샤워커튼 같은 간이 가리개라도 하나 만들어둘까 싶었지만, 굳이 귀한 내장 허가증을 소비하면서 그런 쓸데없는 걸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심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서는 욕조에 발을 담갔다.
입욕제를 푼 따뜻한 물이 넘칠 듯 말듯 넘실거렸다. 따뜻한 물에 잠겨 마무리하는 하루는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처리하던 서류 따위는 전부 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사람이 연초에 한 일을 그 해 내내 하게 된다던데, 그럼 나는 1년 내내 일만 하게 된다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고 조금 우울해졌지만. 아무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은 꽤 소중한 것이었고, 사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똑똑, 하고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까지는.
「사서씨, 안에 있어?」
목소리를 듣고 누군지 알아채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분명 오늘의 조수문호였다.
「슈세이 씨? 무슨 일이에요?」
이 새벽에 올 일이 없는데, 정말 무슨 일이지. 사서는 의아했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건가? 그럼 바로 나가기는 힘든데, 좀 곤란했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
「부탁했던 정리 다 끝나서, 보고하려고. 들어가도 돼?」
아. 올 일이 없기는 무슨. 사서는 자신의 건망증을 탓했다. 그러고 보니 서가에서 서고로 이동한 책들의 목록 정리 작업을 부탁했었다. 천천히 해도 괜찮은데 그걸 하루 만에 끝냈단 말인가. 과연 속된 말로 짬밥이 있어서인지 투입시간 대비 일의 효율이 대단했다. 조수문호를 바꾸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저기, 지금은 좀-」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사서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사오니 지금은 들어오시면 아니되옵니다, 라고 어떻게 말해. 사서는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뭐라고 변명하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나? 어디부터? 다짜고짜 목욕 중이에요! 라고 하기에는 너무 건너뛰지 않았나? 그럼 수도관이 얼어서- 부터?
「설마 또 실험하다가 사서실 날려먹은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그럼 들어간다?」
아니, 그건 좀- 이라고 말할 기회도 없이 사서실의 문은 벌컥 열렸다. 열린 도서관이랍시고 사서실 곁문에는 따로 잠금장치를 달아두지 않은 과거의 자신의 아둔함을 사서는 또 한 번 원망했다.
「……」
「……」
「…저기,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줄래?」
「일단 문 좀 닫아주실래요?」
아, 그래. 슈세이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아니 당신, 그거 말고. 나간 다음에 문 닫아달라는 의미였는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꽤 뻔뻔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와서 그래서 이건 무슨 상황인데? 라고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시선은 돌리고 있는 주제에.
「수도관이 얼어서…」
「그건 난처했겠네.」
「근데 목욕은 하고 싶어서…」
「그럼 공용 욕탕 쓰지 그랬어. 거긴 안 얼었는데. 」
「이 시간에 민폐잖아요.」
「너, 이상한 부분에서 묘하게 단호하구나… 」
만담 같은 대화가 잠깐 이어지고 곧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슈세이 씨, 그냥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 된 김에 편하게 보고 하세요. 슈세이가 대답했다. 너는 이 상황에 편하게 보고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그렇지? 그리고 다시 침묵.
「왜 문 안 잠갔어?」
「여기 잠금장치 없어요.」
뭐? 그럼 아무 생각 없이 욕조를 들여놓았다는 소리야? 슈세이의 표정이 꼭 친가에 계신 어머니처럼 변하는 걸 보고 사서는 깊이 후회했다. 날아오는 것은 잔소리 대신, 곤란함과 어이없음이 잔뜩 섞인 한숨이었지만.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아니, 큰일은 이미 난 것 같은데요. 차마 말대꾸는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나마 들어온게 나라서 망정이지…」
「아니, 슈세이 씨라고 딱히 다를 건 없는데. 오히려 위험하지 않나요?」
「왜?」
아니 그야 당연히, 직장 동료가 목욕하는데 들어와서 편하게 만담하는 사람이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그 대답에 슈세이는 사서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서를 똑바로 쳐다봤다. 너는 지금 내가 편해 보여? 그리고 그 시선의 가까움에 사서는 슈세이가 사서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아뇨. 사서실은 생각보다 좁았고, 둘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다음에는 꼭 사서실 확장을 건의해야겠다고 사서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옷이 젖을 것 같은 거리. 딱 그 정도의 거리였고, 딱 그 정도의 긴장감이었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고 욕조 안 오리 장난감만 둥실둥실 떠 다녔다. 이 사람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슈세이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끝만 살짝 물에 젖은 사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보고는 내일 할 테니까, 얼른 씻고 자.」
「네에.」
「수도관도 내일 같이 확인해보자.」
「네에.」
「다음에 또 문 안 잠그고 사서실에서 목욕하면 가만히 안 넘어갈 거야.」
「네에.」
그럼 잘 자. 라고 말하며 슈세이는 등을 돌렸다. 사서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가만히 안 넘어간다니, 어떤 의미야? 아주 작은 말이었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슈세이가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그러고 보니 연초에 한 일은 그 해 내내 하게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올해 내내 작년과 마찬가지로 저 조수문호와 밀당만 계속 하게 된다는 말인가.
…치사한 사람.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생각만 하며, 사서는 다시 한번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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