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이라는 것이 없다면
레노파우
파우스트가 레녹스의 방랑시절에 떨어졌다는
레노파우 순수 날조 글입니다.
원사제(CP아님이라고 생각함)가 등장하거나 합니다.
쓰다보니 ‘아니, 그래서 이 글은 대체 왜 쓰려고 했지…’
라는 기분이 되어서 업로드를 꽤 망설였다는
저의 TMI도 함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모바일 웹에서 열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1.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늦은 아침을 먹었다. 선생에게도 꼭 먹여주고 싶다며, 네로가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메뉴는 파우스트가 제일 좋아하는 갈레트였다. 짭조름한 폭풍 소금의 맛이 유독 좋게 느껴졌다.
뒷정리를 도와주고 수업 준비를 하러 갔다.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시노는 수업 시작 30분을 앞두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으면 숙제 검사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 차를 한 잔 마시고 수업에 들어갔다. 히스클리프와 시노는 문제를 전부 풀어왔고, 네로도 한 번에 풀 수 있는 건 풀어왔다. 셋에게는 우선 저번 수업의 복습을 시키며 시험지를 채점했다. 히스클리프는 항상 알려준 것과 똑같이 완벽한 답을 내놓는다. 시노는 가끔 영문 모를 어레인지를 한 대답을 내놓는다. 네로는 결과만 옳고 과정은 전혀 처음 보는 답을 내놓는다. 아쉽게도 공식을 물어본 답이니 두 명에게는 틀렸다는 체크를 해놓기로 한다.
수업이 끝나면 종이를 늘여놓고 있는 현자에게 찾아갔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곤란한 의뢰라도 온 걸까. 맞은편에 앉자 현자는 밝게 인사하고, 금방 의견을 구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우스트는 마땅한 조언을 해주었다. 현자는 감사를 표하며 다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그 뒤는 플로렌스 형제가 여쭤볼 것이 있다며 찾아와서, 숙제를 푸는 것을 조금 도와주었다. 어쩌다 보니 아는 문제였을 뿐이다. 둘 다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기 때문에 조금만 도와줘도 금세 문제를 해결했다. 플로렌스 형제는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파우스트는 별거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게 파우스트는 충실한 하루를 보낸 뒤 침대에 누웠다. 슬슬 결계를 수리해야 할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 중앙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면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되니 좋지만, 만일 없다면 동쪽 나라까지 돌아가야 한다.
우선 내일 장을 보러 나가고 현자에게 양해를 구하자. 졸린 정신으로 내일의 일정을 되짚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밤의 장막이 완전히 떨어지고,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한 번 수마에 끌려가는 의식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거기서, 파우스트의 의식은, 각성한다―――
#2.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부신 햇빛. 순간, 또 북쪽의 마법사들이 싸우느라 벽이 반파된 줄 알았다. 천천히 의식이 현실로 올라온다. 등에 맞닿은 감촉이, 침대의 시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부터는 마치 낚싯줄에 걸려 뛰쳐나가는 물고기 같은 기세였다. 파우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닿는 것은 까칠까칠한 모래의 감촉이었다.
바로 앞에서 파우스트를 들여보던 상대는 그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난다. 경이로운 반응속도였다. 파우스트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 ‘단순한 여행객’은 아니다. 파우스트는 방어를 위해 마도구인 거울을 꺼내 들고 고개를 들었다.
“…너는!”
그저, 눈에 비친 상대가 믿어지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크게 놀란 반응을 하자, 상대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들면서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나는 네 적이 아니야. 여기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
낡은 망토의 그림자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인다. 그는 인상이 날카롭기 때문에 남들에게 종종 오해받는다고 하기도 한다. 지금의 파우스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주고, 누군가의 두려움을 사고 싶지 않아 행동에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척 봐도 지쳐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누군가를 살려줄 만한, 그런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너는 사람을 구한다.
그렇기에 마력의 기색은 변하지 않았다.
지쳐보여도, 그의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파우스트는 그 사실에 지독하게 안심하고, 동시에 절망한다. 그렇다면 너는 대체 언제 멈춰 서게 되는 걸까, 하고.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갑작스레 어디에 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이게 전부 환상이라고 해도, 눈앞의 그는……
“내 이름은 레녹스 램.”
혁명시대, 자신의 뒤를 굳건히 지켜주었던 상대. 그에게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고,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으며, 행복을 빌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줄곧 혁명군에 있던 시절을 떠올리고 말았다.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닌 레녹스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나는…”
그런데도,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형대에 불이 붙었을 때에도 이렇게 안색이 나빴던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의 상처를 돌봐줄 때도 그에게는 어딘가 희망이 있었다는 걸까? 그렇다면, 오랜 시간 나를 찾지 못한 너에게는… 무엇이 있다는 걸까?
파우스트는 망설였다.
레녹스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파우스트 라비니아’라고 소개하는 것은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로 인식되지 않는 그에게 부정당하는 것이. 너는 파우스트 님이 아니야, 라고 말하면 파우스트는 나라는 존재에게 자신이 없어진다. 그의 마음속 ‘레녹스’의 존재는 그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나.”
결국 파우스트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레녹스는 그런가, 하고 파우스트의 눈치를 살피며 ‘힘들겠구나’ 하고 위로해주었다.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사용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겠지. 아마, 파우스트도 같은 반응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임시방편의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내가 아는 분이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발푸기르스의 밤 축제에서 만날 수 있어.”
마침 가는 길이 같으니 함께 가자, 하고.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와, 종에게도 모습을 숨기려는 주인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3.
레녹스는 종종 필요한 물건들을 마을에서 구하고는 했지만, 누군가와 친밀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곤경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당연하게 도와주는 길을 택하지만, 답례는 거절하고 다시 자신의 여행길로 돌아온다. 파우스트는 마을에는 다가가고 싶지 않아 짐을 지키기 위해 마을 근처 숲에 앉아서 기다렸다.
늦게 돌아오는 때에는 마을에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어 그것을 도와주고 왔다고 하고, 일찍 돌아올 때는 마법사라는 이유로 배척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녹스는 그 어느 쪽도 똑같은 반응으로, 이제 갈까요, 하고 말한다. 그에게는 어느 쪽도 이미 ‘익숙한 것’이 되어있는 거라는 사실이… 파우스트에게는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레녹스는 말했다. 자신도 여행길 위해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에 처했고, 누군가가 구해주어서 이렇게 여행하고 있으니, 자신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영문 모를 사람을 구해준 것도 그런 이유다.
그래도 가끔은 정말 좋지 않다. 삶이 어려울 수록 생명은 타인에게 비정해진다. 레녹스와 파우스트는 벌써 두 번이나 인간들에게 거부당했다. 식량을 구하기에 곤란하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거절당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마법사라도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지낼 수는 없다. 레녹스 한 명이라면 괜찮겠지만, 동행인을 데리고 마저 움직이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둘은 결국 숲에 들어가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하기로 했다. 파우스트가 약초나 열매를 찾는 동안 레녹스는 낚싯대를 만들고 낚시를 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잘 풀리지는 않았다. 물고기가 낚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낚였다 하면 새끼거나 알을 벤 녀석이라 그냥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 레녹스와 파우스트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다가 만장일치로 ‘놓아주자’고 했고, 그렇게 물고기를 다섯마리나 놓아주었다.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둘에게는 해결책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때, 파우스트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단순한 행운 마법이라면 쓸 수 있어.”
파우스트는 주문을 입에 담지 않고, 마법을 썼다.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위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정체를 들킬 수는 없고, 기억 상실이라는 설정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성능은 꽤 확실했다. 행운 마법을 받은 레녹스는 기적같이 저녁밥으로 먹을 물고기를 세 마리나 낚을 수 있었다. 폭풍 소금으로 간을 하고 모닥불에 구우면, 뭐든 먹을만한 음식이 된다. 파우스트는 문득 네로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 그 위에 향신료를 곁들였다. 비린내가 한층 줄어들어 만족스러운 저녁밥이 되었다.
모닥불의 불빛 앞에 나란히 앉아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을.
“만약, 네가 찾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면, 어떻게 할 거야?”
짐을 꺼내 도구들을 정돈하던 레녹스의 손이 뚝 멈췄다. 파우스트도 좋은 것을 물어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레녹스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면 안심할 수 있을까. 파우스트는 모닥불의 불빛에 어슴푸레 떠오른 레녹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특히 곤란해하는 표정도 아니었고, 화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편안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파우스트 님이 죽었을 리 없어.’
‘그분도 나를 찾고 계실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겠어.’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녹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대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일, 자신이 파우스트를 찾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레녹스는 길을 잃었다. 출구로 나아가는 길도 모르고, 너무 오래된 여행으로 입구로 돌아가는 길도 잊어버렸다. 레녹스에게 남은 것은 이 미로 어딘가에 반드시 출구가 있으리라고 믿고,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었다. 파우스트는 그게… 정말로……
“…그저, 쓰러지지 않아 준다면……”
숲에서 방심하고 잠드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레녹스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도무지 수면욕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안전의 위험도 있지만, 기묘한 상처가 어떨지도 모른다.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런데…
타닥, 타닥, 하고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파우스트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잘자”라는, 레녹스에게 들어본 적이 없는 색다른 인사였다. 그것은 조금 친구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4.
이윽고 도착한 발푸기르스의 밤, 마법사들의 축제.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잡다한 반짝임이 섞여간다. 레녹스는 찾는 사람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가끔 찾아온다고 말했다. 인간이 인간을 알아보는 것보다, 마법사가 마법사를 알아보는 것이 훨씬 쉽다. 파우스트가 만약 폭풍의 계곡에 은거하지 않았다면, 동쪽의 마법사들이 파티 같은 것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면, 레녹스는 진작 그를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둘러보며 레녹스의 뒤를 쫓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축제의 소란스러움은 줄어들고,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어간다. 하늘을 날던 물고기들도 이쪽 안까지는 다가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앞에 누가 있는지, 예상이 갔다.
“피가로 님.”
발푸기르스의 밤 주역.
레녹스가 태연히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숨을 죽인다.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고 숙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피가로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되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이미지가 있다. 어느 쪽이냐면… 이상한 것은 레녹스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마법사 전원을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다. 오직 그의 기분이나 변덕만으로도, 여기 사람들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것과 별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오랜만이야, 레노. 그리고 그쪽은……“
피가로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파우스트는 그것에 움츠러들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레녹스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괜찮습니다, 하고 타일렀다.
상대는 북쪽에서도 손에 꼽는 마력량을 자랑하는 대마법사다. 보통의 마법사들이라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릴 것이다. 짐승에게 목덜미를 내어주러 다가가고 싶어 하는 동물은 없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온후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물어뜯는 행위를 즐기지 않는다. 레녹스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다준 것이겠지.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려서, 혹시 피가로 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 하고…“
피가로가 무언가를 더 말하기 전에 레녹스가 먼저 설명을 해주었다. 피가로는 그런가, 하고 납득하듯이 웃었다. 둘은 짧은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파우스트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레녹스는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한 뒤 다른 마법사들에게 말을 걸러 떠나버렸다.
둘은 레녹스가 완전히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피가로의 배려다. 그는 장수마법사 치고는 눈치가 빠르고 사회성이 좋은 축에 속한다. 피가로가 물러나라고 손짓하자 마법사들은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파우스트였다.
“피가로 님, 저는……”
무심코 호칭도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른다. 파우스트의 말에 피가로는 괜찮아, 하며 오브를 꺼내 든다. 하늘에서 툭 튀어나온 의자에 앉은 다음 파우스트에게도 맞은편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마주 앉은 피가로는 언제나 파우스트에게 답을 내려준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전부 내어주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신호’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거리낌 없이, 질문할 수 있었다.
“…여기는 현실인가요?”
제일 문제인 부분은 그것이었다. 파우스트는 지금 몇백년 전의 과거에 존재한다. 미래의 기억, 신체 상태, 마력까지 전부 가진 채로. 여행 도중에 몇 번이고 사용했지만, 역시 저주의 주술도 쉽게 써진다. 파우스트가 저주상을 한 지 꽤 되었다는 증거였다.
“글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애매하군. 태어났을 때부터 어둠만 보고 자라온 상대에게 빛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 만큼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해.”
파우스트는 입을 닫았다.
피가로나 레녹스에게 있어서도, 지금 이 세계가 ‘현실’이다. 그러니 피가로는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거짓임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약 나쁜 꿈에 홀린 정령들이, 여기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날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의 목숨에도 지장이 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질서 아래에 있다.
만일을 대비해서 여기가 현실인 것처럼 행동한, 파우스트 나름의 ‘보험’은 틀리지 않은 것이다. 다소 이상적인 행동을 해도 파우스트가 다른 시점에서 왔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을 것이다. 파우스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자, 피가로는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해가 빠르고 조심성이 있는 제자였다. 피가로도 파우스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으니, 확실하지 않은 추측성 이야기는 제쳐두기로 했다.
“너는 이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야. 아무리 조심해도 북쪽의 마왕이나 쌍둥이 마법사를 만나면 도망가야 해. 스노우 님이랑 화이트 님은 몰라도, 오즈라면 분명 너를 죽일 거야. 본능적으로 배제해야 할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파우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무척 현명해, 파우스트. 그리고 가끔 어리석은 소리를 하지…… 네 그런 점이 좋았어.”
피가로는 작은 구체를 끈으로 엮어 파우스트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 구체는 바다의 빛처럼 일렁이고, 동시에 주변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며, 조금 차가움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 있었던 피가로의 아뮬렛을 닮아있었다.
“딱 한 번. 이 구체를 쥔 채로 네 주문을 외워. 그러면 마법을 쓸 수 있을 거야.”
여행자에게 행운이 있기를.
피가로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축복의 마법을 걸어준 뒤, 본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멀찍이서 불안하게 지켜보던 마법사들도 피가로가 이쪽으로 오니 조금 안도하기도, 훨씬 긴장하기도 한 것 같았다.
피가로는 마지막 미련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저, 피가로 님, 방금 분은……?”
누군가가 용기 있게 물어보았다. 방금까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있었을 공간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마치 신기루처럼, 하룻밤의 꿈처럼,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남은 것은 씁쓸한 뒷맛과 혼돈 뿐이다. 파우스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잠들지 않았다. 정령들과 세계의 질서 아래에 사는 마법사라면 아마 모두 같을 것이다… 단지, 파우스트가 이물질인 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는 레녹스를 찾으러 갔을까. 아니면 다른 답을 찾으러 떠났을까. 그는… 그 아이는… 나의……
“――글쎄, 누구였더라.”
사실은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파우스트. 지금의 너에 대한 건 방금 전에 봤는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피가로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제일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 파우스트와의 대화에 썼던 것보다 훨씬 호화롭고 편안한 것이었지만, 피가로는 훨씬 불편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어 턱을 괴었다.
#5.
피가로와 헤어진 파우스트는 발푸기르스의 밤 축제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즐기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쪽이냐면 반대였다. 사람이 너무 많고, 다른 마법사들이 자꾸 말을 걸어오며, 가만히 있으면 공중에 떠다니는 정체 모를 물고기가 모여든다. 이유를 모르겠다. 파우스트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마법사들이 모이는 곳에서, 조용한 곳을 찾아야 한다면… 동쪽의 마법사들이 있는 쪽으로 가면 됐는데. 아쉽게도 동쪽의 마법사는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서쪽 마법사들을 피하는 것 뿐이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레녹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콱, 하고.
갑작스럽게 뒤에서 거칠게 팔을 붙잡혔다. 잡힌 부분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파우스트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상대를 바라본다.
“읏… 레녹스!”
레녹스는 스스로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어째서 잡은 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축제의 소란스러움이 이명처럼 멀어진다. 레녹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저는……”
목소리가 애달프게 떨리고 있었다. 레녹스는 팔을 잡은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서, 파우스트가 그 손을 내치고자 하면 금방이라도 내칠 수 있었다.
레녹스는 분명 파우스트를 찾으러 갔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파우스트의 아름다운 눈동자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무슨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어떤 마음을 담아 행운을 바라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파우스트 라비니아’를 기억하는 동포들도 전부 떠나고, 레녹스는 거기에 혼자 남았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여행이건만…… 레녹스는 자신이 종종 미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땅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 저번에도 그랬고, 140년 전의 축제에서도 그랬다. 레녹스는 그것에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다. 사실 파우스트는 이 대지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구나, 하고 문득 생각해버릴 정도로.
…아무튼 돌아가야지. 축제를 즐길만한 마음은 없다. 레녹스는 발걸음을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다못해 단순한 특징조차 모르겠고,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녹스는 공포를 느꼈다. 단지,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언젠가 그렇게 파우스트를 잊어갈 것 같아서.
레녹스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마법사와 부딪히며,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마치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옆모습이 보였다.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에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절망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불꽃 속에서, 파우스트도 그런 눈을 했다.
“가지 마세요. 저는, 저는 당신을……”
레녹스는 고비를 앞에 두고 있다. 그는 여행길 위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파우스트에게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파우스트는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희망만큼의 절망이 있다. 수많은 만남만큼의 이별이 있다. 하늘에 별보다 많은 고독에 빠졌다. 빛을 믿지만 어둠에 내던져진다.
파우스트는, 생각하고 만다.
어째서 더 이른 시간에 떨어지지 못했을까. 이 세계를 인정하고, 환상에 잡아먹혀서, 자신의 삶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못하는 걸까?
만일 레녹스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면, 만일 알렉에게 처형당하기 전에 도망갔다면, 만일 알렉의 팔을 고칠 수 있었다면, 만일 피가로에게 찾아가지 않았다면, 만일 레녹스를 곁에 두지 않았다면, 만일…… 알렉과 같은 이상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너를 만나지는 못했어도 지금의 네가 이렇게 바람 앞 등불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입으로는 누구보다 너의 행복을 빌어준다고 말하지만, 너의 목을 죄고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파우스트는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꾹 눌러 담는 것처럼, 레녹스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네 곁에… 나는 여기에 있어. 레노.”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레노, 너는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찾는 파우스트는 내가 아니야. 파우스트는 그렇게 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이런 건 예쁘게 포장된 껍데기로 속이고 있을 뿐이다.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토닥여주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여주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마법의 주문같이 느껴졌다.
#6.
만일 이 모든 밤이 의미가 없었다면 여행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 앞에 어떠한 곤경이 있어도, 바라는 이와 재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가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 걸음을 멈추고 말 때가 온다. 그때의 너에게도 남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그때의 너에게도 무언가를 남겨도 괜찮을까?
축제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많은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파우스트는 내내 외면해왔던 답과 마주하기로 했다.
이 세계에 파우스트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주어진 ‘기적’은 영원하지 않다.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파우스트는 스스로 사라질 생각이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주어진 시간은 짧은데,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다. 그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영원히 그의 곁에 남아서 머무를 수 있는 말이 되고 싶었다. 목소리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전하고 싶었다.
설령 이 세계가 가짜라고 해도, 그의 기억 속에는 남지 않는다고 해도, 전부 하룻밤 사이의 꿈일 뿐이라고 해도…… 자기만족의 이기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전할 수만 있다면.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손을 붙잡았다.
반드시 우리 둘이서 보아야만 하는 어떤 시작을.
#7.
파우스트가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곳은 남쪽의 레이타 산맥이었다. 아직 개척이 되지 않은 탓인지 가는 길은 훨씬 험난해서, 둘은 빗자루에 의지해 바람에 저항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레녹스는 파우스트가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 그를 꼭 붙잡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괜찮다고 타이르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힌 상처는 겨우 그걸로 납득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어느정도 나아가니 빗자루를 타고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빼곡해서, 둘은 가지를 밀어내고 풀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위로, 더 위로… 파우스트는 촛대를 손에 쥐고 레녹스를 인도하듯 산을 올랐다.
신체가 점점 불안정해져 가고 있었다. 이번 《거대한 재액》이 떠나고 난 뒤에, 이 몸은 분명 흩어질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둠으로 향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레녹스에게 전할 수 있는 말도 더 많겠지.
사실 ‘영원’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싸움은 영원한 평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끝에 남은 것은 타다 만 재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원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안온한 행복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는 꼴에 불과하고, 눈을 돌린 대가는 언젠가 더 커다란 것이 되어서 돌아온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면,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두운 밤도 분명 접힐 때가 온다는 것이다.
언어보다 더 확실한 마음을 이곳에 남기기 위해, 파우스트는 일출을 등에 지듯이 돌아보았다.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주홍빛 하늘에 녹아드는 것처럼, 시야에서 번져간다. 구름이 물러가며 산맥의 모습을 밝힌다.
흰 불빛은 그날 본 희망을 닮았다.
파우스트의 그림자가 늘어져 레녹스의 그림자와 겹쳐진다. 맞닿은 몸은 구름처럼 흩어져만 간다. 섭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파우스트가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동굴에 들어갔을 때, 결국 치유받은 것도… 그 일환일지도 모른다.
“너는 분명 아침을 맞이할 수 있어. 아무리 어두운 밤 속에서도… 너는 불빛을 찾을 수 있으니까.”
레녹스는 어두운 탄광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손에 든 등불 하나만이 시야의 전부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벽을 더듬어서 나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레녹스는 늘 밖을 향하는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어둡고 무서워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레녹스도 알고 있다. 접히지 않는 밤은 없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는 싸웠다. 자신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혁명군에 들어가 자유의 깃발을 휘둘렀다.
모두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영원은 없다고.
“너에게 축복을, 레노.”
앞으로 아무리 많은 여행을 하더라도, 끝내 네가 어디를 선택하게 되더라도, 너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벽이 무엇이라고 해도… 너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금의 내가 모두를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거울을 보며 몇 번이고 생각한다. 성자와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옷을 입고 누군가를 저주하며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변질되어버린 자신은 레녹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 영원을 믿고, 동포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된 사람에게 행복 따위가 필요할 리가 없다.
파우스트는 어둠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세계가 끝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파우스트는 거울을 끌어안았다. 목에 걸고 있던 보석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그래도 감히, 바라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너의 등불이 되겠다.
파우스트는 몸을 내밀어 레녹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남아있는 너에게. 앞으로도 살아갈 너에게. 나의 행복인 너에게.
“……《사틸크나트·무르클리드》”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원일까.
아침 해가 떠오르며, 어둠을 밝혀주던 작은 등불은 힘을 잃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무언가가 타고 남은 재 뿐이었다. 레녹스의 손 틈 사이로 재는 흩어져 아침 바람을 타고 떠나간다.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렇군요, 그래도 내일은 반드시 오는 거군요, 파우스트 님.
산맥의 아침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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