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했던 일상에 바람이 불어온 날

녹아내리다 by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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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님 커미션

w. 녹

 믿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일은 의외로 소설 같은 허구보다 현실에서 일어난다. 그 누구도 멀쩡하게 앞을 거닐던 사람이 맞은편에서 급하게 걸어오던 사람에게 몸통 박치기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 그리고 그 상대방이 건장하다 못해 키까지 큰 남자라서 거의 튕겨져 날아가다시피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라면 더욱 그렇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남자를 올려다보는 백희의 얼굴에 당황이 묻어 났다. 남자 역시 급하게 걷고 있었다고 하여도 엉덩방아를 뒤로 찧으며 넘어져 버릴 줄은 몰랐는지 숨을 몰아쉬어 고르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미안합니다. 다쳤는지 모르겠네. 지금 내가 급해서 병원을 같이 가거나 하진 못할 것 같고. 걸을 수 있습니까?"

 힘이 좋은지 남자는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익숙하게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 발목이 부었는지도 확인한 남자는 걸을 수는 있겠네, 혼잣말을 내뱉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무얼 하나, 가만히 지갑을 뒤적이던 남자의 손에 시선이 꽂혀있었는데 무작정 그의 손에 남자가 명함을 꼭 쥐어준 것이다. 저녁에 연락하면 배상해 주겠다며 혼자 할 말만 마치고는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다시 급한 걸음으로 남자는 백희를 지나쳐 갔다. 가만 보고 있으니 저러다 머지않아 누굴 또 쳐버려서 명함을 쥐어주는 상황이나 생기는 게 아닌가 싶어, 어이없는 상황 전개에 무심코 실웃음이나 팍 튀었다. 남자가 급하게 대충 넘긴 건 아닌지 확실히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리고 가령 몸이 아프더라도 남자가 쥐어준 명함을 보니 가짜로 보이지는 않았다. 쥐어준 명함 그대로의 직위라면 물러날 곳도 없을 사람일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경찰서의 한 팀의 팀장이라 하는데 설마. 그나저나.

 목소리도 좋고 잘생겼었지.

 무심코 나직하게 혼잣말 했다. 험악해 보였지만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그을려서 까무잡잡한 피부도 그렇고, 그 커다란 몸도 납득이 갔다. 약속이 있어서 가던 길이었기에 약속은 미루고 병원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묘하게도 썩 나쁜 기분이나 몸 상태는 아니라는 게 신기했다.

 약속은 취소 됐다. 애써 화장을 하고 차려 입고 나온 것은 아쉬웠지만 중요한 약속은 아니었고 귀찮았으니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쉴 생각에 내심 달가웠다. 남자가 본 대로 발목은 별 이상이 없었지만 문제는 급했던 탓에 보지 못한 손목에 있었다. 넘어지면서 무심코 손으로 딛는 건 조건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니 별 수가 없는데, 보도블럭에 강하게 부딪히고 손목은 크게 쓸려 버렸다. 상처를 소독해주던 의사는 흉이 지겠는데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손목은 마치 헝겊 쪼가리 마냥 너덜거려서 깁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흉이 지거나 말거나 백희는 낙담했다. 그는 오른손잡이고 다친 손도 하필이면 오른손이었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제 손으로 젓가락질도 못해 밥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각보다 이런저런 처리를 하고 병원 밖으로 나오니 해가 훌쩍 넘어가며 노을을 띄우고 있었다. 하루를 이렇게 다 날려 보내는 구나. 저녁에 연락을 하면 배상해준다고 했는데. 지금이면 남자도 하던 일이 끝났을 것이다. 안 끝났으면 어쩔 건지. 당분간 사람답게 일상 생활을 보내지도 못하게 생겼다. 썩 좋은 기분일 수 없으니 퉁명스레 전화를 걸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명함에 적혀있던 번호를 확인하고 핸드폰에 입력하는 데에도 한 손으로는 힘들다는 사실까지 굳이 알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수신음이 울렸고 머지않아 들어본 중저음이 핸드폰 스피커를 타고 귀로 꽂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손목은 욱씬거리고, 어떻게 이걸 따져야 할까 싶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불쾌했는데 어느 정도 눈 녹듯 녹아버려서 남자가 전화를 받았음에도 용건을 말하는 것은 문득 잊고 역시 사람이 뭐든 호감형이고 볼 일이구나, 소리 없이 감탄하게 됐다.

 "전화 받았습니다. 안 들리십니까?"
 "아. 낮에 부딪혀서 넘어졌던 사람인데요."

 백희는 부디 남자가 거침없이 나아가다가 다른 사람도 날려버려서 명함을 또 쥐어주지 않았기를 바랐다.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은 남자가 목소리나 얼굴이 잘난 것과는 별개로 피곤한 일이다. 핸드폰 너머에서 터지는 탄성을 보아하니 남자도 다행히 다른 이를 더 쳐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발목이나 그런 데는 괜찮거든요. 근데, 손목이...."

 "손목을 다쳤어요?"

 "저 이대로는 혼자서 밥도 못 먹게 됐어요."

 "예?"

 잠시 일 순간 정적이 일었다.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오른손잡이가 일을 못하는 건 뭐 병가를 내면 되는데 혼자서 밥도 못 먹는 건 어쩔 수가 없잖아. 그에게 있어 중요하고 진지한 문제다.

 "일단 만나요."

 이 사람이 지금 내 꼬라지를 몰라서 그런다. 보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납득하겠지. 커피 사주세요. 당연히 커피는 팀장님이 사는 거에요. 평소라면 웃으면서 비위를 맞춰주고 커피를 사겠다 자처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뻔뻔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험상궂게 생긴 데다가, 아주 모르는 외간 성인 남성을 만나러 가는데도 겁이 나거나 주저함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경찰서로 경찰을 만나러 가는데. 본인도 과실을 인정해서 배상해주겠다 했는데 꿀릴 것도 없다. 남자는 근무중이었으니 근처로 와줄 수 있겠냐 물었고, 당연히 택시비를 청구할 생각에 택시도 잡아 탔다. 그럼. 당연히 주겠지. 누가 불러서 내가 가는데.

 도착해서도 남자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내 생각했는데, 의외로 남자는 만나기로 한 곳에 미리 도착해서는 어떻게 알아보고 제 택시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내려요. 남자는 택시 기사에게는 사람 좋게 오 만원 권을 쥐어 보냈다. 택시에서 내리고 마주한 남자는 웃는 상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 그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애초에 커피를 마시자고 조르기도 했고, 7월 중의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기 때문에 저녁이어도 밖에서 머무르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둘 중 그 누구도 걸으며 말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고, 단지 남자는 걸으며 한 번씩 깁스를 해서 솜방망이가 된 오른손을 흘겼다.

 "왜요? 신경 쓰여요? 전화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죠? 그쵸?"

 어쩐지 자신이 맞았지 않았냐 기세등등하게도 보이고. 아까까지만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던 표정은 묘하게 읽을 수 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적어도 이상한 부자연스러움은 사라져 있었다. 마침 얼마 거닐지 않아 보인 프렌차이즈 카페에 둘 중 그 누구도 의견을 꺼내진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저녁 퇴근 시간 언저리였기 때문에 테이크아웃으로 가져가는 손님들은 많았고 좌석은 꽤 비어있었다.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떼 마실게요. 제 용건을 내뱉고 좌석을 자리 잡기 위해 백희는 남자를 두고 갔다. 구석지고 괜찮은 테이블 높이에 푹신한 의자에 앉기 위해서는 선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운이 좋은지 조건에 맞는 좌석이 하나 남으니 쏜살같이 걸어서 의자를 차지했다. 사람도 별로 많지 않으니 남자가 그를 찾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밀린 주문이 꽤 있었을 테니, 10분이 넘겨서야 양 손에 음료를 하나씩 들고 남자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인기척을 내자 한 손으로 용케 핸드폰을 조작하며 시간을 때우던 백희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옮겨갔다. 와. 바닐라라떼. 남자보다는 음료에 먼저 관심을 주고 컵에 손을 뻗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네. 보다시피요."

 한 사람 당 음료 한 잔을 주문하는 건 필수이기에 음료는 주문한 것 같지만 남자는 손을 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단지 용건만 이야기하고 금새 끝이 날 것 같았던 대화가 묘하게 뜸을 들이는 듯 해서, 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너무 조급해 하실 필요 없으세요. '주성철 팀장님'. 저도 질질 끄는 거 안 좋아해요."

 "영수증이나 진단서 정도만 보여주면 끝인 줄 알았는데요. 뭐가 더 할 말이 있나?"

 "당연히 있죠. 제가 오른손잡이인데 손이 이렇게 돼서 전 혼자 밥도 못 먹는단 말이에요. '배상'해주신다면서요. 책임져 주셔야죠."

 백희의 입장에서 한 마디씩 튀어나올 때마다 주성철 팀장은 황당하다는 듯 표정이 바뀌었다. 말을 잘못 뱉었나. 생각지도 못한 구석으로 파고들어 오는데 내뱉은 말을 다시 집어 삼킬 수도 없는 일이다. 재밌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끌어당겨 올라갔다. 그래서? 기이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어딘가 불쾌해서 비꼬거나 날을 세우기 보다 흥미가 생겨 더 해보라는 것처럼 읽혀 오히려 뻔뻔하던 백희를 당혹스럽게 했다.

 "... 그러니까! 배상이라는 게 뭐에요. 남한테 피해 끼쳤으면 그 피해만큼 물어주는 거잖아요. 배상 해준다고 했으니까 이것도 책임져 주세요."

 "아. 그런 의미. 오른손잡이도 왼손으로 먹을 만한 간편식만 드시라고 내가 주구장창 뭘 보내주기는 까다롭고. 응? 그럼, 뭐 내가 집에 들어가서 수발이라도 해줘요?"

 "네? 말이 그렇단 거지. 무슨 수발을...."

 "아니. 원하는 것 같길래. 뭐 사지가 다 문제 생긴 것도 아니고 간병인 같은 거 붙여주면 그거야 말로 웃긴 짓인 거 아니까 나한테 지금 따지는 거겠지. 아닌가?"

 "... 그... 저기요. 팀장님. 집단 지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구석이 있으니 팀장님도 생각을 해보셔 달라는 그런...."

 "아니. 됐습니다. 그걸로 괜찮은 것 같고."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문제가 두 가지나 된다. 하나는 자신이 혼자 사는 여자이니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그래서 저 미친놈은 뭐 하는 새끼인데 남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다고 쉽게 결정을 내리는 건지 궁금했다. 사고회로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내뱉는다는 점에서 경찰이건 뭐건 간에 믿어도 되는 인간성을 지닌 사람인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는지 주성철 팀장은 조소를 짓고 먼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걱정은 말고. 그쪽이 딱히 여자로는 안 보이니까."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어디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이 벌어지고 그러한 와중에 말문이 막혔다. 여자로도 안 보인다는 말이 무례한 건 둘째 치자. 어디 가서 못난 외모라고 들을 정도는 아닌데. 오히려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면 들었다. 그런 제게 여자로도 안 보인다니. 진짜 또라이 아냐?! 무심코 육성으로 내질렀음에도 남자는 화내기는 커녕 코웃음을 칠 뿐이다.

 "내일 짐 싸서 갈 테니까 방을 하나 비워 놓으시던지. 아니면 소파를 주던지. 주소는, 요새 지도 어플 좋던데 찍어서 보내주면 알아서 가죠."

 제 할 말만 끝내고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남자는 먼저 사라졌다. 주성철 팀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백희는 굳어버린 채로 한참을 있다가 얼음이 녹으며 유리잔과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을 겨우 차렸다. 녹아버려 밍밍한 찬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비우고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 아까와는 다른 문제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저런 미친놈과 같이 산다는 게 여간 불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긴 했지만 주성철 팀장의 말이 틀린 구석은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고, 짜증나고 더러워도 선만 제대로 긋고 사생활만 잘 챙긴다면 별 일은 안 일어나겠지 싶었다. 하는 말을 들어보자니 그래도 침실을 탐내는 것 같지는 않았고. 제 방문에 자물쇠를 달아 놓기로 마음먹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ㅡ 그래서 뭐 하러 저랑 같이 살려는 거에요? 성인 군자라서 직접 보살펴주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니에요.

 ㅡ 멀쩡한가 보네? 한 손으로 문자 하는 거 아닌가? 나 가고 깁스 푼 거 아니에요?

 ㅡ 됐어요. 내가 괜한 거 물어봤네. 아니거든요.

#부제. 그 사람과 만나고 벌어진 일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있던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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