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가비지타임 성준수 네임리스 드림




 겨울은 추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절에 세상에 단둘인 것처럼 사랑했다.

 

순수의 시대








 겨울바람에는 강 내음이 흘러들어왔다.

 성준수는 뒷골목 출신이었다. 나라의 중심지라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에 살았다. 성준수가 사는 동네는 예외였다. 강변이라 여름이면 물 비린내가 썩은 물고기 시체 냄새와 함께 코를 찔렀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몰아쳤다. 강은 바다같이 넓었다.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성준수는 그걸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했다. 밤에는 양초를 켰다. 수리되지 않은 가로등은 방치되어 길거리가 어두웠다. 강 건너 또는 큰길로 한참 걸어가 나오는 주택가와 딴세상 같았다. 이민자들이 득시글거리는 동네는 법규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보안관들은 살인사건이 아닌 이상 관여하지 않았고 패밀리는 다른 패밀리로부터의 보호를 명목으로 주민들에게 돈을 거둬갔다. 그게 더 안전함을 사람들은 알았다. 기회의 땅이라는 기대에 부푼 것도 잠시,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였다. 삶에 허덕이고 하루라도 연명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남자들은 부두에서 일하거나 자그마한 가게로 먹고살았다. 여자들은 하루종일 삯바느질을 해 손끝이 뭉툭해졌다. 성준수의 가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준수의 아버지는 한참 걸으면 나오는 밝은 주택가의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주택가에서도 깔끔하고 멋들어진 부인들에게 바느질감과 빨랫감을 얻어 생활비를 충당했다. 부부는 성준수와 그의 여동생에게까지 생활에 보탬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밤낮없이 지문이 닳도록 일할지언정 자식에게는 경제적 사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너희는 지금처럼 잘 자라기만 하면 돼."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준수와 두 살 아래 여동생은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공부에 전념했고 그들 남매는 이렇게 불렸다. 똑똑한데 가난한 동양인들.

 코트에 중절모를 차려입은 남자들이 찾아온 건 이 땅에 정착한 지 사 년 즈음이 다 되었을 때였다. 십 대에 접어들고 청소년의 나이를 향해 향해 달려가는 성준수는 키가 한껏 커 처음 가져왔던 옷들이 맞지 않았다. 한겨울인데도 발목이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키가 많이 컸으니 새 옷을 맞춰야겠다며 웃었으나 성준수는 전날 밤 그들이 이번 달 상납금을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기한을 맞추지 않거나 금액을 맞추지 않은 자들의 말로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았다. 신원 명확한 시체가 발견되어도 보안관들이 형식상의 탐문 조사만 하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남자들에게선 차가운 겨울바람 내음이 났다. 항구의 물비린내는 배어있지 않았다. 두엇은 맵씨 좋은 정장에 모직 코트를 차려입었고 두엇은 편하게 입었으나 마찬가지로 따뜻한 차림이었다.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겨울나기에 돈 제법 투자한 이방인이라 이목을 끌 법도 했지만, 성준수의 아버지가 허둥지둥 이웃 눈치 보며 경계 풀고 문 안으로 들이기까지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집안 이방인 경계하기에는 생계유지만으로도 바빴다. 그중 드물게 약간의 악의와 제법 큰 이기심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나, 다행히 오늘은 아니었다.


"대부께선 귀하의 자녀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드리고자 합니다."


 특이한 성씨 가진 동양인 이민자 가족 아들이랑 딸이 똘똘하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성준수는 어머니 손에 등 떠밀려 성지수 손잡고 부엌 겸 현관 옆 창고 문에 들어갔다. 남자들은 정중했다. 주로 말을 하는 이는 이 동네에서 들어보지 못한 억양을 썼다. 부드러운 발음이며 목소리에서 교양이 느껴졌다. 피부가 햇빛에 그을리거나 눈동자가 새카맣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중해에서 온 이민자 집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부드러운 태도와 예의범절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임이 느껴졌다. 존중할지언정 굽히고 들어가진 않았다. 가족은 저희가 을의 입장임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 대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게 알려지면 만치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요."



 어머니의 말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구릿빛 피부에 덩치 큰 사내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동네 주민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리고 마피아들이 으레 그러하듯 지중해 출신의 외모였다. 담배를 오래 피워 노랗게 변색된 이가 드러났다. 그전까지 설명하던 부드러운 말씨의 남자는 멈추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들 사이의 신뢰가 엿보였다.



"만치니 따위는 신경쓰실 필요 없소, 부인."


 돌이켜보건대 그 반응은 아주 정중했다. 감히 대부에게 자그마한 뒷동네 실세를 가져다붙이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스워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남자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달에 한 번씩 수하를 시켜 교육비를 지원해 주겠다 밝혔다. 떠나기 전 발음이 부드러운 남자가 성준수에게 물었다.


"준수 군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변호사요."

"좋아."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당시의 성준수는 몰랐다. 변호사는 공부 좀 하는 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장래 희망이었다. 성준수는 변호사가 되어 성공하고 싶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성지수가 추위에 떠는 게 싫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문 닳도록 고생하는 게 싫었다. 인종, 출신지 그게 뭐라고 저희도 같은 이민자인 주제에 차별하고 수군거리는지 기분 더러웠다. 눈앞의 남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들을 지원해야 할 인재로 대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의 손에 두툼한 봉투가 쥐어졌다. 남자가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그 돈 봉투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은 명확히 남아있지 않았다. 한밤중 성준수가 눈을 떴을 때에는 세상이 불바다였다. 목이며 눈 코 입이 다 따가워서 깼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아닌 뜨겁다는 감각 자체가 피부를 덮쳤다. 벽지가 타들어가고 있고 창밖으로 불길이 넘실거려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성지수부터 찾았다. 방밖으로 나가는데 발길 따라 바닥이 푹 꺼졌다. 조각나 잿더미가 됐다. 엄마는? 아빠는? 성지수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중간이 뚝 끊겨있었다. 그 아래서 불길이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뛰어넘었다. 아래에도 없었다. 불에 타 반쯤 무너진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졌다. 나갈 길이 막혔다. 엄마는? 아빠는? 성지수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 이름을 외치지도 못했다. 성준수는 부엌 옆 창고의 쪽문으로 간신히 기어나갔다. 겨울 찬바람이 숭숭 불어온다고 아버지가 판자로 못을 박아 허술하게나마 막은 곳이었다. 불길에 타 뚫렸다. 쪽문은 뒷골목으로 이어졌다. 이웃집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무도 불을 끄려고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시발, 뭔가 잘못됐다.


“만치니가 제대로 확인하라고 했어. 다 죽은 거 확실해?”

“부부랑 여자애는 죽였어. 지금 불태울 거야. 헤이건이 줬다는 돈은?”

“아들이 안 보여!”


 그러니까….

 왜 화마로 넘실거리는 집 앞에 피투성이가 된 부모님이랑 성지수가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건지. 칼자국 잔뜩 난 채로. 바로 몇 시간 전에 잘 자라고 안아주던 부모님과 졸리다고 눈 비비던 성지수가 어째서.

 왜.


“아들 여깄어.”


 입을 틀어막는 지방 두툼한 손을 세게 물었다. 거친 욕설과 함께 바닥에 내쳐져 굴렀다. 성준수는 즉시 달렸다. 목에서 올라온 혈향과 공기를 가득 매운 기름 냄새 때문에 속이 역했다. 건조한 겨울 바람은 불길에 차가운지 뜨거운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목이 뜨거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죽을 것 같았다. 아파서인지, 그냥 정신적인 이유인지 몰랐다. 토할 것 같았고 머릿속이 녹을 것만 같았다. 달리고 달렸다. 골목길이 막혀있었다. 쓰레기 봉투 더미를 비집고 기어들어가자 조그마한 틈이 나 있었다. 성준수는 가까스로 기어 동네를 벗어났다.

 달릴 수록 주변 길가의 건물들이 점차 번듯해졌다. 유리창에 금이 가거나 벽돌의 이가 나간 건물 따위 하나도 없었다. 낯설었다. 간판 페인트칠 벗겨지려는 식료품 가게가 아닌 멋드러진 레스토랑, 의상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감 얻어오는 동네보다도 더 번듯하고 치안 좋은 동네. 딴세상보다 더 딴세상 같았다. 양초 키지 않고 밤인데도 창문마다 불이 환했으며 가로등은 밝다. 밤인데 환한 세상이다. 불길이 넘실거리지 않는데 환해 숨이 막혔다.

 뜀박질은 이제 걸음이 되었다. 숨이 머리 끝까지 찼다. 내쉴 때마다 피 맛이 났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도움을 요청해야 하던가?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죽이지.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직전 보인 건 어떤 여자애였다. 여자애 뒤로 야트막한 담벼락과 철장 너머 잔디가 드넓은 저택이 보였다. 다갈색 눈동자 한 쌍이 깜박, 하고 성준수를 바라봤다. 놀란 것 같았는데.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 성준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여자애가 성준수를 봤다. 어째선지 가까이에 있었다. 새하얀 이불보며 높다란 천장, 따뜻한 공기와 안온하게 꾸며진 실내가 낯설었다. 누워있는 침대가 제 방만큼 컸다. 시발, 여긴 어디야.


“일어났네. 잠깐 기다려 봐.”


 기다리랜다고 기다릴 성준수가 아니었다. 머리맡 협탁 위에 놓인 고풍스런 도자기 꽃병을 벽에 던져 깬 성준수가 그 조각을 잡고 여자애에게 덤볐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반쯤 덮치다시피 했다. 여자애 위에 올라탄 성준수는 붕대 칭칭 감긴 팔로 목과 어깨를 누르고 멀쩡한 손으로 자기 조각을 여자애 얼굴 가까이에 댔다. 바닥에 차분하던 여자애의 다갈색 머리칼이 흩어졌다.



“소리내지 마. 여기 어디야. 만치니가 잡아오래? 그 씨발새끼 어딨어.”


 제 입에서 나오는 게 이제 겨우 능숙해진 영어인지, 드문드문 주워들은 이탈리아어인지, 모국어인지도 몰랐다. 머리가 어질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걸 단단히 붙잡았다.

 여자애는 성지수 또래로 보였다. 성준수처럼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인종이었으나 살아온 처지가 다른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마냥 얼굴은 깔끔했고 입은 옷도 맵씨가 좋아보였다. 살결에 닿는 천이 부드러울 것 같았고 여자애의 살결 또한 그 못지않게 부드러울 것 같았다. 꾹 다문 입술은 야무졌고 성준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단호함이 깃들어있었다. 어떤 단호함인지 몰랐다. 마치 제가 성준수 밑에 깔려 위협받는 게 아니라 성준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무표정한데 그렇게 단호하고 야무져서, 성준수에게 가진 감정은 매정하지 않아보였다. 날카로운 자기 면이 제 뺨 바로 옆에 있음에도.

 성준수에게 물려받은 옷을 입던 성지수는 남자애 옷이라고 다른 애들이 괴롭힌다는 걸 부모님께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적응하고 나서 동네 다른 아이들에게 물려받거나 어머니가 며칠 밤을 손을 놀려 지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천이 질기지 못하고 엉성해 바람이 새었다.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성지수의 웃음은 언제나 선명하지 않고 물감에 번진 듯 흐릿했다. 단호함을 몰랐다.


“우리 집.”



 여자애 입에서 나온 건 모국어였다. 받침 발음도 선명했다.

 성지수는 되레 모국어에 서툴렀다. 너무 어릴 적에 이곳으로 와서, 가족과 대화할 때도 동네 이민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탈리아어와 영어 단어를 드문드문 섞어 말했다.



“…뭐?”

“잡아오라고 안 했어. 적어도 나한테는. 어디 있는지는….”



 복통에 숨이 막혔다. 침착하게 무릎으로 성준수 복부를 타격한 여자애가 고통에 그대로 제 어깨에 엎어진 성준수를 밀어냈다. 성준수는 반항조차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여자애가 컥컥거리지도 못하는 성준수의 손목을 쳐 자기 조각을 빼내 발로 찼다. 소란에 침실 문이 열렸다. 안경을 쓴 지중해 출신 남자였다. 도자기 조각과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성준수와 여자애를 보고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성준수의 팔을 우악스레 잡아일으켰다.


"돈 치치, 걘 침대 위에 둬요. 잠깐 둘이 얘기 좀 할게요."

“저 아이하고 단 둘이 둘 순 없어.”

“괜찮아요.”


 어린 목소리는 맑고 거친 구석 하나 없었다.

 성지수는 한겨울에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집에 살아 언제나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성준수는 침대에 내팽개쳐졌다. 다시 문이 닫혔다.


"있잖아. 방금 나간 아저씨 봤지? 밖에 저런 사람 많아. 다들 총 갖고 있어."


 여자애는 저보다 한참 크고 덩치 있는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능숙했다. 성준수가 일어나면 올려다봐야 할 텐데, 덩치 좀 크고 붕대에 드레싱을 감고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남자애를 말 안 듣는 고양이처럼 가볍게 취급했다.

 어린 나이에 이민 와 언어니 외모니 하는 것에 괴롭힘 꽤나 당한 성지수는 잔뜩 주눅 들어 제 오빠에게도 말 제대로 걸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침대 위로 올라온 여자애가 무릎걸음으로 성준수에게 다가왔다. 거침없었다. 야. 여자애가 성준수의 정수리 머리채를 붙잡았다. 가까웠다. 흰 뺨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보였다. 아까 성준수 배 차고 자기 조각 빼앗다가 베인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이 마주쳤다. 성준수는 여자애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여자애 내칠 새도 없이 턱과 성대 사이가 붙잡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손끝 위로 곱게 기른 손톱 따라 살이 파였다.

 성지수는 겨울 바람에 손이 터서,


"내 말 안 듣고 딴 생각해도 괜찮고 아까처럼 되도않는 협박해도 괜찮아. 근데 계속 그러면 네 가족처럼 죽어."


 짧은 순간 성준수는 책 빼곡한 서재가 아니라 매캐한 기름이 불타오르는 부두에 있었다. 화마가 넘실거렸다가 눈 깜박이는 순간 사라졌다. 눈 앞에 있는 건 세상의 경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불속에서 발견한 잿더미가 아니라 제 또래 여자애였다.

 성준수는 제 목을 쥔 여자애를 노려봤다. 저와 같은 나라 출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동자가 다갈빛을 띠었다. 시발, 얜 성지수하고 다르다. 성지수가 아니다. 그러니까 저 따위로 굴지. 비교는 무의미했다.


"근데 내 말 잘 들으면, 내가 너 도와줄 수 있거든...."


 가는 손목은 좀만 힘 주면 부러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성준수가 제 목을 쥔 여자애의 손목을 꽉 쥐었으나 여자애는 아랑곳않았다. 되레 목이 조여왔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말 잘 들으라고. 응? 되새기는 목소리는 친절했다.


"만치니 그거, 원래 피라미 새끼라 상관없는데 파누치 쪽으로 넘어가서 지금 당장은 못 죽여. 죽이려면 시간 좀 걸려. 걔가 파누치에서 큰 사고를 치고 좌천됐는데 그래도 부하는 부하인 모양이지."


 숨이 막히는 와중에 정신은 더 선명해졌다. 상납금을 요구하던 비대한 몸뚱아리와 마디조차 구분하기 힘든 두꺼운 손가락이 아른거렸다. 아들과 돈을 찾던 그 피라미 새끼 아래 피라미. 성지수와 부모님의 시체….


"죽을래, 죽일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성준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끌어내어 말했다.


"손 풀어, 시발...."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성준수의 상태를 성심성의껏 살폈다. 성준수는 그 과정에서 제가 어떤 꼴인지 자각할 수 있었다. 먼지투성이이던 몸은 깨끗했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붕대도 감겼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더듬거렸는데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가벼운 화상이 있으니 연고를 발라야 하며 폐와 목에도 화상이 있으니 앞으로 지속적인 진료가 필요할 거라 했다. 적어도 뒷동네 야매 의사처럼 야바위 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성준수는 의사들이 들고 다니는 진료 가방에 저렇게 뭐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바라는 게 뭐야. 존나 친절하네. 믿을 수 있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길래. 얜 뭐하는 얘고. 생각 돌리는 중간중간 칼자국 나 있던 부모님과 성지수의 시신이 떠올랐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열이 몰렸다. 문득 코에 부드러운 천이 닿았다. 여자애가 손수건으로 성준수 코를 꾹 누르고 있었다. 강제로 숙여진 고개 때문에 새하얀 이불에 떨어진 핏방울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쓸데없이 머리 굴리니까 피가 나는 거야.”

 여자애가 조곤조곤 말했다.

"그만 생각해."

 내 말 잘 듣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래서 성준수는 약속을 지켰다. 생각을 멈췄다.

 여자애도 약속을 지켰다. 여자애 시키는 대로 주는 대로 받아먹고 배우고 잘 씻고 치료도 거부 안 했다. 인간처럼 살고 주는 대로 받아먹기, 처음 시작할 때는 좆같고 속 뒤집혔는데 하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잘하게 됐다. 성준수에겐 지니고 살아가야 할 목숨값이 있었다. 성준수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시간과 삶은 결코 개같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의 몫이었으니까.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는 권총을 받을 수 있었다. 성준수를 찾아온 건 지원해주겠다 찾아왔던 남자들 중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덩치 큰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아반단도라 소개했다. 전형적인 지중해 출신 이름이었다.



 "준수. 간부는 굳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 너는 명령하는 입장이야. 대부는 사내 자식이 가족의 원수를 죽이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해."



 내가 언제부터 니 새끼들 간부였다고. 대부는 무슨 놈의 대부. 성준수는 침묵했다. 아반단도가 한숨을 쉬었다. 만치니가 다시 나타났어. 이번 주 일요일에 도박장으로 외출할 거야. 긴장이 풀렸는지 파누치 쪽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 있는 도박장으로 오더라. 너희 가족 우리가 지원하는 거 아는데도 건드렸을 때도 느꼈지만 조무래기라는 입장에 맞지 않게 멍청하고 간이 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직접 해야 할 필요는 없어. 너는 어리고 이 정도 처리는 우리가 말단을 시켜서....



"이거."



 성준수는 차가운 총신을 쥐었다. 묵직했다. 코앞에 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머리를 쏘면 한 방에 갈 터다.



"쏘면 됩니까?"

"그렇게 쥐면 손목 나가."



 아반단도가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엄지를 제대로 고정시켜야 해. 총을 들었으면 고민하지 않고 쏴. 반동은 크지 않을 거야. 풀을 발라서 네 지문을 가릴 거야. 총은 버려. 억지로 휘두를 필요 없어. 손에 힘을 뺀 채로 팔을 내리면 총은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질 거야. 불필요한 소음이 나지 않으니 이목을 집중시키지도 않아. 조용히 빠져나오면 돼. 애초에 만치니는 하급 중에서도 하급 간부니 우리 쪽에서 관여했다는 증거만 남기지 않으면 큰 화제가 되지 않아.


 그리하여 행한 첫 살인은,

 놀랍도록 감흥없었다.


 일요일, 빈민가의 유일한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날이었다. 인간이란 절박할 수록 신적인 존재에 매달리는 법이라 동네 많은 이들이 집안에 십자가 하나쯤은 두고 살았다. 제 손에 피를 묻히고 고해성사를 했다. 동네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던 성준수는 신앙의 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국에 떨어지길 바라지도 않았고 신을 믿지도 않았다. 제 눈 앞에 있는 비루한 개새끼가 제 손에 죽기만을 원했다. 늦은 아침 도박장에서 나온 만치니는 골목을 타고 움직였다. 성준수는 그 뒤를 밟았다. 잦아들지 않고 이어지는 발소리에 만치니가 뒤를 돌았다. 짜증스레 벌어진 입이 성준수를 발견하고 크게 벌어졌다. 성준수는 소리가 나오기 전 총알을 그 목구멍에 박아넣었다. 탕! 한 발 더 쐈다. 이번엔 번들거리는 이마였다.

 언젠가 상상했던 것처럼 손이 피로 범벅이 되지도 않았고 목을 조르느라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제 가족이 죽었을 때처럼 재와 건물 잔해가 먼지처럼 흩날리지도 않았고 기름 탄내와 쓰레기 썩내가 나지도 않았다. 갓 사람을 죽인 것치고 성준수는 아주 깔끔했다. 시체 또한 깔끔했다. 이마에 난 구멍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욕심 많던 눈깔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너무나도 쉬웠다.

 저 시체가 어머니와 아버지와 성지수의 목숨을 해쳤다는 게 믿기지 않으리만치.


 학교에서 농구할 때의 클러치 샷과 비슷하다 생각했는데 달랐다. 성준수의 공은 스몰 포워드가 수비하고 빅맨들이 스크린 서고 포인트 가드가 공을 놀려서 오는 것이었다. 성준수의 살인은 패밀리의 간부들이 총을 가르치고 급소를 가르치고 말단 조직원들이 타겟의 경로와 일정을 알아와 성립되었다. 처음 클러치 샷을 넣을 기회가 생겼을 때 성준수는 신이 난 채로 골을 집어넣었다. 첫 살인은 시간 제한이 없었고 신나지도 않았다. 허망했다. 성지수와 부모님의 복수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 자리를 어떻게 벗어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팔을 내렸어야 하는데, 총은 어떻게 손에 떨어졌는지 몰라도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반단도 아저씨가 잘못 쥐면 손목 나간다고 말 안 해주셨어?"


 여자애가 다가왔다. 여자애는 성준수의 손목을 잡고 총을 떼어냈다. 그리고 두 손을 꽉 맞물리게 잡았다. 그제야 성준수는 제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한참이 지나 떨림이 멎자 여자애는 성준수를 끌어안았다.

 한겨울 바람이 찬데 여자애 품은 따뜻했다.









 그날부로 성준수는 패밀리에 녹아들었다. 사람들은 우두머리를 대부라 부르며 따랐다. 그래서 성준수도 그렇게 했다. 나이가 지긋하든 성준수 또래이든, 패밀리 내부의 사람이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든 모두가 그를 대부라 불렀다. 대부라 부르지 않는 건 여자애와 대부의 아들들이라는 세 명뿐이었다. 그들은 대부를 아빠라 불렀다. 대부와 아들들은 지중해 출신이고 여자애는 아무리 봐도 저와 같은 나라 출신인데도 그랬다. 대부의 친자들은 여자애를 막냇동생 취급했고 대부는 고명딸 취급했다. 특히 장자이자 여자애의 첫째 오빠인 소니는 대부 못지않게 제 여동생을 아꼈다.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성준수에게 여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그 정도로 여자애는 사랑받았다.

 대부와 간부들은 성준수를 여자애 옆에 붙였다. 같이 먹고 같이 학교에 다녔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차에 올라탔다. 학기 중에 한 번 저택으로 돌아올 때면 총 쥐여주고 땅바닥에서 구르는 걸 가르칠 줄 알았는데 만찬에서 식기 쥐는 법이나 파티에서 춤추는 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성준수는 총을 다루는 법과 몸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 요구했다. 여자애는 제대로 싸울 줄 모르니까. 걔가 싸울 일이 생기는 게 싫었다. 성준수는 복싱과 가라테와 태권도를 배웠고 그 어떤 체술보다도 사격술에 가장 큰 재능을 보였다. 아반단도는 성준수가 패밀리 최고의 저격수가 될 거라 장담했다. 대부는 성준수가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길 바랬고 성준수에게 카포레짐이 될 필요가 없다 말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었다.

 대부는 그 호칭처럼 아버지마냥 성준수를 대했다. 자주 불러 지내는 건 어떤지 어려운 건 없는지 물었다. 간혹 뜻모를 이상한 질문을 던질 때도 있었는데 대개의 경우 성준수의 대답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럴 때면 푸근한 웃음을 짓고는 성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부가 요구하는 건 간단했다. 학교에서 상위권의 성적. 여자애와의 가까운 관계. 진로는 변호사나 판사. 현 콘실리에리인 헤이건 또한 변호사였다. 패밀리가 똘똘하다 소문이 난 이들을 눈여겨 보는 건 성준수만이 아니었다. 머리 굴릴 줄 아는데 돈 없는 아이들은 흔했고 대부는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들이 자라 사회 곳곳에서 경찰로, 변호사로, 판사로 패밀리의 연줄이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성준수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는 명령대로 따르는 게 제법 제 적성에 맞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따르긴 따르는데 좆같이 따랐다. 패밀리는 성준수에겐 가족만큼은 아니어도 돌아갈 곳이었다. 그들은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좆같이 따라야 하는 명령이 내려오는 건 여자애와 함께 다니는 학교에서였다. 담쟁이 넝쿨이 건물을 온통 덮는 유서 깊은 학교에서 동양인은 여자애와 성준수뿐이었다. 양놈 새끼들은 여자애한테 붙은 성이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꼭 시비를 걸었다. 그런 놈들은 성준수가 죽어라 팼다. 여자애는 제게 찢는 눈 흉내를 냈다가 다음날 피떡이 되어 사과하는 애들을 보고도 성준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네 인종으로 놀리지 않겠으며 그간 내가 편협했다 구구절절 사과가 들려오면, 여자애는 다갈색 눈을 깜박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성준수의 팔을 툭툭 쳐 자리에서 벗어났다.

"얼마나 다쳤어?"

"안 다쳤어."

 팔뚝이 꼬집혔다. 반사적으로 시발거린 성준수가 물러났다. 여자애는 빤히 성준수를 바라봤다. 셔츠 아래 멍자국이 보였을까 싶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얼굴."

 여자애가 가볍게 손짓했다. 성준수는 머뭇거리다가 그 말에 따랐다. 얼굴이 붙잡혀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붙인 턱 근처 밴드 경계가 여자애 부드러운 손끝에 만지작거려졌다. 남들 다 지나다니는 복도 한복판에서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저희 둘이 그런 거 따지기에는 이미 이상하고 가까워 보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흉 안 지면 언젠가 내가 너 면도해줄게."

"이 정도로 흉이 지겠냐?"

"안 지면 좋지. 이 얼굴에 흠집 나면 아쉬워져."

 그날 여자애가 성준수를 데리고 보건실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한 말이었다.

 여자애한테 시비를 걸지 않으니 성준수한테 꼭 시비를 걸었다. 성준수는 그 새끼들도 팼다. 예외라면 성준수가 속한 클럽 간부들 정도였다. 학생회, 운동부. 위계질서라는 걸 알게 되면서 패려면 팰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성준수는 농구 클럽 주장이 까라면 깠다. 날마다 팔굽혀펴기 세 시간을 이 주간 시켰을 때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여자애를 등에 앉히고 세 시간 팔굽혀펴기를 삼 주 방학 내내 했다. 새끼가 주전에서 빼려고 들면 다음 경기에서 성준수 이름 석 자가 관중석에서 연호되게 만들었다. 주장이 감독 몰래 성준수더러 운동장 백 바퀴 돌라 하면 이백 바퀴를 돌았다. 농구 클럽 주장이 졸업할 때 성준수는 새로운 농구 클럽 주장으로서 그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날렸다.


 여자애는 한 번도 성준수의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다. 성준수 또한 여자애에게 경기를 보러 오라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어떤 허락이나 요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수업이 겹치면 옆자리에 앉았고 팀 과제가 있으면 함께 했다. 대부에게서 오는 편지에는 꼭 여자애의 안부를 전했다. 농구 클럽 연습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여자애를 데리러 갔다. 여자애는 주로 도서관 구석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창가 자리 추우니까 안쪽 책상에 앉아 읽으라고 해도 그렇게 했다. 성준수는 그럴 때마다 씨바거 거리면서 제 교복 재킷을 여자애 무릎에 덮어줬다.



“Grazie, Bacio.”


 

여자애는 짤막한 한 마디만 남겼다. 그 애는 대개의 경우 본론부터 꺼내거나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아주 가끔 그를 부를 때는 바치오라 칭했다. 제 3자에게 성준수에 대해 얘기할 때는 뭐라 부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 애가 성준수를 부르는 이탈리아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나중의 일이다.

“야.”

 성준수는 여자애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이탈리아식 발음의 그 이름은 다른 패밀리 간부들의 이름과 달리 영 입에 붙지 않았다. 또래보다 조금 어려 보이고 머리가 단정하며 코며 눈이 오밀조밀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냥 다른 사람들 잘만 부르는 여자애 이름이 어색하다 느껴졌다. 그렇다고 모국어 이름을 묻자니 질문을 하려면 입이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평생 거리낄 것 없이 말하며 살아왔는데 여자애한테는 머뭇거리게 됐다. 스스로가 꼭 스스로가 아닌 것 같다. 성준수는 그 점이 불편했다.

“야. 오늘 아침 왜 안 먹었어.”

안 그래도 쥐꼬리만큼 먹는 게- 본인이 운동부 남자 청소년이며 상대는 지극히 평범한 체력의 평범한 여학생임을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늘은 만찬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배운 대로 예의 차려 노크를 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쯤 되면 그답지 않게 많이 참았다.

“들어간다.”

여차하면 손잡이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냥 방에서 안 나온 게 아니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불에 푹 파묻힌 몸은 온통 식은땀이 나 있었다. 눈을 감은 여자애는 성준수가 다가가자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여자애 방이 처음이라서인지 여자애가 불편해서인지 몰라도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멋대로 행동하는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여기서 욕을 쓰고 싶지도 않아서, 그는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냥 가. 사감 선생님께는 오늘 수업 빠진다고 이따가 말씀드리면 돼.”

딱 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무리인데 뭔 소리야. 여자애와 성준수 사이의 거리감은 이상했다. 여자애는 절대 개인적인 얘기-가령 여자애들 사이에서 있던 일이나 수업시간에 발생한 사소한 에피소드-를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둘은 당연하게 붙어다녔다. 그 이상한 거리감이 여기서 나오려는 모양이다. 성준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화장대 쪽에 놓인 의자를 가져다가 침대 옆에 놓아 앉았다.

“내가 말씀드릴 거야. 그 전에 너 재우고.”

“그냥 가라니까?”

“내가 너 재우겠다는데 불만 있냐?”

“너 나 불편해하잖아.”

“씨바 거….”

정곡을 찔렸다. 성준수는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병자 특유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부정할 생각이 있었나? 확실한 건 성준수는 지금 이 순간도 제멋대로 빠르게 뛰는 심장과 클러치 샷을 넣을 때도 긴장하지 않던 몸이 자꾸 굳으려고 해 불쾌했다. 그럼에도 여자애의 너 나 불편해하잖아, 라는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어, 나 너 불편해. 근데 네가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나도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긴 한데 네가 나를 너 불편한 사람으로 판단하면 좀 돌아버릴 것 같거든.

“근데 항상 내 곁으로 와. 이해가 안돼….”

성준수는 그야 대부랑 간부들이 나한테 네 옆에 붙어있으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말하기 전 그게 답이 아님을 알았다. 농구 클럽 주장의 좆같은 명령과 달리 패밀리의 요구는 단 한 번도 이행하는 데에 있어 무리라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성준수는, 여자애 옆에 붙어있는 게 싫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또한 여자애는 제법 무심한 성격이니 성준수가 제 곁에 붙어있지 않더라도 대부에게 말하지 않았을 터다.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아빠나 오빠들이나 다른 간부들한테 이미 신뢰받잖아. 성적도 좋고. 모국어가 그렇게나 듣고 싶어서 그래?”

시발, 아니야. 내가 고작 같은 언어 쓴다는 이유 때문에 네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겠냐? 성준수는 답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어떤 감정으로 대했는지 알았고, 수많은 문학 작품 속 연인들이 속삭이는 감정을 알았다. 따라서 제가 가진 답답함을 뭐라 이름 붙이는지도 알았다. 어느새 저를 향해 돌아누운 여자애의 다갈색 눈과 마주쳤다. 그래, 저 눈. 저 눈을 볼 때면,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몰라.”

그래서 성준수는 대답 대신 여자애 이마 위 땀에 흐트러진 잔머리나 넘겨주었다.

“Sei un'idiota.”

 여자애가 중얼거렸다. 알아듣지 못할 이탈리아어였다.

 그날 성준수는 꿈을 꿨다. 여자애가 나왔고, 꿈속에서 그들은 성준수가 상상 못한 일들을 했다. 꿈은 무

의식의 반영이라니 성준수가 자각 못했을 뿐 항상 생각해오던 일들일지도 몰랐다. 간만에 한밤중에 잠에 깬 성준수는 제 앞섬을 확인하고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씨발….”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고학년이 되며 성준수는 사 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모국어. 여자애랑 같이 다니며 사립학교에서 배운 프랑스어. 영어는 어린 시절 뒷골목의 역양과 영국식 억양, 프랑스식 억양, 도시의 높은 사람들의 억양. 뒷동네 살 적 배운 단어와 패밀리 간부들이 때때로 외치는 토막난 어휘를 긁어모아 그럴싸하게 할 줄 알게 된 이탈리아어. 그래서 바치오의 뜻도 알게 됐다. 제 머릿속 감출 줄 알게 된 성준수는 간부들이 그 단어 어디서 들었냐며 재미있어하자 적당히 둘러댔다. 여자애가 가끔 그렇게 부른다고 하면 놀릴 것 같았다. 아니, 놀린다 뿐인가? 소니가 알게 되면 저를 죽이려 들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스쳤다. 숨 넘어갈 듯 웃던 아반단도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준수, 아직 키스 안 해봤어?’

 그 격식 넘치는 헤이건마저 아반단도의 말에 키득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키스가 거기서 왜 나와? 학교 다닐 때 가끔 으슥한 곳에서 목격할 수 있던 제 또래 애들의 진득한 스킨십이 떠올랐다. 이내 의미를 이해한 성준수가 씨발로 시작하는 욕설을 줄줄이 내뱉고 자리를 떠났다. 간부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성준수 뒤를 따라왔다. 준수, 이제 우리 앞에서도 시발 말고 fuck으로 시작하는 욕 좀 써!

“야, 야. 장난하냐? 너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불렀어?”

 시바거 진짜 너는 나를 아주 그냥 물로 보냐? 심지어 최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둘이 처음 만났던 즈음부터 그 따위로 불렀다. 키스? 장난해? 내가 왜 네 키스야 너 나랑 입 맞추고 싶기라도 해? 성준수는 처음으로 여자애한테 화를,

“아빠가 가끔 나 부르시는 애칭인데. 우리 엄마도 그렇게 불렀어.”

“미안하다.”

 내려다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럼 그렇지. 여자애가 무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성준수를 그렇게 부를 리가 없었다. 그날 성준수는 애꿎은 샌드백이나 죽어라 쳤다. 간만에 이상한 꿈을 꿔서 새벽에 화장실에서 거울에 머리를 박았다.

해가 지날수록 성준수는 성장했다. 원래도 크던 키가 훌쩍 커 패밀리 내에서 그보다 큰 사람은 없었다. 평생 실내에서만 생활한 것처럼 피부가 하얬고 원래 잘 빠졌던 이목구비는 한결 날카로워졌다. 투박하던 억양은 유려해졌고 교양이 느껴지는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모국어도 남아있었다. 모국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성준수는 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가끔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빗어넘긴 채 와인잔을 손에 쥐고 가식 떨다 보면 뇌 한구석이 총 맞은 것마냥 흘러내리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양놈들 버터바른 발음 느끼하다고 욕했는데 그걸 매 순간 하고 있고 심지어 존나 잘하니 가끔 진절머리가 나 쌍욕이라도 해야 했다. 여자애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데에 별 관심은 없어 보였지만 성준수의 장단에는 맞춰줬다. 이 땅에는 모국어를 알아듣는 이가 없어 영어로 우아하게 가식 차리고 모국어로 쌍욕하기 편했다-비록 간부들은 성준수를 알았으니 그가 욕설을 살벌하게 중얼거리면 준수, 노시발!이라고 외쳤지만-.

첫 무도회는 학교가 위치한 주州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자선 무도회였다. 성준수는 학생회 자격으로 참여했고 여자애 또한 다른 동아리 회원 자격으로 왔다는 사실을 거기 가서야 알았다. 드레스 입은 걸 그때 처음 봤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틀어올렸다. 화려하지 않은 장신구에 화장도 옅게 해 또래 서양인들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외모가 청순하게 느껴졌다. 처음 1초 동안 성준수는 대놓고 당황해 멈춰섰고 그 다음 1초간 쟤는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라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다음으로 그는 멍때렸으며, 마지막으로 걔한테 흘끔흘끔 눈 돌리는 새끼들에게 분노했다. 나한테 말하지. 그랬으면 내가 파트너로 가는 건데. 대부도 내가 파트너로 가는 걸 더 좋아할 거 아니야.

그래서 성준수는 테이블 위 조각케이크 하나 집어먹는 여자애에게 공격적인 말투를 숨기지 않았다.

“너 거기서 뭐해.”

“파트너 신청 기다리잖아. 디저트 먹으면서.”

 할 말이 없었다. 온갖 예의범절 배우고 무도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당연히 알았지만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눈앞의 이 애가 다른 사람한테 파트너 신청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랑 춤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여자애가 제 뒤의 테이블 위에 놓인 댄스 카드를 톡톡 두드렸다. 성준수는 근처에 있는 만년필을 들어 여자애 댄스 카드에 제 이름 석 자를 유려한 필기체로 적었다. 제자리에 내려놓으려다가 순간 드는 반항심에 그대로 제 가슴팍 플라워 홀에 집어넣었다. 여자애는 그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여자애와 처음 추는 춤이 아닌데 괜히 긴장되었다. 패밀리의 크리스마스 파티 때나 예법 수업 때 서로 파트너로 연습하던 것과 달랐다. 둘은 홀의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여자애 손이 성준수 어깨에 올려졌다. 손을 맞잡았다. 성준수는 반대쪽 손을 걔 허리에 올렸다. 더 이상 시야에 걔 말고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눈 앞의 걔에게 집중되었다. 흘러나오는 왈츠 세 박자보다 걔 숨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렸다. 가볍게 스텝 밟으며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드러나는 구두 끝과 빙글 돌 때 꺾이는 몸의 각도를 따라 휘감기는 천. 희미한 향수 향. 제 손 아래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살결 같은 것들. 걔의 모든 게 지나치리만치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의 감각을 장악했다.

 정신 차려보니 음악은 끝나있었다. 맞잡은 손을 떼어내기 아쉬워 머뭇거리다가 남들 시선 집중될 때 즈음에야 겨우 놓았다.

"이제 잘 가."

"뭔 개소리야."

"두 번째 춤은 첫 춤 파트너하고 못 추는 게 규칙이잖아."

"별 좆같은 규칙이 다 있네."

 당연하지만 성준수도 그 규칙 알고 있었다. 학교와 패밀리에서 예의범절 어쩌고 이하 생략 배웠으니 당연했다. 여자애 댄스 카드가 제게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바로 옆에서 춤췄던 커플의 남자 파트너가 걔에게 다가왔다. 성준수는 몇몇 여학생들이 제게 다가오는 걸 물렸다. 두 번째 춤은 출 생각 없다. 디저트 테이블로 물러나 잠시 벽의 꽃 노릇하기 전 걔한테 확실히 해둘 게 있었다. 성준수는 그새 슬슬 몰려드는 인파 사이에서 걔에게 허리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이 다음부터는 나랑만 춤춰."


 아마 성준수가 처음으로 한 자락 꺼내놓았을 걔에 대한 바람이었다.

 그 애가 이미 내 댄스 카드 가져가놓고 이제 와 허락받는 거냐며 웃었다. 어쩐지 귀와 뺨이 발그레했다. 성준수는 제 모습도 그와 비슷하리란 걸 알았다.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참여하게 된 학기마다 있는 프롬에서 둘은 언제나 파트너가 되었다.

 몇 년 지나 졸업을 앞둔 둘은 도시의 상류층 집안이 초대하는 파티에서도 언제나 파트너였다. 패밀리는 도시에서도 실세였고 대부는 도시의 대부였다. 지중해 출신 이민자와 마피아 박해하는 상류층은 차마 도시의 높으신 분들과 신문에 허다하게 실리는 사람들까지 무시하진 못했다. 대부의 영화계 유명인사들과 정재계 유명인사들은 대부 쪽 인물로 둘을 온갖 파티에 초대했고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로 불려다녔다. 가끔 정장이 교복보다 더 익숙하게 몸에 감겼다. 그건 여자애도 마찬가지였다. 그 작은 몸에 비단이며 모슬린이며 이름 모를 값비싼 천과 드레스가 감겼다. 본래 여자애는 성준수의 코만큼 키가 닿았는데 이제는 성준수의 어깨에 겨우 왔다.

 여자애는 휴게실에도 성준수를 데려갔다. 사람들이 성준수가 여자애를 에스코트하며 사라지면 그 뒤에 대놓고 수군거렸다. 본래대로라면 성준수는 시발새끼들 뭐라 떠드냐며 욕을 했겠지만 여자애가 엮이니 그러지 못했다.

 여자애 에스코트만 몇 년째였다. 여자애는 가끔 성준수에게 코르셋을 조여달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자애의 다 드러난 목이나 어깨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다. 목에서 날개뼈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애썼다. 성준수가 파티장 안에서도 어깨에 제 재킷을 걸치려 들면 여자애는 질색했다. 성준수는 파티장에 오고 갈 때만 여자애 어깨를 가리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여자애에게 오는 남자들의 시선에 빡도는 건 당연히 성준수의 몫이었다. 얘는 왜 자라날수록 예뻐져선.

 여자애가 휴게실 카우치에 기대자 드레스 아래 가슴골이 성준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색하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괜히 더웠다. 여자애가 카우치 손잡이에 몸을 뉘였는지 드레스 자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그마한 발이 성준수의 허벅지를 스쳤다. 시발, 하는 한 마디를 삼켰다. 야.


"휴게실은 그냥 혼자 다녀. 사람들이 너랑 나랑 붙어먹는 줄 알잖아."

"신경쓰여?"

"어, 완전."


 존나 신경쓰였다. 얘라고 휴게실에 남녀가 단둘이 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게 아닐 텐데도 이러니 속이 터졌다. 사람 생각이란 거기서 거기라 저 파티장 모두의 머릿속 성준수와 여자애는 벌써 몇 번이고 붙어먹은지 오래일 터다. 그러나 여자애는 신경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한테 하던 것처럼 신경 끄고 네 맘대로 살아."

"넌 그게 돼?"


 카우치 손잡이에서 머리를 뗀 여자애가 턱을 괴고 성준수를 바라봤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또 말문이 막혔다. 여자애는 솔직하게 내뱉는 성준수가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격식 차리면서도 마음대로 살던 성준수가 제 마음대로 대하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안 될 게 뭐가 있냐고?


"왜. 신경쓰일 만한 이유라도 있어?"


 있다, 이유. 존나 있어서 문제였다. 너는 아니라서 상관없는 모양인데, 나는 찔릴 만한 이유가 있거든. 그래서 신경쓰여. 사람들이 너를 주제로 그딴 저급한 소문을 떠드는 게 싫어. 너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줄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뭐라고 감히. 그런 상상 속에서 네가 얼마나 노리갯감이 되는지도 싫어. 내 꿈에 종종 나오는 네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아? 깨어나면 정말 좆같아. 나는 네가 내 꿈에서 벗겨지는 것도 싫은데, 그 새끼들 상상에서 벗겨지는 건 싫다 못해 혐오스러워.

 침묵을 유지하는 성준수에게 여자애가 다가왔다. 한 손은 카우치 등받이에 기대고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로. 여자애의 손이 카우치에 기댄 성준수의 어깨에 가까워졌다. 흰 손가락이 목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 옛날, 온 힘을 다해 쥐던 것과 다른 손길이었다. 부드러웠고 간지러웠다. 여자애와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지던 답답함은 묵직하게 변해 혈관을 울렸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어."


 성준수는 여자애를 제 품에 가두었다. 제 등을 짚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여자애가 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 웃음이 뭇내 사랑스러웠다. 성준수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그래. 나는 네 앞에 서면 내가 아닌 것 같아 불편했는데, 한편으론 네가 웃으면 나도 웃고 싶었어. 네가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어. 여자애가 성준수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Bacio.


“왜.”

“너 말고, 바보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여자애를 안은 팔을 당겼다. 성준수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여자애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제 이마를 성준수의 이마에 가볍게 부딪혔다.



“지금은 널 부르는 게 아니야.”


 부드러운 이마가 닿았다. 다갈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속눈썹이 선명했다. 한 손으로 여자애의 뒷목과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잡았다. 알았다. 지금은 성준수를 부르는 게 아니다. Bacio의 원래 뜻은.


“Dammi un bacio.”



 허락이 떨어졌다. 아니, 요청인가. 여자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꿈에서 몇 번이고 했던 행동이었으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부드러웠다. 그대로 떨어졌다. 살짝 눈을 내리뜬 여자애가 숨을 쉬었다. 제가 먼저 다가와놓고서 두 뺨이 붉어져 있는 게, 앞으로 어쩔까 싶어 퍽 귀여웠다.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다시 입술을 짓누른다. 다만 거칠었다. 아까의 접촉과 달리 격렬했다. 몇 번 입술을 문지르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여자애가 뭐라 말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제 혀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느 순간 여자애는 성준수의 목 뒤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공기가 뜨거웠다. 혀를 감싸안았다가 입 안을 훑었다. 성준수는 처음으로 여자애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떤 게 노골적이었나. 그냥. 그 감정이. 의도가. 욕망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뜨거웠다. 여자애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으나 성준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네가 먼저 나를 바치오라 불렀고, 내게 그 애칭처럼 키스해달라 요구했어. 소문을 진짜로 만들어도 상관없지 않냐 물었던 건 너잖아. 네가 먼저 나를 구했고, 약속처럼 내게 총을 주었고, 너에게 감정을 주도록 만들었고…. 아니, 결국 네게 내 모든 걸 내어준 건 나다. 그러니 입 벌려. 이 관계에서 나도 주도권을 잡아야지.

 키스가 끝나갈 즈음에 여자애는 성준수에게 기대어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성준수는 여자애를 단단하게 받쳤다. 그는 여자애가 숨을 몰아쉴 때 여자애의 다른 손바닥 위에 가만히 입맞췄다. 눈이 마주쳤다. 다갈색 눈동자는 정확히 같은 욕망과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건 그 밤의 첫 키스였지 마지막 키스가 아니었다.












 성준수는 담쟁이 넝쿨 짙은 동부의 유명 사립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다. 여자애는 같은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둘은 대학에서도 함께였다. 패밀리는 성준수와 여자애의 멘션을 따로 구해줬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여자애는 성준수의 멘션에 자주 찾아갔고 성준수는 그보다 더 자주 여자애를 찾아갔다. 아침에 함께 눈뜨는 날이 잦았다. 그보다 더 자주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보다 더 자주 입맞췄다. 제 손에 잡히는 부드러운 살결이 좋았다. 과제 때문에 밤을 새워 부은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 위에 입맞추면 당황하는 게 귀여웠다. 이탈리아어나 모국어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만사에 무심해보이다가도 저와 눈 마주치면 생기가 도는 게 좋았다. 뒤에서 안아 허리 숙이면 제 턱에 닿는 정수리가 좋았고 앉아있는 것도 서있는 것도 걷는 것도 다 귀여워만 보였다. 감정이 통하고 나니 그 애 앞에서만 긴장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납득되었다. Ti amo. 졸업하고 나면 그 문장을 말해야겠다 생각했다. 반지와 함께. 여자애에게 어울리는 반지를 찾아 한 달 동안 도시 곳곳의 보석상을 뒤진 건 비밀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건 금간 유리창처럼 위태로우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두었다가 모든 게 명확해지고 나서. 그때의 우리는 양지의 직업을 가진 민간인일 테니까.

 꽃다발을 사 갔다. 여자애 멘션에 가는 길에 있는 꽃집에서, 최대한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안개꽃이 한 손에 쥐일 만큼 모이면 그 안에 장미꽃이 포개어졌다. 여자애는 꽃병에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미꽃이 먼저 시들었다. 꽃병에는 안개꽃만 남았다. 성준수가 새로 사 올까, 물었으나 여자애는 안개꽃은 시들지 않았으니 그냥 두라 말했다.

 언더보스이자 대부의 장자인 소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입학 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겨울, 폭설과 함께 날아든 소식이었다. 파누치의 소행이라 했다. 기관총에 벌집처럼 맞았다 했다. 즉사했다고 했다. 도시를 지배하는 대부의 후계자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 성준수는 죽음이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사람은 쉽게 죽었고 죽이기는 그보다 더 쉬웠다.

 여자애는 울지 않았다. 때로는 깊은 슬픔에 울음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도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성준수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여자애의 손을 꽉 쥐었다. 여자애가 성준수를 돌아봤다. 다갈색 눈이 건조했다. 낙엽 같았다. 가는 어깨를 잡아 제게 기대게 했다. 키 때문에 성준수가 허리를 구겨야 여자애가 기댈 수 있었으나 그 정도 불편은 감수했다. 며칠 밤을 지새워 얼굴이 퀭한 게 싫었다. 성준수는 시체가 어떻게 창백한지 알았다. 낙엽은 죽은 것이었다.


“좀 자.”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준수는 여자애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겨울 세상은 잔뜩 성말랐다.

 염을 한 시신은 평온해 보였다. 대부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이 아들 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왔다. 신문과 파티에서 자주 접한 얼굴들이 많이 끼어있었다. 성준수는 바빴다. 여자애보다 더 바빴다. 대부와 간부들은 장자의 죽음을 수습하기에 여념없었다. 후계자의 죽음이니 당연했다. 업무, 거래.

 그리고 복수.

 가장 중요한 건 복수였다. 대부는 섣부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작금의 평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서 그 평화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가족을 지킨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일궈낸 것이었다. 그 가족이 죽었는데 의미가 있던가.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 파누치에서 사죄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들의 장자가 섣부른 판단으로 패밀리의 장자를 죽였다 했다. 아무리 속죄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알지만 우리는 형제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구구절절한 개소리였다. 섣부르다 못해 멍청한 선택이었으니 그들의 장자가 앞뒤 재지 않고 실행한 계획임은 명백했다. 그러나 파누치의 대부가 그 계획에 참여했든 참여하지 않았든 그들이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결국 차기 후계자를 죽인 건 파누치다. 타탈리아가 아들 잃은 패밀리와 파누치를 중계하고자 시도했으나 대부는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콘실리에리들은 파누치의 장자가 패밀리의 마약 사업을 유도하기 위해 소니를 암살한 것 같다 말했다. 후계자인 소니가 한 파티에서 대놓고 자기는 마약 사업에 손대지 않으리라 언급했다 했다. 대부가 죽으면 마약에 뛰어들 것 같던 패밀리가 이어받을 장자마저 마약은 아니라 확언했다니 큰 거래 상대 놓치기 아까워서. 성준수는 마약이 다같이 뒈지는 지름길이란 걸 알았다. 시작하면 지금껏 패밀리의 사업을 눈감아줬던 경찰이 기어오를 것이다. 대부도 알았고 언더보스들도 알았고 콘실리에리들도 알았다. 마약 사업 시작해달랍시고 장자를 죽였는데 거기에 응해 그래 우리도 마약 팔아주마, 하는 등신은 없었다. 슬픔에 빠진 대부는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사고했다. 이대로 넘어가면 패밀리가 도시의 주인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음은 명확했다. 패밀리는 가족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가족의 죽음을 묻는 건 근본을 흔드는 행위였다.

 그들이 사랑하는 장자의 죽음을 어떻게 갚는가?

 질문의 답을 가져온 건 여자애였다.


“Bacio.”


 여자애는 깔끔했다. 피가 묻지 않았으나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화장이 진했다. 분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여자애는 비틀거리다가, 성준수의 품에 안겨 무너졌다. 힘이 풀려 스스로 몸을 지탱하지도 못했다. 머리 한구석이 새하얘졌다. 여자애가 창백해서 걱정 때문에 새하얘졌다가, 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분노로 새하얘졌다. 누가. 도대체 누가. 누가 때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못 볼 꼴이라도 보고 왔나.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을 꽉 안았다. 혈액이 빠르게 도는 뒷목을 꽉 제 몸 위에 눌렀다. 분명 피가 빠르게 도는데 차가웠다.


“시발, 어떤 새끼야.”

“나야.”


 여자애에게선 분내나 값비싼 향수 꽃내음이 아니라 화약 냄새가 났다. 총을 쐈을 때 나는 매캐한 탄내. 어린 시절 여자애의 말을 듣고 패밀리에게 받은 총을 쐈을 때. 사격 연습을 할 때 손에서 떠나지 않던 냄새였다.

 여자애에게서 난 적이 없고 날 리가 없는 냄새였다.



"너한테 죽일 건지 죽을 건지 물었었잖아. 그래서 나도 죽였어."


 여자애가 성준수를 올려다봤다. 다갈색 눈은 간만에 건조하지 않았다. 대신 습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것도 싫었다. 얘 안 울리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 괴롭히는 새끼들 다 내가 패고 다녔고 뒷담하는 새끼들도 다 처리했는데. 네 오빠 죽었을 때도 울지 않더니 지금 와서 울음이 터져.

 그건 옛날이잖아. 몇 년 전인데. 왜 갑자기 너 홀로 그때로 돌아가 있어. 총 한 번도 잡은 적 없이 곱게 자란 애가 왜 총을 쥐었어. 총 잘못 쥐면 손목 나간다고 네가 나한테 말해줬잖아. 근데 왜 지금 네 손목이 이래. 왜 네가 다쳐. 너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알아서 했을 텐데.

 내가 너 대신 죽였을 텐데.


"오빠가 죽은 걸 납득하지 못하겠어서, 내가 죽였어...."


 도주는 어렵지 않았다. 대부와 간부들은 성준수와 여자애에게 배표를 끊어줬다. 대부는 제 막내딸을 떠나보내기 싫어했으나 그들처럼 장자를 잃은 파누치를 처리하는 동안 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함을 알았다.


‘소니는 너를 사랑했어.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대부는 떠나는 딸의 이마에 입맞췄다.

 어린 동양인 남녀는 눈에 잘 띄었으나 둘은 온갖 언어에 통달했으므로, 교포 흉내를 내는 건 쉬웠다. 여객선이란 곳도 결국엔 계급사회라, 값비싼 장신구와 옷을 두른 일등석 승객에게 무례한 질문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지중해로 향했다. 대부와 패밀리 간부들이 온 그곳으로.

 배를 타는 한 달 동안 그들은 낮의 바다를 보지 않았다. 낮에는 객실 안에서 지냈다. 호텔 못지않게 호화스러운 객실은 그들이 바다 위를 항해 중이며 도주하고 있음을 가끔 망각케 했다. 그러나 성준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들은 일등석에 머뭄에도 하녀를 데리고 오지 않은 유일한 승객이었다.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지 않고 객실에서 그들의 몫을 따로 받았다. 혹시라도 독 있을까 봐 오는 길에 산 새 한 마리한테 먼저 던져주고 먹었다. 성준수는 여자애가 먹기 전에도 제가 먼저 확인하고 먹였다. 그의 품 안에는 언제나 반지 케이스와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여자애가 권총을 지니지 못하게 하는 대신 여자애를 제 옆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들의 침대 머리맡 협탁에는 또다른 권총이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도주는 평화로웠다.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에는 파티가 열렸다. 일등석 승객인 그들에게는 당연히 참석권한이 있었다. 티파티 초대장도 왔고 저녁식사 초대장도 왔으며 무도회 초대장도 왔다. 그러나 성준수와 여자애는 그 모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성준수와 여자애는 도시에서 그러했듯 파티에 참여하는 대신 그들만의 춤을 즐겼다. 파티장 불빛이 잘 들지 않는 간판은 음악 소리가 들렸으나 사람 발길은 닿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도 춤을 줬다. 무도회의 정석적인 사교 댄스가 아니라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성준수는 여자애의 발을 제 발 위에 올렸다. 여자애 허리에 제 손을 둘렀고 여자애는 성준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게 춤이야?”

“춤이지.”



 성준수가 뻔뻔하게 대답하면 여자애는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아 이 우스꽝스런 춤인지 뭔지 모를 걸 계속했다. 남들이 보면 춤이 아닌데 그들에게만 춤인 것 같아서. 우리 둘만 공유하는 것 중 하나인 것 같아 괜히 더 의미를 부여했다.


“너 되게 로맨티스트인 거 알아?”

“뭔 소리야.”

“왜, 은근히 의미부여하고.”


 성준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날 낮에 잠깐 홀에 꽂힌 꽃 한 송이 슬쩍해서 여자애한테 선물이라고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뜻한 지중해로 가기 위해선 한겨울의 북극해를 지나야 했다. 얼마 안 가 밤에 간판으로 나올 수 없어졌다. 모피코트같이 호화스럽고 두꺼운 겨울 옷 챙길 겨를은 없었다. 우리 지중해로 가잖아. 거기 따뜻하니까 이 정도 추위는 괜찮아. 성준수는 어릴 적 겨울 강가의 추위도 버텼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너도 곁에 있으니까. 겨울은 끝날 거야. 여자애는 가끔 제 살인을 떠올렸다. 말은 안 했는데 성준수가 알아차렸다. 객실이 따뜻한데 저 혼자 간판에 나간 것마냥 몸을 떨었다. 그럴 때면 성준수는 여자애가 자면서 흘린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온종일 객실 안에서만 지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밤바다와 밤하늘을 보면 꼭 이 세상에 단 둘이서 겨울잠자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등석이니 넓긴 한데 결국엔 실내라 하루는 여자애의 고집에 나갔는데 다음날 걔는 열이 올라 끙끙 앓았다. 나가자고 한 게 넌데 아픈 것도 너냐. 어이가 없는 한편 여자애가 아픈 게 싫었다. 학교 다닐 때랑 다르게 아픈 애 옆에 죽치고 앉아서 사심도 채울 수 있는 점은 좋았다. 땀 닦아주면서 뺨 한 번씩 꾹 눌렀다. 여자애 이마에 올린 찬 물수건은 금방 미지근해졌다. 성준수는 여자애의 뜨거운 손목을 잡아 오목한 부분에 입맞췄다. 간밤에 제가 남긴 흔적이 남아있었다. 여자애의 살은 여렸고 자국은 쉽게 났다.


“네 몸 존나 정직해.”

“…야!”

“감기 잘 걸린다고.”


 왜. 무슨 상상했어? 안 그래도 열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졌다. 여자애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누워있어서 물러날 곳 없는데 그렇게라도 퇴로를 만드는 게 귀여웠다. 성준수는 여자애 머리맡에 제 손을 짚었다.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자애 몸 위에서 한참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결국 못 이긴 건 여자애였다. 성준수의 간질간질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여자애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Sei un idiota fastidioso.”

“Oh, cavolo, gli piaci.”


 땀으로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는 게 아니라, 그 이마에 이마를 맞댈 수 있어서 좋았다. 당장 주변에 믿을사람 없고 언제 파누치가 어떻게 쫓아올지 몰라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데도. 겨울 바다 한복판인데도 둘이 함께하면 따뜻해서 좋았다. 품 안에서 깊게 잠든 여자애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요새 살이 빠져 걱정했는데, 그래도 반지가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들은 지중해 바다의 조그마한 섬으로 숨어들었다. 같은 계절 같은 달이라는 게 믿기지 않으리만치 따뜻했다. 언제나 늦봄 느지막한 오후 같았다. 바다는 햇살에 맑게 반짝였고 지붕이며 벽이 온통 흰 집들은 낮에도 밤에도 보기 좋았다. 그들이 얻은 집은 그 섬에서도 깊숙한 안쪽에 있었다. 조그마한 돌담과 정원이 있었다. 지프차는 달에 한 번 소식을 전하러 오는 보트를 맞이하러 나갈 때 썼다. 면허는 없어도 사격술과 함께 운전을 배운 성준수가 운전대를 잡았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창문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유리창 너머로 풍경을 바라봤다. 바다와, 흰 마을과, 이따금 보이는 사람들이 여유를 즐겼다. 그래도 좋았다.


 총을 지녀도 쓸 일이 없었다. 성준수와 여자애는 가끔 해변을 걸었다. 여자애가 맨발로 반짝이는 모래를 밟았다가, 밀려드는 바닷물에 살짝 젖었다가. 그리고 성준수에게 물을 튀기면 저도 똑같이 물을 튀겼다. 어린애들처럼 학생 때도 안 하던 물 장난을 쳤다. 똑같은 흰 옷 차림으로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해변으로 나올 생각도 않고 물 속에서 입맞춤을 나눌 때면, 반지와 총을 떠올렸다. 주머니 안 반지가 어디 녹슬지 않도록 집에 돌아가면 잘 둬야겠다. 너한테 보이지 않게. 긴장 풀려 총이 물에 젖었으니 돌아가는 길은 더 조심해야겠다. 어쩌지. 너랑 있으면 불편했는데, 이제는 불안해. 편안하고 행복한데 한편으로는 그래서 너를 잃을까 봐. 사람은 쉽게 죽고 죽이는 건 그보다 더 쉬워서. 너도 희생양이 될까 봐. 그 불안을 잊기 위해 다시 한 번 입맞췄다.


“Tu baci sempre perché io ti chiamo 'Bacio'?”

“Non l'hai scoperto troppo tardi?”


 키스에선 바다의 짠내가 났다. 세상은 겨울이래. 이 바다 너머 세상은 겨울이라는데, 우리가 있는 이곳은 따뜻해. 우리의 살인과 우리의 겨울은 함께 있으면 떠오르지 않아. 겨울이 끝났다고 믿고 싶어. 너를 잃을 걱정이 사라지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들이 사라지면. 그러면 네게 반지를 내밀고 말할 거야.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언어로는  Ti amo. 우리만 아는 언어로는 사랑해. 총은 협탁 안에 보관해야지. 적어도 네가 내가 총을 쥐려고 긴장하는 모습은 볼 일이 없게 할 거야. 그래, 그러면 너와 있을 때 총과 반지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만 생각할 수 있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점검하고 간단하게 운동하고 씻고 청소하고 아침을 준비한 뒤에야 여자애를 깨웠다. 걔는 왜 이렇게 늦게 깨웠냐고 하면서도 성준수의 가벼운 입맞춤에 응했다. 볼에서 간지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탁자에 나란히 앉아 오렌지 주스와 버터에 구운 통밀빵을 먹었다. 책을 읽거나 체스를 뒀다. 바다 건너로 저희를 위해 준비 중인 사람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도 했다. 문자로 나열하면 단조로웠는데 몸으로 느끼는 하루하루는 벅차고 알찼다.


“오늘은 내가 운전해 볼래.”

“할 줄은 알고?”

“왼쪽이 엑셀 오른쪽이 브레이크잖아.”

“넌 그냥 운전하지 말고 얌전히 타고만 다녀.”


 여자애는 평소처럼 조수석에 앉았다. 그날은 그들이 기다린다,고 볼 수 있던 소식이 날아왔다. 대부의 장자와 파누치의 장자가 죽었으니 각자의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것으로 화해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부는 남은 자식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사랑하는 딸이 타지에서 목숨을 위협받거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함이리라.


“괜찮아.”


 편지를 읽는 성준수의 팔뚝에 여자애가 툭 제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겨울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함께라면. 여자애는 더 이상 한밤중 저도 모르는 새 몸을 떨거나 끙끙 앓지 않았다. 이제 항상 총을 품에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남은 건 너와 반지다.

 총은 협탁 안에 넣었다. 내일이면 그들을 데리러 보트가 온다. 서로 안고 밤새 속삭였다. 도시로 가면 학교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예전처럼 수업도 듣고, 같이 밥도 먹어. 뭐야, 수업 듣는다는 거 말고는 지금이랑 달라지는 게 없잖아….

 이 즈음 되어 여자애는 잠들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성준수는 제 품 안에서 느껴지는 맥박 소리를 들었다. 닿지 않을 고백을 했다. 돌아가면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우리 지금까지 말로 한 적 없잖아. 내가 말할 거야. Ti amo. 사랑해. 수백 번도 넘게 행동으로만 표현했던 감정을 제대로 말할 거야. 달라지는 거 없는데, 그냥 말할 거야. 이제 넌 안전하니까. 우리의 일상은 마침내 완전히 안온하니까.

 다음 날 여자애는 일찍 눈을 떴다. 좀 더 자라고 해도 너랑 같이 할 거라면서 성준수랑 같이 청소하고 짐 싸는 걸 도왔다. 올 때 단촐하게 왔던 터라 갈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자애는 성준수 손에 여행가방 두 개를 달랑 쥐여주고 먼저 내려갔다. 당당하게 운전석에 앉아 차고에서 차를 빼왔다.


“오늘은 내가 태워줄게.”

“…….”

“아니, 좀 봐봐.”


 성준수의 한심함 반 어이없음 반 섞인 표정에 아랑곳않은 여자애가 운전대를 제법 매끄럽게 돌렸다. 정원을 한 바퀴 도는데 막힘없었다. 적어도 엑셀 브레이크 헷갈리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여자애가 당당하게 웃었다. 성준수도 피식 웃었다.


“어때, 괜찮다니까?”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나만? 어서 타. 우리 이제,”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형언하지 못할 큰 폭발음이 들렸다. 충격에 제 몸이 멀리 날아갔다. 이명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한쪽 시야가 피로 물들었다. 잠깐만. 너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운전석과 여자애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에 타오른 불이 조수석에 막 옮겨붙었다.


 차체와 정원과 제 몸은 온통 진득한 피범벅이었다.


 누구의 피인지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성준수는 울지 않았다. 때로는 깊은 슬픔에 울음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운전석에 기폭 장치를 달았다고 했다. 성준수는 매수된 마을 청년이 사정 설명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입 안에 대고 한 번 더 당겼다. 심장에 대고 한 번, 복부에 대고 한 번, 관자놀이에 대고 한 번…. 그러다 총알이 더 나오지 않았다. 벌집된 시신을 짓밟았다. 피곤죽이 되고도 멈추지 않았다. 주변에서 잡아 말렸다.

 네 마지막 말 제대로 못 들었어. 우리 이제, 그 뒤에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네게 반지를 주지도 못했는데.

 네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는데.

 평소처럼 성준수가 운전석에 탔더라면. 이제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 괜찮겠지. 네가 좋아하니 나도 좋다, 싶어서. 이제는 총으로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만해서.


 내가 안일하게 이 평온을 누렸다.

 이건 내 죄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득한 피묻은 흙을 그러모았다. 총을 쏘지 않았는데. 내 첫 살인과 달리 총을 쏘고 떨리는 손이 아닌데. 첫 살인처럼 총을 쐈는데 너는 내 손을 맞잡고 나를 끌어안아주는 게 아니라 이 흙과 내 몸과 저 벽과 풀에 흩어졌다. 처참했다. 사람의 흔적이. 함께한 추억이. 네가. 피에 젖어 눅눅한 흙은 성준수의 품에서 형체 없이 흩어졌다. 다시 그러모았다. 잡히지 않는 흙무더기를 끌어안았다. 걔 위에 차마 엎어질 수 없어 이마만 맞댔다. 분명 걔 피 때문에 진득한데 온기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여자애 피에 성준수 눈물이 섞여들었다.

 성준수는 피묻은 흙과 그날 입은 제 옷과 피묻은 벽의 파편과 잎을 함에 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그 과정의 기억이 없었다. 간간히 제가 모으는 게 그 애의 흔적임을 실감했다. 흰 원피스 조각, 갈색 머리칼. 조금이라도 더 그러모았다. 살점 하나 흔적 하나 모일 때마다 키스 한 번 웃음 한 번을 떠올렸다. 그 애와의 세월이 그렇게나 길었고 감정이 그렇게나 짙었다.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했다.

 한 달 간 항해는 따뜻하지 않았다. 올 때는 겨울이었는데도 따뜻했다. 갈 때는 봄인데도 추웠다. 성준수는 몇 번이고 토했다. 토해낼 게 없어지자 헛구역질했다. 함을 꽉 껴안고 밤을 지새웠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걔는 꿈에도 나오지 않았고 현실에서 허상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야속하게도.

 암살당할 위험 때문에 여자애는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성준수와 찍은 사진은 더더욱 없었다. 시신도 없고 사진도 없어서, 그 애는 성준수의 기억에만 존재했다.

 도시로 돌아왔다.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성준수가 그러모은 여자애의 파편으로 장례를 치렀다. 차마 묘에 묻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빈 관을 짜고 성준수가 데려온 여자애의 함을 집어넣었다. 수의도 제대로 입히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성준수는 내내 품고 다니던 반지를 함께 묻었다. 패밀리의 누구도 반지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성준수와 여자애의 사이는 대부도 묵인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장자에 이어 막내딸까지 잃은 대부는 진노했다. 패밀리는 더 이상 평화를 유지하지 않았다. 성준수는 복수에 가담했다. 파누치의 대부와 차남은 그가 저격했다. 도시 모든 마피아가 안대 낀 저격수에게 그들의 대부와 장자를 잃었다. 패밀리는 명백한 왕좌에 올랐다. 희생뿐인 승리였다.






















 모든 게 끝났을 땐 겨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때처럼. 춥고도 따뜻했고, 건조하고도 습했던 그 계절. 반지는 한 쌍이었으나 이제는 하나였다. 하나는 여자애와 묻었고 하나는 성준수의 약지에 언제나 끼워져있었다. 여자애와 있을 때 지니던 권총을 가져왔다. 여자애와 총과 반지에서 반지와 여자애가. 그리고 여자애가 남길 바랬는데 그의 곁에 남은 건 총뿐이었다. 약지의 반지는 짝이 없었다. 성준수는 죽음을 사랑의 약속마냥 대했다.



“야. 도대체 누가 사람을 키스라고 불러. 니네 어머니나 대부가 너를 키스라고 부르긴 개뿔.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냥 넘어갈 거 알고 거짓말한 거지?”

…….

“그것도 거의 처음부터. 나랑 단 둘이 있을 때 부를 일 생기면 항상 바치오,라고.”

…….

“그때부터 나랑 입맞추고 싶었어? 어린애가.”

…….

“근데 나도 별로 다르진 않았어. 처음 볼 때부터 네가 불편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너 좋아서 긴장하는 거더라.”

…….

“내가 먼저였다고.”

…….

“키스하고 싶어했던 것도, 좋아했던 것도.”

…….

“그러니까 이 말도 내가 먼저 하는 거야.”

…….

“사랑해.”

…….

“Ti amo.”

…….

“고백도 내가 먼저 하고 좋아하는 것도 내가 먼저였고 키스하고 싶던 것도 내가 먼저였어서. 그래서 죽는 건 네가 먼저 했어?”

…….

“필요없으니까….”


 필요없다. 네가 죽은 건 내 탓이고 이 잠깐의 삶도 네 몫이었다. 그런데 네가 죽어서, 나는 네 몫을 돌려줘야겠다. 나는 네 것이고 너는 내 것이니 내가 너에게 가면 네 삶도 네게 돌아가겠지.

 성준수는 신을 믿지 않았다. 제 판단을 믿었다. 여자애는 삶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존재였고 마지막은 그가 틀린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성준수는 이번엔 걔의 죽음을 믿기로 했다. 적어도 걔의 죽음은 틀린 기준이 아니었다. 너를 죽여서 내가 죽였어. 네가 죽어서 나도 죽어.

 그러니까.


“내가 거기로 가면 너도 나한테 고백해.”


 방아쇠를 당겼다.

 마침내 성준수에게 남은 건 오로지 걔뿐이었다.


 우리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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