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체육대회

 

 

 

이번 체육대회 하이라이트요? 아. 올해는 조금 재미있는 일이 많아서 꼽기가 어렵네요. 사실 작년에 나민이가 그렇게 활약한 뒤로 몇 년은 그 이상으로 기억에 남을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맞아요. 작년처럼 종목마다 나와서 뛴 것도 아닌데, 어째 기억에 남는 일이나 애들 반응은 올해가 더 뜨거웠죠. 뭔가 활약상보다는 임팩트가 컸다고 해야 하나? 빌리기 경주 같은 건 솔직히 누가 해도 눈에 띄잖아요. 근데 거기에 나민이가 나와. 말 다 했죠. 대기 줄에 서 있을 때부터 애들이 주머니에 있는 거 꺼내서 어필하려고 하던 거 보셨어요? 엄청 귀엽더라고요.

 

 

 

*

 

 

 

2학년 빌리기 경주 출전 선수들은 대기해주세요. 안내방송이 들려오자 주영서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다시금 꺼내 펼쳤다. 직접 정리한 체육대회 종목별 출전 선수 명단이었다. 빌리기 경주는 남녀 각각 두 명씩 배정되어 있었다. 현지, 정혜, 승호, 나민이. 주영서가 해당하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빌리기 경주는 뛰어난 운동신경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가 배당된 승점이 적은 만큼 부담도 적어 인기가 좋은 종목이었다. 반 인원 거의 대부분이 참여한 가위바위보로 인기 종목을 따낸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주영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 지점을 가리켰다. 잘하고 와! 그들의 뒷모습에 반 아이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장나민 포카리 뭐야?”

“하. 작년에도 저런 걸 입혔어야 했는데. 뭔 등신 같은 농활 옷을 쟤한테 입혔네. XX.”

 

 

 

그렇게 떠들던 이들은 장나민이 근처를 지날 때는 짠 것마냥 입을 꾹 다문 채 장나민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굴렸다. 짱나! 여기 한 번만! 핸드폰을 든 누군가가 장나민을 불렀다. 제법 커다란 외침이었기에 출발 지점에 있던 장나민에게도 들려, 장나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는지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니 작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포카리스웨트 로고가 새겨진 하얀 티셔츠에(본인은 새파란 색 쪽을 원했으나 반 여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로 기각되었다.) 함께 맞춘 새파란 바지. 온갖 컨셉이 판치는 체육대회에서 그다지 튈 것도 없는 수수한 차림이었으나 입고 있는 사람이 사람이다. 여기저기 포카리, 하는 수군거림이 일었다.

 

 

 

그것은 1학년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가볍게 1등으로 달려나가 가장 먼저 쪽지를 집은 장나민이 자신들이 앉은 구역으로 다가오자 수군거림은 숫제 비명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보고 하이톤의 비명을 질러대는 여학생들 틈에서도 장나민은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장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친구야, 미안한데 같이 좀 뛰어주라. 네!!! 여학생은 쪽지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뻗은 장나민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가자.”

 

 

 

먼저 잡았으면서도 덜덜 떨고 있는 여학생의 손을 가볍게 고쳐잡은 장나민이 트랙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나민과 함께 출발했던 이들은 이제야 찾았거나, 아직도 찾는 중이었다. 여유로운 1등이었다. 수고했어. 결승점에 있던 선생님이 장나민과 여학생의 손등에 1등 스티커(나중에 상품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 같은 개념이었다.)를 붙여주었다.

 

 

 

장나민은 자신의 손등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냈다. 손아귀에서 구겨져 꼬깃꼬깃해진 쪽지에 스티커를 붙여 여학생에게 건넸다. 고마워~. 짧은 인사와 함께 2학년들이 앉은 구역으로 돌아가는 장나민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학생이 터덜터덜 1학년 구역으로 되돌아갔다.

 

 

 

야! 뭐야? 뭐였어? 달려온 친구들이 반쯤 넋을 놓은 친구 대신 쪽지 내용과 그 위에 붙은 스티커를 확인했다. 아, 미친. 나도 양갈래 할걸. 이 스티커 저 오빠가 준 거? 하…. XX…. 장나민 존나 유죄. 저 오빠는 그냥 사형임. 자신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지는 줄도 모르고 2학년 구역에 앉은 장나민은 이온 음료 한 통을 단숨에 비웠다.

 

 

 

*

 

 

 

빌리기 경주하면 다들 사이좋게 들어오는 거 너무 귀엽더라고요. 나민이는 이번에 빌리기 경주 말고도 뭐 나왔었죠? 아, 맞다. 축구도 했었구나. 아니. 저희 반 학생이 나민이한테 차였다고 울던 것만 기억이 나서. 아니, 진짜 차인건 아니고요. 울지도 않았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

 

 

 

이제 막 농구 결승이 끝나가는 참이었다. 짱나, 준비하자. 스탠드에서 일어난 클래스메이트의 말에 장나민이 신발끈을 고쳐맸다. 그다지 움직인 것도 아닌데 땡볕 아래에 있다 보니 땀에 젖은 앞머리 몇가닥이 이마에 들러붙었다. 반 티와 함께 왔던 헤어 밴드는 보호대도 아닌데 장나민의 손목에 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영서가 말을 걸었다. 나민아.

 

 

 

“앞머리 괜찮아? 넘겨줄까?”

“어.”

 

 

 

반대쪽 신발 끈을 다시 매던 장나민이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허락이 있었기에 주영서는 사양하지 않고 주머니에 있던 실핀을 꺼냈다. 조심스레 앞머리를 넘겨 핀을 꽂자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고마워. 끈을 다 맨 장나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저기, 오빠…”

 

 

 

장나민과 주영서 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시선이 처음 보는 여학생에게 쏠렸다. 난데없이 등장해 말을 거는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장나민에게 꽂혀있는 시선이 답을 말하고 있었다. 이거 드세요! 여학생이 손에 쥐고 있던 파워에이드를 내밀었다. 짱나가 또. 줄여서 짱또.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최상현, 최하현 쌍둥이의 추임새가 끼어들었다.

 

 

 

“아, 난 괜찮아. 친구가 마셔.”

“선배 드리려고 사 온 건데…”

 

 

 

여학생의 미약한 저항은 마음만 받을게. 라고 말하며 미소짓는 장나민의 얼굴에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돌아가는 후배의 모습을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이설이 이내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헛웃음을 뱉었다.

 

 

 

“아까 내 고드름 처먹은 건 누구더라.”

“게토레이도… 내 곁을 떠났지.”

“토레타야. 넌 내가 본 토레타 중에 최고의 토레타였어.”

 

 

 

이어 쌍둥이도 말을 얹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선 채 운동장을 바라보던 장나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뺏어 먹는 게 맛있잖아. 이어지는 항의는 경기 끝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

 

 

 

놀랐네. 고백이야 뭐, 있을 만한 일이잖아요. 하여튼 애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안 다치는 쪽이 제일인 것 같아요. 근데 또 하다 보면 그게 잘 안 되잖아요. 특히 체육대회 같은 거. 뭐 대단한 거 걸린 것도 아닌데 애들은 몸 부딪히다 보면 격해지고.

 

 

 

가벼워도 이기고 싶은 생각 들다 보면 애들도 무심결에 세게 나가는 것 같아요. 올해는 늘 말썽이던 농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축구가… 나민이 체격이 워낙 좋아서 어지간한 몸싸움은 티도 안 났지, 애들 말로는 견제가 정말 심했다고 하더라구요. 큰 부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

 

 

 

응원으로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진다. 공이 이미 장나민의 발을 떠났음을 알고도 들어간 태클이었다. 태클만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장나민을 견제하려던 또 다른 상대 팀원이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태클에 걸려 비틀거리던 장나민은 달려오는 상대 팀원에게 부딪혀 그대로 밀쳐진 뒤 등부터 떨어져 운동장에 미끄러졌다. 체구만큼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일었다. 심판(1학년 체육 선생이었다.)이 급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일어날 수 있겠니? 심판이 장나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드러누운 채 잠시 숨을 고르던 장나민이 심판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는 듯했으나 새하얀 티셔츠의 등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상처는 없는 것 같구나. 흙 들어갔으면 그냥 뱉으렴. 심판의 말을 듣던 장나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침을 뱉자 상대 선수들이 움찔했다. 본인이야 그저 입에 들어간 흙을 뱉기 위한 행동이라지만 덩치가 덩치다 보니 위압감이 상당한 탓이었다.

 

 

 

그러는 사이 의료 본부 천막에 있던 양호 선생은 구급 약품함을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가 장나민의 상태를 살폈다. 요령 좋게 떨어진 모양인지 상처는 물론 통증도 없는 듯 했다. 뛰다가 아프면 말해. 끝나고 나서 병원 꼭 가기다. 네. 고개를 끄덕인 장나민이 티셔츠의 목 부근을 잡아당겨 흙먼지가 묻은 입가를 마저 닦았다.

 

 

 

바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방금의 파울로 받은 옐로카드를 의식한 모양인지 장나민의 곁에 붙는 견제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덕분에 장나민은 방해받지 않고 공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볍게 뛰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이 앉은 구역이 가까워지자 최상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짱나! 괜찮아?”

“멀쩡해. 피 좀 나야 퇴장 받았을 텐데.”

“피 없어도 퇴장감이야, 저거! 당장 퇴장시켜!”

 

 

 

가벼운 장나민의 대꾸에 오히려 최상현이 펄펄 날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장나민이 웃음을 터뜨리며 공을 향해 달렸다. 최상현! 조용히 안 해? 응원인데요? 그게 무슨 응원이야! 방해하지 말고 앉아! 부심인 또 다른 체육 선생이 다급하게 다가와 최상현의 입을 다물게 했다.

 

 

 

*

 

 

 

병원은 다녀왔대요? 왜, 겉으로는 아무 상처도 없고 통증 없는 것 같아도 그런 거 그냥 두면 만성 된다고 하잖아요.

 

 

 

아. 체육대회 끝나자마자 하 선생님이 근처 병원 데려가셨어요. 넘어졌을 때부터 차 키 챙기셨잖아요. 우승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오시는 것 같더라구요. 담임인 반 애들 엄청 아끼시잖아요. 이번에 어쩌다 보니 그 반에 좀 학교 명물들이 모여 있어서 고생하시는 것 같긴 한데. 나쁜 애들은 아니니까요.

 

 

 

맞다. 쌍둥이… 누구였지? 상현이었나? 그 반이었죠. 아무래도 매일 사고 아니, 주목받는 애들이라 오히려 체육대회 같은 날엔 얌전한 느낌이네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냥 있진 않았을 거 아녜요. 나민이가 크게 한 방씩 쳐줘서 그런가.

 

 

 

나민이 졸업할 때까지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쌍둥이나 나민이 같은 애들이 연예인을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하하.

 

 

 

어머. 선생님, 모르셨어요? 나민이 남동생이 대형 소속사 연습생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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