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백사이반
열병
최근, 어디다 말하기 곤란한 고민이 생겼다.
말하기 어려운 고민인 이유는 이것은 내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반 이바노프는 나와 함께 많은 재액을 해결한 마법사 파트너였다. (앵커는 아니다.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꽂는 행위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잔잔한 호숫가 같은 마음씨를 가진 마법사였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평화롭고 따스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인상은 그닥 좋지 못했지만, 현재 나는 그에게 굉장히 푹 빠져 있었다. 마법사가 마법사를 사랑하는 것은 대법전 내 금지된 사항은 아니었지만...나는 이 이야기를 대법전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얄팍하고 정말 딱 필요로만 이어진 관계, 앵커 우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별로 좋은 대답이나 쓸만한 대답은 기대할 수 없을것 같았다. 같은 문호의 다른 마법사는 어떠할까... 야곱 아즈라엘? 그녀석은 나와 어느정도 대화를 하는 문호였지만 내 사랑이란 이야기에 절대 좋은 말을 해줄리 없었다.
그야 야곱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그가 싫었다.
아무튼, 나의 파멸적인 마법사 관계와 인간 관계 때문에 결국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럼 직접 이반 이바노프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 어떠할까?
그러나 그것도 영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그와 나는 마법사 분과회 파트너정도였으며 , 그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나를 사랑할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생각해봐도 첫 인상에 인상 더럽고 싸가지 없던 상대가 같이 재액좀 처리하고 친해졌다고 이제와서 대뜸 고백을 한다니? 내가 생각한 상상이지만 정말 나는 최악의 상대였다. 물론 같이 처리한 재액들이 조금 부끄럽고 머슥하고 살짝 에로틱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거기다 이반은 그런 상황에 엄청 휩쓸릴 타입도 아니었다.
이반이 진작에 휩쓸릴 타입이었다면 이미 내가 그를 침대에다가 밀치고 사랑을 고백했을 것이다. 마법사 랑 마법사 끼리 하면 아이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같은 쓰레기같은 소리도 조금 했겠지만...
하지만 이반은 휩쓸리지 않고 여전히 이반 이바노프였다. 재액이 무슨 일이 있건... 이반에게 단장이 빙의했건, 나한테 단장이 빙의됐건간에 그는 내가 알던 여전한 그 모습으로 열심히 마법사의 본분을 다했다.
꾸준하고 성실한 그가 좋았지만 동시에 미웠다. 내 마음도 모르는 바보였다. 하지만 내가 말 안했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상반된 내 마음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하자 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아, 사랑이란 바보같아...
무슨 사건이 생기는건 항상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터지는 것 같다. 제발 예고 좀 하고 터지라고!
다름이 아니라 나는 개...가 아니라 마법사는 거의 걸릴 일 없는 감기에 걸렸다. 마법사 생에 아파본적이 마법전을 제외하고는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알수가 없었다. 혹시 이것도 단장인가? 싶었지만 서공들이 확인해준 결과 정말로 100% 우자들이 걸리는 감기에 걸렸다고 알려주었다. 백퍼센트라는 말에 강한 악센트가 들어가서 조금 열이 받았지만, 괜히 열을 더 올리는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 감기만 걸린거라면 나 혼자 쉬면 그만이고 , 인계의 일은 대충 조작조작 해놓으면 됐지 뭐~ 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감기만 있는게 아니었다.
이반은 자신과 같이 다닌 것 때문에 (물론 재액처리지만) 걸린게 아닌가 싶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나에게 보였다. 그리고 조금의 고민과 결심...이반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이 스쳐지나간 이후 , 그는 나를 자신의 골동품 공방 윗층에서 돌봐주기로 했다.
이반이 나를 위해 병 간호를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였으면 아 ~ 즐겨볼까! 였던 마음이었겠지만, 마법사가 우자나 걸리는 감기에 걸린 상태라 혹여 이반에게 옮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맘편히 간호를 즐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공방의 윗층은 이반이 가볍게 잠만 자는 공간으로서 내가 침대를 차지하면 이반은 바닥이나 의자에서 자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반에게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나도 내 집이 있으니 혼자 쉬면 나을거라고 했지만, 이반의 걱정어린 눈망울과 마주치는 순간 내 마음은 그대로 녹아버렸다.
이반이 옮아서 같이 아프면 안돼, 이반의 잠자리를 방해해선 안돼, 어짜피 혼자 약먹고 쉬면 났겠지...라는 내 이성은 여전했지만 동시에 나의 본능이 그래도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간호 받아보겠어? 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해 진짜 너무 좋았다! 행복했다!
그 누구라도 짝사랑하고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걱정하고 걱정하다못해 심지어 손수 간호해준다? 이런 천금같은 기회는 놓칠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몸은 정말로 아픈게 맞았는지(내가 약해보이면서 상대에게 동정을 사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이 기회를 무시하고 자꾸만 정신이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이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반이 사용하던 침대 위에서 첫번째 잠에 빠졌다.
꿈에서 나는 이반과 함께 흔들거리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 이건 아마 어떤 재액을 정리하고 돌아가기 전 짧은 휴식의 기억 이었다.
그날의 바람은 선선했지만 춥진 않았다. 햇빛은 나와 이반에게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이런 포근한 분위기를 위한 햇빛 같았다. 그러고보니 보통 꿈이 기억의 나열이라고 했지만, 이 꿈은 제법 생생했다. 이반과 함께해서 그랬던걸까.. 싶을정도로 이 순간도 그의 얼굴과 표정이 확실했다.
다만 말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 하나하나는 다 기억하지 못했던걸까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꿈에서라도 이정도면 제법 확실한 편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꿈이라고 인지하는 꿈을 자각몽이라고 했던가? 보통 자각몽이라고 확신하면 꿈은 무너지던데 ... 다행히 내 몸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무너질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이반 . "
깨지 않는 자각몽이라면 , 이것이 내 기억을 기반한 꿈이라면 ... 조금 이반을 만져봐도 괜찮지 않을까... 몸이 아프다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방금전까지 거의 들리지 않던 꿈속 이반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히듯 들려왔다.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 그대로였다. 낮은 저음이지만 그렇게 어둡고 우울한 목소리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잔잔한 그 목소리.
" ...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
" 하고 싶은 말..."
이건 꿈이었다. 그것도 나만이 보는 꿈.
" 이반, 널 좋아해..."
그리고 이것은 내 기억과 내 마음을 토대로 하는 꿈이었다. 비록 꿈에서의 고백이지만 그 말을 들은 이반은 귀끝이 조금 빨갛게 변했고 어색하지만 웃어볼려고 하는 점이 굉장히 귀여웠다. 단순하게 좋아한단 이야기가 아닌 것을 꿈속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 이것이 진짜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반의 얼굴에서 빨갛게 물들어가는 부분이 차츰 늘어가면 갈수록 , 나는 만족감 빠져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세상에 이런 마법사가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것일까. 그가 부끄러워 하면서도 웃는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느껴졌다. 또한 이반은 자신을 세피아 라고 표현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그 누구보다 반짝이고 아름다운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다보니 내 기억을 기반으로 한 꿈에서도 마찬가지로 빛나고 있었다.
" 좋아해 이반..."
고백을 한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짜피 꿈인데 , 내 마음 정도는 편히 발산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 널 좋아하고 사랑해. 바보같은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냥 너가 좋아...너만 보면 행복해져. 좋아해..무척...좋아해. "
" ...... "
꿈속의 이반은 이제 빨갛게 물들다 못해 완전 사과처럼 변해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고 착하고 솔직한 사람이 있는걸까. 이게 꿈이고 내 망상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사실 현실의 이반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사랑스러운 사람.. 이반..
내 꿈속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나의 사람.....
그러나 달콤한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새벽에 눈을 떴다. 아마 열이 오락가락 하는 감이 심해져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반은 침대 근처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아마 나를 돌봐주다가 늦은 시간이 되어서 결국 잠에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싶었으나 , 실상 내 몸은 여전히 상태가 안좋은듯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 이반만 바라보며 미안함과 쓸쓸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그와 함께여서 다행인걸까?
하지만 결국 그를 힘들게 한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두배 이상 무거워졌다. 이 망할 감기가 어서 나아야 그가 힘들지 않을텐데.... 굳이 안해도 되는 간호를 해주겠다고 친절을 배푼 이반이었다. 그에게서 어서 나라는 짐을 덜고 싶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자고 있는 이반에게라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 내 몸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결국 두번째 잠에 빠져들었다.
두번째 꿈은.... 일단 굉장히 공허했다.
하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이것은 내 주권이었다. 내 내면을 반영한 곳 답게 흰색 사막과 두개의 눈동자같은 태양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꿈에서까지 굳이 주권을 보고싶진 않았지만, 이번 자각몽도 내 주된 기억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정말 자주 보고도 남은 내 주권이 이렇게 펼쳐진 것이겠지.
흰색 사막은 매번 볼때마다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내 주권은 이전에 폭풍과 비가 내리는 바다였으나 , 마법사로서의 의지와 마음이 꺾이고 대법전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면서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처음에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에 마음에 들어했지만 요새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이반에게 보여줄 것이 없었다. 공허한 내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있는 척 해봤자 속은 텅빈 내 초라한 모습 같았으니...
사실 주권 정도야 마법전에서 보고도 남지만 그래도 이반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적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공허함을, 내 허무함을, 내 무(無)를 보이기 싫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입장에선 더더욱 그랬다.
혹여 내 사랑이 이반이 봤을때 공허해보인다면 ?
내 사랑의 근본이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無) 로 보인다면?
이반은 그렇게 볼 사람이 아닌걸 알지만 난 그래도 싫었다. 이반에게만큼은 없는 마음 있는 마음 전부 담아서 꽉꽉 채우고 싶었으니까.... 내 마음의 거짓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꿈에서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나는 이 주권에 절대 있을리 없는 사람을 발견했다.
당연하겠지만 이반이었다.
내 꿈이여서 그를 여기다 두고 싶어했던걸까? 이반을 굳이 내 주권에 초대한 적 없는데? 이 기억은 아무래도 혼선이 된 것 같았다. 꿈이란게 다 그렇지만, 그래도 두번째 꿈마저 이반이 나오다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했다.
물론 당황과 별개로 나는 그에게 팔을 벌리며 달려갔다. 어짜피 이것도 꿈이라면 껴안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이반을 강하게 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꿈인데도 온기가 느껴지고 그의 어느정도 체격있는 몸을 더듬을 수 있었다.
이런 온기와 이런 촉감이 꿈이라니, 정말 아쉽고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반은 꿈이지만 나에게 너무 달콤한 존재였다.
" 이반 가지마.... 가지마... 나랑 있어 나랑... "
이것이 꿈인데도 나는 그를 놓기 싫어 껴안는걸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온기와 그의 체향을 느끼고 온전하게 만끽하고 싶었다.
" 이반... 사랑해.. 가지마.."
" .... 응. 난 여기있어. "
귀에 확 들어오는 그의 저음에 내 척추는 순간 전기충격을 받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들었던 목소리고 기억하는 목소리인데도 어쩜 이렇게 좋은걸까. 이반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지. 꿈속인데도 목소리 하나하나에 심장 떨려하면서 좀 더 매달리고 싶고 듣고 싶은 내 마음을...
" 사랑해... 사랑해.. 날 사랑해줘.. 나말고 다른 마법사들과 친하게 지내지마 ... 날 좋아한다 해줘.."
"..... "
" 좋아해....날 떠나지마....."
이게 정말 단순한 자각몽인가 싶을만큼 내 마음은 굉장히 간절해졌다. 어서 눈을 떠서 차라리 직접 말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필 왜 몸이 이렇게나 아프고 힘들어서 꿈에서 밖에 이반을 부를 수 없는걸까...
분명 꿈 속인데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았다.
사랑해,
그래도 이 말은 계속 이어나갔다.
이렇게 하면 마치 닿을 것 같아서.....
눈을 떴을때는 이반이 없었다.
아마 시간도 시간이라 아래에서 가게 일을 보고 있는 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 자고 일어났으면 이제 슬슬 몸이 괜찮아 질 법도 했는데 내 몸은 물먹은 솜 처럼 매우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이반의 간호 덕분인지 어제에 비해선 확실히 열이 내려간 듯 몸은 더이상 뜨겁지 않았다. 그냥 난 차갑고 무거운 몸이 된 것 이었다. 이런 바보같은 경우가 다 있나..
연달아 이반이 나오는 꿈을 꾸다보니 나는 잠깐 현실과 헷갈릴뻔 했었다. 내가 그에게 고백을 했던가 , 나를 떠나지 말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은 전부 꿈이었고 자각하고 있는 망상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현실의 이반은 나를 돌봐주고 있을 뿐, 나와 그의 사이는 진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나는 내 망상 속에서 떠들고 그 망상에서 기뻐하고 있었고 , 이렇게 생각하니 바보같음이 더 추가 된 것 같았다.
차라리 다시 한번 잠을 자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면 꿈에서라도.... 이번 꿈에서도 이반이 나오길 바라며 ... 그리고 내 거지같은 몸 상태도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세번째 자각몽을 꾸게 되었다.
이쯤되니 나는 원래 자각몽을 꾸는 마법사였는데 그동안 기억을 못한 것이 아닐까? 라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느꼈지만 , 아무리 이반이 나오길 바랬다고 해도 이건 좀 과했다. 내 망상이 과하다 못해 아주 추잡하단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분명 이것은 내 꿈인데도 .... 여기는 이반의 골동품 공방이었다. 눈을 뜨면 이곳일텐데 , 눈을 감아도 이곳이라니... 너무 보고 싶어한 거 아니야? 나는 내 자신을 타박했다.
당연하겠지만 꿈이라 내 몸은 멀쩡했고 가벼웠으며 이반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반은 신중하게 오르골을 고치고 있었으며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매우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실이라면 이런 상황에 굳이 장난을 치지 않겠지만 , 뭐 이건 꿈이었다. 내 망상이고 내 상상이고 내 염원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서슴없이 이반을 껴안고 그의 볼에 몇번의 입맞춤을 건내주었다.
" ...! "
이반은 내 행동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이내 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예쁘고 고운 미소였다. 현실의 이반이 들었다면 이런 체격의 사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 내가 보기엔 정말로 예쁜 표정이었다.
" 귀엽다. "
" 그런 소리는 조금... "
" 그렇게 반응 하는 것도 귀여워 이반. "
역시 꿈이란건 굉장히 좋았다. 고민만 하던 말이나 생각을 서슴없이 표현해도 된 다는 점이 매우 이점이었다. 이반이 또 다시 발갛게 물들어가는 볼을 보여주자 나는 참을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숨기면서 지내온걸까 싶을정도로 이반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와 제법 오랜시간 분과회 파트너였는데도 이런 표정 보기 어려웠는데.... 이반과 사랑을 한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그가 더 간절했다.
그냥 이대로 깨어나서 이반에게 달려가 사랑했고 그동안 계속 좋아했다고 고백을 하는게 나을까? 아니면 이대로 망상이란 이름의 내 꿈에서라도 그와 마음을 나누는게 좋을까?
"... 왜 그래 백사? "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이반의 빨려들어갈 것 같은 자안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내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자각할 수 있는 꿈이라면 최대한 그 안에서라도 사랑하는 것이 맞았다. 어떻게 이걸 놓고 갈 수 있을까. 현실의 이반은 내 마음을 모를테니 여기서라도 그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었다.
이반의 볼에 입맞춤 하는 것을 넘어 , 나는 그의 입에 조심히 입을 맞추고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껴안았다. 키스라기엔 가볍지만 단순한 인사라기엔 무게감 있는 나의 행동에 이반은 굳어버린 듯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것은 꿈이고 망상인데 어째선지 그와 맞대고 있는 부분이 뜨거웠다. 체온이 느껴지고 살짝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현실처럼 조금 끈적거리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살짝 뒤로 물러나자 꿈이 아니라 현실의 이반 같은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 잠..잠시만 ㅡ "
그리고 그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고 , 내 옆에는 손으로 입을 가린채 부끄러워하고 있는 이반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했던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어쩌면 꿈이라고 치부해서 행동한 것들 중에 몇몇은 잠꼬대처럼 현실 이반에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손끝이 얼어가는 듯한 착각이 나를 좀먹었다. 더이상 내 몸을 괴롭히던 감기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했던 혹시 모를 무례함과 그걸로 유추할 수 있는 내 질척한 마음이... 다른 것도 아닌 이 마음이 이반에게 전부 보여졌을 것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 .. 미, 미안. 미안.. 미안해. 잠깐, 잠깐 내가 어지러웠나봐 내가.. 내가 이 빌어먹을 감기에... "
" ..... "
이반은 딱히 무어라 말하진 않았지만 조금 발그레한 볼을 숨기지 못한채 나를 바라볼듯 말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잠꼬대로 말한걸까? 세번의 자각몽 사이에 이반이 얼마나 들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 맨날 회수해야하는 단장이나 금서의 영향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정하고 회피하고 ... 그리고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100% 우자들이 걸리는 단순한 감기였다. 증상만 따진다면 열이 머리에 돌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정도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망할!
감기!
때문이었다.
이반에겐 사과밖에 할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 또 어떤 변명을 해야할지 어떤 사과를 해야할지... 머리속이 너무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동시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아파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이반에게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무례함과 그리고 매우 노골적으로 쏟아진 내 마음들이... 너무 미안했다. 조금씩 흐르던 눈물은 감정이 북받쳐오르면서 결국 펑펑 터져나왔다.
" ... 싫어하지마.. 날.. 날 버리지 마.. 미안해... .."
" ... 백..백사. "
" 조용히.. 조용히 있을게. 티내지 않을게. 널 좋...좋아해서 미안...미안해... 버리지마.. "
" ...백사..!"
" 내가 잘못했어.. . 너에게 무례했고 정말.. 내가 쓰레기야...미안..미안해.. "
"...... 내 말 좀 들어봐.. 백사! "
서러움에 빠져있는 나에게 이반은 단호하지만 그리 우울하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당장 이반이 나를 한대 치지 않는 것만 해도 굉장한 용서라고 생각했는데... 이어진 이반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 ...ㅅ...싫다고 한 적 없어. 난... 백사가 좋아. 그러니까 이렇게.... "
"...... "
".... 물론 잠꼬대로 행동한 것이나 말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
" ...이..이반... "
" ...... 싫어하지 않아. 좋아해..... "
이반의 말은 내가 아직도 꿈인가? 자각몽인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행복한 발언이었고.. 나는 거기서 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고마웠고 미안하고... 그리고 진작에 말하지 않은 내가 바보 같았다. 먼저 푹 빠져있었던건 나 일텐데 , 내가 비겁하고 소심해서 이반을 사랑한다고 미리 말하지 못했다. 그저 거절당할 것만 두려워서 회피하던 지난 시간들이 더욱 미안해졌다. 거기다 고백도 멋없게 무슨 감기에 걸린 상태로 잠꼬대로 하다니...
내가 더 펑펑 울자 이반은 걱정을 하며 나를 쓰다듬어 주며 안아주었고, 그의 따뜻한 품은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따스함보다 좋은 온도였다.
결국 그날 겪었던 감기는 내 정신과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이반의 대답을 들을 수 있게 해준 엄청난 매개체였다. 그 일로 이반이랑 더 깊은 사이가 될 수 있었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추억하지만...
그래도 역시 감기는 싫다.
죽어라 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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