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구원의 이면
Call of Cthulhu 7th Fanmade scenario based
TRPG 크툴루의 부름 7판 동인 시나리오 "밀짚꽃편지" 엔딩 이후의 상황을 그린 글입니다.
시나리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시나리오 본문을 인용한 구절도 다수 존재합니다.
슬픔에 눅눅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작성 2022. 09. 07
수정 2023. 09. 29
救援의 異面
카스미 마논이 죽은 지 일주일이 되어가던 날이었다.
무라카와 치사키가 제 목숨을 담보로 카스미 마논을 살린 지도, 일주일.
카스미 마논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내던졌다. 협탁에 꽂힌 밀짚꽃이 거의 시들어 있었다. 교환의 대가, 무라카와 치사키가 남기고 갔던 유언이 효력을 잃어가는 순간이었다. ‘꽃이 그렇게 중요한가? 꽃 한 송이가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걸까.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꺾어와서는 안 됐을 텐데.’ 원망 섞인 잡념이 카스미 마논의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카스미 마논은 약속을 좋아한다. 그리고 동시에 싫어한다. 그날 무라카와 치사키는 밀짚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에서 카스미 마논에게 부탁했다.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내일도, 모레도 살아서 자신을 만나달라고……. 자신이 있어 살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카스미 마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그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을 금방이라도 지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저 알겠다고 그와 함께 약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무색하게도 무라카와 치사키는 카스미 마논을 떠났다.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알 수도 없는 곳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스미 마논은 성실하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해도 미련하게 그 약속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카스미 마논은 약속을 좋아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싫어할 힘 같은 것도 없다. 말에는 힘이 있어, 쇠고랑을 찬 것마냥 자신을 속박할 테니까. 그날 무라카와 치사키가 보여준 표정은 관성처럼 자신을 돌아오게 할 테니까.
카스미 마논은 협탁 앞에 섰다. 꽃병 옆에는 반으로 접어둔 편지 네 장이 있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사랑이 담긴 편지.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는 그는 고마워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아무런 사이가 아닌데도 섬세하게 신경 써줬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은 위선 같았다. 그는 자기 멋대로 만족하고 갈 거라면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말해줄 것도 아니면서.
백 번 사랑한다고 말해도 줄글로는 절대 믿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카스미 마논은 밀짚꽃을 서슴없이 집어들고 손으로 바스러뜨렸다. 비닐봉지에 넣고 완전히 조각내었다. 가루가 된 밀짚꽃을 그릇에 옮기며 그는 속삭였다. “다정이 두려움을 꽃피우면 두려움이 영원을 꿈꾸네. 영원을 도모해도 나 이것에 물 주는 것 감히 잊지 못할 테니, 그것이 다정의 두려움이다.” 돌아오라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으면서 그는 한 자 한 자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산산이 조각난 밀짚꽃 가루가 빛을 내며 다시 꽃 한 송이가 되었다. 가루 파편들이 공중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것들은 꽃병 주변을 별무리처럼 감싸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갔다. 상처 하나 없이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꽃. 카스미 마논은 본능처럼 그것에 손을 뻗었다. 무라카와 치사키가 남기고 간 유산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달려올 것 같았다. 따스하고 그리운 촉감이 손끝에 오래 남아 스며들었다.
그날 카스미 마논은 꿈을 꿨다. 밀짚꽃이 만발한, 그때를 빼닮은 공간에서 무라카와 치사키가 자신의 곁에 누워 있었다. 꿈이지만 너무 생생해서 그가 자신의 곁에 진짜 와있는 것만 같았다. 카스미 마논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돌아오라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몇 년이 걸려도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더 이상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활짝 웃으면서 꿈이 끝났다. 카스미 마논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머리띠에 밀짚꽃을 달았다. 싱싱하게 살아난 그 꽃잎을 오른쪽 귀퉁이에 달고 계속 매만졌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그날 이후로 생각도 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꽃에는 뇌라고 할 수 있는 기관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이따금 자신을 감싸는 촉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낮과 밤을 구분해 주는 햇살과 그것의 온도를 담은 바람, 이따금 습기를 머금은 채 톡 쏘는 물기라던가. 그리고 어떤 애정 어린 손길도 알아챌 수 있었다.
카스미 마논은 무라카와 치사키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한번 그를 믿어보기로. 무라카와 치사키는 어느 것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지만, 돌아갈 수 있다는 말만은 몇 번이고 건네주었다. 충분했다. 시간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쏜살같이 지나갈 테니까. 그러나 어떤 감정이 카스미 마논을 꾸준히 자극했다. 꽃병 옆에 놓아둔 편지 끄트머리만 봐도 가슴이 무거웠다. 침대에 몸을 던져 옆으로 돌아누우면 왜인지 한 사람 분의 자리가 남았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마치 파도처럼 집안 곳곳에 물 자국을 남기고 간 것 같았다. 그의 냄새가 집안 가득 남아있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카스미 마논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를 닮은 꽃이 가득한 들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언제 그가 말해준 것처럼, 별이 자신에게 내리길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달빛이 머리띠를 비추고 지나갔다. 동시에 무라카와 치사키는 눈을 떴다. 생경한 일이었다. 뭍에서 그물을 들어올리듯 붉은 끈에 묶여 의식이 건져올려졌다. 눈앞에 카스미 마논이 눈물을 삼킨 채 잠든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가에는 미처 다 삼키지 못한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손을 뻗어 그것을 훔쳐주었다.
“마논……”
“마논, 정말 미안해.”
무라카와 치사키는 자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무리 카스미 마논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라지만, 그는 카스미 마논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없었던 일로 할 순 없다. 모든 생명은 끝이 존재한다. 그러니 카스미 마논의 삶은 단순히 거기서 끝난 일이지만, 무라카와 치사키는 인정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한 줄기 불씨가 피어났다. 그는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카스미 마논의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붙잡고 거래했다. 거래 결과 확실히 카스미 마논을 살릴 수 있었지만, 담보는 자신의 목숨이었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그 대신 죽기로 했다. 무모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두 사람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어느 다정한 속삭임이 꺼져가던 불씨에 다시 한번 불을 붙였다. 무라카와 치사키에게 희망이 한 줌 생겼다. 되살아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덕분에 그의 곁에서 불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형체를 갖고 그를 안아줄 수 있는 것이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카스미 마논의 눈가에 짧게 입 맞추고 속삭였다. “반드시 돌아갈게. 내가 사랑하는 마논.”
동이 트고 있었다. 카스미 마논은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눈을 떴다. 그러자 그는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웃고 있는 무라카와 치사키였다.
“마논, 잘 잤어?”
“……”
카스미 마논은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를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는데, 꿈에서까지 나와 괴롭히다니. 그런데 꿈이라면 말을 걸 수 없는 것 아닌가? 드디어 미쳐서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 눈앞에 있는 건가? 그가 내게 돌아왔을까?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숨이 막혀왔다. 그저 눈앞의 존재에게 막연한 기대를 하고 물을 뿐이었다.
“꿈……?”
그것을 지켜보던 무라카와 치사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스미 마논이 너무 솔직했다. 가시돋힌 평소의 표정은 어디 가고, 껍데기를 다 벗은 모습이 한편으로는 너무 간절해 보여서 그 꿈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어울려 주기로 했다.
“응. 네 꿈으로 찾아왔어.”
그러자 카스미 마논은 무라카와 치사키를 끌어안았다.
“……어서 와. 혼자는 싫어.”
예상치 못한 행동에 무라카와 치사키는 당황했다. 그러나 곧 동요한 표정을 지웠다. 조금 더 솔직한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카스미 마논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꿈이라 생각할 테니까. 그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
“응. 나도 네 곁에 있고 싶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카스미 마논은 무라카와 치사키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아냐.”
“응?”
“아니야. 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옆에 있어…”
후회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목숨을 던질 필요가 없었을 텐데.’ 무라카와 치사키의 생각과는 반대로, 카스미 마논은 모든 일이 자신의 탓 같았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가령 이번 일이 그 때문에 일어났다는 거라던가. 그를 애정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다는 말 따위는 백 번의 밤이 지나도 꺼낼 수 없었다. 그날 밤, 정작 그가 사랑을 표현했음에도 그를 의심할 지경이었으니까.
무라카와 치사키는 잠시 카스미 마논을 바라보았다. 짙은 자책의 파도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 같았다. 부정해야 했다. 그러나 뻔한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반사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씹어 삼키고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더 직설적인 말을 건넸다.
“......”
“네 곁에 없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카스미 마논은 고개를 들었다. 서러운 눈동자가 무라카와 치사키를 올려다봤다.
“아니? 내 곁에 있던 걸 후회해야지, 나 때문에 치사키 네가,”
“하하, 아하하…… 나 때문에……”
내뱉는 말이 점점 흐려졌다. 카스미 마논은 결국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토해냈다. 그리고 애원하듯 덧붙였다.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으니까 돌아와. 가지 마. 곁에 있어줘, 치사키…”
무라카와 치사키는 조용히 카스미 마논의 등을 쓸어주었다. 건넬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
“하하, 꿈인데 내가 진짜 별소리를 다 하네…”
헛웃음이 이어졌다. 무라카와 치사키의 목울대에 여러 감정이 차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울어버리면 카스미 마논을 감싼 꿈의 요람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럼, 그는 견딜 수 없겠지. 아마 가시를 다시 세우고 마음을 바닥 깊이 숨겨버리겠지. 그리고 도망칠 것이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그를 달래는 동안 해가 완전히 떴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카스미 마논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작별의 키스였다. 그는 햇빛에 몸을 맡기면서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반드시 돌아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응, 치사키.”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는 요람을 떠났다.
시간은 절대적인 간격으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뇌는 시간의 흐름을 실제보다 길게 인지한다. 있는 힘껏 달리는 사람은 가만히 서 있는 사람보다 시간을 조금 더 빠르게 사용한다. 그렇다면 무라카와 치사키와 카스미 마논 중 어느 쪽의 시간이 더 빠른 걸까? 어차피 무라카와 치사키는 의식이 없었으니 흐름을 인지할 수 없지만.
로켓처럼 시간이 쏘아올려지고, 수없이 많은 밤이 지나갔다. 고요를 깨뜨리고 무라카와 치사키는 눈을 떴다. 그는 맨 처음 자기 몸을 확인했다. 늘 사용했던 백금발의 여체가 다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되찾은 몸을 확인한 다음 숨 쉬는 법도 잊고 카스미 마논에게 달려갔다. 한시가 급했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쉼없이 뛰어가다 뒷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날 카스미 마논과 함께 유성우를 보면서 살아달라 부탁했고, 맨 처음으로 약속을 건넨 들판. 그곳에는 여전히 밀짚꽃이 피어 있었다. 꽃잎이 달빛을 머금은 채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카스미 마논이 누워 있었다.
그는 밀짚꽃을 하나 쥔 채 잠들어 있었다. 눈가는 조금 붉었고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웅크린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하릴없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느라 얼마의 밤을 지낸 걸까? 그에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어 미안했다. 기약 없이, 오로지 말 한 마디뿐이었지만 믿어줘서 고마웠다.
어쩌면 무라카와 치사키는 카스미 마논 덕분에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스미 마논에게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날, 무라카와 치사키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죽는다.’ 그것은 고칠 수 없는 하나의 명제 같았다. 밀짚꽃은 길어봐야 가을이면 모두 지니까. 한낱 꽃에 불과한 몸은 여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거래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수많은 밤을 건너 다시 그가 아는 모습으로. 자신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누군가의 의지가 더해진 것이고, 무라카와 치사키가 생각해 볼 법한 사람이라곤 카스미 마논밖에 없다. 그러니 무라카와 치사키가 카스미 마논을 구한 게 아니고, 카스미 마논이 무라카와 치사키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살며시 그의 곁에 앉았다. 그의 곁에 흰 머리띠가 놓여있었다. 머리띠 위에는 노란 밀짚꽃 한 송이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조금 시들었지만, 여전히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머리띠를 집어든 채 고개를 숙였다.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천천히 카스미 마논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그를 침대에 눕힌 후 따라 곁에 누웠다. 그것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카스미 마논이 편히 잠들 수 있게 도와주려는 행동이었다. 무라카와 치사키는 카스미 마논에게 입 맞추고 속삭였다. “조금 이따 만나.” 그리고 곁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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