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기려] 이타심

#창호기려_전력_120분

* 소재 주의

* 쿠소로맨틱코미디를 쓰고 싶었는데(더보기)

* 퇴고 없음

 

* 김기려가 지구인에게 이타심을 발휘합니다.


김기려는 과일인지 채소인지 모를 것을 쓰다듬으며 20분 전에 만난 지구인의 행실을 떠올렸다.

나한테 고맙다고 했었지.

 

언젠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하던데, 김기려는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한주먹거리의 몬스터를 쓸어버리면서 주변에 널브러져있는 포유류의 면면을 어떻게 다 살피나. 더군다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은 ‘초면의 지구인’이란 개체에게 흥미를 가지는 편이 아니었다.

 

김기려가 상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음에도 지구인은 재차 감사인사를 남발하며 커다란 수박을 덥석 안겨주었다. 감사의 마음을 물질로 전달하는 바람직한 행동에 김기려는 수박을 달랑 안아들고 저택으로 왔다.

 

(여기서의 저택이란, 세 번째 S급의 명의로 되어있는 수영장 딸린 거주지를 뜻한다. 뭐, 이젠 김기려에게도 수영장 딸린 자택이 생겼기에 강창호의 저택엔 아무런 메리트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주방 좀 쓸게요.”

 

저택에 들어선 김기려는 집주인에게 고개하나 까닥이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다짜고짜 주방으로 쏙들어가는 인영을 따라 코트자락이 팔락인다. 강창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웬일로 고분고분 찾아오더니 하는 짓거리가 뻔뻔하기 그지없다. 여기까지 와서 애타게 찾는 게 고작 식사 공간이라니. 그 집 주방이 터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입꼬리만 끌어올린 집주인이 손님의 뒤를 이어 주방을 방문했다. 김기려는 여전히 수박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한손에는 방금 찾은 식칼을 든 채였다. 날붙이의 생김새가 얇고 길쭉한 게 누가 봐도 생선살 바르는 용도의 칼이었다. 다만 그걸 쥐고 있는 인물이 인물인지라. S급 헌터의 손에 들린 이상 사시미칼이 무리 없이 수박을 관통할 일만 남았다.

 

줄무늬를 손톱으로 슬슬 긁어내리던 김기려가 수박의 위통을 약하게 두드렸다. 퉁퉁퉁. 내용물이 그득한 상태에서 퍼지는 울림이 듣기 좋았다. 아직 과실을 입에 머금지도 않은 김기려가 벌써부터 배부른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요즘 포유류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지. 나 같은 천재에게 그 정도는 식은죽 먹기인데, 당장 몬스터를 해치우고 돈 받기에 급급했어. 이렇게 보답할 줄 아는 지성체들과는 돕고 살아야해. 아암.’

 

혓바닥 아래에 고인 침을 꼴딱 삼킨 외계인은 에라 기분이다, 지구인에게 이타심을 가지기로 했다. 손가락만 휙휙 돌리면 상황이 척척 해결되는 대마법사가 수박 하나로 편을 들어줄 줄은 수박의 원래 주인도, 수박을 기른 농부도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 지구인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는 둘째 치고, 일단 눈앞의 수박 맛을 먼저 보자고 다짐한 김기려가 막 식칼을 들어 올린 참이다.

 

위이이잉-. 근접한 거리에서 기계가 작동되었다. 김기려는 설레었던 기분이 단번에 진창으로 처박히는 것을 느꼈다. 여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집주인께서 다분히 의도적인 태도로 기계를 조작했다. 김기려의 희멀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칼자루를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머지않아 속이 매슥거릴 정도로 짙은 접착제 냄새가 둘 사이를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 하나가 너무나 당연하게 김기려의 앞에 놓인다. 김기려는 가뜩이나 송장 같은 눈깔을 치켜떴다. 강창호 이 개새끼가.

 

“이제 손님 대접 받을 마음이 좀 생기나?”

 

제 몫의 커피잔을 든 강창호가 조리대에 가볍게 기대며 김기려를 내려다봤다.

 

‘생길 리가 있겠냐.’

 

수박과 식칼에서 손을 떼지 않은 김기려는 싱크대의 배수구 구멍만 노려봤다. 이곳에 올 때마다 김기려 대신 47잔의 커피를 마셔준 기특한 배수구였다. 이런 시발 한낱 배수구조차 자신을 위해주는데, 강창호는 대체 뭐란 말인가.

 

김기려가 불만을 목구멍 안으로 눌러 담는 동안 강창호는 커피잔에 입을 두 번 갖다 댔다. 위아래로 삐죽한 동공이 김기려의 피부 위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시선에 손이 달려있었다면 진작 김기려의 이목구비를 헤집었을 터였다.

 

‘불투명하고 공간차지하고 머리털까지 풍성한 주제에 뭘 웃고 난리야.’

 

여러모로 마이너스였다. 인간의 겉가죽 안에 들러붙은 외계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아무리 지구인에게 살갑게 대해주어도 강창호의 존재가 모든 걸 망치게 생겼다. 하여간 저놈의 유전자가 문제야. 지구인들을 위해서라도 강창호의 유전자를 제거해야만…….

….

……제거?

 

퉁.

하고, 깨달음을 얻은 김기려가 수박을 내리쳤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제거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지.

 

“자릅시다.”

 

어려운 수식을 풀어낸 마도학자의 희열 따위가 묻어있는 해답이었다. 우중충하던 표정근이 풀리는 것을 구경하던 강창호가 초대하지 않은 과실을 향해 말했다.

 

“베어먹을게 아니라면 잘라야겠지.”

 

당연한 걸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는 듯 다소 무덤덤한 말투였다. 장발 포유류의 불성실한 반응에 김기려는 조용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시커먼 옷차림의 남자가 눈알을 아래로 고정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제야 강창호는 김기려가 언급한 ‘자르다’라는 행위 앞에 어떤 목적어가 존재해야하는지 깨달았다.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이거를.”

 

강창호가 자신의 바지춤을 일별한다.

 

“그걸로.”

 

여태 쥐고 있던 식칼이 지목되자 김기려는 속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원시인 아니랄까봐 도구 취향까지 미개하군.’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비효율적인 취향이라니,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기려는 이 돼먹지 못한 포유류에게까지 이타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가 원하는 취향에 맞춰주기로 한 것이다.

 

‘방식이야 어쨌든, 우선 생식기관을 제거하면 강창호의 유전자가 대물림 될 확률이 대폭 줄어들겠지. 선한 지구인들을 위해서라도 이게 답이다.’

 

김기려는 조리대에서 떨어져 강창호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예리한 칼날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강창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동종 업계인이자, 서로가 연인 관계인 걸 혼자만 모르고 있는 남자를 마주했다.

 

‘제법 어울려.’

 

원체 살갑지 않은 인상에 회칼까지 쥐어 주자 일반인이라면 이 몰골을 보고 졸도하겠거니 싶다. 자신의 생식기관이 위협을 받는 와중에 드는 감상이란 건, 대체로 이러한 것들뿐이다.

 

태평하게 서서 날붙이의 길이를 눈대중으로 짐작하는 동안 김기려가 강창호의 앞에 다가섰다. 흉기를 쥔 사람치고는 살의가 전혀 없었다. 길가에서 꺾은 꽃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연장을 다루는 방식이 허술했다. 칼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걸로 뭘 자르겠다고 덤벼드는지. 눈살을 옅게 찌푸리며 미소 짓던 강창호가 머리를 숙였다. 친히 제 앞의 김기려와 눈높이를 맞춰주며 말한다.

 

“그러지 말고, 이쪽에게 기회는 한번 줘야지 않겠어?”

“무슨 기회요.”

“쓸모를 증명할 기회.”

 

단신으로 몬스터를 찢는 엽사의 두터운 팔뚝이 김기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버티는 힘이 없어 그의 신체일부가 손쉽게 강창호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하반신이 맞닿자 어정쩡하게 상체를 뒤로 뺀 김기려가 특유의 무감한 낯빛을 내보인다.

 

“그럴 필요가 있나요.”

“왜 이리 야박하게 구실까. 응? 김기려.”

 

김기려가 만든 거리감이 강창호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돌연 김기려의 몸이 번쩍 들렸다. 성인 남성을 손쉽게 안아든 강창호가 공중에 뜬 다리를 자신의 골반께에 둘렀다. 하체의 두께에 못 이겨 김기려의 다리가 속절없이 벌어졌다. 강창호의 너른 손바닥 위로 허벅지가 묵직하게 눌린다. 구부리고 있던 손가락을 쭉 뻗어 허벅지와 둔부 사이의 살집을 감싼다. 값 꽤나 나가는 매끄러운 정장 바지 덕분에 일련의 행동들에 막힘이 없었다.

 

졸지에 거구의 남자에게 매달리게 된 김기려가 두 눈만 껌뻑였다. 단단한 상체와 가슴을 겹치자 앞뒤로 흔들리던 머리가 허공에 덜컥 멈춰 섰다. 청보라 빛의 촘촘한 속눈썹이 지척이다. 폐가 짓눌리며 뱉어진 밭은 숨이 강창호의 입가에 닿았다. 김기려의 서늘한 안색과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숨에 강창호의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살짝 벌어진 제 연인의 입안은 필시 비좁고 뜨거울 것이다.

 

‘미친놈.’

 

김기려는 지금 강창호에게 달라붙어있는 게 자신만이 아님을 뒤늦게 상기했다. 아직 칼이 들려있었다. 균형을 잡기위해 강창호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는.

인간의 급소 중 하나인 경동맥에 차가운 금속이 알짱거리는데도 강창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기려의 신경이 날붙이로 쏠리자 그의 엉덩이를 움켜잡으며 관심을 돌려받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건방지고 오만한 포유류.’

 

감히 겁도 없이 대마법사님을 안아드는 작태에 김기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이어 식칼의 넓적한 부분으로 강창호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한다. 굶주린 짐승이 앓는 소리 따위가 강창호의 잇새에서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김기려의 허벅지를 쥔 채 느긋하게 허릿짓을 한번 하더니 콧등을 부벼오며 속삭인다.

 

“이게 없으면, 우리 김기려 헌터가 적잖이 손해 볼 텐데.”

 

강창호의 생식기관이 없어진다고 자신이 손해 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타입의 김기려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사고가 훤히 읽히는 낯짝이었다. 그것은 줄곧 빈틈을 노리고 있던 강창호에게 신호탄과 다를 바 없었다.

 

강창호는 사냥감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남자였고, 그건 김기려의 입장에서 작은 불행이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 손해인지, 실험해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냉철하신 김헌터께서 어련히 알아서 결정할 거라고 믿어.”

 

해당 발언을 마지막으로 강창호의 입은 김기려의 턱밑을 지분거리는 데에 쓰였다. 발칙한 포유류가 자신을 주무르는 동안 강창호의 등 뒤에서 날붙이를 까닥거리던 김기려가 계산을 마쳤다.

그래, 자르는 거야 금방 끝나니까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 지금은 강창호가 언급한 ‘손해’라는 게 어떤 종류의 손해인지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설마 이번에도 금전적 손해를 보는 건 아니겠지. 다시금 탈세 헌터의 가능성이 열리는 건 사양이다.

 

김기려는 강창호의 실험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실험은 알파우리 출신 대마도사가 자신하는 분야였다.

실험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어렵겠어? 빨리 끝내고 수박이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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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분 후.

김기려는 강창호의 생식기관을 잘라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된다.


왐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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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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