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히어로 샘플

태웅대만

임시디디함 by 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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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체육관은 밤이지만 떠다니는 열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공기가 뜨거웠다. 태웅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지도 않고 그저 앞을 응시했다. 그러다 등 뒤에서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들으라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야, 서태웅. 하기 싫은 건 알겠는데 이왕 하는 거 성의있게 하자.”

“…네.”

 

마치 벌을 받을 때처럼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양팔에 힘을 주었다. 태웅에게 핀잔을 날린 태섭은 백호의 어깨를 툭 쳤다. 자, 강백호. 봐. 아니, 나 말고 서태웅 눈 보라고. 허리 더 낮추고 무릎에 힘 빡 줘. 여기서 서태웅이 너 밀고 들어올 수도 있어. 그럼 어떡할 거야? 버텨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무릎에 힘 더 줘. 태섭이 백호를 옆에 끼고 일대일 과외를 해주는 동안 태웅은 그저 손을 들고 백호의 상대 선수 역할을 했다. 팀 운동인 이상 서로의 훈련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태웅을 구한 건 체육관을 울릴 듯 채우는 호루라기 소리였다. 체육관 곳곳에 흩어져 있던 부원들이 치수 앞으로 모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그리고 다음 주 체육관 이용 시간 바뀌었으니까 다들 확인하도록. 오늘 청소 당번 누구지?”

 

대만과 중식, 호식이 손을 들었다.

 

“어제 축구부 부실에 정체 모를 놈이 침입했다고 하니까 우리도 조심하자. 문단속 제대로 해라. 그럼 이만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쩌렁쩌렁한 인사 뒤 부원들이 하나둘 체육관을 나섰다. 그러나 태웅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수가 그런 태웅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서태웅, 무슨 할 말 있나?”

“오늘 남아서 연습을 더 하고 싶습니다.”

“안 돼.”

“그렇지만….”

“오늘 안전 귀가 시간은 10시까지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치수가 체육관의 시계를 가리켰다. 작은 바늘이 숫자 9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웅이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새어 나온 건 소리 없는 한숨이었다. 태웅은 센티넬이었으니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귀가 시간을 굳이 지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치수는 완강했다.

 

“아무리 너라도 예외는 없다.”

“…….”

“서태웅.”

“네.”

“강백호 도와주라는 게 그렇게 불만이냐?”

 

태웅은 입을 꽉 다물었다. 방과 후에 진행되는 농구부의 훈련은 매일 비슷한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 같이 모여 스트레칭으로 시작해 기초 훈련 후 조를 짜서 기술 훈련을 했다. 그러나 오늘 태웅은 태섭의 부름을 받았다. 초보자 강백호의 훈련을 도와주라는 거였다. 태웅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세를 잡고 스텝을 배우는 백호 앞에 손을 들고 가만히 서 있으라는 것뿐.

 

“부원들끼리 도와가면서 훈련해야 하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네.”

“너도 언젠가 강백호의 도움을 받게 될 날이 올 거다.”

 

글쎄,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하지만 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수는 위로하듯 태웅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치수가 먼저 체육관을 나섰고 태웅이 뒤를 따랐다. 아쉬운 듯 잠시 돌아보자 양팔에 공을 끼고 있던 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태웅이 샤워실을 나왔을 땐 청소당번이었던 호식과 중식이 막 락커룸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가볍게 나눈 뒤 태웅은 가방을 챙겼다. 원하는 만큼 농구를 하지 못해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집 근처의 공원을 떠올렸지만 제법 늦은 시간이었으니 선뜻 발길이 향하지 않았다. 태웅은 교문을 나서기 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체육관을 보았다.

 

“……!”

 

청소 당번들도 돌아왔으니 새까만 어둠이어야 할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태웅은 저 빛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지금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태웅이 자전거의 핸들을 완전히 꺾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았다. 힘을 주어 문을 열자 가장 안쪽의 조명 두 개만 켜진 채로 바닥에는 농구공 몇 개가 굴러다녔다.

 

“서태웅이냐?”

 

골대 근처에서 공을 던지던 사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태웅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대만은 체육관의 불을 끄고 혼자 연습하고 있었다. 태웅을 확인한 대만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들어오려면 빨리 들어와. 거기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걸리지 말고.”

 

겨우 허락을 받은 태웅이 자전거를 체육관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입구 근처에 자전거를 내려놓고 태웅은 메고 있던 가방 속에서 농구화를 꺼냈다. 신발을 갈아신은 뒤 굴러다니는 공을 주웠다. 그리고 대만에게 일대일을 권유하려다 그만두었다. 대만도 오늘 종일 1학년들의 슛을 봐주느라 개인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규칙을 어겨가며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태웅에게 그 정도 눈치는 있었으니 대만과 반대편 골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조명을 제대로 켜지 않은 체육관 내부는 꽤 어두웠지만 골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집중하기 위해 숨을 들이켜자 날카로운 공기가 코를 타고 내려가 몸 어딘가의 심장이며 폐까지 쿡쿡 찔렀다. 마치 가시라도 박힌 듯이 태웅의 전신을 끊임없이 두들겼다. 익숙했지만 적응되지 않는 감각이었다. 그 탓인지 가볍게 몸을 풀고 공을 만져보아도 생각대로 잘 풀리진 않았다. 그건 태웅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도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가는 소리가 수상하리만치 자주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서로의 탓이었다. 그러나 태웅은 공을 놓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이유로 공을 놓기에 태웅은 농구가 간절했다. 공기가 거슬리는 만큼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살갗을 두드리는 공기를 파고들며 골망을 흔들었다. 거칠게 움직인 덕분에 온몸에서 열이 났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백호의 앞에 서 있을 때와는 달리 땀을 닦는 것도 귀찮지 않았다. 태웅이 아대로 이마를 훔쳐낸 순간 농구부에서 사용하는 호루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안전 귀가 시간이었다. 태웅이 뒤를 돌아보았고 당연하다는 듯 대만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쩔래?”

“전 상관없어요.”

“나도 상관없어. 그럼 계속하던가.”

“…….”

 

태웅과 대만이 살고 있는 이곳은 전쟁 중이었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안전 귀가 시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센티넬인 태웅은 예외였지만 대만에겐 상관없을 리가 없었다.

 

“왜 그렇게 봐? 너 알잖아. 나 가이드인 거.”

 

태웅은 집이 가까워서 북산을 선택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북산엔 센티넬과 가이드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학교에 능력자가 있으면 귀찮은 탓이었다. 그러나 대만이 체육관에 들이닥친 날, 태웅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 사람 가이드구나. 심지어 태웅과 상성이 맞지 않아 공기에서부터 거부감이 느껴지는 가이드였다. 다만 센터에선 정대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 허가가 나올 정도로 등급이 높은 가이드는 아니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그 사건 이후 대만이 농구부로 돌아온 건 태웅에게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만의 농구는 지금 북산엔 꼭 필요했고 태웅은 묵묵히 거북함을 견뎠다. 태웅이 센티넬인 건 온 학교가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대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았으니 태웅은 대만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떠벌린 적도, 확인받은 적도 없었다. 이제 와서 본인에게 확인 사살을 받아도 태웅에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태웅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꼽냐? 별것도 아닌 놈이 가이드라고 말하고 다녀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요.”

“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어.”

 

태웅은 센티넬이란 이유로 자주 시비에 걸렸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태웅을 치켜세우는 척 끌어내리려 안달이었다. 그러나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정대만이라면 더더욱. 누구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는지 정녕 모르는 걸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을 참아줄 정도로 태웅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선배는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텐데요. 별것도 아닌 가이드가 안전 귀가 시간 넘겨서 좋을 일 없잖아요.”

“…하.”

“별것도 아닌 가이드라 모르시겠지만 전 센터에서 야간 통행증이 나와서요. 선배는 야간 통행증 없이 돌아다니다 걸리면 근신 아닌가.”

 

말을 뱉고 나니 선을 넘은 것 같다는 자각은 있었다. 혹시 주먹을 휘두른다면 한 대 맞아줄 생각으로 태웅은 몸에 힘을 뺐다. 그러나 대만은 잠잠했다. 대신 눈에는 시뻘겋게 핏줄이 섰다. 어금니까지 꽉 깨물고 화를 참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대만은 들고 있던 공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치고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나갔다. 신발도 갈아신지 않은 채였다. 농구를 오래 한 주제에 농구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짓을 저지르다니 내일 체육관에서 흙이 보이면 저 사람 탓이라고 알려줘야겠다. 태웅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제법 옹졸한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대만이 별것도 아닌 가이드라면 태웅은 제법 별 볼 일 있는 센티넬이었다. 태웅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도 센티넬 관리 센터의 침대에서 시작되었다. 태웅이 사는 곳은 아주 오랫동안 전쟁 중이었고 그 탓에 모든 사람은 3살이 되면 센터로 가서 센티넬 적합 검사를 받아야 했다. 태웅은 아주 오랜만에 나타난 상급 센티넬이었지만 그건 태웅에겐 썩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농구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센터로 불려 다니며 현장에 차출당하는 건 끔찍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센티넬이란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은 편견을 한 겹 씌우고 태웅을 보았다. 태웅의 뛰어난 농구 실력도 그저 센티넬의 부산물쯤으로 여겨졌다. 센티넬은 모든 능력을 억제해야만 운동 경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무교육 시간에 배우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태웅은 자신의 능력이 기꺼웠던 적이 없었다.

 

대만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사람들. 오랜 전쟁으로 능력자가 귀해졌지만 최하위 등급도 나오지 않는 사람을 센터에 두고 관리하기엔 유지비용이 더 들었다. 그러니 대만같이 애매한 사람들은 센터에 등록조차 되지 않았다. 센터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센티넬이 어떤 삶을 사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센티넬이라고 하면 눈에 힘을 주고 달려드는 사람들.

 

심지어 대만은 태웅과 상성도 맞지 않아서 함께 있으면 그 주변의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센터에 가서 관리라도 받으면 나아질 텐데 대만은 등록도 하지 못하는 가이드니 그걸 알 리가 만무했다. 태웅은 대만이 나간 입구를 보다 혀를 찼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공을 들긴 틀린 모양이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공을 하나둘 주워 카트에 담았다. 밀대로 바닥까지 깨끗하게 닦고 벽에 기대어 둔 자전거를 들어 주변을 정리했다. 자전거가 들어왔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태웅은 체육관을 나왔다.

 

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둘 체득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중이었던 지금의 학생들은 매일매일 달라지는 안전 귀가 시간을 확인하는 게 당연한 습관이었다. 센터의 운영도 그랬다. 공격력을 단숨에 쏟아부어 승기를 잡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오랜 전쟁으로 쏟아부을 물량도 없었다. 효율적인 전략이 중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센터의 센티넬들은 미리 정해진 일정에 따라 현장에 출동했다. 그렇지만 전쟁이란 것이 매번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으니 태웅은 학교에 있다가도 현장에 불려 나가기 일쑤였고 아무리 중요한 시합이 있어도 센터에서 연락이 오면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도 있었다. 다음 시합을 위해 대기 중이던 태웅은 공립 체육관 안내 방송으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올 때 예상이 아닌 확신을 했다. 유니폼을 입은 채로 체육관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차가 태웅을 기다리고 있었고 인사도 없이 그 차에 실려 현장으로 옮겨졌다. 태웅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다가올 전투가 아닌 전투가 끝난 뒤 체육관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장에 도착한 뒤 무너지는 폐허더미에 다리가 깔릴 뻔했거나 급한 마음에 능력을 과하게 써서 수습하느라 애를 먹은 팀원들에게 눈총을 받은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태웅은 현장이 정리되자마자 요원들에게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가이딩이 먼저라며 센터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협박이 통했던 건 아직 현장의 근처라서 태웅의 능력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이 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그 사람들을 해칠 만큼 능력을 쓸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태웅을 보좌하는 말단 요원들이 알 리가 만무했다. 그들에게 힘을 가진 센티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 태웅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립 체육관 앞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가이딩을 위해 센터로 돌아가야 하니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요원들에게 대충 그러세요, 하고 차에서 뛰쳐나간 태웅은 체육관에 들어가기 전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현장에서 멀어지면서 제어장치가 발동했고 능력은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능력과 체력은 별개였으나 가이딩을 받지 못한 상황에선 말이 달랐다. 감각이 조금 멀어졌나 싶긴 했지만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니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태웅은 체육관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상황실로 갔다. 이름을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다가왔다. 왼쪽 팔뚝에 끼워두었던 아대를 내려 피부에 옅게 심겨 있는 칩을 내밀었다. 직원 중 한 명이 형광빛이 나는 기계를 가져다 대자 삐익삐익 소리가 났고 이윽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 제어 문제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경기에 출전하셔도 됩니다.”

“네.”

 

태웅이 다시 아대를 꼈고 직원은 태웅의 뒷목에 도장을 찍었다. 그 사이 태웅은 직원이 들고 있던 명단을 흘낏거렸다. 센티넬 관리 대장. 거기에 올라가 있는 이름은 서태웅 하나뿐이었다. 태웅이 상황실에서 나오자 한나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태웅아, 너 출전 가능해?”

“네.”

“그럼 몸 풀고 바로 들어가자, 전반 7분 남았어!”

 

태웅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곧바로 선수교체가 나왔다. 태웅은 심판에게 뒷목에 찍힌 도장을 보여주었고 심판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치수와 태섭이 태웅에게 와서 상태를 확인했고 백호는 멀리 떨어져 툴툴거렸으며 대만은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이유야 분명했다. 태웅과 대만은 서로 기분 나쁜 공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만에게 태웅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팀에 필요한 선수인 걸 알기에 묵인할 뿐이었다. 잠시 뒤 경기는 속행되었다. 가이딩을 받지 못한 탓에 이따금 손이 떨리거나 시야가 흐려지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였다. 태웅이 시간을 들여 쌓아 온 농구는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눈에 띄게 플레이가 흔들린 건 대만이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턴오버를 하는가 하면 슛도 불안정했다. 몇 개의 슛이 빗나간 이후 대만은 자신에게 찬스가 와도 직접 슛을 던지지 않고 태웅이나 치수에게 공을 돌렸다. 그리고 대만은 전반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태웅을 밖으로 불러냈다. 열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너 뭐냐?”

“뭐가요.”

“몰라서 물어? 너 오늘 진짜 최악이라고.”

 

태웅이 순순히 대만을 따라 나온 건 태웅도 오늘따라 대만이 거슬린 탓이었다. 평소에는 공기가 따끔거리는 정도였다면 오늘은 뾰족한 물체로 쿡쿡 쑤시는 것처럼 태웅을 압박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그래서 태웅은 최대한 예의를 차려 솔직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서 가이딩을 못 받았어요.”

“뭐? 가이딩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힘을 많이 쓴 건 아니라 이 정도로 어떻게 되진 않아요. 끝나고 센터 가면 돼요.”

“아니, 너 말고 나! 내가 죽겠다고!”

 

어쩌라고요. 그 말을 참을 수 있었던 건 태웅이 이 모든 상황이 제 탓임을 정확히 인지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원인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해결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날 더러 대체 어쩌라고. 유독 상성이 맞지 않는 센티넬이나 가이드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대만처럼 유별나진 않았다.

 

“저도 선배랑 같이 있으면 힘들어요. 근데 참고 뛰는 거니까 선배도….”

“시발, 무릎이 아프다고!”

 

과연 그 말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태웅은 저도 모르는 사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호대를 차고 있었으니 겉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대만은 저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무릎이 지끈거려. 다른 때는 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오늘은 아냐. 후반에도 이렇게 뛸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 봐.”

“어떻게….”

 

여기서 센터까진 거리가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가이딩 약물도 챙겨오지 않았으니 대만이 어떻게를 요구해도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오늘은 쉬세요. 제가 뛸게요. 경기에 지진 않을 테니….”

“이게 뚫린 입이라고!”

 

돌연 다가온 손이 태웅의 멱살을 잡았고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빠질 거면 네가 빠져! 당장 한 경기가 급한 사람한테 지금….”

“우선 손부터 놓으세요.”

 

방어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현장에서부터 입고 있던 유니폼이었다. 전투에 사용되는 물질 중에는 그리 좋지 않은 것도 많았으니 유니폼에 뭐가 묻어있을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대만의 손아귀에서 유니폼이 구겨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웅이 손을 들어 여전히 제 유니폼을 쥔 손 위로 겹쳤다.

 

“우왓!”

 

대만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손이 맞닿은 순간 불에 델 듯한 열이 느껴진 탓이었다.

 

“뭐, 뭐야. 너 설마 방금 능력 썼냐?”

“아뇨. 제 능력은 염력이에요. 방금 건….”

 

가이딩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태웅은 여전히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떠 있는 손을 잡았다. 인간의 체온이라기엔 과할 정도의 열기 아래로 아주 미약하지만 무언가 느껴지긴 했다. 대만을 보자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가이드잖아요.”

“뭐?”

“선배 가이드잖아요. 저 가이딩 해주세요.”

“아, 아니, 난….”

 

상성이 맞지 않으니 가이딩을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을 틀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자 삐죽하게 솟아올랐던 감각들이 아주 조금 얌전해졌다.

 

“야, 나, 나 가이딩 할 줄 몰라…. 어떻게, 어떻게 하는 건데?”

“어차피….”

 

선배 등급으론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예요. 태웅은 그 말 대신 나머지 손도 잡았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설프게 손이 잡힌 채로 대만은 얌전해졌다. 복도 한가운데서 양손을 붙들고 있는 두 명의 선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개중에는 태웅과 대만의 이름을 아는 이들도 있었다. 태웅은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익숙했지만 대만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제 끝내냐며 성화였다.

 

대만과 두 손을 잡고 체온을 공유해도 유의미한 가이딩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맞잡은 손의 과한 온기는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도와주긴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태웅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저런 가이드라도 없는 것보단 낫구나. 태웅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만은 후반전에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했고 경기가 끝나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게워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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