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장르

악마를 보았다

네로x브이/데빌메이크라이5

Red camel by 스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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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작성.

데빌메이크라이5 네로브이

본편과 상관이 없는 AU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세요.

감정선은 네로>키리에 / 브이>네로에 가깝지만 우선 네로x브이 글입니다.

+나오는 종교는 일부 기독교적 모티브를 차용했지만 일치하진 않습니다.


마른 손가락이 바이올린의 현을 짚는다. 활을 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랐다. 그림자마저 얄쌍했지만 눈으로 보면 마른 근육이 붙은 남자였다.

“네~ 거기까지. 좋은 연주 잘 들었습니다.”

남자의 연주가 끝났을 때, 앞에 앉은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잘 되진 않은 것 같다. 남자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자, 다음분. 들어오세요. 남자의 한숨위로 건조한 목소리가 울린다. 남자는 그 목소리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과 교차되어 방을 나갔다.

지갑을 아무리 털어 봐도 오늘과 내일을 지낼 식대가 전부다. 당장에 방값을 내라며 성화인 집주인에게 오늘도 뭐라고 한담. 거기에 빚도 아직 이자가 남았는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애매한 재능이란 이래서 좋지 않다. 그의 재능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중간했다. 어디에 가서 음악을 전공했다고 할 수는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좋은 연주 실력과 멋진 작곡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문외한들끼리의 얘기다. 수많은 천재와 수재가 넘치는 이곳에서 그는 평범한 범재였다. 돈을 벌어먹기에는 조금 모자란 재능. 그것이 그가 가진 음악자로의 아이덴티티이다.

청년은 구불구불한 자신의 까만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 더 길러서 차라리 묶을까. 이제와서 단정하게 이발을 한다고 해서 면접에서 뽑힐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발할 돈도 아깝다. 남자는 오늘따라 계속 나오는 한숨을 입에 단 채 가방을 어깨에 멨다. 바이올린을 팔면 방값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면 앞으로 뭘 하고 먹고 사나. 그런 걱정을 할 때 우연히 벽에 붙은 구인 광고가 보였다.

근처 교회에서 붙인 광고였다. 교회이다 보니 그다지 돈을 많이 주진 않는다. 일종의 봉사정신. 주님께 자신의 탈렌트를 바칠 것. 그런 문제다. 남자는 종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무시하려다가 다시 종이를 봤다.

봉급이 문제가 아니다. 조건에 다른 사항이 적혀 있었다. 식대 및 숙식 제공. 두번 읽었다. 식대. 혹은 숙식을 제공.

“……….”

갈 곳 없는 그에겐 제법 좋은 조건이었다.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셨군요. 아, 지휘자 경험도 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혹시 피아노 말고도 다루실 수 있는 악기가 있나요? 바이올린이 전공이시라고요. 오! 정말 잘됐습니다. 마침 저희 교회에도 합주반이 있어서……. 어린 학생들이지만요. 하하.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교회의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학생부의 합주를 봐주고, 성가대의 반주를 해주면 되는 정도의 일이다. 오히려 이 일을 하면서 작곡공부를 할 수 있으니 그에겐 무척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역시 식사가 나오고 방도 준다는 부분이지.’

교회이다 보니 이런 곳의 복지는 꽤 좋았다. 빈방이 바로 있다는 말에 남자는 자신의 짐을 챙겨서 교회로 향했다. 남자가 가진 짐이라고 해도 별로 없다. 악기. 악보. 그리고 옷 몇 벌. 돈이 될 만한 건 이미 옛날에 다 팔아치워서 참으로 간소한 짐이다. 그나마 비싼거라곤 바이올린. 그리고…. 돈은 안되지만 인생을 건 작곡 노트 정도이다.

“어이. 거기. 너. 누구냐? 못 보던 얼굴인데.”

가방을 들고 교회 문을 열었더니 긴 의자에 누워있던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얀 머리에 조금 큰 어깨.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키도 크고 골격 자체가 다부진 남자다. 그렇지만 얼굴은 꽤 갖추어져있다. 잘생겼다고 해야할까. 높은 코에, 굵은 골격이지만 반대로 곱상하고 섬세한 눈이 예쁜 미남이었다. 거기에 나이가 어린지 아직 소년티가 다 벗겨지지 않은 얼굴이다.

“아아~ 네로. 그분은 이번에 새로 온 성가대 반주자일세.”

그를 알아본 교회의 목사가 달려오며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네로라고 불린 남자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충 훑어봤다.

“아하. 어쩐지. 조금 예술 할 것 같이 생겼다 싶었더니만. 반주자였구나.”

여기서 내가 내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고 있어야하나? 남자는 조금 까다로운 표정을 짓고 그를 무시하며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렇지만 네로가 먼저 손을 뻗었다.

“나는 네로야! 앞으로 자주 볼것 같은데. 잘 지내자고.”

“…잘부탁한다.”

기세에 밀려 억지로 악수를 받아주었다. 짐이 많아서 무거웠기 때문에 길게 말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끝나고 다른 분들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목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기에 그는 목사를 따라갔다. 흘깃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네로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교회에 온 첫날. 간단한 교회 구조와 사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마침 오늘 성가대의 연습 날이라기에 첫날부터 반주를 맡기로 했다. 한번 훑어보니 찬송가의 악보가 그리 어려운 수준은 아녔다.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으면 교회의 성가대가 들어왔다. 다들 사람 좋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도 어중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앉지도 않은 자세로 인사를 꾸벅꾸벅 했다.

그는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두들겼다. 낡은 피아노는 이 교회에 한참 오래토록 있었던 모양이지만, 조율도 잘 되어 있고 관리상태가 좋았다. 그만큼 이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 이 피아노가 소중한 위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피아노가 자신의 상사라도 되는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의 의자위에 앉아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다. 높은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천장에 울린다. 시선 끝에 있는  성녀의 조각상. 그 뒤로 보이는 햇살. 그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노래하는 여성. 갈색의 머리가 햇살에 비추어져 붉게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노래했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성스럽게 울린다. 아. 참 좋은 목소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심취했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이시죠?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이 끝나고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성가대의 메인 소프라노였던 여성이었다.

“연주 실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저는 키리에라고 해요.”

키리에는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노래를 할때의 그녀는 무척 빛나고 무엇보다 눈이 부셨는데, 노래를 하고 있지 않을때의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수수하게 보였다. 어디 하나 빠지진 않는 용모지만 그렇다고 눈에 크게 들어오는 미인은 아니다. 목소리가 좋지만 아주 매혹적이지도 않다. 방금 전에 노래를 부르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던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키리에. 노래를 무척 잘하시더군요.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어머. 정말요? 부끄럽네요.”

그와 키리에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을때였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의 옆으로 큰 그림자가 하나 가까이 왔다. 키리에는 놀라지도 않고 웃으며 돌아봤다.

“네로. 왔어?”

“응. 키리에. 지금 끝났나보네.”

“마침. 딱 알맞게도 말이지.”

키리에는 네로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네로 역시 웃곤 있었지만 묘하게 미소가 어둡다. 네로의 눈이 한번 흘깃 그에게로 향했다.

“잘됐다. 같이 돌아가자.

“어어, 잠시만 네로…….”

네로가 키리에의 팔을 잡고 뒤로 돌았다. 키리에는 조금 당황하더니 간신히 팔을 저었다.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뵐게요.”

그는 멀어지는 키리에와 네로를 바라봤다. 네로는 그를 견제라도 하는지 날카로운 표정으로 한번 노려보았다. 그는 솔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를 좋아하는군.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감정이다. 자신에 대한 무례함에 화나진 않았다. 사랑은 원래 사람을 유치하게 만든다. 네로는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고자 유치해져버렸을 뿐이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악보를 정리했다. 교회를 비추던 햇살이 지금은 텅 비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무척 빛이 났는데 말이다. 그는 키리에가 서 있던 자리에 한번 서보았다. 막상 서보니 무대는 조금 높기도 하고 조명이 있어 어지러웠다. 그는 손을 뻗어 노래를 하려 했지만 막상 생각나는 노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시를 읊었다.

사랑의 뜰에 가서

그 옛날엔 못 봤던 것을 보았네

내 어릴 적 뛰놀던 풀밭 가운데

교회당이 하나 서 있었네

교회당 문은 닫혀 있고

그 문 위에는 '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여 있었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꽃들이

수없이 피어 있는

사랑의 뜰로 돌아서 버렸네*1

그는 그 뒤로 며칠간 교회에서 반주자로서 일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교회에 익숙해졌고, 사람들 역시 그가 교회에 있는 사실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이 교회는 이 도시에 꽤 오래 있었기에 충실한 신자가 많았다. 놀랍게도 네로도 그런 충실한 교인중 하나였다.

“난 네가 교회의 경비원 정도 되는줄 알았어.”

그는 네로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어느 정도 친해졌기에 가능한 말이다. 네로는 ‘뭐, 임마?’라고 말은 했지만 정말로 화가 나진 않아보였다. 그의 말 끝에 피식 웃으며 그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잡고 보니 차가운 캔 음료이다.

“나름 신실하긴 하다고.”

“흐음. 그래 보이진 않아서.”

네로의 말에 그는 시선을 흘리며 말했다.

“다른 속셈이 있는거 아녔어?”

씩 올라간 입꼬리에 네로는 오히려 화를 냈다.

“아, 아냐! 절대 없어!”

없기는 무슨. 그는 그런 말을 삼키며 음료수를 마셨다. 네로가 키리에를 얼마나 뜨거운 눈으로 보는지, 교회의 사람들은 모두 네로의 속 마음을 알고 있다.

‘사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음료수를 삼키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납득이 갔다. 키리에는 빛이 나는 사람이다. 교회 벽에 걸린 종교화처럼. 여신을 조각한 석상처럼. 아름답고 언제나 바라보게 되지만 더러운 마음을 품지 못하는 고결함이 있다. 어쩌면 네로도 그런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손에 넣지 못하기에 아름다운것도 있다는 말이 있지.”

“비꼬냐?”

“잘 해보라고.”

음료수는 잘 마셨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를 씩씩 거리며 바라보는 네로의 얼굴이 붉다. 네로는 가끔 무척 순수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한다. 아마 거칠어 보이는 네로의 진정한 내면은 순수하고 맑다는 뜻이겠지. 그는 생각했다.

*   *   *

교회의 일은 시간이 많이 남아 돌았다. 성가대의 반주를 해주거나, 유소년 부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를 해주는 일 정도였다. 남자는 여가 시간에 작곡을 마저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오늘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때였다. 그의 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려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절대로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라는게 문제다. 덩치가 꽤 큰 남자 몇이 그를 보며 인사한다. 여어. 오래간만이야. 어디 가서 굶어 죽은 줄 알았네. 쓰레기통을 찾고 있었다니까? 네 시체가 나오려나 하고 말이지. 낄낄 거리며 남자의 어깨를 친다. 남자는 맞은 어깨를 감싸쥐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난감하다. 이 놈들은 질이 안좋다.

돈은 언제 갚을거야? 우리 형님께서 엄청나게 화나 있으시다고. 너 때문에. 사시사철 빡쳐서. 우리한테 얼마나 뭐라고 하는지 알아? 어? 사내들은 그가 서 있을 자리까지 침범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림자가 점점 짙어진다.

“원금이라면 이미 냈잖아.”

“원~금이라~면?”

말은 잘하네. 너. 이자가 얼마나 붙은지 알거 아냐. 낄낄 거리며 남자들은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남자도 알고 있다. 이 놈들은 그냥 오늘 심심했나보다. 그들의 기분을 풀어줄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거기에 자신이 걸렸다. 물론 산처럼 불어난 이자 역시 좋은 이유가 되어주었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남자는 이 앞의 일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조금씩 가해지던 힘이 어느 순간 강해진다. 퍼억. 놈들 중 하나가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옆으로 후려쳤다. 그렇지 않아도 가녀린 몸은 옆으로 쉽게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땅에 넘어지는 소리마저 작고 얇았다. 그 뒤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번 넘어진 사람은 얼마나 때리기 좋은 상대인지. 놈들은 남자가 같은 인간인걸 잊은 사람처럼 밟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지나가는 병아리를 발로 굴리며 잡아 놀 듯이 말이다. 남자는 크게 비명한번 지르지 못했다. 그럴 힘조차 없었다. 낮고 쉰 신음이 바닥을 기어가는 뱀처럼 새어나올 뿐이다.

“야! 너희들! 뭐하고 있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린다. 골목을 가득 채우는 생동감있는 목소리다. 쿵쾅 거리는 발걸음이 다가온다. 뭐야 넌. 놈들이 말하자마자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쿠당탕. 놈들 중 하나가 넘어진다. 남자는 시선을 겨우 들었다. 눈에 익숙한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네로였다.

“넌 또 뭐야?”

“넌 또 뭐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이 양아치 새끼들아.”

남자는 땅에 쓰러져 싸우는 네로를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네로. 이름을 작게 불렀지만 입 밖에 소리가 되지도 못했다. 너무 아팠다. 네로는 자신보다 체격도 큰 사람들 앞에서 주먹을 쥐고 노려보고 있었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사람 수도 많은데 말이다. 그중 한 놈이 비웃으며 네로에게 말했다.

“아~ 이놈 그놈 아냐. 대가리 하얀 창녀 아들 놈.”

“…….”

네로는 딱히 그 말에 화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있는 남자를 한번 바라보았다.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야야. 창녀 아들놈. 괜히 껴들지 말고~”

“꺼지라고? 그건 내가 할 소리고.”

네로는 말을 하던 남자의 턱에 발차기를 꽂아넣었다. 그래. 발차기였다. 네로의 발이 남자의 골을 흔들고, 남자는 억하며 뒤로 쓰러졌다.

“시발 다 덤벼. 전부 조져줄테니까.”

네로는 말만큼이나 걸한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숫자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한놈씩 착실하게 면상에 주먹을 갈겨 넣거나, 복부에 발차기를 먹어두었다. 쓰러진 놈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지만 별로 의미없는 발버둥이었다.

“두고보자. 이 자식…!”

“전형적인 양아치 대사 아냐. 좆까고 있네 허접 새끼들아~!”

……욕 한번 정말 잘하네.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숨을 쉴때마다 흉통이 아팠다.

네로는 뒤늦게 남자를 부축해주었다.

“괜찮아? 어디 아파?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어?”

일어설 힘도 없는 남자를, 네로는 일으켜주었다. 네로의 큰 손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고도 남았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헉하고 숨을 몰아 뱉었다.

“이렇게 하면 아파? 혹시 갈비뼈라도 부러진거 아냐? 봐봐. 내가 만지면 아파?”

네로는 당황해서 남자의 허리와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큰 손이지만, 힘이 실렸기보다 오히려 상냥함이 실려 있었다. 

“아, 아니. 그런건 아닌데.”

남자 역시 당황해서 네로의 어깨를 잡았다.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어쩌다보니 네로의 가슴팍에 폭하고 박혀 안긴 자세가 되었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얻어 맞아서 머리가 아픈게 분명하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 놈들 뭐야?”

“빚쟁이야. 아니, 정확하겐 빚쟁이 끄나풀인가……. 가끔 와.”

“가끔? 종종 있는 일이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네로는 남자를 부축하며 일으켜주었다.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친다. 네로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반짝인다. 예쁜 눈이었다. 그 예쁜 푸름 안에, 슬픔이 있다. 처연함이 있다. 남자는 알 수 있었다. 네로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 동정하고 있다. 그 빛을 읽었을 때. 아름다운 눈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하튼. 도와줘서 고맙다.”

“어딜 혼자 가려고 해. 부축해줄게.”

“괜찮…….”

다고 말하고 싶지만. 전혀 괜찮지 않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 뼈가 나가진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 부탁할게. 남자의 말에 네로는 씩 웃었다. 방금전까지 사람을 두들겨 패놓고는 저렇게 환한 미소라니. 신기한 일이다.

남자는 네로에게 반은 안겨서, 겨우겨우 교회로 찾아왔다. 교회는 밤에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몇 명 있을 뿐. 한산했다. 네로는 그들과 가볍게 고개짓으로 인사를 했다. 남자는 네로에게 기대 고개를 들었다. 여신의석상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자비롭고. 사랑에 차있는 눈빛이.

뒤쪽에 있는 남자의 방까지 오자, 네로가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남자는 말했지만 네로는 굳이 남자를 침대에까지 들고가 눕혀주었다.

“오늘은 우선 자. 약이 필요하면 가져다줄게.”

“…괜찮……. 아니지 고마워.”

아마 상비약이 서랍에 있을거야. 진통제가 있을테니까. 우선 오늘은 그걸 먹을게. 남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양할 상황이 아니다. 네로는 물을 한잔 떠다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는 약을 넘겼다. 물을 마시는 일도 지나치게 힘이 들었다. 남자가 한숨을 뱉자, 네로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다시 침대에 눕혀준다. 이불을 끌어올리는 남자의 손이 떨린다.

“…네로. 나 부탁 하나만 더 해도 괜찮을까.”

“응.”

돈 빌려 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나도 없거든. 네로의 농담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옆에 잠시만 있어줘.”

잠시면 돼. 남자의 말에 네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해 하지도 않았다.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을 것 같아? 나도 그 기분 알아. 네로는 그저 그렇게 말할뿐이다.

“뭐 물어볼 말 없어?”

“딱히. 너도 나한테 묻지 않잖아.”

그야 그렇네. 네로는 짧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 나는 정말 어렸을 때. 아직 목도 가누지 못할 때 교회 앞에 버려졌던 모양이야.”

네로는 묻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키리에와 함께 살았거든. 키리에는 나에게 누나와도 같아. 가족과 같지. 남자는 네로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단순히 가족이상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내 엄마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

“아. 아까 그래서 그 놈들이…….”

창녀라고 불렀군. 남자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네로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다들 말하지. 낙태하지 못한 여자가 버린 자식이라고.

“그렇지만 난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 엄마의 직업이 뭐든. 상황이 뭐든. 무엇이든간에 가장 힘든건 어머니 본인이었을테니까.”

내가 생겨서 힘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어머니였겠지. 그러니까 버린 것에 대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아. 나도 힘들기야 했지만, 그녀가 더 힘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사실 내 인생은 나쁘지 않았어. 키리에도 만났고. 모두가 있었으니까. 네로는 그렇게 구겨진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펼쳐보였다.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려졌어도 자신의 것이라 자부하며 말이다.

자. 지루한 얘기도 들었는데. 잠이 안와? 네로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이 안오면 말이지……. 아, 내가 이럴 때 딱 좋은 방법도 알거든.”

네로는 남자의 이불을 토닥여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계속 들으니 네로는 제법 노래를 잘했다. 어딘가의 동요나 민요일까. 느리면서 반복되는 멜로디가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너………. 노래를 좀 하는구나. 의외인데.”

의외는 뭐야. 의외는. 네로는 노래를 하면서 투덜거렸다.

“나, 나름 롹밴드 보컬도 했다고.”

“기타도 치고?”

“했지. 얼마나 인기 좋았다고. 잘생긴 내 얼굴을 보려고 여자팬들이~”

“웃기고 있네. 진짜.”

뭐~~~~? 뭐가 웃겨??~ 너 말 다했어? 네로는 바로 뜨거운 물이 끼얹어진 닭처럼 꽥꽥거렸다. 남자는 못들은척 이불을 덮고 옆으로 누웠다. 남자는 퉁명스레 말했지만 그럴싸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네로는 얼굴도 근사하고 체격도 좋다. 목소리도 좋은데 노래까지 잘 부른다니.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만도 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담. 남자는 눈을 애써 감으려 했다. 네로는 그 뒤로도 조금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러고보니 노래가 묘하게 단조인게 자장가였을까.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그렇게 며칠이 더 흘렀다.

교회의 일상에도 익숙해졌다. 매일 먹는 식사는 소박하지만 맛있었고, 이제 얼굴을 외운 아이들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팔다리에 달라붙기도 했다. 

다 좋은데, 여전히 돈이 없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교회에서 주는 돈은 넉넉하지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적다. 그나마 식대가 나갈 일이 없다지만 빚을 갚고 나면 신발하나 바꿀 돈 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전과 비교하면 나은 상황이니 불만은 없다.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밝은 여성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온다. 노래를 따라 가자 키리에가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키리에가 부르는 노래는 그날의 네로가 불렀던 노래와 같았다.

남자가 다가오자, 키리에가 노래를 멈추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얼굴은 이제 많이 괜찮아지셨네요.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볼을 쓸었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남자의 답에 키리에는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 미소가 왜인지 익숙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여신의 조각상을 보았다. 아, 이 얼굴이다. 이 미소다. 자비가 넘치는. 타인을 사랑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얼굴이다. 그녀와 닮았어. 남자는 생각했다.

키리에. 여기 있었구나. 조금 다급한 네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로가 이쪽으로 서둘러 달려오고 있다. 네로는 키리에의 앞에선 언제나 저런 얼굴이 된다. 순수하고 밝은 소년의 얼굴이다.

왜인지. 이 자리에 자신이 있어선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 이 곳을 떠났다. 

나는 어울리지 않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아. 남자는 자신의 감정 파편을 쓸어만지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교회가 불편하진 않다. 오히려 마음이 채워진다. 모두 다정하다. 모두가 따사로운 햇살과 같이 웃는다. 그렇지만 그 부분이. 그런 부분이. 모두의 호의가 거북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다. 나의 문제다.

남자는 결국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밖에 돌아다녔다. 면접이 없는 날에도 괜히 밖에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 누구도 등을 떠민적 없는 따스한 둥지에서 나오려고 애썼다.

오늘 면접은 작은 오케스트라였다. 꼭 지휘자가 아녀도 좋다. 남는 자리면 뭐든지 좋은데. 그렇지만 또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절망이나 실망도 익숙해지니 씁쓸하지 않다. 남자는 터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발걸음이 더디어졌다.

소년 처럼 웃는 네로의 얼굴. 그가 자신의 옆에서 흥얼거린 노래. 욕을 내뱉으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성격. 남이 보기에 평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

모두가. 모두. 그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불편한건 아니다. 그 밝음을 볼때마다, 오히려 자신 안의…….

퍽―!

짧은 소리와 함께 통증이 몸을 달린다. 몸이 한쪽으로 비틀어지며 휘청였다. 누군가가 남자를 치고 지나갔다. 남자는 넘어졌다.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이 없다. 가방에는 바이올린이 있다. 누가 봐도 악기 가방인게 분명한 가방이다. 놈은 남자의 가방을 노린 것이다. 안돼. 남자는 놀라 외쳤다. 바이올린은 남자가 가진 물건 중 그나마 가장 값이 나가는 유일한 물건이자. 남자의 삶의 밑천이다.

“소, 소매치기…….”

주변에 사람을 불러봤지만 누구도 남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저 놈. 잡아주세요. 도둑입니다. 남자는 외쳤지만 다들 자신의 갈길만 갈뿐이다.

숨이 차오른다. 남자는 원래가 체력이 좋지 않다. 나름대로 전력으로 달렸지만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최대한. 조금이라도 따라가려 할 때, 남자의 신발이 미끄러졌다. 남자는 무언가 미끄러운 것을 밟았다. 옆에는 큰 쓰레기통이 보인다. 젠장. 남자는 욕을 내뱉으며 일어나려 했다. 발목이 시큰거리며 아파온다. 아, 넘어질 때 발목을 삔 모양이다. 도저히 뛸수가 없다.

남자는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발목을 다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엄청나게 짙은 그림자였다. 순간 해가 저물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선 끝에 보이는건 누군가의 신발이다.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은 그 발걸음부터 엄숙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혹시 좀 일으켜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지금 도둑을 잡아야 해서요. 근데 발목을 다쳐서……. 남자는 쏟아진 자존심을 주워담지도 못한채 중얼거렸다. 그만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더러운 시궁창에 떨어진 들쥐라도 된 기분이었다. 

남자의 앞에 있는 상대방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의 남자 한명이 차가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얼굴이 하얀지, 하얗다기보다 푸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저러할까. 피도 통하지 않을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주는 위압감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내려버렸다. 그때 남자는 알고 말았다.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모양이 이상하다.

그림자의 실루엣의 형태가 인간이 아니었다. 팔다리는 두껍고 손톱은 길게 자라 있다. 등에는 날개가 여러장 있었으며, 무엇보다 머리에는 뿔의 형상이 있었다. 그 형태는 마치……….

“힘을 원하나?”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남자는 그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채 땅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일렁인다. 짙은 어둠이 입을 연다.

대답을 들을 것도 없는 질문이었군.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누구보다 '너'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아니까.

다시 그림자가 말한다. 남자는 묻지 않아도, 확인하지 않아도 직감했다.

이 자는 악마다.

타들어갈 듯이 목이 말라지기 시작한다. 원인 모를 갈증에 몸이 떨린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을 하고, 푸른 눈을 한 악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비라곤 전혀 없는 눈빛이다. 사랑이라곤 겪어보지도 못한 얼굴이다.

잔악하며 잔혹할지도 모르는 그저 차갑고 냉담한 얼굴이다.

남자는 그를 보며 시가 하나 떠올랐다.

“……매일 밤. 매일 아침….”

매일 밤과 매일 아침

어떤 이는 불행 속에서 태어나고

매일 아침 매일 밤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 속에서

또 누군가는 끝 없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는구나

우리는 거짓을 믿게끔 길들여지고

우리가 눈을 통해 볼 수 없을 때

그 눈은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서죽고

영혼이 한줄기 광채속에 잠드는 때로다

*2

그 뒤로 며칠 동안. 교회에서 남자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네로는 그 날. 우연하게 마을의 뒷골목에 들어갔다. 평소에 자주 가는 술집이 그날따라 화장실을 공사중이라나 뭐라나. 다른 펍은 죄다 빈자리가 없기에 어찌어찌 발걸음을 걷다보니 평소에 그가 잘 가지 않는 어두운 골목까지 와버렸다.

꽤 큰 술집 하나에 사람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에 발을 옮기던 네로를 붙잡은건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의 선율. 네로는 그 연주에 자신도 모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 남자 한명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가냘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얇은 팔과 손가락이 격정적으로 연주를 한다. 몸 위에도 문신이 어찌나 많은지 네로는 처음에 봤을 때 그가 문양이 있는 옷을 입고 있는줄 알았다. 그렇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정작 걸친 옷의 면적은 적고 전부 문신이었다. 까만 옷을 입은 남자가 연주가 끝나자 인사를 한다. 사람들의 환호가 들렸다. 네로는 그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지만, 분명히 네로가 아는 얼굴이었다.

“잠시만. 너……!”

네로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잡았다. 남자는 네로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아, 네로. 짧게 웃으며 인사했다.

“너……. 스타일 엄청 변했네.”

그 문신은 또 뭐야. 네로는 평범하게 인사를 했다. 남자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브이.”

“뭐?”

“브이라고 불러줘. 나는 이제 그렇게 불리고 있으니까.”

“아아. 그래. 브이.”

네로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브이는 가벼운 몸짓으로 바에 앉았다. 한잔 하겠어? 이렇게 만난것도 기쁜데. 내가 한잔 살게. 브이는 얇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네로에게 밀었다. 손가락에도 빼곡하게 문신이 박혀 있었다. 네로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아무런 의심 없이 한입 마셨다. 독하고 쓰지만 좋은 술이었다.

“참. …브이. 너 짐 안뺐더라.”

아직도 교회에 그대로 있어. 네로의 말에 브이는 네로의 옆에 앉으며 술을 따랐다.

“어어. 그 짐. 아직도 있구나. 몰랐네……. 다 버려도 되는데.”

어떻게 그러냐? 주인이 없는데. 네로의 답에 브이는 작게 웃었다. 그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더니 자신도 술잔을 비웠다. 이놈 술이 꽤 센가. 독하던데. 네로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지만 그 짐 너한테 중요한 물건 아녔어?”

나는 잘 모르지만 뭔가 노트라든지. 그런것도 보이던데. 왜, 너 작곡 공부 한다 했잖아. 네로의 말에 브이는 술을 마시면서 낄낄 웃었다. 술에 취했는지 내뿜는 숨이 열기를 가진 상태다.

“나, 이제 여기있어.”

“취직했구나. 진짜 다행이다.”

브이의 말에 네로는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이 정말로 해맑고 기뻐하는 표정이라, 브이는 그 미소를 눈에 다 담지도 않았다.

“그래. 다행이지.”

브이는 자리에서 의자를 빼며 일어섰다.

“기왕에 네가 왔으니, 한곡 들려줄게.”

브이는 테이블에 놓아둔 바이올린을 들었다. 네로는 그의 바이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 보던 바이올린이네. 새로 샀어?”

네로도 기타는 배워본적이 있다. 교회에서 어린시절부터 있던 덕에 악기라면 곁눈질로 많이 보았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신기한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은 까맣게 옻칠을 한 듯이 온통 검게 빛났다.

“아아. 전에 있던 건 누가 훔쳐갔거든.”

“뭐? 진짜? 어떤 놈이야?”

말해. 내가 발견하면 두들겨 패서 돌려달라고 할테니까. 네로는 마치 자신의 일인것처럼 화를 내 주었다. 거친 행동과 말투를 쓰지만 알고보면 무척이나 정의롭고, 순수한 그 다운 태도다. 브이는 여유있게 웃으며 바이올린을 턱에 괴었다.

“괜찮아. 덕분에 근사한걸 손에 넣었으니까.”

그 바이올린 얘기지? 네로는 웃으면서 브이의 연주를 기대했다.

브이는 그 눈빛에 응답하듯이 천천히. 그렇지만 점차 빠르고 힘차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사실 브이가 손에 넣은 것은 바이올린의 얘기가 아니다. 힘. 어둠. 그림자. 악몽. 이 세상에서 그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 그것을 그는 그 순간 받아들였다. 브이라는 이름은 떨어져나간 그의 인간성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머릿글자였을 뿐이다.

네로는 브이의 연주에서 눈을 돌리지도 못했다. 눈을 감는 찰나의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네로는 브이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네로는 브이의 숨결 하나하나를 따라서 숨쉬었고, 브이가 운지하는 현에 귀기울였다.

귀는 음악에 사로 잡히고, 눈은 브이의 모습에 빠져들었고, 혀는 쓴 술에 감겼다. 정말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몸의 모든 것이. 영혼의 전부가. 완전히 속박된 느낌이다. 

브이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졌다. 더워진다. 숨을 쉴수가 없다. 네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역시 술이 너무 독한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어느새 연주를 끝낸 브이가, 네로에게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네로. 괜찮아? 브이의 말에 네로는 손을 저었다. 아아. 미안. 과음했어. 네로의 답에 브이는 두 손으로 네로의 얼굴을 잡아 들었다. 얼굴이 가깝다. 네로는 뇌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참. 네로. 그 짐. 지금 가지러 갈까 하는데.”

지금 교회로 갈까? 네로는 자신이 생각도 하기 전에 브이와 함께 술집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발이 꼬인다. 매일 오는 길이 이리 어지러웠던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왠지 모르게 땀도 흐른다. 네로는 헉헉 거리면서도 교회로 들어섰다. 멀게 느껴지는 복도를 걸으며, 네로는 말했다. 저기. 네 방. 어딘지 알지? 브이. 아직도 네가 나갔던 그대로야. 그 뒤로 아무것도 손 안댔어. 그러니까……. 들어가서 짐 가지고 나오면 돼. 네로의 말에 브이가 네로에게 물었다. 너는?

“나? 나는……. 가, 갑자기 숨이 차서. 여기에 좀 앉아서 쉴게.”

술이 너무 과했나봐. 좀 쉬면 깨겠지. 하하. 네로는 말하면서 교회의 긴 의자에 앉았다. 땀이 흘러서인지 손도 미끄럽다. 앉으니까 좀 덜 어지러운 것 같다. 네로가 고개를 숙이고 거친 숨을 토할때였다.

브이가 네로의 볼을 양 손으로 잡아 다시 고개를 올렸다. 네로는 브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따랐다. 브이의 눈동자가, 어두웠다.  이렇게 어두운 녹색이었던가. 무척 어두운데도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순을 느끼는 순간. 브이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네로가 정신을 차리니 브이가 네로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네로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인지.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 동안 브이는 네로와 입을 맞추고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네로의 눈이 흔들리면서 브이를 바라본다. 브이는 그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혀를 빼서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아, 역시. 너 내 생각대로의 맛이네. 브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시야가 뒤집혔다.

네로가 브이의 뒷목을 한손으로 잡았다. 네로의 큰 손이, 브이의 뒷통수를 감싸쥔다. 브이는 그 손을 잘 알고 있다. 다쳐 쓰러진 브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워주던 다정한 손이다. 그 손이 지금은 거칠고, 투박하게 브이를 잡았다.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건 더 이상 상냥함이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욕망만이 있었다. 네로는 브이의 머리를 당기더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거칠고, 힘겹기까지 한 키스였다. 네로는 숨조차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로 험하게 브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브이의 시선 끝에 여신상이 보였다. 언제나 자비로운 표정의 그녀를 보며 브이는 눈으로 웃었다.

아. 손에 얻지 못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나는 알고 있었지.

참아야 한다. 절제해야 한다. 모두를 사랑해야한다. 교리는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행동이 그릇된 일인가. 언젠가 벌을 받을 일일까. 죄일까. 브이는 천천히 생각했다.

네로는 숨을 헐떡이며 연거푸 이어진 키스 끝에 고개를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네로는 처음 본다. 내가 이렇게 네로를 만들어버렸다.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망쳐버렸다. 브이는 자신의 턱에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네로. 내 짐 말인데. 내 방에 남아 있다고 했지?”

같이 들어가자. 나, 힘이 약해서. 다 못들고 나올 것 같아. 도와줄거지? 네로.

유혹하듯이 말하는 브이의 그림자에 악마의 형태가 일렁였다.

거칠게 보이지만 언제나 정의롭고 상냥하며 순수했던 영혼. 나는 네 마음이 내것이 아닌걸 너무나도 잘 알아. 너는 자애롭고 다정한 이를 좋아하지. 그렇지만. 그렇기에. 한번쯤 취해보고 싶었어.

네로. 그림자를 모르던 너에게. 한번쯤은 나를.

악마는 그림자 속에서 웃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날, 보고 말았네.

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무덤과 묘비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검은 가운을 걸친 신부들이 배회하면서

내 기쁨과 욕망조차

가시덤불로 묶고 있는 것을.

*3


*1 사랑의 비밀/윌리엄 블레이크

*2 순수의 전조/윌리엄 블레이크

*3 사랑의 비밀/윌리엄 블레이크(1과 동일시. 다른 부분)

삽입된 시는 길이와 연출 상 일정 부분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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