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머리
경,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 1차.
※ 이 글에는 시신에 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허락 없는 발췌를 금합니다.
이름 없는 머리
경,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여기 목 없는 기사의 시신이 드러누워 있다.
기사의 목을 도려낸 것은 무명의 창이다. 오로지 찌르고 짓이기고 꿰뚫기 위해 연마된 무구. 기사는 목젖과 혀 그리고 이빨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에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유용한 일부는 죄다 머리 위쪽에 달려 있군. 그 목을 버리지 말고 주워야 했을까. 발테어는 생각한다. 그는 창 한 번 휘둘러 이 사람의 유용한 쓸모를 모조리 빼앗은 셈이다. 정녕 효과적인 살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발테어는 이 사람을 왜 죽여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조금 전까지 그는 기사와 승냥이 평원을 사이에 둔 채 남과 북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고 그러므로 기사는 분명 그의 적수라 부를 만한 자였는데 이처럼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남았던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이 자를 적수라 여겨 그 한 목숨 앗아간 것인가?
발테어는 오랜 시간 골몰해 보았지만 그의 창은 낙뢰를 닮아 번뜩이며 이 목과 저 목을 꿰뚫는 물건이다. 한마디로 이 기사를 조우한 뒤에 어떠한 심경으로 창을 내질렀는지 벌써 가물가물하다. 나 원. 살인자가 살인의 순간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말 그대로 어불성설 아닌가.
그가 목 없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경, 조금 전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눴습니까?
…….
음흠.
…….
목 없는 채로는 답하기가 영 곤란하시겠지요?
…….
기다려 보세요.
말을 끝내자마자 발테어는 전투가 소강된 승냥이 평야를 가로질러 걸었다. 기사의 떨어진 목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까마귀 모여든 시체밭을 뒤지다 보면 당신 목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겠지. 그는 창간을 휘둘러 부리 쪼아대는 새 무리를 쫓아냈다. 그리고 썩어가는 머리통의 투구를 하나씩 벗긴 다음, 피에 절어 굳어버린 머리채를 쥐고 들어올렸다. 투구 쓴 채로 머리통이 날아간 자들은 하나같이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발테어는 경악 서린 그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갈색 눈 청색 눈 때로는 겨자씨 닮은 눈 그리고 까마귀처럼 새까만 눈알들. 죄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다. 그 사람 눈 색깔이 어땠더라. 참 형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푸른 색이었을까. 발테어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 가진 어떤 수급을 챙겨 기사에게로 돌아갔다.
경, 내가 당신 머리를 찾아왔습니다.
…….
이제 답해 봐요. 우리가 조금 전에 같은 마음으로 무기를 겨눴다고 생각합니까?
…….
…….
…….
아하. 이거 당신 머리가 아니군. 목 두께가 안 맞아요.
…….
경,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겠습니다.
발테어는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갈색 머리 푸른 눈 가진 수급을 두 급 더 가지고 돌아와 목을 맞춰 보았다.
희한하군.
…….
거기서 만난 게 아니었나?
…….
경, 우리가 어디서 싸웠는지 기억합니까?
…….
나 원.
…….
이 목들은 당신이 가져요. 당신네 그라소 사람들은 삼두룡을 참 좋아하니까, 그쪽 머리도 세 통은 되어야 수지가 맞지.
…….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대화 즐거웠어요, 경.
그리고 나서 발테어는 평야를 완전히 떠나 깊은 잠에서 깼다. 벌써 이른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웬 얼토당토 않은 꿈이람. 목 없는 사람한테 말을 걸다니 멍청하기도 하지. 침상에서 내려오자 바닥에는 그와 수 해를 함께 보낸 투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투구를 들어 마주보았는데, 그 안에 눈알 부릅뜬 사람 머리통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것 참. 뭘 주춤대고 앉았어, 드라고비크 경? 비식대는 웃음이 기어나왔다. 투구에 자신의 머리통을 끼워넣은 다음에도 그랬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