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조로] 88

사망소재 有

"이게 진짜라고 확신할 수 없어."

로우는 고장난 전보벌레처럼 그 말만 되풀이했다.

세계는 언제나 순차의 형태로 존재해왔다. 세계란 시간의 흐름이나 인류의 역사 따위를 뭉뚱그려 축약한 단어이다. 초창기의 전보벌레는 4개 바다와 위대한 항로에 통신망을 연결한 후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나무는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 후 싹을 틔운 다음 뿌리를 내린다. 세계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과 후차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구분되어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인간이 시간을 훌쩍 건너 뛰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했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 이상한 경험을 하기는 했다. 하트해적단은 신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의 바다에서 오랫동안 배회하고 있었다. 딱히 미지의 항로로 들어서는 걸 망설이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아직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을 뿐이었다. 트라팔가 로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매의 능력 때문에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무언가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목격한 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아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랜드 라인의 어떤 현상일 것이었다. 그건 아주 좁지는 않지만 넓지도 않은 범위의 해류의 흐름이었다. 어느 섬 주변의 유독 암초가 도드라진 부분의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결과 그 섬 자체는 정상이었으나 그 부분에서만 그림을 허공에 그려놓고 바람에 휙 날린 것과 비슷해보이는 일그러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우는 그 곳에 최대한 접근하지 않고 상륙하기 위해 배를 지상으로 띄웠다. 그는 그 현상이 단순한 신기루이거나 그랜드 라인이라는 항로가 지닌 고유한 물리법칙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갑판 위에 서 있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누군가가 쑥 잡아끄는 것처럼 바다에 끌려들어가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물에 폭삭 젖은 채 깨어나자마자 본 남자의 얼굴과 자신이 붙들고 있는 신문에 씌여진 날짜는 아무리 봐도 순차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우선 이 남자는 롤로노아 조로였다. 그는 샤봉디제도의 휴먼샵에서 마주쳤던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원이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나타나자마자 요란법석을 떠는 무리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게 다였다. 그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는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일당이 각자 흩어져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많이 양보해서 바다에 빠진 자신이 우연히 남자가 숨어 지내던 곳까지 떠내려가 주워져 그의 오두막에서 깨어났다는 소설을 쓸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묵묵히 내민 신문의 타이틀 위에 표시된 해원력 뒤 네글자는 도저히 소설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신문 다발에 씌여진 날짜들을 모조리 살펴본 뒤 남자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목표하는 바가 같았으니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일당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비정상적인 형태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마 네 현재에서 80년 정도 후인데."

남자가 확인사살을 날렸다. 로우는 축축함을 불쾌해 할 정신도 없었다. 그는 우두커니 침대에 걸터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도 꼬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태 파악을 해보자. 그러나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로우는 내면 속 자신이 맞은 편에 불량하게 앉은 롤로노아 조로의 발언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고 그래서 이 상황 또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남자의 외관은 왼쪽 눈에 상처가 있다는 것만 빼면 샤봉디에서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절대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자신이 실제로 80년 정도를 건너 뛰었다고 한다면, 80년 전에 만난 자는 지금 당연히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다.

조로가 갑자기 오두막에 젖은 생쥐 꼴로 뚝 떨어진 자신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 신문의 날짜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계산해보자. 그건 더더욱 말이 안된다. 로우는 그 가정을 박박 찢어 저만치 집어 던져버렸다. 로우는 생각을 이어나간다. 또 하나의 가정...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가정이다. 그리고 미래를 건너뛰었다는 것과 자신의 신변이 절대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인정해야했다. 그 때 조로가 마치 자신의 두번째 가정을 읽은 것처럼 미묘한 뉘앙스로 말했다. 

"너는 옛날에 죽었어."

"말도 안돼!!"

옛날이라는 단어를 별 의미없이 선택한 건 아니라는 것 쯤은 뻔히 알 수 있었다. 로우는 벌떡 일어났다. 물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로우는 뒤늦게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미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협탁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이미 집어던져 버렸고 바닥에 김이 펄펄 나는 찻물이 넓게 퍼져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조로는 남의 살림을 이런 식으로 멋대로 부숴먹는 거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로우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건 불로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냐, 아니면 그걸 받은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냐?"

로우는 '불로수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머리를 싸매며 도로 주저앉았다. 좀 닥쳐봐. 로우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있는 황당한 사건들에 앞 뒤 재지 않고 마음껏 분노하고 싶었으나 그의 지독하게 냉정한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로우는 다시 신문을 집어들고 다시 제대로 날짜를 계산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정확히 88년 후로 건너뛰었고, 눈 앞의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 사실 100살 정도 먹은 노인이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셈하자 더더욱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진짜로 내가 너한테 그걸... 시전했다고?"

"황당해서 미치고 펄쩍 뛰겠는 심정은 알겠는데,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내 클론이었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했거나 했을 가능성은?"

그러자 조로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로우는 그가 비웃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으므로 재빨리 다음 질문을 했다.

"그게 언제였지?"

"네 미래인데 내가 함부로 알려주면 안되지."

다시 화가 치밀었다. 분노할 요소가 너무 많아서 번호를 붙여 나열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래로 건너왔다는 황당함과 자신이 젊은 나이에-맥락으로 보아-요절하게 된다는 비극도 제쳐버리고 가장 선두를 차지한 요인은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도플라밍고도 아닌 전혀 엉뚱한 자라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살아있는 자가 도플라밍고였어야했다. 그건 11년전 스왈로 섬에서 자신의 내장을 꺼내서 도려낼 때부터 설계해왔던 큰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노선이었으며, 그러면 분노가 정확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그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 상황은 그가 조립해 맞춘 어떤 큐브 조각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자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던 해적사냥꾼이 툭 내뱉었다.

"그렇게 한번에 두 세 가지씩 생각하고 살면 몸뚱이가 막 아프지 않냐?"

로우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난 조롱받는 건 질색이야. 그러자 조로는 주눅들지도 않고 착실하게 대꾸했다.

"난 네가 나한테 호소했던 걸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그는 그러면서 있는대로 엄살을 부리길래 정신머리가 빠진 놈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허구한 날 머리가 아프다는 둥, 어깨가 뭉쳐있다는 둥 허리를 주물러달라는 둥 별 괴상한 요구까지 하면서 통증을 호소했다고 했다. 로우는 설마 자신이 그런 헛소리를 주절거렸을까 싶었지만 굳이 마지노선을 잡자면 베포나 펭귄, 샤치 정도이며 생판 모르는 타해적선의 검사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고 쏘아붙였다. 조로는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원래 남자란 잠자리에서 혀가 풀리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법인데."

"...뭐?"

차라리 상대가 아주 정색하고 있었다면 덜 징그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꿋꿋이 발언의 진실을 주장했다. 더불어 그를 납득시킨답시고 한 마디를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혼란만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아무도 눈치 못 챘어... 아마."

그러더니 불쑥 의자를 드르륵 밀며 일어서서는 갑자기 로우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우뚝 서는 것이다.

"사실 나도 좀 당황해서 그만 인사도 빼먹었다."

"인사?"

"그래, 이 망할 애송아."

로우는 갑자기 사나워진 그의 어조를 지적할 수 없었다.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가슴팍을 강하게 걷어차이고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절하면서 그는 확신했다. 방금 전에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

로우가 깨어난 날은 하루 뒤였다. 그는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보고있는 어슴푸레한 하늘의 광경이 일출인지 황혼인지 가만히 누워 노려보고 있다가 점점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 안의 풍경은 낡고 황량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란 이불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나무 바닥, 다 뜯어져 벽돌이 다 비치는 벽지, 그리고 한 쪽 구석에 얌전히 기대어놓은 세 자루의 검. 유일하게 낡지 않은 것은 테이블 보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밀짚모자가 그려진 새까만 해적기-로우는 이 시점에서 미래가 아니라는 의혹을 모두 접었다-뿐이었다. 그 해적기는 항해할 당시의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해보였는데, 해지거나 닳은 흔적이 전혀 없어서 집 안의 너절한 분위기와 기묘할 정도로 동떨어져 있었다. 로우는 집 안에는 조로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후 단단히 벼르며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마당에도 조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화를 삭히고 주변부터 탐색해보기로 했다.

그는 천천히 집을 나와 몇 시간 동안 주변 언덕과 산책로를 떠돌았다. 그러면서 이 곳이 약간 쌀쌀한 가을 기후를 가진 섬이고 특정 관광지나 어떤 왕국의 영토가 아니라 방랑자들이 잠깐 머물렀다가 가는 정도의 무인도나 다름 없는 섬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조로의 오두막은 섬의 변두리에서도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아오면서는 오두막 바로 옆에 커다란 대장간이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러나 대장간이 있든 말든 그건 그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관심을 다른 곳, 그러니까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돌렸다. 가장 쉽고도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빠진 바로 그 장소로 가보는 것이다.

"안될걸?"

로우가 그렇게 말하자 조로는 얄미울 정도로 짧고도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로우는 마당에 짚으로 만든 멍석 위에 미동도 없이 드러누워있는 조로를 보고 시체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가 부스스 깨어나는 그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가 막혀 걷어 차인 것에 대한 항의를 하는 것도 포기해버렸다. 그는 바람이 쌩 불면 찬 공기가 확 끼치는 이 날씨에 단추가 다 떨어져 풀어헤쳐진 후줄근한 한 벌 옷을 입고 흙바닥에서 잘 생각을 하는 미친자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깨어난 조로는 느슨한 몸짓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무슨 일이라도 났냐는 것처럼 로우를 흘끗 쳐다보고는 어슬렁어슬렁 대장간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로우는 그때서야 그 대장간이 그의 것이고, 현재의 그가 도공 일을 겸하고 있다는 것도 함께 알아차렸다.

"여긴 신세계 중반부 바다야. 너 아직 신세계에 진입도 안 했잖아?"

막연하게 그 위치 주변에 떨어졌을 거라는 희망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랜드라인에서 신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은 알아도 되돌아가는 방법은 아직 몰랐다. 로우는 앞으로 얼마의 기간 동안은 스스로를 상당히 쓸모 없는 상태로 방치해야한다는 현실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으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중의 돈이며 의료장비 등등은 전부 폴라탱 호 선장실 안에 있었고 배를 띄울 때 자신의 검인 귀곡을 들고 있기는 했었으나 그나마도 빠지기 직전 갑판 바닥에 검을 내려놓았으므로 그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됐군? 조로는 그걸 굳이 지적함으로써 로우에게 극도의 짜증을 유발시켰다.

이후 며칠 동안 대장간에서 매일 같이 망치로 단단한 쇠붙이를 깡! 깡!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온종일 흘러나오는 걸 들으면서 저 소음을 직접 발생시키는 당사자는 머지않아 귀가 멀지 않을까 하는 시답잖은 망상 따위를 하면서 지냈다. 물론 귀가 멀어도 그가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동반한 망상이었다. 그는 로우가 오두막 주변을 빙빙 돌고 있으면 땀범벅이 된 채 톡 튀어나와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야, 꼬맹아. 자꾸 어설프게 얼쩡거리지 말고 집에나 박혀있어라."

견문색 때문에 잡스러운 기척이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으면 매우 거슬린다는 논조였다. 로우는 그가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지적하고 싶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 없는 건 새파랗게 어린 얼굴로 자신을 햇병아리 취급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알맹이가 노인인 걸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청년의 체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동력이 불로수술의 힘인지 수백 번의 망치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근육이 무섭게 붙은 팔뚝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비슷한 근육이 반가움의 인사를 건넨 다리 쪽에도 붙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로우는 어렴풋하게 그가 그다지 실력 좋은 도공이 아니라고 짐작해보았다. 일단 그는 자신이 만든 검을 별로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 장인이란 보통 스스로가 완성한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긍지를 가지고 대하기 마련인데, 로우는 조로가 그의 검들 중 몇 개는 장작을 아궁이에 넣고 뒤적거리는 용도 따위로 쓰고 부러지자 망설임 없이 그걸 다시 녹여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건 전혀 예술가의 태도가 아니었다. 칼의 가격도 제대로 매기지 않는 것 같았는데, 잡검 몇 개를 한데 묶어 싸구려 술 몇 병 정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헐값에 팔아버리는 식이었다.

"배를 사야겠어."

어쨌든 언제까지고 여기에 미적거리고 있을 순 없었으며, 로우는 손으로 노를 젓든 아무 해적선이나 급습해 해적기를 찢어서 돛을 만들어 달리든 바다를 건너려면 조각배 한 척이라도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붙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조로가 명백하게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 무슨 수로?"

로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것을 이 귀신 같은 눈치의 소유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로는 그런 간절함까지 가뿐히 무시했다.

"이봐. 그렇게 일일이 신선한 반응을 보이니까 더 쑤셔보고 싶은 거야. 몇 살이랬더라?"

그러면서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널 샤봉디에서 봤을 때가 언제였지? 모자도 내가 봤던 그 털모자가 아니군. 아무튼 아직 신세계에 안 들어갔다면... 그 모습은 여태껏 여러 섬을 돌면서 보았던 마을의 주정뱅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은 눈 앞의 주정뱅이는 아마 지금도 목에 수십 억의 현상금이 걸려있을 것이고, 그 목이 아직까지 멀쩡히 몸에 붙어있는 끔찍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조로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물었다.

"배만 있으면 돌아갈 수 있나?"

"돌아가야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마. 그렇게 안해도 넌 좋은 선장이야."

그 때 로우는 이스트 블루와 웨스트 블루에도 약간의 시차가 있듯이 이쪽과 저쪽의 시간의 흐름이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조로가 그렇게 내뱉자마자 방금 전까지의 고뇌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조로의 말에 안심해서가 아니라 염려 뒤에 숨어있는 염려까지 들춰내는 지독한 육감이 소름끼쳐서였다. 로우가 질색하는 표정을 도무지 감출 줄 모르자 조로는 피식 웃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선심써서 배는 내가 적당한 걸로 주워와보지."

빈정거림이 먼저 튀어나온 건 순전히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수로?"

로우는 곧바로 후회했다. 조로는 또 한 번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대고 있었다.

*

오두막 옆 대장간은 사방이 꽉 막혀있었지만 입구는 커다랗고 둥글게 뚫려있어서 멀찍이 있어도 안에서 하는 작업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로우는 굳이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그의 작업을 관찰했다. 무료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다는 검사라는 자의 손에서 어떻게 그런 고철덩어리들만 줄줄 튀어나오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면서 로우는 이 청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노인이 생각보다도 더 맹한 짓을 한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지 늙으면서 머리가 굳어 멍청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작업 과정에는 검의 표면에 진흙을 바르는 작업이 있었는데 매번 그 때마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뭐라 투덜거리고는 그 도신은 다시 불에 쳐넣어버렸다. 진흙을 바르는 건 본인 말에 의하면 열처리를 하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진흙을 바르는 모양에 따라서 칼날의 무늬가 달라진다며 로우에게 알려줘놓고는 정작 본인은 진흙을 바르는 위치를 꼭 한 번은 틀렸다. 몇 번 어깨 너머로 본 게 다인 로우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작업이었는데도 그랬다. 보다 못해 옆을 지키고 있다가 그 과정이 오면 조로를 멈추고 슬쩍 알려주는 지경이었다. 아무튼 칼날을 다 제작하고 나면 나무 속을 파 손잡이를 만들어서 조립하는데 거기서도 조로는 한 번씩 힘을 너무 세게 줘서 칼자루를 부러뜨리곤 했다. 그 쯤 되면 힘자랑인지 제작을 하는 건지 구분이 안갔다. 작업이 끝나면 조로는 대장간에 쌓아둔 검들을 챙겨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몇 시간 후에 다시 돌아와서는 가져온 술을 마셨다. 그 짓거리를 매일 반복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정적이었고, 생각보다 요란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배를 구한다고 해도 목적지가 있어야 항해를 하잖아."

조로가 가죽끈을 입에 물고 낑낑거리며 말했다. 로우는 조로가 칼자루에 두꺼운 가죽을 둘둘 감싸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옆에 조로가 둔 안줏거리를 입에 기계적으로 쑤셔넣었다.

"통로라는 건 항상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존재해야 생겨나는 거야."

그 때 조로가 로우를 흘끗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우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신이 스스로의 예민함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조로는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있기는 하지만 본인이 보고 있는 눈동자가 자신이 아는 그 자인지를 무의식적으로 탐색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기분이 얼음장처럼 식어갔다. 조로는 멀뚱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 쪽의 문이 반드시 저 쪽으로 통하리라는 법은 없잖아?"

로우는 느릿느릿 말을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두 문은 이어져있을거야. 하지만 아까보다 어조는 훨씬 낮아진 상태였다.

"둥그런 공을 뭉툭한 바늘로 위 아래 양쪽에서 꾹 누르면 누른 부분부터 일그러지면서 언젠가 바늘 두 개의 끝부분이 만나잖아. 내가 본 왜곡이 바로 그 일그러짐이야. 혹은 소용돌이를 생각할 수도 있지. 소용돌이가 양 쪽에서 생겨나고 내가 한 쪽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가 중심으로 빨려들어가 다른 출구로 나오게 된 거지. 소용돌이 안에서는 바깥의 광경이 일그러져보이지."

"흠."

조로는 알 수 없는 의미의 신음을 흘렸다. 로우는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못 알아듣겠으면 애초에 물어보지마라."

하지만 조로는 멀뚱한 표정을 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그걸 무사히 빠져나간 너는 예전의 너와 같은 너야?"

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철학적인 질문이다. 박연병에 걸렸던 트라팔가 로우와 걸린 적이 없는 트라팔가 로우는 확실히 다른 존재이다. 인간은 경험의 유무차이로 완전히 다른 자로 변모할 수도 있으며 매 순간의 변화는 무수한 타인을 만들어낸다. 로우는 이제 앞으로 이루어질 자신과 조로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의 조로가 만난 과거의 로우는 미래를 건너와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과 동일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만날 조로는 로우가 미래의 조로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조로이다. 로우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게 중요한가?"

"음... 아니. 그냥 시시한 공상 한 번 해봤다."

그렇게 말하고 조로는 가죽끈을 꽉 묶었다. 그리고는 하품을 하며 일어나 다시 아궁이 근처로 쑥 들어가버렸다. 

사흘 뒤에 조로가 말한 배가 도착했다. 물론 로우는 오두막을 좀 내려가면 나오는 바닷가 근처에 떠 있는 캐러벨이 조로가 말한 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항구도 없는 외딴 섬에 정박하는 멍청한 선장도 있다고 비소했을 뿐이었는데, 뒤늦게 그가 정말로 배를-그것도 두 명이 겨우 낑겨야 탈 수 있을만한 뗏목이 아니라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소형 캐러벨을-사왔다는 것에 너무 놀라 몇 번이고 조로에게 물었다.

"훔친 게 아니고 진짜로 산 거냐?"

혹은 (전직)해적답게 판매상을 죽기 직전까지만 패서 갈취했다거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배를 가져올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자 조로는 농담이라는 것도 할 줄 알았느냐고 비웃으며 그냥 검을 판 돈으로 샀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열 자루를 만들면 그 중에 여섯 자루는 부러뜨리거나 불쏘시개 따위로나 쓸만한 잡검만 만들던 그가 그렇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배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로우는 딱히 순화하거나 돌려 말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조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와자모노(業物) 몇 자루 정도면 충분하지... 아무리 그래도 글자도 제대로 못 뗀 코흘리개 시절부터 칼을 쥐었다고..."

"잡검도 제대로 못 만들어서 싸구려 사케랑 바꿔왔잖아."

글쎄? 모아둔 돈도 좀 보태긴 했고. 조로가 덧붙였다. 로우는 어쩐지 민망해지려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맙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이유야 뭐... 네가 빨리 돌아가야 내가 아는 미래가 무사히 오지."

조로는 그러면서 홱 몸을 돌려 배를 살펴보러 걸어갔다. 로우는 그 설렁설렁 움직이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통 이상의 관계였음을 슬쩍 흘렸던 건 자신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도발이었거나 주정뱅이가 술김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로우는 미래의-현재 시점으로는 과거의-자신과 그가 두어 번 서로의 욕구나 풀고 넘어간 정도의 가벼운 사이는 아님을 확신했다. 그건 그의 눈을 보면 알았다. 아무리 겉으로 불퉁하게 굴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눈은 거짓을 꾸며낼 수 없다. 

조로는 아직도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를 사랑-물론 과거의 사랑하는 이를 만나자마자 왜 걷어찼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하고 있었는데, 그 사랑의 방향이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불안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대상이 있으나 사실 자신과 조로의 로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구분지어도 될 만큼 교점이 없었다. 그래서 지저분한 감정을 최대한 빼고 담백해지기 위해 애써보지만 마음이 수런거리는 것까지 사람의 힘으로 억누를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이라는 건 그래서 성가신 것이다. 그래서 애써 단호하게 선을 그으려고 한다. 로우의 시점에서 미래에 관련한 정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차단하려고 했다. 본인의 나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일당은 다들 죽었느냐고 물었더니 살만큼 살다 갔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로우는 미래의 자신과 그가 쌍방향적인 관계는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짧게 짐작해보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조로와의 관계는 여전히 자신에게 와닿지 않는 문제였다.

조로는 삐딱하게 서서 배를 한참동안 올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로우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뜬금없이 내뱉었다.

"어릴 때는 솔직하게 구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냥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안 해보려고 한다는 뜻이야."

"넌 매번 그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는데, 도무지 적응이 안..."

"같이 가자."

"뭐?"

"네가 말한 그 '왜곡'이 일어나는 장소가 어딘지 알아."

로우는 눈을 크게 떴다. 조로는 그가 놀라든 말든 "기다려"하고 한마디만 내뱉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걸어나오는 것이다. 간단한 짐을 챙기러 간 줄 알았는데 들어갈 때의 그 복장 그대로 세 자루의 검만 허리춤에 걸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놓아둔 검을 다시 집어들기 전에 그는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꼈을까? 혹은 어떤 다짐 비슷한 것을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창고에 깊숙히 집어넣었던 장비를 다시 꺼내 정리하는 것처럼 아무 감흥도 없었을까? 조로가 설렁설렁 다가와 기록지침을 내밀었다. 조로는 좀 낡았지만 항해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하며 로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술을 실어야겠는데."

덧붙이듯 말한 것이 사실 본론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우는 그 시선이 원하는 것을 어림짐작하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내 능력은 물건 운반용이 아니다. 직접 가져와."

그러자 조로는 히죽 웃었다. 

"안된다는 소리는 안 하는군."

재밌는 녀석이야. 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다시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로우는 얻어맞지도 않았는데 뺨 한 쪽이 얼얼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를 쫓아갔다.

***

로우는 마스트에 기대어 앉은 채 손에 든 지도를 한 번, 기록지침을 한 번 보았다. 그는 항해사가 아니었지만 기록지침을 보는 법 정도는 알았다. 출항 전에는 항해사도 없이 갤리온 같은 전문 범선도 아닌 배로 바다를 건넌다는 점이 약간 불안했는데 이 부근의 바다는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 편이었다. 조로가 말해준 위치는 지금 속도로 가면 열흘 안에는 도착하는 곳이었다. 출항 첫 날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지도를 짚어주는데 로우는 처음에는 도무지 그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초조함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왜 처음부터 장소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곧 그의 묘하게 낮은 긴장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태 자신이 한 가지를 놓친 채로 조로를 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그가 너무 긴 단위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과거와 아주 먼 과거, 미래와 아주 먼 미래의 간격이 남들보다 크지 않았다. 5년 전의 일과 10년 전의 일이 별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5년 전에 만든 검과 일주일 전에 만든 검을 혼동한 적도 있을지도 몰랐다. 인지하는 시간 감각 자체가 타인과 다른 것이다.

조로는 하루종일 배 한 쪽에 놓여있는 간이의자에 앉아 느리게 호흡하면서 낚시대를 걸쳐놓고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입질이 오면 낚시대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작은 물고기들이 걸려 올라오면 망설이지도 않고 주둥이를 빼 다시 바다에 던지는 식이었다. 조로는 심심풀이로 할만한 일이 낚시 뿐이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무료함을 달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따분함에 지나치게 절여진 나머지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것 같은 고독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진득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고독을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미래의 자신이다. 자신이 그런 괴물을 만들어내게 된 경위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므로 로우는 자연스럽게 그 괴물의 존재 자체에 집중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누군가와 단 둘이 있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기분이 복잡했다. 인적이 드문 섬에서 좁은 오두막에 붙어 있을 때가 차라리 세상과 덜 동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끝없이 확장하는 세계에 오롯이 둘만 남겨져 자신도 모르게 온 신경을 상대방을 향해 곤두세우는 것이다.

의술이라는 학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명에 대해 생각한다. 의술은 공공재이며, 배경에 상관없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해야 한다는 본분에 근거하지만 생명을 무리해서라도 연장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역설적인 논제도 존재한다. 인간은 죽을 권리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연명보다 삶의 깨끗한 종결이 더 가치 있을 때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의 존재는 영생을 탐내는 자들에게 들이밀 수 있는 완벽한 반례이다. 무의미한 삶의 지속.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무기력과 우울.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직시할 때가 됐다. 출항 3일째, 해가 완전히 넘어갔을 때 로우는 선실에 틀어박혀있는 조로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탕 하고 탁자 위에 놓았다.

"현실을 술로 외면하려는 건 최악이다."

그러자 조로는 엉거주춤 팔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우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딱히 뭘 잊으려고 그러는 건 아냐. 안 마시면 허전해서 그런거지."

"그럼 그냥 중독이군. 더 안 좋아."

조로는 '중독'이라는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피식 웃고는 로우가 빼앗은 술병으로 손을 뻗을 뿐이었는데 그가 술병을 아예 바닥으로 치워버리자 피곤한 얼굴로 탁자에 턱을 괴는 것이었다. 둘은 잠시 그렇게 대치 상태로 침묵을 지켰다. 로우는 서두를 고르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조로는 그저 맹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가 툭 말했다.

"자위해봐."

로우는 지금 당장 널 거꾸로 매달아 매우 치겠다는 말이라도 들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로는 약간 심각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말했다.

"네가 목석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위하는 걸 보는 건 흥미로울 것 같군. 싫어? 싫으면 다른 신나는 일을 좀 만들어봐. 널 따라오면 재밌어질 것 같아서 탄건데."

로우는 기가 막혀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 같잖은 성희롱을 그대로 받아 넘겨야 하는 것인가? 설마 미래의 자신은 이따위 저급한 요구까지 고분고분 따라주는 머저리라는 말인가? 로우는 그의 약간 모호한 초점의 홍채와 풀어진 눈썹 따위를 들여다보다 취했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하려던 말을 계속 하기로 했다.

"날 보내고 나면 다시 돌아갈건가?"

"어딜?"

"네가 있던 섬."

"글쎄. 생각 안 했는데. 그냥 너랑 배를 한 번 타보고 싶어서 온 거야."

조로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로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가 아냐."

"알아, 꼬맹아. 내 시간에서 넌 죽었어."

"그래. 너의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네놈은 마치 내가 죽는 걸 바라는 것처럼 '네 시간'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고 싶어하지 않고, 날 자꾸 네 트라팔가 로우와 겹쳐보면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지. 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게 그 영생인가 했지만 딱히 그걸 즐기는 것 같지도 않아. 내가 죽지 않고 너도 그 빌어먹을 불사의 삶을 살지 않는 미래로 바꿀 생각은 없어?"

"아... 미안한데, 없어."

길고도 치열한 갈등 끝에 꺼낸 질문이 무색해질만큼 간결한 대답이었다. 로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로는 고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의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두가 만든 거야."

"......"

"지금의 내가 사라진다는 건 그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 그들이 쌓아올린 것에 건방지게 간섭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군."

그의 말대로였다. 사실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로우는 분노를 느낀다. 

"나에게 불공평해."

트라팔가 로우는 트라팔가 로우만의 삶이 있었다. 그건 동시에 로시난테를 위한 삶이기도 했다. 열매를 삼킨 다음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코라손을 위해 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코라손의 죽음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라손이 말한 진짜 자유를 찾아보려고 발버둥치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점점 속박해 간다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 단념할 수 없는 강박에 사로잡혀있다. 그걸 깨뜨려야만 자신은 비로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 첫번째로 행해야하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복수에 성공해야만 그 다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노선의 첫번째 단계조차 제대로 밟지 못하고 실패한 미래라면 나의 짧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내 은인의 마지막 웃음은 뭐가 되는거지?

로우는 흥분을 죽이기 위해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조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힘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88년보다 더 긴, 그 제곱의 제곱을 더한 세월의 무게가 얹혀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로우는 갑자기 괴로움을 느꼈다. 그건 로우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게 아니라 타인의 괴로움이 전이되어 온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완전한 타인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사히 살아있는 미래의 자신,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대의 자신이 괴로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을 비틀어 말했다.

"나한테는 평생의 숙원이 있다. 뭘 이야기하고 있는지 지금의 너는 알겠지? 아니, 몰라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내 숙원의 끝을 강탈해갔다는 거야.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았을 형태로."

"불로수술은 네 선택이었어."

"그건 너에게나 그렇게 보였겠지.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내가 널 구했다는 걸 합리화 시킬 수 있으니까. 내가 죽어가면서 후회하지 않았으리라는 장담은 어떻게 할 수 있나?"

그러자 조로는 입을 다물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로우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로우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그 무표정에서 도리어 안도를 느꼈다. 슬픔이나 상처가 엿보이기라도 했다면 자신은 그를 갈갈이 찢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을 것 같았다. 조로는 시선을 탁자로 내렸다. 그리고 고개도 시선을 따라 약간 숙였다. 그는 빛을 등져 약간의 그림자가 진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다 느리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흩어진다는 게 참을 수 없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죽기 직전의 넌 반짝반짝 빛나는 등불 같았다는 거야."

메마른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잠겨버릴 것처럼 어둡게 말했다. 가진 걸 전부 끌어모아서 빛을 내며 산화하다가 마침내 심지까지 다 타서 천천히 꺼져가는 등불 말이야… 로우는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머리 속이 핑핑 돌면서 어지러웠고 기분은 말로 꺼낼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묘하게 해방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성취하고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조로는 완전히 두 팔을 테이블에 늘어뜨리고는 얼굴을 그 위에 기대어 엎드렸다. 그래서 널 사랑했어. 조로는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독 속에 파묻혔던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는 있었다. 로우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반대쪽으로 건너가 조로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는 그를 꽉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응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는데 조로는 늘어뜨린 두 팔을 올려 로우를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은 키스를 하면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혀를 섞고 있을 뿐이었는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숨가쁘게 입을 맞췄다. 둘 다 무언가를 잔뜩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쪽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다른 한 쪽은 과거의 태엽을 돌리는 것에 불과한 짓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랬다. 서로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술에 이가 스쳐 상처가 나고 입가로 타액이 마구 새어나오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절박하게 키스할 뿐이었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술을 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바싹 달라붙은 채였다.

"있잖아."

조로가 음울한 목소리로 먼저 속삭여왔다.

"네가 여기를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만큼 나도 네가 그래."

진짜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거든. 조로는 비로소 공백의 세월을 제대로 직시해보았다. 빛난다는 건 태양처럼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는 걸 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존재가 아니어도 다른 모양으로 간절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아무리 달려나가도 끝이 없는 공포 속에서 점처럼 아주 작게 보이는 불씨가 구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눈을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빛이 사라진 뒤의 공백을 채워넣기가 힘들다는 건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

둘은 그 뒤로도 겉으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로우는 자신의 시선이 여태 집요할 정도로 그를 따라다녔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관찰하는 것은 더 쉬워졌다. 그는 새벽까지 잠에 들지 않다가 동이 터오를 때 즈음 겨우 눈을 붙이고도 오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다시 눈을 뜬다. 본인 말로는 해적질을 할 때 선잠에 들었던 게 지금까지 굳어진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간의 불면증 증세라는 걸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로우는 갑판에 오전의 햇빛을 나른하게 받으며 태평한 자세로 누워있는 조로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는 잠에서 막 깬 것처럼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너에게 그걸 행하지 않을 거다."

약속해. 내뱉고 보니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가 진짜로 바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로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죽는 게 두려워서도 아니고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도 아니야."

그러자 조로는 눈을 한 번 힘주어 감았다 뜨더니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도 정말 어지간한 남자로군."

로우는 그가 자신의 고집을 지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조로는 잔뜩 굳어져 있는 로우의 입매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더니 고양이처럼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어보이고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불로수술은 그냥 늙지 않게 하는 능력일 뿐이야. 절대적인 불사가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런 쪽의 발상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우는 눈만 깜빡거렸다. 조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건 내 선택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자살이라는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내면을 단련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아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때 조로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로우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의 지독하리만치 날카로운 육감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그리고 네가 여기에 온 것도 예정된 수순일지도 몰라. 한낱 인간이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안 어울리는군. 넌 누구보다 운명이란 걸 믿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인데."

"아, 그거 예전에도 말했어."

무덤덤한 눈빛 밑바닥에 깔려있는 애틋함을 보면서 로우는 미래의 스스로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감정이라서 스스로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는데, 도플라밍고가 코라손을 감싸는 발언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그것이 미친듯한 질투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더 당황했다. 자기 자신에게 질투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인가?

마지막 열흘 째에 로우는 해가 머리 꼭대기로 올 즈음 바다 한가운데에 불쑥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암초 지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주변으로 맴돌이치는 파도를 보면서 이 곳으로 오기 직전 보았던 것과 똑같은 해류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선실로 가서 자고 있는 조로를 깨우면서 그것을 설명했다. 하지만 조로는 그에 대해서는 별 대꾸도 없이 벌써 아침이냐는 소리를 지껄이고는 세수를 해야겠다면서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조로가 선실 밖으로 나온 건 로우가 그를 기다리다 지쳐 도로 잠에 들었음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렇게 거대한 의문을 품고 돌아갈 줄은 몰랐어."

로우는 갑판 위에서 불길하게 일렁이는 파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좀 더 가까이 가는게 좋지 않냐? 조로는 여전히 태평한 목소리로 빠지기만 하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구해줄테니 걱정말라는 둥의 헛소리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로우는 뛰어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걸로 된건가? 그게 맞는 일이야? 입 안이 왜인지 비릿하게 썼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이 곳에 떨어진 후 얼마의 시일이 흘렀는지 세어보고 있었다. 3주 남짓한 시간이었다.

"로우."

그 때 조로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우는 고개를 돌렸다.

"날 살려줘서 고마웠다. 진심이야."

이제 가. 조로가 활짝 웃었다. 로우는 그가 그런 웃음을 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주 유쾌하고 즐거우며 이를 한껏 드러내고 짓는 함박웃음. 순간 조로가 로우를 확 떠밀었다. 큰 물체가 요란하게 물에 빠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포말이 하얗게 일었다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조로는 그가 빠진 자리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파도가 적당히 가라앉은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사히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다시 보는 건 신세계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신세계의 섬에서이다. 조로는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떠나간 자와 자기 자신, 두 사람에게 꾹꾹 눌러쓰듯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너한테 이 말을 하려고 지금까지 살아온거야."


차가운 바닷물이 확 몸을 덮치는 순간 트라팔가 로우는 왜곡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빛이 번쩍 퍼져나가면서 주변을 에워쌌고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서서히 사그라들며 에너지 상태로 응축되어간다. 그 에너지는 정렬되어 있던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뒤섞어놓았으며 뒤섞인 그 시간들은 마구잡이로 회전하다 겹겹이 중첩되어 점차 시각화 되어간다. 로우는 중첩된 시간들 틈에서 자신이 겪은, 아니 이제 겪게 될 일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미래를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잔상은 점차 뚜렷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롤로노아 조로와 털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그의 곁에 앉아있는 트라팔가 로우이다. 지금보다 조금 나이를 먹은 것 같지만 아주 차이는 없는 모습의 자신이 말한다. 내 숨겨진 이름은 D야. 그는 자신의 염원이 D가 가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정한 자유, 장벽의 파괴, 그를 위한 의무. 솔직히 밀짚모자는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 너희와는 이제 동맹도 뭣도 아니고 그 녀석을 완전히 믿기는 힘들지만!! 로우는 명백히 죽어가는 그를 앞에 두고 태평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너무 태평해서 오히려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공포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눈동자가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널 살려주면 밀짚모자한테 쥐어줄 자신 있냐? 원피스. 

로우는 쏟아졌다 잦아들었다를 반복하는 빗방울처럼 드문드문 이어지는 문장 사이의 공백에서 얄팍한 기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치챈 것이다. 거창한 대의와 진정한 자유를 향한 갈망. 정말로 그 뿐인가? 롤로노아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당연하지.

로우는 빙그레 웃었다. 조로의 몸에 손을 얹은 뒤 눈을 감는다. 열매를 처음 삼켰을 때와 마찬가지의 한기가 감돌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면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욱 흐르다 멈췄다. 그리고 완전한 암전이 밀려들어왔다. 장면은 거기서 끊겼다. 로우는 그 불길한 암전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고는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의 생이 거기서 마감되었기 때문에 장면이 더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죽음 이후 남아있는 건 어둠과 허무와 쓸쓸함 뿐이다.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오고 서글픈 미련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시작한다. 조로에게 미래를 확답받고 애써 의연한 척 했으나 자신은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짧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이 허망해서도 아니었다.

"캡틴!! 캡틴!!"

로우는 깨어나는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친듯이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베포가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고 펭귄이 다급하게 물잔을 내밀었다. 분명히 물 속에 가라앉은 걸 봤는데 도무지 그가 보이지 않아서 주변만 뱅뱅 돌고 있었다고 했다. 로우는 기침이 좀 잦아든 후에 간신히 입을 열어 그에게 정확히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사흘 정도요. 느닷없이 섬의 끝자락에서 젖은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발견되어서 재빨리 배에 옮겼는데 그 이후에도 이틀 동안 깨어나질 않고 잠만 자고 있었다고 했다. 현실의 시간으로는 고작 사흘이었을 뿐인데. 베포가 그에게 덥썩 안겨들었다. 사실 모양새는 로우가 안긴 것과 다름없었다. 

"걱정 시켜서 미안해."

로우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베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베포는 훌쩍임을 멈추지 않았다. 캡틴이 계속 울어서... 로우는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눈물이 말라붙어서 뻑뻑해져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로우는 손바닥을 아예 눈두덩에 붙인 채 묵묵히 앉아있다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불쑥 중얼거렸다.

"...하자..."

"네?"

베포가 얼굴을 가까이하며 되물었다. 이제 우회나 도피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 가는 방법 뿐이다. 이 육신이 반응하는 방향에는 누가 있는지.

넌 좋은 선장이야.

"이제 그만 출발하자... 신세계로."

자신의 영혼은 왜 이토록 처절하게 울고 있는지.

***

역시 약속은 못 지킬 것 같다, 조로야.

조로는 갑판 위에서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운 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트라팔가 로우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니까 그건 벌써 80여년 전의 일이었다. 무슨 약속? 그렇게 되묻고 싶었는데 입조차 벙긋하기 어려워서 그를 흘끗 쳐다보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까지 죽음을 직감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래서 깨어났을 때는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당황스러웠으며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복잡한 머리로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일당들에게 그 방법 밖에 없었느냐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로는 다시 한 번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너희는 그러는 트랑이를 내버려뒀냐? 그러나 대상이 다른 선원 중 하나이고, 지켜보는 자가 자신이었어도 내버려뒀을 것이다. 선장을 왕좌에 앉히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었다. 그래서 목표한 바는 이루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마저 실패했다면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 순간 로우가 속삭였던 말 만큼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전혀 고맙지 않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 때 날 세게 한 대 때리는 정도로 용서해줘.

무슨 뜻이야? 그것 또한 묻지 못했다. 그와의 마지막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아무튼 조로는 동료들과 자신의 외적인 변화가 두드러질 즈음부터 자기 자신이 어쩐지 죽음을 거부하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르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스물 네 살의, 아직 일당과 동맹을 맺기도 전 날 것의 트라팔가 로우를 다시 보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래서 그를 기약 없이 기다려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조로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소한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이 로우를 후려친 것과 로우가 자신을 살리면서 때려달라는 농담을 한 것 중에 어느 쪽이 먼저지? 물론 이제와서 아무 의미는 없었다. 사람은 사실 무익한 공상만으로도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나 이제 그런 분투도 그만둘 때가 됐다.

조로는 화도일문자의 칼자루를 움켜쥐며 일어났다. 생물은 평생 있는 힘을 다해 허물을 벗으며 살아가다가 마침내 마지막 탈피를 하고 나면 산산히 바스라져 없어지는 것이 도리이다.

자. 이제 그만 만나러 가자.

今来むと言ひしばかりに長月の

有明の月を待ち出でつるかな 

곧 오리라고 말하셨던 당신

9월 긴 밤을 동틀녘 달이 뵐 때껏 기다렸소 *


* 백인일수 21(素性法師)


+)bgm은 같은 노래 다른 버전인데 하나는 팔가 하나는 조로 느낌으로 넣어봤내요... 각각 어느 쪽인지는 개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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