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남실바람은 붉은 과육을 꿰뚫고.

[이엘사샤]- 이엘 시점

개인서재 by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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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필생의 역작이다.

 

누가 그리 말했는지는 몰라도, 필생 마지막을 행복하게 보낸 자의 유언이 틀림없다. 세상에 태어나듯 눈앞에서 터지는 선혈이 나의 시야를 단조롭게 만든다. 너무나 선명했다. 가슴 한 움큼이 뜯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네 몸을 찢고 지나간 저것이 정녕 현실인가. 방금까지 내게 웃어주던 네가,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저 고깃덩어리가 맞는가.

결론적으로,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과거의 편린, 지독한 악몽이 내게 손짓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절망이 나를 덮쳤다. 잘 지냈어? 나의 첫사랑. 이윽고 다시 찾아올 사랑조차 이렇게 절절하진 않을거야. 너를 잃은 만큼 너를 추억하며 살게. 내 인생에 단 하나뿐인 여자였던, 내게 슬픔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너의 추억을 내가 전부 간직하고 살아갈게. 내 심장만큼은 영원히 너의 것일거야.

수도 없이 반복한 맹세를 폐포 속 깊이 품고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의 인테리어는 지나칠 정도로 흑백이었다. 흰 벽지에 검은 가구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색채라는 것은 침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전부였다. 나의 매일 아침 일과는 저 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나마 잔재한 인간성이라도 붙잡고 싶다는 내 알량한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습관. 내 나이가 중학생이었다면, 잠깐 찾아오는 중이병 정도로 생각하면 될 텐데. 삼십이 넘었는데도 여전한 것을 보면 태생이 생각이 많은 인간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 얼굴에 사색이 많다는 특성까지 겹쳐지면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결과를 낳았기에, 딱히 고쳐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지만.

빠른 샤워를 마치고 정장을 챙겨 입었다. 회장은 뽀대가 나야 한다며 회계 양이 챙겨준 털 망토도 잊지 않고 몸에 걸쳤다.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자, 누가 봐도 고압적인 무기 회사의 회장이 완성되었다. 제법 괜찮군. 오늘의 백정장은 은빛에 가까운 빛을 냈다. 나이프의 칼날처럼. 오늘은 간만에 스스로 운전을 해야 했다. 차고에 널린 수많은 차들 중, 무난한 롤스로이드 고스트 블랙배지를 골라 잠금을 풀었다. 롤스로이드는 고스트도 팬텀도 다 좋은데, 이름을 죄다 저따구로 짓는단 말이지. 솔직히 디자인도 그렇게 취향은 아니었는데, 고스트 블랙배지 1세대에 비해 2세대가 조금 더 슬림한 면이 있어서 한 대 사주었다. 역시 무엇이든 겉보기가 중요한 법이니까. 마케팅이란 보이는 것에 많은 지분이 치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쓸데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내가 백정장을 입든 후드티를 입든 나는 똑같은 나란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이 아니라면 ‘이엘 크로커스’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비단 나 뿐만 그런 건 아니었으니 나름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사회란 그렇게 돌아가도록 설계된 존재다. 커다란 시계처럼 굴러가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선과 악, 양지와 음지가 공존해야만 한다. 따라서 각 구역의 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의 겉모습 또한 그에 어울리게 변하는 것이 아닐까. 타인이 그 겉모양을 보고, 사회의 구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도록. 회사의 부품이자 필수불가결인 직원, 그들을 통제하는 체계, 그리고 그 안에서 더 높은 권력에 닿고자 하는 알량한 인간들의 생각은 지엽적이기 그지없으므로, 이런 일차원적인 면모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까놓고 말해서, 저런 이유로 인해 내게 세상이란 언제나 지루했다. 주변에 널린 인간들은 죄다 그저 그런 돌멩이밖에 없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직접적으로 대드는 인물은 여태껏 형과 회계 양뿐이었으니 말 다 했지. 권력과 돈에 지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원석들은 죄다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런 돌멩이를 가공하여 빛을 발하게 해야 하는 입장으로는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말 되는 것 하나 없는 요즘이었다. 현실에 굴복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래도 나름 세상이란 건 소수의 힘이 변화시키는 거 아닌가? 현재 주류라고 취급받는 것들도 모두 초반에는 비주류였다. 나의 돈과 권력으로 이들을 지원한다면, 예정된 운명보다 빠르게 사회에 인정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애초에 내게 이러한 배경이 주어진 것부터가 일종의 혜택임을 알고 있으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은 하는 편이었다. 외양에 속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인간을 모으고자 했던 것 덕분에 정작 되바라진 놈들만 잔뜩 늘어나게 되었지만. 돈은 꼬박꼬박 받아가면서도 선은 지키는, 그래도 신경을 긁긴 하는 간부진들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대부분 여생이 길지 않았으므로, 그들만 남은 것일지 모르지. 나를 모시는 인간들은 언제나 깍듯하게 굴었기에, 그 이상 손을 대기에는 아무리 나라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엔 외롭다는 결론이다. 퇴근하고 오면 드넓은 집에서 숨 쉬는 건 나 혼자뿐.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해도, 자주 오지 않을테니 그 동물에게 못된 짓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회계 양에게 외롭다고 엄살을 부리면 정말 진심으로 혐오하는 표정을 지어주기 때문에 쉽게 한탄할 수도 없었다. ‘저는 회장님의 돈을 보고 회장님 밑에 있는 거니까 그에 맞는 선을 지켜주세요.’ 라는 그녀의 입장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미 떨어지는 나를 좋게 포장하여 언론에 내보이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으니 내가 얹을 말이 없기는 했다. 원래라면 비서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자리는 현재 공석이므로.

 

저 멀리 커다란 회사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나에게 허리를 숙이는 수많은 직원에게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며 걸어갔다. 저 높다란 건물의 최상층과 최하층이 나의 공간이었다. 최상층은 집무실, 최하층은 일종의 작업실이자 연구실이었다. 회사에서 남몰래 연구를 하려면 따로 공간이 필요했기에, 주차장 하나를 야외로 옮겨서 만든 내 개인 공간이었다. 말이 개인 공간이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애들 학교 교실 하나 정도 될까. 그 안에서 환풍구를 켜고 온갖 무기를 실험용으로 제작하고 있으면 잡생각도 들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세간에선 이것을 취미생활이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퍼즐이나 게임도 아닌 무기 제작이 취미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고로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는 이런 곳은, 내게 있어 일종의 안식처와 같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자, 위층에서 회계 양이 내려와 나를 데리고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늘 오전 8시, 비서 최종 면접이 있을 예정입니다. 후보는 총 다섯입니다, 이엘 크로커스 회장님. 언질대로 이후 일정은 전부 비서 인수인계로 채웠습니다. 서류가 쌓였으니 그것부터 처리해주세요. 급한 일은 따로 메일 드리겠습니다.”

 

벽 장식품과 같은 목소리. 소중한 우리 회사의 부품들. 늘 녹슬지 않도록 기름칠을 해 줘도 망가질 것들은 망가지는 나약한 것들. 나 대신 그들을 관리해주는 회계 양은 언제나 본인 희망으로 과다업무를 맡곤 했다. 몇 번 말린 적도 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기에 이젠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래. 이만 본래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동안 비서 일을 맡아서 했던 건 보너스로 추가 입금해주겠네. 수고했어.”

“영광입니다.”

 

그러니 원재료가 단단한 놈들로 골라야 하는 거다. 회계 양처럼. 나의 사생활이나 헛소문에 휘둘리지 않을, 심지 굳은 자들이 필요했다. 비단 직원을 뽑는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뭐든 줏대가 있어야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나갈 테니까. 그리고 내가 파악하기에도 더 쉽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무실의 의자까지 걸어갔다. 집무실에서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풍겼다. 비서 후보들이 온다고 신경 좀 쓴 모양이지. 별로 달가운 냄새는 아니었다. 차라리 시트러스가 나았다. 하여간 말 안 하고 일처리하는 건 으뜸이야. 머릿속에서 ‘어쩌라고요.’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경호실장이 떠올랐다. 역시 나무는 나무대로 쓸 곳이 있고, 강철은 강철대로 쓸 곳이 있는 모양이다. 자네는 비서 일이 적성에 안 맞는 모양이구만. 다음에 만나게 되면 한번 골려줘야겠어. 그러고 보니 최근 양식장의 물고기가 많이들 배고파한다는 경비 이사의 보고가 있었다. 미국 마피아 측의 요청이 들어왔단 이야기다. 좀 처리할 시체가 많나 보지. 양식장 대여 정산 내역을 서류로 올리겠다는 메일에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전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맞춰 조절되는 뒷세계에 신물이 날 법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상한 더러움은 제법 취향에 맞았다. 타인에게 신경쓰지 않는 제 특유의 이타심. 크로커스 집안은 대대로 이타심이 넘쳤다. 그렇기에 나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굳은 손을 풀고있는 스스로의 자태가 마음에 들었다. 경호원이 건네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입에 가져가 음미했다. 별로였다. 그럼에도 뿌듯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을 보니 뭐라고 타박할 순 없었다. 뭐 씹은 듯한 내 표정을 보곤 경비원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일부러구나. 허, 참. 우리 직원들이 늘 고생이 많지. 조만간 보너스 정산이라도 전체적으로 해야겠군. 저 친구가 있는 경호 1팀만 쏙 빼고 주면 될 것 같다.

어느덧 시계는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에는 최종 면접 대상자들의 프로필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고스펙에 능력자들이로군. 차별 없는 회사의 신조답게 국적과 성별, 특색은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판에 박힌 사람들인 것이 분명한 자기소개서. 내 취향을 잘 알고 있을 다른 간부들이 하나같이 웃기만 하기에 한 놈이라도 괜찮을 줄 알았건만, 오산인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리 유연한 인물은 아닐텐데, 내가 느끼기에 이러면 어쩌자는거지? 간부진들이 뇌가 굳었나. 갈아치울 때가 된건가. 이런 자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버젓이 알고 있으련만.

 

집무실 호출 버튼을 누르고 면접 시작을 알렸다. 다섯 후보가 집무실에 들어와, 앉을 곳을 찾기에 그냥 소파에 편히 앉으라 일렀다. 솔직히 비서 따위 있든 말든 상관없는 존재였다. 내 몸 내가 알아서 챙기면 될 일을, 굳이 회계가 안된다며 고집 피운 탓이니까. 엄밀히 말해서 잠도 충분히 자는 편이었고, 일도 다른 기업의 회장보다 성실히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스스로 운전 잘만 해서 왔다. 이상하게 내 차 앞쪽에 있던 다른 차들이 비켜주긴 했지만.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계 양은 내 그런 추측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쌓인 서류들을 가리켰지만. 납득해줄 수밖에 없었다. 취미를 줄인다면 더 잘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심적 여유가 충분치 않으므로 하루 수면 시간은 4시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스펙만 빡빡한 자들을 끌어오기엔, 서류 처리와 눈썰미를 겸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반골 기질이 다분한 크로커스 인더스트리 현 수뇌부는 눈치 능력자를 원했다. 애초에 전 오너였던 애쉬 크로커스에게 반발하여 세워진 수뇌부다. 이엘 크로커스 산하의 간부란 어엿 생존본능이 다분해야 제맛이지. 쉬이 억눌리지 않는 자들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회장 비서라는 직위로 남들에게 뻗대는 자들은 사양이었다. 그 미묘한 간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배를 마셨으며, 비리 탓에 양식장으로 끌려갔으니까.

 

“무기 회사 회장의 비서로 온 이유가 뭐지? 사람 생명으로 돈 장난 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을텐데.”

 

소파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며 후보 하나하나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도 사회적 시선이라는 게 있으니, 다수의 긴장감 어린 표정을 즐기며 특유의 능글맞은 포커페이스를 지었다. 연륜 꽤 있는 자 넷에, 나보다 어린놈 하나. 포식자 앞에서 움츠릴 줄밖에 모르는 겁쟁이들에 불과한가. 다들 대답을 망설이며 서로의 눈치만 보는 듯했다. 침묵이 감도는 짧은 순간, 물고기 사료, 아니지. 탈락자가 될 자들을 결정했다. 애초에 그걸 위한 비서 면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계 말에 곧이곧대로 따를 이유도 없으니, 이 정도의 일탈이면 충분하겠지. 사실상 원로와 간부진들에 의해 내정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 후보자 또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눈에 띄는 이력과 출중한 외모. 일하라고 후보에 넣은 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나이 서른일곱이라고, 슬슬 연애 좀 하라는 압박인가 싶었으니까. 그의 이력서엔 정보실장의 글씨체, {추신: 매우 적합}이 하트와 함께 반짝이며 들어가 있었다. 황금색 잉크는 또 어디서 구한거야. 하라는 일은 안하고, 또 이런 것만 모았나 보군. {회장님 취향의 남자 발견♡} 이라고 적힌 글씨를 다른 이력서로 슬 가려버렸다.

 

“사람 생명으로 돈 장난을 친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거래라는 뜻이죠. 돈으로 사람 생명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소리니까요.”

 

검은 머리, 짙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정보실장표 매우 적합자이자 회장님 취향의 남자 발견의 주인이었다. 1차 면접 담당자들이 이번만큼은 괜찮을 거라며 나를 다독이던 기억이 어렴풋이 솟아오른다. 그래, 제법 얼굴은 반반하다만. 이것들이 회장을 놀려먹는 것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군. 본인의 눈 색과 맞춘건지, 푸르른 넥타이를 바르게 맨 단정한 옷차림이 먼저 보였다. 과거 운동을 한 것 같은 풍채, 그러나 지금은 아닌 성싶었다. 악어 이빨에 찔리지 않고 잘 살아남는다면, 꼬마 악어 새끼 정도는 손에 쥐여줄 수 있겠군. 모두들 오해하곤 하지만, 나는 꽤 관대한 편이니까. 까부는 인간들이 선만 넘지 않는다면 나 또한 건들지 않았다. 써 볼 만한 인재는 일단 써보고 판단한다. 결코 연애 쪽으로 의도한 의미의 말은 아니다. 이 자 또한 마찬가지. 앞서 말했듯 러시아 국적은 상관없었다. 이름이 더럽게 길긴 했는데 뭐. 본인 의지도 아닐테니까.

 

“알렉산드르 아르세니예비치 아르테미예프, 자기소개서에 사샤라고 불러달라 했던가. 그래, 사샤 군은 그런 장난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군?”

 

가지고 놀면 재밌을까? 물론 일 적으로. 전 비서는 버티지 못했었지. 하지만 말도 없이 횡령한 건 그쪽 잘못이니 괜찮다. 괜스레 장난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오만한 성정이 움텄다. 오랜만에 발견한 재미있을 만한 사람을 뺏기고 싶지 않다고, 벌써 제 소유라 탐내는 속내를 감추며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확실히 취향이긴 취향이다. 동시에 차가운 열망이 자라났다. 무언가 숨기고 있군. 애초에 면접장에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이 회사에서 계속 지내려면 자신의 밑천 정도는 모두 드러내야 하지 않겠나? 본능적인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뭐, 차차 진행되면 되겠지. 가벼운 손짓으로 사샤의 뒷조사를 명했다. 오랜만에 재미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감흥이 없다기보다는, 장난질에는 그리 재능을 타고나지 않아서. 저는 돈 놀음보다는 거래를 좋아합니다.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있지만···. 진지하지 않은 장난질에는 놀아날 생각이 없는 편이죠.”

 

놀라울 정도의 궤변이군. 그 용기가 가상했다. 장난이란 단어 자체가 진지와 양립할 수 없는 법이거늘, 모순을 이용해 재치있게 답했다. 대가리가 제법 굴러가는 놈이 왜 여기에 지원했을까. 단순히 대기업의 고연봉을 바란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 대가리 굴리던 놈들에게 좋은 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에 반해 저 늙다리들은 뭐지? 배웠다면 배운 바를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딴 무기 회사같은 곳에 지원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표방하는 비정부 기구라도 지원했어야 했다. 죽을 자리를 찾아서 온 거라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샤 군 빼고 전부 나가도록. 너희들은 탈락이다. 면접 수고했다. 사샤 군, 오늘부터 바로 일할 수 있나? 내 일정은 새로운 비서를 위해 전부 비워서 말이야. 자네가 나의 일정에 맞출 수 있기를 빌지.”

 

고작 두 질문 후에 결정된 결과에 비평화주의자들이 벙찌는 것이 보였다. 멍청한 표정들이 제법 웃겼다. 나 그런 건 아니었는지, 뒤쪽에 서서 경호를 서던 부하들도 하나둘 피식거렸다. 이건 불합리하다고 외치는 몇몇 탈락자들에게 경호원이 다가와서 사전에 알려줬지 않냐며 도로 다그쳤다. 빨리 정리하라는 나의 손짓을 신호로, 사샤를 제외한 모든 타인이 집무실을 끌려나갔다. 순식간에 결정하고 처리되는 일 처리에 사샤 또한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정작 나 자신은 제법 기꺼웠다. 이엘 크로커스라는 이름 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의사를 밝히는 사람은 꽤 오랜만이라서, 이런 비서라면 제 훌륭한 사업 파트너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 이전에 가치를 입증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무리도 아닐 것이다. 입꼬리가 자연스레 말려 올라갔다.

 

“뭐, 그래. 사샤 군. 내가 말은 거창히 했지만 말이야.”

 

그저 자네에 대해 추가적인 뒷조사를 해도 될지 여쭤보려고 남겼네. 하지 말라고 해도 이미 진행 중이지만.

피슥 흘러나오는 웃음. 공적인 자리, 흔히들 악어의 표정이라 부르는 시선을 띄운 채 고개를 들었다. 단둘이 남은 공간을 가득히 채우는 압력. 서서히, 장악하듯 너를 집어삼킨다. 악어의 아가리를 벌린다.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싫어도, 네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는 무기 회사란 그런 곳이니까. 스스로 악어 소굴에 들어왔다면, 적당히 분수를 알고 얌전히 악어새로만 지내라면서. 악어새가 실제로 존재하는 새가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서도.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회계 양이 집무실로 들어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우리 회계 양이 자네에게 대략적인 인수인계를 해줄 걸세. 자네 사수라고 봐도 좋다네.”

 

몸속에 산소를 들여보내고, 부산물을 버리는 행위를 감상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이런 식의 분위기가 익숙하리만치 따분하다며 그가 혀를 차는 것만 같았기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데. 그닥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불행하겠지만, 제법 흥미로웠다. 새삼스럽게 확신했다. 면접에서의 여유로움, 그의 은은한 권태와 의무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 비서 자리를 쟁취하고선 성취감이나 해방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로봇 같은 사람. 여태껏 나의 휘하에 살았던 사람들치고 이런 모습을 가진 자는 없었다. 회계 양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드물겠지. 모든 것이 연기라고 할지라도, 천하의 크로커스를 상대로 이런 연기를 벌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건, 이미 이보다 엄청난 담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 된다. 기분 좋아 보이는 내 표정에 회계 양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이만 가보라며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바꿔 꼬았다. 가장 귀찮았던 일이 끝났으니, 이제 여유를 가지고 마저 취미생활이나 할 생각이었다. 맞다. 서류가 많이 남아있었지. 그럼 아까 회계의 표정은 서류나 마저 처리하라는 것이었군. 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를 다시금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쓰군, 아까도 이 맛이었던가. 그새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간을 꾸욱 누르며 머리를 굴렸다. 진정하자. 아까까지 기분 좋았잖아. 또 다시 이러지는 말자, 이엘 크로커스. 그래, 진정하는거야. 진정. 그렇게 기대했지만서도, 정보실장의 바람처럼 저 사람을 가까이할 일은 없을거다. 회계 양의 닦달에 새 사람을 들였을 뿐, 언제나 그렇게 해 왔으니까. 연애는 무슨. 일이나 잘 진행되면 과분했다.

일이나 할까 싶어 어제 대비 보고서를 펼쳐들었다. 회사의 무기가 몇 명을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났는지 등등이 그래프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을 직속 고아원으로 보내는 기밀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가만히 침전해갔다.

 

* * *

두 시간 후, 대략적인 인계를 받은 사샤가 다시 집무실로 내려왔다. 단순한 서류 전달 및 분리 작업을 하고 있는건지, 책상에 수북히 쌓인 처리된 서류들을 다시 모아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 회사는 회장 비서가 고용주를 보좌하는 자리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감안해 회장과 집무실을 같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정보 교류가 가능하고, 상호 감시도 잘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들었나보군. 힐끔힐끔 제 자리랍시고 마련해놓은 책상에 시선을 보내는 꼴이 제법 신선하게 다가왔다. 귀엽네. 애써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편안히 입을 열었다.

 

“편하게 대하지. 서류는 거기 자네 자리에 놓고 가게. 어차피 오늘 일정은 넉넉하니 인수인계도 편하게 들어. 책상과 의자는 마음에 드나? 내가 자네 취향을 몰라서 말이야. 무난하게 내 취향대로 샀건만. 마음에 안 들거나 따로 쓰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게. 회사 비용으로 사줄 테니.”

 

돈이 썩어나냐는 표정에 그저 미소로 긍정했다. 표정 구경하는 맛이 제법이군.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쓸 만한 부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능력이니까. 친근하게 대해주는 정도면 딱 만족스럽다. 이로써 상호 유순한 관계로 자리잡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사샤에게서 신경을 완전히 끈 채 내 일에 집중했다. 미처리 서류 더미 가장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와 읽으며 아직도 서 있는 사샤를 보았다.

 

“질문이라도 있나?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하고선 갑자기 여유만만해졌다. 의구심이 들었다. 이젠 본인 자리로 가라는 의미였는데. 설마 이 정도 눈치도 없는걸까. 면접에서의 배포는 그냥 눈치가 없던 것이었나? 그럴 리가. 지금 제 비서는 이제야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눈빛이었다.

 

“아, 마침 말씀대로 질문드릴 게 있어서요.”

“무엇인데 그러나. 방금은 나름대로 축객령이었네.”

 

그러지 마시고, 하며 능글대는 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누군가가 고용된 지 하루 만에 상사에게 깝죽댈 인간이 있을 리 없다고 한다면, 제 비서는 완벽한 반례를 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내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던, 사샤는 조금 들뜬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비서와 회장이라면 이 회사의 직급 내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아닌가요. 그러니 조금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잠시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싶다고? 세간에 나에 대한 정보를 뿌리지 않은 것은 명백한 나의 의도였다. 그것을 이리 정면으로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아, 그래. 내가 반골을 원한 건 맞는데. 처음부터 너무 스스럼없지 않나. 나 스스로도 자신이 조울증마냥 의견이 왔다갔다 하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다. 지금은 글쎄, 가라앉는 타이밍인가 보군. 친근하게 지내고 싶던 건 맞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기꺼우면서도 고까웠다. 은근한 거부감이 일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너 따위의 질의응답을 받아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름 믿는답시고 이것저것 알려줬다가 되려 이쪽이 당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자네 질문은 꼭,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기 위해 비서에 지원했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말이지. 스파이도 아니고, 나에 대해 알아서 뭐 하려고? 쓸데없을텐데.”

“아니, 그러니까···. 회장님의 커피 취향같은 걸 알아야 제가 제때제때 만들어 오지 않겠어요?”

 

그런 목적이라면 좀 무안하다. 그보다 자기가 커피를 타 오겠다는 건가. 직장 상사에게 커피 타주는 건 여러 매체에서 많이 다루는 장면이긴 했다.

 

“예를 들면?”

“만약에 단 게 취향이 아니신데 카라멜 마끼아또를 받으시면 기분 나빠하실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대답해주세요.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니까요.”

 

아예 메모장을 꺼내어 주섬주섬 적을 준비를 하는 것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이가 없군. 커피에 왜 그렇게 진심인데? 아무렇게나 타줘도 잘 마시는데. 때문에 이엘 크로커스에 대해 나 또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뭘 어떻게 해도 나는 뭐든 잘하는데 어쩌라고.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취향이라는 것을 정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달달한 게 좋다는 정도? 직접 묻는다고 명쾌하게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걸까.

 

“유감이군. 내 커피 취향은 나도 모르네. 달든, 쓰든, 독이 들었든 신경 쓰지 않아. 그래도 익숙한 게 좋긴 하지. 정 궁금하다면 회계 양에게 여쭤보게. 최근 일주일은 그녀의 커피를 마셨거든.”

 

추가로 오늘 커피는 저기 서 있는 경호원이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쩐지 조금 비꼬듯이 말이 나갔나 싶지만, 생각은 다른 곳으로 흘렀다. 달달한 게 좋다는 것이 사실 취향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쓴맛은 커피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많이 맛보았기 때문에 굳이 찾아 마시고 싶진 않았다. 또한 첫사랑이었던 그녀가 단것을 좋아했었으니까···. 핫초코 만들어달라는 것이 거의 입버릇과 같았다. 그에 물들어 자연스레 입맛도 닮았던 거겠지. 하지만 이런 외부적인 것도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장담하지 못하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핫초코를 먹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아련한 기억에 실풋 공허하게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어···. 그러면 퇴근은 언제 하세요?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제가 운전해 드려야죠. 집 주소랑 그런 것도 나중에 다 보내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아니면 그때 가서 불러주셔도···.”

“그러니까, 내 운전기사 노릇을 하겠다?”

 

한번 떠볼까.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괜스레 공허를 살기로 착각하도록 채웠다. 다시 가면과 같은 살기를 덧씌우자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다.

 

“돈이 그렇게 궁하나? 추가 노동을 요청할 정도로.”

“...”

 

순간, 이 공기가 내가 의도한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사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네. 경제적인 문제가 있나? 그래서 여기에 지원한건가?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귓가에서 파도 소리가 넘실대며 흘러왔다. 아, 이런. 또 사고쳤군. 사과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난 것 같은데. 마음대로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떠본 것에 걸린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고압적인 회장이 되어있었다. 지원해주겠다고 하면 도리어 열불을 내겠지. 진짜로 나의 기사가 되고 싶어서 말했을 리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그의 체면을 차려줄 수 있을지부터 생각해야했다.

 

“알 것 없네. 담당자는 따로 있으니.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그냥 말하게. 회사 자금에서 적당히 횡령해도 뭐라 하진 않아. 대신 말은 했으면 좋겠군. 얼마얼마 가져간다고.”

 

사실 담당자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야 담당은 사샤니까. 깍지를 낀 채 책상에 올려두었던 손을 가볍게 풀었다. 망했군. 조만간 카운슬링이라도 받으러 가야겠는데. 은근 방어기제가 심해서 자꾸 튀어나오는 걸 알면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나쁜 버릇이었다. 마음이 제법 아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쩌겠어. 의도한 거였고, 잘못 저질렀다. 멀리서 들리는 갈매기 소리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수습하려 하면 할수록 망한 판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방법밖에는 알지 못했다. 어느샌가 나의 분위기는 흩어진 지 이미 오래였고, 그저 괜찮은 척 웃고 있는 사내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네. 아예 여기서 잘 때도 있지. 자네가 신경 쓸 부분은 나의 회사 일정이지 사생활이 아니야.”

“아니, 물론 회장님 사생활이 저도 별로 궁금하진 않고요. 아랫사람은 윗사람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하잖아요? 회장님이 퇴근을 하셔야 제가 마무리를 하고 퇴근을 하죠. 별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야 그렇겠지. 내가 문제니까. 사과해야만 하는데 자꾸만 스스로 잘못하지 않은 것처럼 퇴로를 찾아 몸부림치는 스스로의 꼬라지가 역겨웠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려 노력하자 이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저지른 독설이 내게 돌아온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그냥 사과부터 하고 이어서 말하면 됐잖아? 이제와서 뒤늦게 사과를 한다고 받아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샤 또한 그렇겠지. 근무 첫날부터 험담하는 상사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입을 억지로 떼려 노력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했다. 이거라도 하지 않는다면, 회계 양의 노력이 전부 무색해지기 때문에. 내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럴 때 해결하는 방법이라며, 과거에 받았던 조언이 있었다. 나는 운을 떼었다.

 

“뭐, 회장님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일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하신다는 것은 새로 알게 되었군요. 그리고 돈이 궁한 건 맞지만 회장님의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하면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미안하네. 내가 실수를 했군. 자네 태도가 우리 회사 베테랑급과 비슷해서 잠시 망각을 했어. 변명할 기회를 주겠나.”

 

 

뭐라고 했더라. 첫 번째는 스스로 인정하기.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새로운 관계에 있어 신경질적이네. 아니, 어쩌면 그걸로 부족할지도 모르지.”

또 이런 일을 겪고 싶진 않았는데.

 

두 번째, 솔직해지기.

 

“나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내 표현하기 어려워. 내가 회의주의자여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그렇게 자랐을 뿐이라네.”

 

그 놈의 망할 애쉬 크로커스 탓에.

세 번째, 설명하기.

 

“변명 시간이니까 덧붙이자면, 내 주변엔 돈 주워 먹길 원하는 하이에나밖에 없어서. 자네 전임도 그러했거든. 말도 안 하고 횡령을 했지.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요점은, 무언가 알고 싶다면 천천히 하란 이야기야.”

자네와는 의도했든 아니든, 오래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네 번째, 다음을 기약하기.

 

“내가 아니어도 말해줄 사람은 많을 걸세. 일하다 보면 말이지.”

회계 양이라던가, 정보실장이라던가, 경호실장 등의 간부진들같이.

 

다섯 번째, 진심을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가지 마. 자네 자리는 여기잖나.”

 

만년필로 사샤의 책상을 가리켰다.

 

* * *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남은 서류까지 모두 처리하고 나니 절로 잡생각이 떠돌았다. 어제의 실수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그것은 고질병이었다. 인간 불신과 같은, 어쭙잖은 별난 감정 따윈 아니었다. 나 스스로 이런 현상이 자기방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절제된 생활은 크로커스 인더스트리라는 회사에 필수적이었다. 언제부턴가 현대의 재벌가들은 이상하게 꼬여있는 사람들만 남아있게 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부작용일지도 모르지. 흔히 말해 악독한 인간들 사이에서의 약육강식과 같았다. 나름 편두통에 비유할 수 있겠다. 레이문드 가문을 몰래 돕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하지만 그 아이의 몫까지 철저히 경계한다는 핑계로 회사를 집어먹은 건 사실이기 때문에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자신은 꽤 감성적인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 모든 것이 비단 레이문드 은행과의 유착 때문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전적으로 나의 야망 때문이었지. 덕분에 레이문드 회장이라는 우군을 얻었으니 만족했다고 생각했다. 효율을 위해 친근한 인간을 늘리는 건 이래서 좋다니까. 모든 것은 인과관계라서, 언젠가는 써먹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레이문드 회장이 자기 연인을 보여주었을 때는 내심 놀랐다. 아니. 그 사람 범죄자라며? 암살자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타겟이었다는데도 어떻게 사랑같은 걸 할 수 있는건데. 내가 우리 대자를 그렇게 잘못 키웠던가. 정작 나는 내가 믿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무기나 쥐여주는 인간인데. 그 증거로, 우리 회사 고위 간부들은 모두 내가 직접 제작한 맞춤 무기를 선물받곤 하니까. 의미는 저래도, 소속감도 느끼고 회사 애정도 키우고 여러모로 좋잖아. 곧 사샤도 저만의 무기를 가지게 되겠지. 디자인은 아직 고민 중이다만. 그것으로 언제든 나를 찌르고 쑤시고 쏠 수 있게 될 것이다. 수직관계에서 벗어난 강력한 아군은 서로의 약점을 틀어쥔 회장끼리의 서약이면 충분하니까. 크로커스와 레이문드같은 세력 말이다. 일종의, 세상의 축이 되어 시계를 돌려야 할 의무자들의 법칙인 셈이지. 이쪽 방면에서 쓸데없는 관계는 되려 독이 될 뿐이니까. 이런 노력으로 인해, 언제나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자연스럽게 세상이 굴러가는 법이다. 어느 하나가 평화롭다면 다른 곳은 전쟁통이어야 하는 아이러니함과 일맥상통한다 봐야겠지. 아마 내가 죽게 되면 인류를 기만한 죄로 가장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사회를 이따구로 만든 기득권의 죄.

괜스레 오늘 커피는 사샤에게 받아 마셔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가 들어와 인사와 동시에 일정을 읊었다. 쭈뼛 웃어주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허우대다. 아니면 내가 그러길 바라고 있던가.

 

“자네의 커피가 마시고 싶네.”

 

상쾌한 아침은 한 잔의 커피잔과 함께. 내심 일상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문장을 핑계로 대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품위고 자시고, 저자가 고용된 이상, 나에 관한 모든 함구령이 내려졌을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커피 원두를 재배해 오나? 하는 꼰대 대사도 내뱉어 보고. 가볍게 툴툴거리며 웃었다.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고, 회사에 새로 들어온 유입으로 뇌를 가득 채운다. 재미있었다. 사샤는 내가 뱉은 험담을 신경쓰고 있을까. 사과해야 할텐데. 어떡한담. 그 일 이후로 특별한 교류 없이 할 일만 하고, 모두 정시에 퇴근했기에 미처 괜찮냐고 물어보지 못했었지. 아직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인을 걱정한 적이 까마득하여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하는지도 내심 난처했다. 이런저런 공적인 말은 잘만 내뱉으면서도 사적으로 같은 말을 하려 하면 왜 이렇게 되는건지. 공과 사의 철저한 구분, 그중에서도 공이 삶의 주도권을 잡으면 벌어지는 일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역시 사교성 부족인가? 그거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결국 시간은 흐르고, 두 번째 커피를 부탁하며 작게 운을 떼었다.

 

“···화났나?”

“아뇨? 저 오늘 기분 좋은데요.”

 

뭐지? 빈말이라기에는 나를 바라보는 사샤의 눈총이 묘했다.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저 사람 왜 또 저러냐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선을 돌리곤 침묵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청승맞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거지. 방금까지 머리를 쥐어싸매며 고민하던 시간이 허탈해졌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걸까. 그냥 보이는 게 전부인가? 영국의 궁중암투와 같은 생활이 곧 미국의 자본암투일텐데 정말 이래도 되나. 다시 고개를 틀어 제 할 일을 하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겨우 이틀째 일하는 사람치고는 과하게 제대로인 행색. 처음부터 저를 위해 안배된 자리였다는 마냥 자연스러움에 괜히 심사가 비틀렸다. 아니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할까. 입에 맺힌 미소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아, 그래. 다행이군. 저번엔 미안했네.”

 

뭐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는군. 그가 결재가 끝난 서류를 들고 경호원이 서 있는 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떼지 않았다. 경호원들이랑은 언제 친해진거래. 내 명령도 가끔 개기는 녀석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참. 그가 떠나간 후 나와 눈이 마주친 호위 인력 한 명이 꾸벅 목례로 답하곤 본직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나의 비서님께 사교성을 좀 배워야하나 싶었다. 나도 슬슬 할 일을 해야지. 오늘까지 회사 내 일정이었지만 내일부터는 바빠질 예정이다. 뒤쪽에 연락도 넣어야 했고, 곧 무기 공급일이기도 했으니까. 마침 업무용 노트북으로 떠오른 어플을 켰다.

 

“원할 때 멋대로 요청 걸어오는건 여전하군.”

 

내가 말하자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빠르게 문장이 완성되어갔다. 정작 내가 타자 칠 공간은 마련되지 않은, 배려심 하나 없는 어플리케이션. 멋대로 도청해서 나의 대답을 들으면, 그에 대한 답변이 화면에 나타나는 식이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AI새끼. 인공지능 주제에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하기사, 가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봤다 싶으면 기계답지 않게 감상평을 줄줄 늘어놓는 녀석이니 말 다했지.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이 기계를 내가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통칭 박사, 라고 불리는 이 인공지능은 과거 진짜 미쳐버린 박사가 자기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옮겨 만들어졌다고 자칭한다. 실제로 많은 딥웹 이용자들이 실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다. 사실 진실이 어쨌든 이 자식이 이끄는 조직의 영향이 지대했기에 진위 여부는 상관없지만. 적어도 본인 주장은 그렇다.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를 뜯어보면 정작 박사라는 인간의 모든 기억을 데이터화해서 저장한 것뿐이지만. 때문에 성향이라던지 취향이라던지, 창조 이후에 접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목적은 어쩌다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범죄조직 창설로 이룬다는 건 모순 아니냐 얘기했더니, 네 인생이나 잘 살라고 되려 욕이나 한 바가지 들어먹었다. AI 주제에.

 

[소시오패스 회장님아. 새로 비서를 들였던데.]

“오,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이 많았어? 별로 원하진 않는데. 협력으론 부족하나?”

[천만에. 저번에 보내준 것은 잘 썼다. 다만 포의 사거리가 너무 길다. 새롭게 최정예를 구성했다. 그에 맞춘 근거리 무기를 원한다.]

“대체 포의 사거리랑 근거리 무기랑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준비해두지. 말하는 것 치곤 꽤나 요긴하게 쓰는 것 같던데 불만이었나? 무기는··· 애초에 그럴거면 직접 연락하라고 해라. 언제까지 네 쪽으로 접선할건지 원.”

[···모르지. 너도 모르듯 나도 모른다. 나는 그 정도로 세밀하게 설계되진 않았으니까.]

“지랄. 본인 한계는 잘 안다니 만족스럽군.”

[꽁냥꽁냥 잘 사는 사람 건들긴 싫어서.]

“그렇다고 나한테 이래? 애초에 마피아 담당은 레이문드 아니었나. 왜 크로커스한테 난리인지 모르겠군. 우리는 엄연히 보조에 불과하다. 최전선이 아니라고. 너도 알고 있잖나.”

[잔금 정산 완료했다.]

 

이 새끼가.

 

[그리고 너도 우리의 아군이란 것을 잊지 마라. 쓰레기 하나 보냈다. 미국 마피아 쪽으로 갔더군. 괜히 일 늘리기 싫어서 그쪽으로 보냈으니 알아서 처리해주길.]

“그래, 뭐··· 뭐? 야! 뭘 보내? 야!!”

본인 할 말 끝났다고 멋대로 꺼져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니터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박사 이 자식 다음에 만나면 뒤졌어. 은신처 소프트웨어에 커피라도 쏟고 올 것이다.

 

“회장님. 소포 왔어요.”

 

집무실의 방음이 완벽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사샤의 얼굴이 평안한 걸 보면 그랬다. 어쩌면 그러길 바라는 나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나는 한탄하며 모니터를 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엿을 준 거다. 미국 마피아 쪽으로 갔다며? 그걸 왜 나한테 보내는데? 내가 배후라고 누명쓰라고? 하여간 간악한 것들.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자기네들 위치 안 들키려고 날 이용해? 어이가 없었다. 몇십년 묵은 컴퓨터 주제에 크로커스 인더스트리를 제집 안방처럼 여기는 꼴에 두통이 절로 몰려왔다. 아무리 사업이라 해도, 우리가 시체 청소부인줄 아나. 무기 회사라고, 무기 회사! 그 AI, 박사가 만든 조직에 대 주는 물자만 해도 준 전쟁에 가까운 물량일텐데. 확 다 끊어버릴까. 커피론 부족하지. 역시 이런 소소한 복수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두고보자.

사실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무기가 소비되지 않는 현재, 크로커스 인더스트리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영향력과 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 탓이 크다. 여기저기 전쟁에 용병마냥 파견해서 조율한답시고 설치는 조직이 있으니까. 물론 대외적으로 드러날 수 없었기에 기밀이 우선이었고, 예외적인 경우로 몇 사람이 알고 있지만 그중 하나가 나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으로는 레이문드 회장, 러시아 정부와 미국 정부, 그리고 몇 주요 인사들과 국가 정부들이 있을까. 저 소포는 보나마나 러시아 쪽에서 보낸 거겠지. 러시아 측 무기 판매 큰손, 미하일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특수정보요원이 전해주어 알고 있었다. 표정을 굳힌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걸 사샤가 보는 앞에서 열어야 할까, 아니면 내보내야 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이미 소포를 눈앞에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뜯지 않냐고 반문하는 듯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시독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샤같은 비전문가는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불길함이었다. 태연한 척 소포를 뜯어 내용물을 보았다. 눈 대신 유리알이 박힌, 그나마 형체만 유지된 머리통이 곱게 쌓여 선물같이 놓여있었다. 한때 뒷세계를 주름잡던 미하엘, 그가 맞았다. 꼴 좋군. 암살자를 보내도 끈질기게 살아남더니 결국 모가지가 따였구만. 그런데 이걸 왜 내 편으로 보낸걸까. 수신인이 적힌 엽서를 확인했다. 역시나 내 명의가 아니었다.

 

「영광을 이루어낸 자. Dear, 조직.」

 

이걸 뭐 어떻게 처리하라고. 망할 박사 놈 따위랑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우리 회사 양식장은 타인의 시체 처리용이 아니었다. 내 거지. 사적인 용도. 그곳에 들어가는 수산화나트륨과 과염소산이 얼만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영광을 이루어낸 자라···.”

 

엽서의 뒷장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들고 있었다. 적힌 문구가 참 시적이군. 내심 어떠한 이유로 보냈는지는 알겠다만, 그냥 서면으로 전달해주면 될 일 아닌가. 사실 어떠한 의미론 또 다른 기회였다. 미하일이 죽은 이상, 그 빈자리를 노리는 틈새시장이 매우 활발하게 태동할 것이다. 과격한 일을 처리하기엔 적격이지. 갑자기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한결 편해지겠는데. 영광이긴 하군. 돼지 멱 하나 따고 이루기엔 과분할 정도야.”

 

지독하리만큼 싸늘해진 파장이 뇌를 훑고 지나간다. 이걸 들고 온 사샤를 보았다. 그리곤 그 얼굴을 보았다. 제가 들고 온 것의 정체를 깨닫곤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저 당황에서 그치다니, 이것도 재능의 영역인가. 생각해보니 면접 때 그랬지. 장난질엔 재미가 없다고. 어쩌나. 나는 꽤 즐기는 편이었다. 그마저도 이런 내 낙을 견딜 사람이 몇 없어, 여흥을 충분히 즐기지 못할 정도로. 어느 쪽에 신무기를 공급할지 감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의 비서에게, 소포의 뚜껑을 닫고 다시 잘 포장해 건네주며 살짝 웃었다.

 

“사샤 군. 아, 아니지. 우리 비서님, 그대로 다시 가져가서 회계 양에게 물고기 밥 가져왔다고 전하게.”

 

손에 든 엽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전을 기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흐렸다.

 

“지금부터 경호 제5팀의 목표를 실적 팀으로 옮긴다. 회계 양에게 인수인계는 전부 들었으니 할 수 있겠지? 경호실장에게 전달만 하면 되네, 비서님.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A와 B팀으로 나눈다. B팀의 편성 인원은 최정예 3명으로 한정한다. 나머지는 A팀으로. 마침 블랙리스트를 비울 때가 되었지, 흐음. 차라리 잘 됐어. B팀은 작전 청소부를 할당한다. A팀은 경호실장에게 맡기게나. 그리고 자네는 내일부터 최상층이 아닌 최하층으로 출퇴근하도록.”

 

본격적인 신경전이 벌어지기 앞서서, 후환이 될 자들부터 치우고 시작해야겠다. 일어나선 코트를 어깨에 걸친 후에 방을 나서려다 문득 돌아섰다. 사람 대가리를 처음 봤을텐데도 혼비백산하여 뛰쳐나가지 않는 기개가 놀랍군.

 

“비서, 오늘 이만 퇴근해도 좋다네. 나는 조금 더 있다 갈테니. 아, 조만간 멕시코로 갈 채비를 하게. 짧게 이틀이면 되니, 여행으로 쳐도 좋아.”

 

* * *

나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가, 비밀 통로를 열었다. 최하층은 탁한 공기로 가득했다. 내가 관리를 안 했던가? 그렇다기엔 탁자 구석의 푸른 장미 한 송이가 유독 시퍼랬다. 기술도 참 좋지. 불가능하다는 걸 가능하게 만든다는 건, 인간에게 있어서 축복일까 혹은 저주일까. 익숙하게 환기 시설을 가동했다. 먼지 봐라. 이 주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꼴이라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청소를 해야겠는데. 행거에 코트와 자켓을 걸고 익숙하게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공기가 대류하기 시작하며 먼지가 짙게 일어났다. 절로 콜록거리는 기침이 나왔지만, 물뿌리개와 걸레를 들고 손수 작업실을 정돈했다. 누가 뭐래도 집과 같은 곳이었으니 직접 이리 관리하는 게 편했다. 이러고 있다 보면 서류작업만 한다는 자신의 위치가 더욱 실감나기도 했다. 다 의미없는 짓거리지만. 장장 3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부를 둘러보니 제법 예전과 같은 태가 났다. 쌓인 먼지를 보니 대부분 금속성이었다. 저번에 그라인더로 깎아낸 금속이 정체된 공기에 머무르다 가라앉은 모양이지. 오늘은 더 많을 예정이니 내일도 꼬박 3시간을 청소에 할애할지 모를 일이다.

 

비서를 이리 불렀으니 청소시키면 되겠지. 결국 출퇴근할 나를 차로 태워다주는 담당자는 너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으니 자업자득이라 여기자. 앞쪽이 거울로 이루어진 무기장을 양쪽으로 밀어 쭉 열었다. 손수 만든 무기들이 지하의 백열등의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이미 출시된 것들, 또는 실용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 너무 유용해 미루어진 것, 또는 생산이 제한된 한정판 등등. 날붙이와 총들이 싸늘한 살심을 품에 담고 저를 구상한 자를 에워쌌다. 무엇이 나을까. 근거리 무기라. 어차피 내가 손수 작업한 무기를 실전에서 쓰는 사람은 S군 밖에 없었다. 단검을 가장 선호하는 일인군단의 명성에 맞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을테니 당연지사지. 박사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으니 떠오르는 대로 하면 될 것이다. 날은 날카롭되, 직선의 단조로움은 최대한 없앤다. 그 무지막지한 근력이면 일자든 곡선이든 관계없을 테니까. 그를 위한 구상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의 연애로 생각이 넘어갔다.

 

“진짜 납득이 가지 않는군.”

 

어떻게 자신을 위협하러 온 암살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걸 또 받아준 암살자, S군 또한. 덕분에 이쪽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지만, 이성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는 내 아군이 될 사람을 뽑아놓고도 믿지 못하는데. 오래전부터 작업해놓은 상대가 아니면 투정조차 부리기 어려운데 말이다.

주요 고객님과, 내가 대부로 있는 동료의 연애에 골머리 썩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 그냥 둘이 꽁냥대는 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망할 대자 자식은 연인과 싸우고 나면 꼭 사적인 연락을 해오기 일쑤였다. 공적인 일도 전화로 전하는 바람에 안 받을 수도 없거니와, 안 받으면 본사로 찾아오기까지 하면 누구여도 질려버리겠지. 허구한 날 개인 문자로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이딴 것만 그만 보냈으면 좋겠다. 그냥 하트모양 무기를 만들어버릴까. 정기 납품하는 가롯테의 손잡이에 블링블링한 하트 크리스탈이라도 박아주고 싶구만.

단검의 적당한 사용법을 속으로 정한 이후, 스케치를 시작했다. 컴퓨터로 작업하면 망할 박사가 바로 해킹해서 딴지를 걸어 올 테니까.

 

* * *

······언제 잠들었지. 깜빡 졸았나보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인공적인 백열등이 얼굴을 은은하게 비춘다. 밤새 구상한 스케치가 시야에 들어오자 정신이 들었다. 지금이 몇 시지. 아침 6시가 조금 지났나. 조금만 더 자도 괜찮을 성싶은데.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지? 아, 금요일이군.

비척비척 일어나 앞치마를 내려놓고 코트를 걸쳤다. 대충 고양이 세수로 세안을 마치고선, 물로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곤 엘리베이터를 탔다. 회계 양이 보면 뭐라고 하겠지만 이런 시간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조용히 최상층 집무실에 가서 출석 체크를 하곤, 다시 최하층으로 내려가야지. 갔다오는 길에 커피도 좀 타고. 서류도 몇 장, 아. 이젠 비서가 있군. 똥개훈련 시키는 것 같은데 괜찮겠지. 머리 아프게 서류랑 씨름하는 것보다 서류를 들고 나르는 게 뭔가 일하고 있단 품새를 내기엔 좋을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분명 6시가 맞을텐데. 불쑥 의심부터 드는 내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샤는 진심으로 나를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내뱉는 와중 사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출근하시는 거 못 봤는데, 여기서 주무신 건가요?”

“···깜빡 졸았더군. 자네야말로 여기서 자기라도 했나? 취침실을 원하면 마련해줄 수 있네만.”

“그냥 일찍 출근한건데요. 그나저나 그, 머리는 왜.”

“아, 그냥 대충 물로 쓸어넘겼네. 커피나 좀 타서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어서. 이참에 자네가 타게나.”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최하층으로 출근하라 하지 않았던가? 비서님은 제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에 놓곤 커피를 타서 내게 넘겼다. 제법 달았다.

 

“최하층으로 출근하라고 하셨는데, 그냥 주차장이던데요. 거기로 가는 게 맞나요?”

“맞네만, 미안하네.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야. 자네가 오는지도 몰랐으면. 이왕 만났으니 같이 가지. 가서 마시고 싶은 음료수가 있으면 알아서 챙겨오게. 오늘 하루 정도는 거기 박혀 있어야 할거야.”

 

사업 벌이기 전에 하는 사전 준비에 모든 게 달린 법이지. 슬쩍 미소지어주었더니 사샤의 표정이 볼만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네. 사샤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최하층의 버튼을 눌렀다.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히고, 코트 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회게 양의 보고대로라면 실전 투입을 감행해도 무리가 없다고 하던데.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데 역량을 전부 내지 않는 느낌이라고 하더군. 비서, 무기 밀수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작업실까지 걸어가며 나는 사샤에게 기본적인 지식을 때려넣었다. 어차피 이론과 실전은 천지차이니, 본인이 이해한 것과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원석은 다듬어 보석으로. 무기 회사가 밀수를 허용한다는 것도 대외적으론 비밀이니 조심하라고 웃었다. 축축한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코트 어깨를 적셨다.

 

“멕시코의 시날로아 카르텔에서 의뢰가 들어왔네. 3백 명을 무장시킬 자동화기, 2세대 이상의 야간투시경과 레이저 조종기 3백 세트, 도트사이트 3백 개, 경기관총 100정에 탄약 2만 발. 혹시 로켓도 필요하냐 물었더니 그것까진 됐다고 하더군. 미하일이 뒤진 영향이 커. 이런 무법지대도 전쟁을 준비하는 걸 보면 다른 쪽도 어지간하겠지. 요즘 제3세계가 말이 아니라 가격도 많이 올랐는데, 카르텔 쪽이 대단하다고 해야할까. 다음 달 이맘때 즈음까지 푸에르토 남쪽 부두로 들여와야 하네. 그리고 자네가 책임지고 해야 할 임무이기도 하지. 일정이 빠듯하지만 인수인계도 끝났다고 했고, 가격 협상할 일도 없을테니 괜찮을거야.”

 

사샤가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나는 멕시코에서 타코나 좀 먹고, 주요 인사들도 몇몇 만날 예정이다. 그 또한 나의 비서이니 같이 합석해야겠지만. 기껏해야 식사나 회의 정도일 거라며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그나마 쾌적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나는 말없이 진공청소기를 들어 사샤에게 건넸다. 일그러진 표정이 참으로 웃겼다.

쿡쿡 웃기도 잠시, 의자에 앉아 밤새 작업했던 스케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전투용 단검과 비슷하지만, 단면적이 좁으며 날의 가로가 미세하게 촘촘히 끊어져있는 악랄한 디자인. 팩스로 자료를 전송하곤 책상에 턱을 괴었다. 투덜대면서도 잘만 청소하는 제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옆으로 넘긴 흑발, 은은히 조명이 반사된다. 짙은 일자눈썹이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드러내게 만든다. 웃는 상이 잘 어울리는 미남형의 남자. 여러모로 자신과 대비된다 느꼈다. 본인의 아름다운 은백발은 뒤로 넘기기 무섭게 다시 앞으로 뻗치기에, 제대로 이마를 드러내기 쉽지 않으니까. 또한 자신의 홍채는 저리 맑지 않았다. 채도의 면에 있어, 누가 봐도 영롱하다고는 하지 못할 진녹색이었으니. 지금의 비서님 눈에는 자기가 왜 주차장에 내려와 청소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투의 불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그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밝게 빛나 보였다. 역시 잘생겼군. 새삼스레 인식하게 된 상대의 장점에 재미가 붙었다. 당장 머릿속에만 해도, 우리 비서님이 작정하고 러시아식 미인계를 펼친다면 홀라당 넘어갈 인간들이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휘둘리기 쉬울 것 같이 생겨선, 그가 의외로 강단있는 편임을 짧은 시간이었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형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제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나는 솔직한 인간을 대상으로 사기를 칠 만한 위인은 못 되니까. 늘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호도하여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뿐이지. 그리고 나는 30%의 진실과 70&의 예상 또한 진실로 판별하는 인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멕시코행은 제법 의미가 크다. 분명 진실만을 말했지만, 상대에서 나오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비서인 우리 사샤 군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게 물어봐도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정식으로 나의 라인에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정보 공개에 유의하라는 경호실장의 조언도 있었고.

 

우리의 무기를 사용할 세력은 시날로아 휘하 3대 무장 세력 중 하나, ‘로스 메히끌레스(Los Mexicles)’다. 새내기 비서가 처음 접하는 일로선 매우 중대한 건수라는 것은 알고 있다. 뭐, 여차하면 안 도와줄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우리를 함부로 대하기엔 붙잡힌 수족이 한둘이 아니니 웬만하면 협조하겠지. 갑자기 빡쳐서 비서를 꽥 죽이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 없었다. 죽으면 뭐, 어쩔 수 없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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