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시히 x 노랑언니

축전 백업

1차 by 휴일
1
0
0

“본 재판에서, 많은 죄업을 지어 무거운 업로 세상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 마나협회장. 프시히 레테에게 책임을 물어 그 대가로 사형에 준하는 형을 내리기로 판결한다.”

“….”

 

이미 알고있었다. 우리에게 이미 승리의 여신은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걸, 이름뿐인 낡은 왕관을 붙들고 있었다. 만들어낸 허상속의 질서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새파랗게 빛나던 달은 파편이 되어 사라지고, 속에 썩어고인 알아보기 힘든 덩어리들만 남아있었다. 화살이 심장을 뚫고 파고드는 힘은 강했다.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흐려지는 시야에 입을 뭐라 중얼거려보았지만, 실제로 성대를 타고 나온 소리는 금방 공기중에 흩어졌다. 말해야햐하는데, 늦게라도 좋으니까. 입에서 피를 뱉었다. 흰 가운에 검붉은 체액이 튀었다.

 

‘미안,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멀리서 달려오던 실루엣이 점점 어둠에 잠긴다. 너를 향한 내 마지막 눈도 어둠속에 영원히 감겼다. 언제쯤이었더라, 우리가 서로가 남이 되던 그날이. 그렇게 널 내치는게 아니었다. 란과 그 아이들도, 그리고 너도. 전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이 있다. 왜 내가 시작한 관계의 끝은 후회로 남을까. 어째서 나는..

 

‘고민 끝에 선택한 최선의 결과가 왜 이 모양인지.’

 

테쎄라의 마나협회장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세상을 지키고자 했던 최선이었다. 온 몸에 힘을 잃고,그대로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고있는 몸은 방향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질서는 혁명의 불길에 검게 재가 되었다.

 

마나가 지나는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감겨가는 정신을 붙잡으니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14만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인생이 이렇게 덧없는 것이었나. 창조주의 기적으로 태어난 자신이 작은 불씨로 스러진다는 사실을. 결국 자리를 내어주고 세대교체됨을 알고있었겠는가.

 

“안..돼..!!”

“.....”

 

벌을 집행받으러 나가는 걸음이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다. 굳은얼굴이지만 그만큼 홀가분해보이는 표정에서 불안을 가라앉혀주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올리브색 눈이 반으로 곱게 접힌다. 옅은 미소는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 같았다.

 

‘괜찮을거다, 걱정 마.’

 

 

 

모두가 일을 마치고 퇴근한 저녁. 협회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마나협회 연구 6동. 새벽녘 달빛이 은은하게 복도의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적막이 인기척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조용한 로비에, 건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빛을 받아 발걸음의 주인도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담주색의 머리카락, 조금 헐렁하게 입은 협회복. 이시간까지 여기에 있을 사람은 이사람을 제외하곤 거의 없질 않은가. 퇴근을 하는 와중에도 손에 들려있는 자료는 손을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늘자 목표치의 연구를 끝마친 프시히가 그의 개인공간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항상 보는 방의 하얀 천장. 아침부터 쏟아지는 회진에, 연구에. 또 강의까지 다니며 몰아치는 일정을 소화하는 프시히는 늘 켕했다. 깊은 한숨을 쉬며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동시의 프시히의 탁한 올리브빛 눈이 예민하던 긴장이 탁, 풀리듯 그의 날선 눈꼬리도 부드럽게 내려간다. 자신의 온전한 시간을 누리던 중, 단말기의 화면에 메시지 알림창이 뜬다.

 

‘올 연락이 더 남았나, 누구길래 이시간까지.’

‘아.’

[ 계속 사무실에 있길래, 늦게 끝날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갈게. 다음에 보자. ]

“….”

 

협회 안에서 이루어진 인연. 뜨겁게 타오르지 않지만 감정의 온도는 유지했다. 노란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나의 그녀. 쉬는 타임에 금방 끝나리라, 하고 기다리고있으란 답을 준다는게 이미 하루가 몇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미안해서 어쩌지, 잊었던 약속을 뒤늦게 생각해냈다. 몇백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몇 수십번의 권태기를 넘기고도 어떻게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단말기를 쥔 프시히의 얼굴에 복잡함이 담겼다. 매번 기다리는 것은 그녀였고, 직책에 따른 책임의 범위도 달랐다. 그렇다고 얼굴을 아예 못본다는 말도 아니었다. 단지, 일터에서 서로가 실장과 협회장이라는 공적으로 보는 시간이었으니까. 오랜 시간동안 살아온 탓인지 연애에 대해선 무심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의 교류나 둘만의 시간에 확인하는 사랑은 거의 없었다.

 

“...미안하다, 오늘 마무리할 실험이 남아있어서. 다음에 하자. 응?”

“프시....히..?”

 

얼마 전 일이었다. 일정을 끝내고 개인 사무공간에서 일하고 있던 프시히를 그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가 입고있던 흰 가운을 바닥으로 떨어졌고 정적속에 작은 소음이 일렁였다. 차가운 조그마한 손이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갔을 때, 프시히의 입에서 예상 밖 대답이 나온다. 오랜만에 생긴 시간에 용기를 내어 대담하게 했던 손짓은 다음으로 미룬다. 매번 같은 이유다. 실험이었다면 이번에는 회식, 다음에 회식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 같은 팀도 아니었기 떄문에 같은 직장에서 자주 만나기는 조금 힘들다. 프시히의 원체 성격에서도 질투를 크게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 입장에서는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을 법도 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해왔던 그런 것으로 식어버릴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뒤에서 프시히를 기다려줄 수있었다. 다만 그의 최근에는 유독 그의 여전한 사랑을 확인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 앉아 창밖에 보이는 사이좋은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푸른 초원을 닮은 녹안이 슬픈 표정으로 가라앉았다. 언제까지, 내가 네 뒤에서 기다려야하는걸까. 네가 맡은 질서를 지키는 일. 책임을 가지고 임하는 것들이 마무리 지어지면 그사람도 나를 돌아봐줄까? 질투나 집착도 거의 없는 프시히의 방식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쉽다면 방치에 가까운 애정이 프시히의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의자에 다시 앉아 한숨을 깊게 쉬었다.

 

“...주변사람을 조금이라도 돌아보면 좋을텐데.”

 

네가 건넨 커피한잔에 서운한 마음이 녹아버린다. 그에게 못당해내는 자신이 밉지만 마음이 누구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기다리는 사람만 지치게 된다. 아슬아슬하게 두사람 사이를 이어진 붉은 실을 끊어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 연인에게는 그녀가 먼저 가위로 잘라냈다. 이별에 이유는 없다. 당사자인 프시히도 알고 있다. 테쎄라와 질서라는 큰 부담감을 짊어진 채 걸어가는 자신이. 공적인 일이라 어쩔 수 없다며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다는 것을. 헤어짐은 일상에 갑자기 일어난 특별한 사건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몇밤을 고민하던 그녀가, 드디어 마음을 먹고 이별을 말하고 프시히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특별한 사건은없었다. 카신과 관련된 일 때문에 평소보다 더 바빠 예민해진 날이었다.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고 조금만 건드려도 히스테리를 부릴 얼굴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건지, 눈이 뻑뻑하고, 결려오는 어깨의 뻐근함을 인지할 정도까지 와서야 피곤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겼다. 키보드를 현란하게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배경음처럼 울려퍼지던 소리가 멈추고 프시히의 노란 눈이 잊고있던 하늘을 그제서야 바라보았다.

 

“... 밤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한심하군.”

 

‘수신메세지(3)’

 

오늘따라 자신이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없다. 다른떄였다면 부재중 전화, 문자도 10통 이상씩이나 됐을텐데말이다. 별 일이 다있다는 생각으로 통화목록부터 확인했다. 각 실 실장과 여하단장, 명예의 트럼프 수장. 이들 말고도 티에르에게도 한통정도가 와있다. 늦기 전에 빠른 시일 안에 메신저나 연락을 통해 일의 진척을 확인해야한다는 압박감에 프시히의 눈은 다시 피로감에 절었다. 망할 놈들. 나는 언제 쉬라고. 속으로 욕짓거리를 중얼거리며 문자메세지 상단바를 클릭했다.

 

1실 실장. 저번에 했던 연락 이후로 오랜만이다. 무심한 눈으로 심각한 내용은 없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스크로를 내려 내용을 확인했다. 심드렁 하던 올리브빛 눈이 조금의 당혹감과 씁쓸함으로 변했다.

 

‘오늘도 일하고 있어서 결국 부득이하게 문자로 말하네.’

‘미안, 프시히. 우리 그만 만나.’

‘기다린다고 했던 나지만, 이대로 가다간 내가 지치고 힘들 것 같아. 미안.’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한게라는 것이 있고 여기까지가 그녀의 인내심의 마지막이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왜” 라는 물음에 가득찼다. 자신의 무심함을 너무도 잘 알고있음에도 그녀를 한번이라도 돌아봤으면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움이 프시히의 감정을 좀먹고 들어온다. 흔들리는 정신머리를 붙잡고, 동요없이 답장하기 위해 단말기 자판 화면으로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그래, 내가 좀 더 신경써야했는데. 계속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원한다면 휴가 몇..’

 

내가 이사람을 위해서 휴가를 내어줄 수나 있을까. 뒷말을 쓰다가 구질구질해 보인다는 생각이 미치자, 쓰다 만 문장을 다시 지웠다. 귀찮게 다른 문제 일으키지 말자, 쟤 나름대로 힘들거아니냐.

 

‘그래, 내가 좀 더 신경써야했는데. 미안하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마지막 말은 누구나 쉽게 이별멘트로 하는 말이니까. 자신이 보기에 깔끔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답장을 했다. 그대로 의자 등받이 뒤로 쓰러져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더 피로감을 느낀 눈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중얼거린다. 냉정해지자, 이건 단지 지나가는 일상중 하나일 뿐이야. 정신차리자 프시히 레테. 언제부터인지 작은 빗소리가 창밖으로부터 귓가를 거슬렸다. 조용한 사무실인 탓에 더 크게 울려퍼지는 소음은 괜소래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예민한 청각을 긁는 빗소리는 아무래도 그가 잠들기 전 까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오늘 자기는 글러먹었네.”

 

...

“요즘 수아 잘 안보이네, 너희 무슨 일 있어?”

“.......”

“아….너희 헤어졌어.?‘

“내가 그것까지 설명할 이유는 없어보이는데.”

“미안해...”

“…됐다. 네가 모를 만도 하지.”

 

무심하게 뱉은말에 체르타의 심기를 껄그럽게 만들었다. 수아와 체르타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는데도 별 감흥이 없다. 푸른색과 은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속을 모르겠는 여하단장은 별 상관없다는 듯 다른것에 신경을 돌렸다. 책상에 있는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따뜻하게 샷을내린 음료의 김에서 김이 올라온다. 차가운 책상위에서 온기를 나누어주는 따뜻한 음료를 보며 생각했다. 뜨거운 커피도 시간이 지나면 미지근해지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그런게 아닐까. 한순가 타오르던 사랑도 이렇게 식을 수가 있다고. 늘 옆에있다는게 당연해서, 계속 내 곁에 있어줄거라고 생각했던 건 내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옆에 없어도 습관처럼 너를 부른 뒤 대답없는 정적에 네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자각했다. 그뿐만아니라 전화를 하기 직전에 손가락을 멈추는 일은 습관이 됐다. 사소한 일 조차 너를 거치지 않는 것들이 없었고, 그만큼 내 일상에 네가 많이 차지했으리라. 지금도 사적인 용건을 문자로 전송하기 직전에 알아채고있지 않은가. 깊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불현 듯 머릿속이 시커멓게 엉키면서 복잡해졌다.

 

“하아…. 이제 아니잖냐, 프시히 레테..”

 

사적인 관계로서 끝은 다시 공적인 일로 되돌아갔다. 처음엔 일상에 변화를 느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너가 일상적으로 내게 했던 행동들이 자꾸만 옛 생각을 하게했고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자주 업무일정에 늦어 나를 챙겨주던 너는 없었고, 귀찮은 작은 일을 대신 부탁하던 것은 이제 온전한 내 잡무가 됐다. 항상 정신이 없고 빠트리는것이 많던 내 주변에서 너의 빈자리가 확실하게 나타났다. 정리를 해주던 너가 없으니 사무실을 들어가면 책상은 지저분했다. 아침마다 아메리카노를 건네주며 인사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예전처럼 제 할일을 하고있는 한 부서의 실장. 딱 거기까지였다. 내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난 네 모습이 낯설다.

 

‘프시히, 다음에 회의있어.’

‘좀 치우고 살지~’

‘커피 한잔 해, 협회장이라고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그사람의 일상적인 한마디가 떠올라 흔적으로 남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던 너는 이제 없다. 오래산 경력이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이상한 감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익숙한 환경이 변하는 현상은 변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그의 성향과도 맞닿아있었으리라. 그 점이 상황 뿐만 아니라 관계의 변화도 해당이 됐을지도 모른다. 묵혀둔 감정은 서서히 틈새로 퍼져나왔다. 어쩌면 프시히 자신이 깨닫지 못한 감정이 정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별통보를 당한 다음날도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금발머리를 단정하게 묵은 그녀가 보였다. 아는척을 하려다가 껄끄러운 상황이 싫어 지나쳤다. 이젠 다 끝난 관계니까, 뭐하러 굳이 사담을 해. 무심하게 지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다른 실장과 하하호호 웃고있는 대화가 들려왔다. 고개 너머 그녀가 웃고있다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지않아도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익숙하니까. 나와 상관 없는 일이다. 이성을 되찾으며 귓등으로 그들끼리 대화를 넘겼다. 묘하게 변한 상황이, 관계가. 예민한 자신의 신경을 긁고있는 것 뿐이라고 자기세뇌를 하며 협회장실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그러니까 협회장님, 우리 마나협회 기밀자료가..”

“너희는 보안 관리도 안하고 지금까지...!!!”

“...죄송합니다..”

“나가, 꼴도 보기 싫다. 아니, 내가 직접 해고하기 전에 당장 나가.”

“…네.”

 

‘달칵’

 

“수아 헤 벤젤….”

내가 카신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줬다는 걸 모르겠지. 벤젤 남매와 적이 되기 싫어서. 반이 개입하면 무조건 우리가 진다. 수아가 테쎄라에게 위협이 될 기밀문서를 모두 유출했다. 카신마나 추적기로 이틀을 꼬박 붙잡았던 때였다.내가 모르는 사이 기밀문서를 보관한 연구실에 출입해 usb로 복사한 흔적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커뮤니티에는 내 정체를 까발린 게시글이 올라왔고 대중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또한 측근이었던 자들 한명씩 부상을 입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어떻게 된 일이냐, 너를 공격한 자는 누구였지?”

“면몫이 없습니다.. 복면을 쓰고있어서 검은머리 남자아이와 한 여성 밖에는..”

“…알았어, 다들 가 봐.”

 

지금 상황에서 내가 무너지면 협회도 무너진다. 나는 테쎄라이자, 마나협회장이니까. 내 정체가 익명 계시판에 폭로되고, 400년 전 사건이 대중에게 다시 까발려졌다. 당시에 올라온 글을 보자마자, 사고가 정지했다. 머릿속이 지하 끝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머리 안에 울려퍼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이대로 뭍히기를 기다려야하나,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하는가. 그럼 누구에게? 침착을 유지하던 손이 바르르 떨려온다. 여기서 대중 여론이 안좋아져 테쎄라에게 악영향이 가면..그리고 이 협회도 혼란이 일 것이다.

 

“….안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예상을 안한건 아니지만.... ....체르타.”

 

어두운 사무실에서 인기척도 없이 조용히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았다. 400년전 마나협회가 저지른 잘못... 아직도 참혹한 그 장면이 어른거린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왔다. 멜리 머리카락에 집착한 나머지 엔피스테에 문제가 생겨 연구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얼마나 긴 시간동안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눈을 떳을 때는 이른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

 

제정신을 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날 잠에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서야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수를 했다. 찬물로 얼굴을 적시니 그제서야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이대로는 안된다. 나라도 정신 차려서 이 상황을 타개해야한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어날 상황에 대비를 해야하니까. 테쎄라의 미래를 생각하니 전날부터 덮쳐온 불안과 초조함이 싹 가셨다.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옷에 뭍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외부에서는 카신과의 전투로 내 체력또한 타격이 컸다. 설상가상 여하단장이 쓰러져 엔피스테에 문제가 생겼다는 일이 벌어졌다. 협회의 내부에 신경을 쓰느라, 체르타의 움직임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상태확인차 들린 병실에 갔지만, 돌아오는 것은 알 수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뭐?”

“어차피 너도 나한테 할말 많은거 아니었냐?”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되잖아. 지금 양심이 있는거니?”

프시히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차가운 눈으로 금발머리 여성을 바라본다. 최근 협회기밀 유출건으로 예민해진 그가 애꿏은 그녀를 의심해서다. 그녀는 프시히와 교제할 당시 그가 알고있는 기밀들을 다룰 때 옆에 있었다. 그것도 늘. 그를 보조하는 일도 자주했았기 떄문이에 의심을 쉽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동안 협회장과 만났으니 테쎄라에게 위협이 되는 정보들을 알 법 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프시히의 무심으로 한번 상처를 받은 전적이 있다. 마지막은 프시히가 억측한 심증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내린 논리였다. 일그러진 여성의 눈이 어이없다는 감정으로 물들어간다.

 

“프시히.. 너는 진짜 마지막까지 최악으로 남는구나.”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지. 아니라면 유감이다. ...아니라니 됐어, 이만 가 봐.”

 

 

반란의 물길은 협회도 당해내지못했다. 심지어 마나를 다룸에 있어서 최고 엘리트. 수아 헤 벤젤이 반란무리에 가담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곳은 마나협회였고, 프시히는 후방에서 그들을 지휘했다. 아무리 국내 최고의 기관이라고 해도 실전전투 감각이 없는 연구원들이 많았다. 책상에 앉아 실험과 연구만 할줄 알았던 자들이 싸울줄 알겠는가. 창조주에게 반기를 든 세력들은 하나둘씩 협회를 공격했다. 연구자료들과 문서들이 사무실에서 온통 휘날렸다. 밤마다 울리는 보안경보가 귀를 시끄럽게 울려댔고, 예민해진 밤잠으로 신경은 예민해졌다. 눈 밑은 꺼멓게 그림자가 생겨 퀭한 몰골이 초라하게 거울속을 비추고있었다. 외부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을 때, 이상하리만큼 고요했고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 끝에 퓽겨왔다. 1실부터 마지막 연구실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협회를 지키겠다고 했던 자들은 이미 끌려간 듯이 하나같이 그들의 연구실은 여러명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종이와 각종 서류들이 널부러져있었다. 몇몇은 몸싸움을 했는지 비커나 플라스크가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것들은.....”

 

다음 타겟은 내가 될 것이다. 협회장인 나를 먼저 쳐도 됐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서서히 내 숨을 죄어오기 위해서겠지. 깨진 유리조각을 주우니 날카로운 단면에 손가락이 베여 선홍색 피가 흘러나온다. 윽. 유리조각 상처는 물리적인 힘이었기 때문에, 로드 체질인 나조차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해야만한다. 자동문을 열고 건물밖으로 나갔다. 눈 앞에 무장을 하고 손에서 오오라를 내뿜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둘러싸는 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맞지? 사람 죽여놓고 뻔뻔하게 실장 행세를 하고다니던.”

“…그건 너희들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변명은 죽기전에 해라, 무릎꿇고 목숨을 구걸할 준비나 하시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러방향에서 복면쓴 반란군들이 덤벼들었다. 평소같으면 마나를 쓰지 않고도 티에르의 마나를 담아 광범위 공격을 날렸을 것이다. 지금은 총무와 연락이 되지 않고 연이어 밤을 샌 상태라 몸이 무거웠다. 힘겹게 직접 마나를 구현해 한 부대를 물리치면, 다른 정예부대가 나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두 번째 기적, 나는 192가지의 마나를 구현할 수 있다. 고유마나가 없는 대신에 마법이 통하지 않는 체질을 기적 부여받았다. 평범한 너희들에게 쉽게 당할 리가 없다.

처음에는 쉽게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한 무리가 오면 쳐내고, 또 다른 무리가 덤비면 다시 물리치고…. 그렇게 몇수십번 전투로 체력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있었다. 또렸했던 정신이 점점 희미해졌고 시야에는 적들이 겹쳐보인다. 한명,두명… 한 다섯 명 쯤 쓰러뜨렸을 때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 앞은 온통 까만 것으로 온통 뒤덮힌 뒤, 정신을 잃었다.

 

‘이게 나의 마지막입니까…. 창조주여.’

 

 

“...이상, 재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실장님...!!”

“....프시..”

 

히아센 벨르네피아와 카신이 주축으로 일어난 혁명은 성공했다. 자신들의 비리와 욕심으로 타락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처리도 진행되었다. 오늘은 그 재판이 열리는 그날이었다. 옆에서 연행하는 자들이 쇠고랑을 찬 내 팔을끌고 일어선다. 테쎄라의 예의였던걸까. 강제로 일으키지는 않았다. 웅성거리는 공판안에서 내 옆 두사람은 집행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일어났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테쎄라로서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내가 맡은 소명이자 책임이니까. 후회는…. 더이상 긴말하지 않을게. 할 일 해라.”

“...그래.”

 

집행의 낫이 기분나쁜 오로라를 만들어내며 형체를 드러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사형을 할 때 쓴다던 무기다. 기억을 빼앗긴 채 마르니에서 살아가는 형벌은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멸을 하면 집행자의 기억은 잊는다고 했던가. 서류상 가족관계라도 동생의 기억애서 내 존재가 사라진다. 조용히 낮게 가라앉은 푸르고 흰 눈과함께 칼날이 춤을 춘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네가 내 마법, 기억조차 멸해 없앴으니까. 초라했던 마나 협회장으로서 생애는 끝이 났다.

 

-

 

“저기… 선생님,괜찮으세요?”

“...아, 누가 왔습니까.”

“네, 보호자님 오셨어요.”

“아…”

 

회색빛 칙칙한 벽지가 있는 방. 휠체어로 몸을 의지하고 있는 한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관리자의 부름에 느리게 뒤를 돌아본다. 채도낮은 다홍색 머리칼. 공허하지만 연한 올리브빛을 가진 그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프시히다. 창조주의 두 번째 자녀이자 테쎄라의 마마나협회장 헤인. 창조주의 뜻을 곡해해석해 세상을 어지럽힌 죄목으로 벌을 받았다. 모두가 그가 이세상에서 사라질거라고 믿었다. 예상외로 여하단장의 판단은 달랐다. 끝까지 살인을 하고싶지 않아서였다. 고민 끝에 그는 프시히를 포함한 트리아들의 기억을 멸한 뒤, 마르니카르타로 인적 드문 곳에 살게 하였다. 처음에는 기억을 잃은 그들은 방황에 빠졌으나, 주변 마르니들의 고운 심성 덕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프시히는 한 보호시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프시히, 산책도 나가고 해야 기운이 나지.”

“.괜찮은데.”

“네 몸을 생각해주면 안될까.”

“...알았다니까.”

 

여전히 빛나는 금발은 가진 2실 실장이라 불리우던 여인. 마지막까지 그를 잊지 않았던 그녀는 프시히를 찾아 나섰고 끝내 재회했다. 동정이라 생각해도 좋으니 그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로제로카르타의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는 처음에 금발머리의 그녀를 경계했다. 해도 그에게는 정이라는 것이 기억속에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서히 경계심을 풀었고 서로가 익숙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후 둘은 남은 여생을 함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