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나그네의 길

6월 4주차

by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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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 시간이 지나, 영원을 건너. 노래하던 여신의 분노도 사라지고 열화와 같은 세계의 분노가 사그라들며 인류의 태조가 신에게 번제를 바친 땅도 의미를 퇴색한 시점. 신을 노래하는 찬가는 여흥, 세계를 그리던 성화는 유흥,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는 유희가 되어가는 어떠한 시대에.

방황하는 나그네가 정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나그네의 정체는 이름 없는 신, 이름을 상실한 시대에 걸맞는 이름 없는 신이다.

그 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제는 지난한 이야기이다.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은 많았어도 신의 근원을 궁금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의 이들이 ‘우리의 영광된 신’ 이라 말하며 칭송하고 숭배하고 찬양하지만, 정작 그 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그리고 너희에게 어떻게 도래하였는지 알고자 하는 이들은 없다.

그들에게 신이란 어떠한 수단, 어떠한 결핍, 어떠한 대상이므로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할 뿐, 신이라는 존재가 딱히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 그러니 보라, 신이라는 이름이 천박한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을 시대에서도 너희는 다양한 존재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숭배한다. 설령 그 존재가 너희의 살을 깎아 먹는 짓이라 할지라도, 삶에 흥취를 더해주는 것이라면 그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슬퍼하고, 분노하고, 경멸하리라 짐작하는 것도 너희의 특권이다. 특히 나그네에게는 더 그러하다. 그는 이제 존재할 이유가 없음에도 존재하는 방랑자, 눈물짓고 웃음짓는 관측자, 바라보는 방관자. 기어이 이 세계에서 긴긴 걸음을 걸어가는 여행자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사랑. 너희가 우리의 사랑이라 말하는 것에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사랑이 나그네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여정의 시작이라고 꼽을 법한 것을 말하자면 무수히 많으나, 마침내 결정하고 만 이야기를 옛 방식대로 말하자면 멸망의 시대에 운명의 틀이 짜내려간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있었다. 갈래가 이리저리, 갈팡질팡. 끝을 알 수 없지만 끝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영원히, 영광의 별로서 미래를 예측하는 눈마저 가려버리고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떠나던지, 아니면 지리멸렬하더라도 이 세계의 끝에 종속될 것인지.

수많은 이들이 전자를 골랐다. 이미 많은 이들은 사랑에 실망했다. 세계를 만든 것은 우리지만 그 세계를 존속하는 것은 너희. 권능을 베푸는 것은 우리지만 그것을 바라는 것은 너희. 우리는 너희의 기원에 탄복하여 사랑을 했다. 굳이 할 이유 없는 것을 했다. 남아도 되지 않을 이야기에 남았다. 우리의 존재 의의가, 어느새 너희의 바램에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남았다. 나그네만은 남았다. 대단한 의미나,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록이 없으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기록이 없으면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며, 적어내려갈 이야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바로 너희를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신화와, 신성과, 신이 사라지고. 필경 인간의 시대에.

이름없는 신이 이름을 잃어버린 신들을 기록하며 망각을 유예하고 있다.

인간의 멸망을 함께 유예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신성을, 이름을 빌린 신앙으로 연명하며.

모든 인간의 세계가 우리와 같아질 때, 그 때에서야 완전히 망각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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