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이름을 부르노라면

6월 3주차

by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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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진실되게 말하건데.

너와 사랑하는 것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서녘이 서서히 밝아온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으로 거칠게 헤집고, 거칠어친 눈가를 주무른다.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나 덮은 하관을 더듬는다. 거울에 비추지 않아도 퍽 유추하기 쉬운 감각의 꼬락서니가 바로 내 작태다. 이 모습을 누구라도 본다면 최대한 좋은 평을 내려주어 봤자 산적보다 좋은 것은 없겠지. 그런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며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다가 급속도로 가라앉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인다.

오늘은 나의 4백번 째 실패가 있는 날, 4백번의 도전이 있던 날, 시간의 역행을 시도한 날, 우리의 결혼기념일.

그리고 네가 죽은 날이다.

이 좋은 날, 한 철 여름 날. 해는 높다랗게 파란 하늘을 비추고 그린 듯한 구름이 천장을 장식 할 때, 이 날보다 아름다운 네가 허무하게 죽어버린 날이다.

왜 하필 너여야 했을까? 이 세상에서 왜 네가 사라져야 했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너의 죽음은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갑자기 들이친 재앙이라서, 너의 죽음을 붙들고 아무에게나 하소연을 하고 싶지만 네 죽음의 이유마저 누구보다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서. 나는 차마 죽음의 이유에 고함을 지르지 못하고 너를 끌어안아 침잠하는 것을 한참 선택했더랜다.

빛이 들지 않아 가라앉은 심해에 먹먹한 나의 영혼을 전시한 기분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를 금방이라도 뒤따라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살아가야 했다. 너는 살아서 웃음 짓는 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목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세월, 천재라고 칭송받던 두뇌의 값이 알량했다. 이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자, 나에게는 한가지 황당한 일이 기어코 떠오르게 된 것이다.

타임머신을 만들자.

시간을 되돌리자.

그리고 너를 다시 만나자.

이 의견을 알리자 마자 주변의 사람들은 반으로 갈렸다. 단단히 미쳤다며 나에게 욕을 하고 내 곁을 떠나가는 쪽, 그게 현실로 가능할 것 같냐며 나를 걱정하는 쪽. 사실 어느쪽이든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상처의 고통이 너무 커서인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발로 널려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왜 그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그런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데 왜 시도하는 것인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는 이유가 따르는 법인데,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정말이지, 나답지 않다고.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빈약한 이성을 끌어모아 생각해보건데, 나의 선택은 지극히 불합리하며 그들의 말이 전부 맞았다. 맞다, 이건 미치광이의 발악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의 길을 가겠다고 공중걷기를 시도하는 오만한 도전에 불과했다. 선구자들이 없는 길은 이미 그 길에서 추락해 영영 사라졌기 때문이며, 관측하지 못하는 길은 관측 이후에 시도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들은 알까? 그리고 너는 알까? 나에게는 네가 없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런 무모한 길을 시도하거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제 네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몰라서, 네가 곁에 없는 날을 상상할 수 없어서, 네가 없이 멀쩡히 살아가는 길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멀쩡히 걸어갈 수 없어서…

필경, 나에게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보다 네가 없는 것이 더욱 존재해서는 아니될, 내가 한번도 발을 딛지 않은 미지의 길인 것이다.

내가 정녕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면, 나는 너와 만나지 말아야 했다. 너를 사랑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이미 너는 나의 빛이다. 나의 이정표다. 내 갈 곳 없는 영혼을 잡아주는 안식처이다. 그것이 한 순간에 송두리 체 파괴되었으니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든, 그것을 재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든 크게 달라질 일은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나는, 제아무리 황당하고 빛이 비추지 않는 길이라도,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형체 없는 길이라도 기어코 가야한다는 소리다.

정말로, 아주 정말로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고, 나에게 남은 것이 아무도 없을 때는, 그 때에야 너의 유언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부디 용서해줘, 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지 않는 법을 몰라서, 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만약, 내가 그 때로 돌아간다면 최선의 선택은 어쩌면 너를 만나지 않는 법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결국에는 너를 다시 만나서, 숨통을 틔우고, 또 다시 후회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의 숨을 만끽하겠지.

만약, 내가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체념하고 살아가볼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볼게. 힘겹더라도, 힘들더라도 살아가볼게.

네가 바랜 유언의 뜻대로, 웃으면서 살아가볼게.

그러니, 우리가 언젠가 재회할 날.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너와의 이별을 되돌릴 수 없고, 계속해서 너 없이 혼자 가야하는 길을 완주하고 난 후에,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을 걸어온 후에.

이 모든 생의 끝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그리고 서로 꼬옥 끌어안자. 다시는 길을 헤매이지 않도록. 우리 서로 평생 함께할 수 있도록. 영원의 이름에 우리의 영혼을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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