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엔드 히어로즈

[야고라이] 벚꽃잎 팔랑팔랑 흩날릴 때

꽃그늘에서 웃던 추억의 형상에

- 벚꽃에 휩쓸려갈뻔한 야고의 이야기


다른 녀석들은 벚꽃이라던가 도시락이라던가 벌레라던가에 흥이 오른 것 같았지만, 야고는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장소를 찾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했다고 생각했고, 그냥 자고 싶었다. 마침 괜찮은 꽃그늘에 돗자리가 펼쳐져 있었기에, 야고는 벚꽃을 보는 대신 홀로 몸을 누이고 그대로 잠들었다.

“일어나, 야고.”

…그런 야고의 잠을 깨운 건,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신경 쓰지 않고 더 자고자 했지만, 완고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야고가 눈가리개로 쓰고 있던 헤어밴드를 그대로 위로 올려 버렸다. 닫은 눈꺼풀 너머로 빛이 느껴져서, 야고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을 풍경을 잠으로 놓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그 말을 무시하고 헤어밴드를 내리려 했지만, 천이 아닌 머리카락과 피부의 감촉만이 손끝에 닿았다. 설마 아예 벗겨 버린 건가. 야고를 상대로는 지나칠 정도로 거리낌 없는 녀석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건 좀 열 받는다.

야고는 결국 눈을 떴다. 예상한 대로, 제 쪽으로 살짝 몸을 숙인 라이죠가 야고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에 익은 흰 가쿠란에 벚꽃잎이 몇 장인가 떨어져 있다.

“……?”

“드디어 일어난 건가? 정말이지 너는….”

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힌 라이죠가 푹 한숨을 내쉰다. 몸짓 하나하나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건 여전하다.

그래, 평소의 라이죠와 다를 것 하나 없다. 귀찮게 잔소리를 하며 야고에게 참견하는 것도, 언제나 그 푸른색으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전부 야고가 아는 라이죠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대체 뭐야.

“네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라는 건 알지만, 이 풍경이 장관이라는 것 정도는 너도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편 라이죠가, 양팔을 벌리고 웃었다. 머리카락에, 가쿠란에 붙어 있던 벚꽃잎이 그 움직임에 따라 슬쩍 떨어져 내렸다.

그 말대로, 벚꽃은 아까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만발해 있다. 눈이 피곤할 정도로 분홍색이 가득해서, 그 사이에 있는 라이죠가 도드라져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일까, 야고를 바라보는 푸른 두 눈의 색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비쳤다. 

“어때, 굉장하지 않아?”

강한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벚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흩날리는 벚꽃이 야고의 시야를 덮으며, 이쪽을 보며 웃는 라이죠의 모습을 가린다. 눈앞을 가득 채운 분홍의 사이로, 하얀 손이 손짓하는 것만이 언뜻 보였다.

“이쪽이다, 야고.”

푸른빛이 훌쩍 몸을 돌린 것을 알아채고, 야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몸에 쌓여 있던 벚꽃잎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면 제 주변에도 벚꽃잎이 잔뜩 쌓여 있다. 여전히 옷에 달라붙은 것을 툭툭 털어내며, 야고는 라이죠가 있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눈이 두껍게 쌓인 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벚꽃잎에 푹푹 가라앉는 게 방해가 돼서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라이죠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가뿐한 움직임으로 멀어져간다.

바람은 멈추지 않고, 흩날리는 벚꽃잎은 계속 시야를 방해한다. 이렇게나 우수수 쏟아지고 있는데도, 머리 위의 벚꽃은 여전히 하늘을 가릴 정도로 풍성하다. 분홍으로 가득한 사방에서, 홀로 분홍색이 아닌 것이 드문드문 그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다가가고 있는데도 가까워지질 않는다.

발을 막는 벚꽃잎을 차듯이 발을 내디디며, 야고는 라이죠를 따라갔다. 뒤쫓아가는 듯한 감각이 불쾌하지만, 발을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발을 옮기니, 어느 순간 바람이 멈추었다. 흩날리던 벚꽃잎은 더는 시야를 가리지 않게 되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활짝 핀 벚나무로 가득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발한 벚꽃과, 흙이 보이지 않을 만치 바닥에 담뿍 쌓인 벚꽃잎. 라이죠는 이게 장관이라고 했지만, 야고는 그저 눈이 이상해질 것 같다 느낄 뿐이다. 그 기묘한 풍경의 중앙에는, 이쪽에 등을 보인 채로 걷는 라이죠가 있다. 분명 야고가 그렇듯이 그 또한 쌓인 벚꽃잎을 헤치며 걷고 있을 텐데도, 그 걸음에서는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야고!!!”

걸음을 멈춘 라이죠가 저를 돌아본다.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더니, 곧 소리를 내어 웃는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야고는 계속 걸음을 옮긴다. 거리가 점차 좁혀져서, 야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봐, 야고. 이렇게나 아름다워.”

전혀 아름답지 않아. 야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같은 색을 계속 본 탓인지 어질어질하고 기분이 나쁠 뿐이다. 머리 위도, 발밑도 온통 분홍색이다. 거부감마저 느껴질 정도의 분홍, 분홍, 분홍. 그리고 홀로 분홍색이 아닌 것.

목덜미를 살짝 덮을 정도로 기른 어두운 머리카락에, 하얀 가쿠란. 이쪽을 향한 또렷하게 푸른 두 눈.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라이죠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또다시 등을 보였다. 한순간에 거리가 벌어져, 야고는 순간 멈칫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시 바람이 불었고, 흩날리기 시작한 벚꽃잎은 또 야고의 시야를 가린다. 그 사이로, 라이죠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기다려.”

잊고 있던 감각이 올라와, 야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초조함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초조함이다.

멋대로 도장을 그만두고 제 앞에서 사라졌던 주제에, 또 멋대로 도장에 와서 얼굴을 내밀던 귀찮은 바보.

그새 혼자서 어른이 된 것처럼 새침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세상이니 미래로의 희망이니,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나 하는 의미 모를 바보.

성가시게 눈앞을 떠돌며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팔랑팔랑 야고를 방해하며 거슬리게 하는 바보.

하지만 야고가 원하지 않아도 손에 달라붙는 벚꽃잎과는 다르게, 저 녀석은 도저히 이 손에 잡혀 주질 않아서.

그래서, 그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이 너무나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야고!!!”

선명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거칠게 팔을 잡는 감각을 느꼈다. 그 순간 야고의 시야를 채우고 있던 분홍색이, 갑자기 부서진 것처럼 산산이 흩어져 없어졌다. 눈앞에서 풍선이 터진 것을 본 고양이처럼, 야고는 굳은 채로 눈을 몇 번인가 깜빡였다.

만개한 벚꽃의 위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 얇게 쌓인 벚꽃잎 아래로, 공터의 풀과 흙이 보인다. 여전히 곳곳에 벚꽃의 분홍색이 보이긴 하지만, 다른 색도 제대로 있다. 아까까지 봤던, 어지러울 정도로 분홍으로 가득한 풍경은 대체 뭐였던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머리를 긁으면, 손끝에 헤어밴드의 감촉이 느껴졌다. 한 번 벗겨졌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또 제대로 쓰고 있다.

더 생각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색과 금색이 있었다.

“…라이죠.”

“몇 번을 불렀다고 생각하냐. 들었다면 대답 정도는 해!!! 나 참. 갑자기 없어져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혼자 이런 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줄이야.”

“…….”

“꽃놀이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엄연히 히어로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행사다. 네 멋대로 빠지는 건… 야고?”

제 팔을 단단히 잡은 손 위로, 야고는 손을 겹쳤다. 라이죠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이전과 달리 한쪽이 시끄러운 금색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런데도 이 강한 시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걸 알아채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손끝으로 라이죠의 손등을 더듬었다. 부드럽지만 연약하지는 않은 손이다. 어쩌다기는 하지만, 이 손을 잡아본 적은 몇 번인가 있다. 매끈하고 깨끗하게만 보이는 이 손의 곳곳에 무기를 쥐는 손 특유의 굳은살이 있는 걸, 야고는 기억하고 있다.

“…갑자기 뭐야, 야고.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도 멍한 것처럼 보이는데… 잠이 덜 깼나?”

“글쎄… 그럴지도.”

“……지금의 너는 확실히 조금 이상하군. 약은 제대로 먹었나?”

“먹었어, 바보.”

이제야 조금 감이 잡힌다. 아까까지 헤매고 있던 저는, 시시한 중학생 시절의 자신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니 헤어밴드도 없었고, 그 라이죠에게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목표도 없고 그저 싫은 것에만 둘러싸인 채, 바짝 예민해져 있던 때였다. 어쩌다 만난 라이죠에게 히어로의 제안을 받은 걸 계기로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날 선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야고는 계속 라이죠에게서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 전부 그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딱히 라이죠를 봐도 그런 초조함은 들지 않는다. 재미있는 싸움을 하게 되면서 야고에게 여유가 생긴 것도 있고, 라이죠도 그리 빈틈없는 녀석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른처럼 굴지만 결국 저와 동갑내기고, 사랑하는 세상이니 뭐니 말해도 야고는 결코 그 안에 끼워 주지 않는 이 녀석은, 팔랑팔랑 떠도는 것 같지만 제가 손을 뻗으면 의외로 잡혀 주기도 한다.

지금의 자신은 그걸 알기 때문에, 아까의 환상은 자신을 중학생 때로 되돌아가게 한 것일까.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일단 돌아갈까. 제대로 따라와라.”

“어.”

미묘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라이죠가 짧은 한숨을 내쉰 후 그렇게 말했기에, 야고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전히 야고의 팔을 잡은 채로 라이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야고도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바람이 불었지만, 아까처럼 벚꽃잎이 시야를 덮는 일은 없다. 그 대신 나뭇가지가 부딪히며 꽃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워, 아까워.

그 사이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야고는 들었다. 하지만 라이죠는 듣지 못한 건지 걸음을 멈추지도, 야고의 팔을 놓지도 않았다. 야고는 라이죠가 이끄는 대로 걸으면서도,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바람이 부는 것보다 강한 움직임으로, 벚나무의 가지가 아쉬운 것처럼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다. 야고는 그쪽을 향해 혀를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중학생 때보다 길어진 라이죠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조금씩, 살랑살랑 흔들렸다.

더 뒤돌아볼 이유는 없었다.


안녕! 나는야 '벚꽃 사이에서 른(멀쩡히 살아 있음)의 환영을 보고 따라가는 왼쪽과 영문도 모르고 그런 왼쪽을 붙잡는 른이라는 시츄를 좋아하는 협회'의 창립자!(그런 협회 없어요)...네 아무튼 이런 상황에 환장을 합니다. 벚꽃에 휩쓸려가는 이야기 자체는 클리셰겠지만 저는 그걸 약간 빗나간 계열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왼이 벚꽃에 휩쓸려가는 게 좋다 협회 멤버라서 그래(그런 협회도 없어요) 아무튼 마침 벚꽃과 인연이 깊은 CP를 둘이나 좋아하게 되어서 같은 소재 다른 CP...라는 컨셉으로 써봤습니다 야고라이편입니다. 아무튼 왼은 벚꽃에 휩쓸려가줘 닷뗴 봄이잖아...여기까지의 후기는 안시가편과 동일합니다(왜?)

근데 다 쓰고 나니 아니 이거 벚꽃에 휩쓸려가는 게 메인 주제가 아닌거같은데? 되어서 웃어버림(ㅋㅋㅋㅋ 아~~~ 어쩔수없어요 저는 중학생 시절의 야고상은 시구레에게 연정과는 또 묘하게 다른 초조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이 둘의 야쿠사도장 시절과 중학생 후보생 시절은 공식에서 깊게 언급해준적이 없다보니 망상을 꾸준히 달이는 오타쿠가 됩니다...아이였던 시구레를 아는 야고상은 그때와는 이것저것 달라졌지만 근본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시구레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진정해)

아무튼 망상을 뜯어먹고 사는 오타쿠 하루하루 변치않고 살고있네요. 아마 다음에도 이런 거 들고 올 것 같으니 미지근한 눈으로 바라봐주십시오. 그러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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