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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by P_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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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조명이 은은하게 주변을 내리깔았다. 오래된 레코드의 소음을 비집고 수런스런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흐린 말소리가 오가고 부딪하며 내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녀는 가라앉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기를 띤 이 공간을 사랑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타인을 의식하며 불안과 분노를 쌓는 일은 요즘의 그녀에겐 질리도록 계속되는 일상이었으니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타인과 부딪히며 평화로운 전쟁과 침묵이 얽히는 삶.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에서 칵테일이나 홀짝이고 있는 올리 스펜서는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사회인’을 그렇게 정의했다. 물론 술을 마시며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철학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본인도 그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올리는 매주 금요일 오후 10시가 되면 항상 이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칵테일을 조주하는 솜씨가 좋아 한 두번 찾기 시작한 곳이 이제는 매주 이곳에 오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녀가 안식처를 찾기 시작한 원인은 최근 새로 이직한 회사에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바로 윗상사 때문에.

“반가워요, 조이 제클린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올리 스펜서에요. 잘부탁드립니다.”

처음 인사를 할때만해도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와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 너머로 깜빡이며 웃는 모습이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긴 했지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당사자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므로 단순 기우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이직하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시작한지 정확히 한 달하고 일주일째. 지금의 올리 스펜서는 처음의 직감을 믿고 충분히 경계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쓸데없는 예의를 들먹이며 별거 아닌 것처럼 넘겼던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조이 재클린은 부서에서도 ‘실수투성이 조이’라고 불릴 정도로 엉성한 사람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책상 위에 쌓인 종이를 흩어놓아 떨어뜨리기 일쑤였고, 누구도 그녀의 발을 걸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하이힐을 신으며 허둥지둥 또각거리다가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실수를 하든 사실 올리가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도는 올리도 그러려니 넘길만했다. 비록 조이가 그녀의 옆자리여서 그런 잔실수들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부서에서도 이름이 날 정도로 유명하다면 그건 완벽한 타인인 올리가 고쳐줄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적응하는 동물이므로 하루이틀 거슬리는 일도 반복되다보면 결국 눈에 익기 마련이니, 이런것쯤은 사실 문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었다. A라는 일을 먼저 처리해달라 부탁해서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C일을 아직 다 하지 않았냐고 타박을 주거나, B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B-1을 B-2로 잘못 전달하고서는 그런적이 없다고 발뺌하는 식이었다. 올리는 이 말도 안되는 텃새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종종 업무 중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최악인 건 조이 제클린이라는 인물은 권위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올리가 싫어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무능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길 바라는 사람. 그나마 다행인건 자신의 일을 함부로 퍼나르진 않는다는 점일까. 하기사 ‘실수투성이 조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어설프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업무적인 부분에 대해서 누가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어줄까 싶긴 했다.

“혼자 오셨나봐요.”

자신의 무능한 상사를 안주삼아 속으로 씹고 있던 올리는 어느순간 제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청자켓에 티셔츠, 바지 정도만 입었을 뿐인데도 비율이 좋아 태가 났다. 꼭 어디서 고급스러운 옷을 집어 입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올리는 칠흑같은 머리카락과 금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을 짧게 훑어보다 칵테일을 한모금 홀짝였다.

“아뇨. 애인을 기다리고 있어서요.”

“애인이요?”

“네. 당신보다 훨씬 잘생기고 멋진 사람 있거든요.”

“나보다 훨씬 잘생기고 멋진 사람?”

“그럼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궁금하네요. 나 말고 다른 애인을 두고 있다던가.”

야성적인 눈을 빛내며 당장이라도 올리를 유혹할 듯 속살거리던 남자는 그새 심통난 얼굴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누가 보더라도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 원인이 올리에게 있는 것은 자명했다. 올리는 동그랗고 넓은 칵테일 잔에 담긴 프렌치 마티니를 들고 있다가 테이블 위로 내렸다. 그리고 곧 턱을 괴곤 재미없는 얼굴로 아랫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남자의 볼을 찔렀다. 그녀가 찌른 방향으로 남자의 부드러운 볼이 조금 패여 들어간다.

“그렇게 한가로운 사람 아닌데.”

“네가 한가롭지 않더라도 네게 관심있는 사람은 많겠지.”

“그 관심에 일일이 대응해줄 여유도 없고. 이런 장난은 재미없기까지 해, 아델.”

무심함에 가까운 목소리에 아델은 손을 뻗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제 쪽으로 끌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평소의 올리라면 가볍게 웃으며 넘어갔을 일임에도 직접적으로 ‘재미없음’을 선언했다는 건 그녀의 컨디션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오늘도 그 상사가 괴롭혔어?”

‘상사’. 조심스럽게 담긴 아델의 말에 올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입이 열림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한숨은, 단순히 숨을 내뱉는다기 보다는 탄식에 가까웠다.

“늘 그렇지. 여전히 무능하고,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며, 그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는 마치 노래하듯이 주절거렸다. 어떻게 보면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델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분홍빛의 가까운 머리카락. 밝은 낮에 보면 꼭 솜사탕 같이 넘실거리는 이것을 아델은 사랑했다. 사실 아델에게 있어 올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솜사탕같이 넘실거리는 머리카락, 에메랄드가 박혀있는 듯 빛나는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날카로워 자신을 지긋이 보고 있으면 꼭 저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가까이 지낸지도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아델은 올리를 보면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델의 손이 테이블 위에 얹어진 올리의 손으로 옮아갔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손을 덮어내며 ‘회사를 그만두라’라는, 감히 하지 못할 말을 애써 삼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덮은 제 손등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화를 읊어주는 사람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세상 모든 것을 녹여낼 듯이.

“오늘은 우리집에서 영화를 볼까? 네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거야. 그러니까…공포영화 같은 것 말이야. 영화를 보면서 눈이 감겨올 쯤에면 서로를 품에 안고 잠이 드는거지. 오늘도 수고했어-, 라는 의미로.”

올리는 그의 말에 눈을 휘어 웃었다. 완전히 환한것도, 그렇다고 희미한 것도 아닌 그 애매한 웃음은 적어도 그녀의 기준에선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델, 괜찮겠어?”

“나? 왜?”

“너 무서운거 싫어하잖아.”

“……그건,”

“우리 어릴 때 기억나? 고등학교 때였나. 부모님들끼리 여행을 간 날 말이야. 둘이서 공포 영화를 보다가 기절하지 않았,”

“올리.”

“응.”

그녀의 말을 가로막은 노란 눈이 접혔다. 아델은 그녀에게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칵테일은 차가울 때 마셔야 맛있지 않을까.”

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곤란할 때 말을 자르고 주제를 전환하는건 아델의 오랜 버릇이었다. 여간 부끄러운게 아닌 모양인지 그는 제 뒷목을 매만지는 듯 하다가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도착했을 때부터 그의 자리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이제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리는 그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바쁘게 메뉴판을 읽어 내리면서 간헐적으로 제게 시선을 두는 모습이 퍽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건 그녀의 마음이 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만큼 마모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공포영화도 좋지만, 오늘은 로맨스나 가족영화류가 좋을 것 같아. 인류애를 충전할 필요가 있어.”

“지금 바로 갈까?”

“메뉴판 다시 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잔은 하고 가야지.”

“…바로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손님으로 가게에 방문하고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가는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메뉴판을 보는둥마는둥하던 아델이 이내 그것을 테이블 위로 덮으며 말했다.

“그럼 핑크레이디로.”

“다른 칵테일도 많은데 항상 넌 그것만 시키더라. 지겹지도 않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라서 그런가. 항상 눈이 가네.”

“…입만 살아선.”

“그런 점이 매력 아니었어?”

올리는 가볍게 웃으며 제 잔 안에서 은은히 빛나는 주홍빛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핑크레이디는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칵테일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처음 아델이 이것을 주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도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꼭 너 같다’라는 말을 하면서.

“하긴, 넌 그거 빼면 시체긴 하지.”

“껍데기도 예뻐서 함부로 버리기 아깝긴 하지.”

웃겨.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던 올리는 곧 말없이 칵테일을 들이마셨다. 씁쓸한 알코올의 온기가 식도를 지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그녀는 문득 켜켜히 쌓였던 불편한 감정들이 한결 가라 앉았음을 깨달았다. 올리는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킨 후, 잔을 빙글 돌리다가 곧 제 칵테일 잔을 아델의 잔에 가볍게 쳤다. 맑은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짧게 울리다 흩어졌다.

“다음주 월요일에 회사로 데려다줘.”

“주말 동안 있으려고? 갈아입을 옷이 없을텐데.”

“그럼 내일 일정으로 쇼핑을 추가하면 되겠다.”

“…….”

“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제 입을 가린 아델의 시선은 더이상 올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이렇게 치고 들어올 땐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도 어려워서.”

“어려워할 필요 있어? 아니면 내가 먼저 물어봐주길 바라는 거야?”

올리는 미소지었다.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던 동그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만약 그녀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재밋거리를 찾은 듯 살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재미없죠? 나갈까요?”

고개를 돌려 딴청 피우듯 눈을 굴리던 아델의 눈이 다시 돌아갔다. 턱을 괴며 저를 보는 녹빛 눈동자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아델은 눈을 조금 크게 뜨는 듯 하다가 이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올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적어도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리 속절없이 흔들릴 리 없었다.

“오늘은 밤이 길겠네.”

아델이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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