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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디에

-사용된 설정, 단체 등은 모두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집에 있는 책을 갈무리해서 펼쳤다. 혹시 몰라 문진으로 눌러놓았다. 생각해보니 다른 책도 한 권 있었다. 그것도 잘 펴서 닫히지 않게 해놓았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글자는 고물고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된건가.

에녹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손쉽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등 뒤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기에 에녹은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 뒤에는 그래, 그 책이 있었다. 에녹과 까마귀와 페이가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담긴 그 책. 에녹은 그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듣겠다고 다짐했다. 그 책도 펼쳤다. 꽉꽉 눌러 역시 닫히지 않게 해놓았다. 세 권의 책. 세 권의 책이 전부일까? 물론 아니다. 펼쳐진 소설 “블랙 백” 은 장르 소설로 서점에서 엄청나게 팔리고 있었다. 당장 조그마한 동네 서점에 가서도 구할 수 있는게 이 소설이었다. 에녹은 소설 안의 시간이 다 가버리기 전에 곰곰히 생각하고, 고민했다.

“원본” 을 찾아서 펼쳐야하나.

에녹이 책에게 묻듯 중얼거렸다. 책은 별 말이 없었다. 에녹은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들었다. 맨 뒤, 도서 정보를 펼쳤다. ISBN과 몇 판 몇 쇄인지, 얼만지 등이 주르르 나와있었다. 이 책은 2판 3쇄. 원본이라면 역시 초판본이려나. 헌책방으로 가면 될까. 곧 에녹은 이 책이 어마무시하게 많이 찍혔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물론, 어마무시하게 많은 책 중에 초판 1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초판 1쇄는 단 한 권이 아니다. 초판 1쇄도 어마무시하게 많이 찍혔다. 백권? 천권? 그럼 그 어마무시한 책 중에서 뭐가 원본이란 말인가? 에녹은 원본을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마무시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만나봐야할 것이었다.

ISBN을 확인해야겠다.

ISBN은 책을 식별하는 고유 번호이니, 이 고유번호가 이상한 책이면 높은 확률로 원본이 아닐까. 에녹은 출판사에 메시지를 보내 ISBN이 없거나 훼손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출판사는 부정적이었다. 그런 책들은 파본으로 폐기되었다. 폐기된 도서가 원본일까. 에녹은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서점에 가서 책들을 죄다 펼쳐놓을 수는 없었다. 점원에게 한 소리를 들을 것이고, 에녹은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2판 3쇄.

에녹은 전자책은 또 다른 “법칙” 을 따른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당장 전자책으로 블랙 백을 샀다. 편집 형태부터 읽는 법, 사용하는 매체, 심지어는 몇몇 단어까지도 달랐다. 전자책은 원본일까? 생각보다 난감한 문제에 직면했다. 에녹은 수많은 책들이 인쇄소에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전자책은 뭐가 다른가, 똑같이 어디선가 파일을 복사해서 붙여넣고 있었다. 2판 3쇄. 초판 1쇄는 적겠지만, 증쇄를 거듭할수록 나오는 책의 권수는 점점 늘어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똑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채로, 오탈자를 고치고 고칠 것이 없으면 표지를 좀 더 세련되게 고치고……. 에녹은 속이 메슥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똑같은 ISBN을 지니고 묘하게 다르지만 그 것들 모두가 같은 - 에녹은 전자책에서 이상한 것을 찾아냈다. 에녹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 전생의……?

“에녹”이 말했다. “크로우 박사를 죽였다는 사실에서 숨기 위해 이전에 썼던 이름을 써야겠군요”. 숨이 탁 막혔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이런 좆같은 소설들은 다 치워버리고 불태운 뒤 그 세상이 망하던 말던 신경쓰지 말자. 그 동안 부대꼈던 까마귀도, 페이 올슨도 다 죽질 않았던가? 에녹은 전자책 파일을 삭제하고, 자신의 집에 있는 블랙 백을 모두 수거해 싱크대로 갔다. 한 손에 태양빛을 모았다. 파도에 반사되는 빛 칼날 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불길이 그의 손을 감쌌다. 책을 그 불길에 대자, 불길은 게걸스럽게 마른 종이를 집어삼켰다. 책이 타는 것을 바라보다가 에녹은 옆구리에 들큰한 감정이 피어오르는걸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에녹이 있었다.

나?

에녹이 쓰러지며 물었다. 에녹을 찌른 에녹은 칼을 뽑고 타들어가는 책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깐, 에녹을 찌른 에녹은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자신의 옆구리를 강하게 파고드는 것을 알아챘다.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에녹이 있었다, 에녹을 찌른 에녹을 찌른 에녹은 칼을 뽑고 타들어가는 책을 쳐다보다가 옆구리를 찔렸다, 고개를 돌리자 에녹이 있었다 에녹을 찌른 에녹을 찌른 에녹을 찌른 에녹은 칼을 뽑고 타들어가는 책을 쳐다보다가 옆구리를 찔렸다 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은칼을뽑고타들어가는책을쳐다보다옆구리를찔렸다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을찌른에녹은

에녹에게 대가리가 날아가고 사건은 완전한 원이 되었다.

총알은 각기 다른 세계의 에녹을 관통하였다. 그것이 자신의 뒤통수로 날아오는 것을 시시각각 느끼며 에녹은 자기를 찌른 칼을 집어들고 손목을 내리쳤다. 허무할 정도로 동강 잘려나갔다. 피가 솟구쳤다.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에녹은 고통과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잘린 손목을 움켜잡았다. 고스트가 소리쳤다.

수호자, 이런 놀이를 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 알잖아요?

고스트의 전자 홍채에는 감정이 담겼으나, 에녹은 고통과 충격, 안도감과 과다출혈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뒤로 넘겼다. 커다란 몸뚱아리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딛혔다. 고스트는 에녹의 손목을 치료해주고 다시 양자중첩상태가 되었다. 에녹은 기절하기 직전, 생각했다. 작가가 누구기에 내 전생의 이름을 아는거지? 그럴 수 밖에 없다. 에녹은 복제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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