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제비에게 이름을 붙인 아이들 (리뉴얼)
결국에 그가 바라보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새벽제비는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그 시선을 받아내며 자신의 숄을 여몄다.
설마.
왜요, 이렇게 클 줄은 몰랐나요?
여인이 서글프게 웃었다.
정말 리카이냐.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당신은,
리카이는 새벽제비의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았다.
아직 그 집에서 살고 있어요.
그건 초대였을까? 리카이는 새벽제비가 따라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자박자박 멀어졌다. 새벽제비는 뒷모습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집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리카이를 쫓는 것은 겁이 났다. 새벽제비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발이 기억하는대로 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하면 초대에 응하는 것이고, 걸음이 엉뚱한 곳으로 옮아간다면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엉뚱하군요.
리카이의 말에 새벽제비는 눈을 떴다. 지진 때문에 부엌 쪽이 허물어진 집. 이층의 다락방은 새벽제비가 썼고, 일층의 넓은 방은 리카이와……. 새벽제비는 집을 쳐다보았다. 집은 그의 마음을 굳게 만들었다.
리카이.
새벽제비가 마음을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리카이는 듣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새벽제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면. 그러면, 그대로 돌아가면 됐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위안하고 리카이의 마음은 지금껏 그랬듯 모르는 척 하면 됐다. 무너진 벽에서 나는 퀴퀴한 곰팡내며 먼지 냄새, 벌레를 쫓기 위해 말린 쑥을 태우는 냄새, 각종 야채들과 고기덩어리를 말리는 냄새……. 그러나 그것들이 새벽제비의 마음을 잡아끌어 홀린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오셨어요?
리카이는 다정하게 웃으며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가스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새벽제비는 질문을 무시하고 낡은 식탁에 앉았다. 그가 두 사람을 키우면서 쓰던 식탁이었다. 그 때 났던 흠집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리카이가 더 매섭게 물었다.
왜, 오셨냐구요.
널 보면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물어본 것은 그게 아니잖아요.
새벽제비는 가만히 앉아있었고 리카이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찻잎이며 설탕이며를 찾아 컵에 담고 있었다.
리카이, 난.
설탕 빼달라고요? 알고 있어요.
리카이는 끓지도 않은 주전자를 들어 대충 물을 부었다.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새벽제비 앞으로 던지듯 놓고, 자신은 선 채로 맹물에 가까운 차를 마셨다.
나를 떠난 그 10년동안 못 살았길 바라요. 그래도 동생 무덤, 아니 동생이 빠져죽은 방파제엔 가보긴 했죠? 나한테 들킬까봐 몰래 와서 내가 몰랐던거죠?
비아냥거림 속에 아주 미약한 기원이 들어있었다. 새벽제비는 그 온도로는 차가 우러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추모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단다.
리카이는 찻잔을 든 채 새벽제비를 노려보았다.
장소는 기억을 지배해요. 전 아직도 그 자리에 가면, 내 동생이-,
인정하마. 널 두고 떠난 것은 잘못한 일이었어.
절 두고 떠나요? 새벽제비, 당신은 날 버린거에요. 그 때 내 나이가 열 세살이었어요.
저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렸다. 리카이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마치 파도소리를 무찌를 수 있을 것 처럼.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리카이는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다. 그래도 파도소리는 들렸다. 리카이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을 추모하지도 않고 나는 버리고 떠나고. 이럴거면 우리를 왜 맡은거에요?
새벽제비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내 잘못이 아주 없다곤 말 못하겠다. 그런데 리카이. 네 동생이자 내 아이 리쩐이 죽은 이유를 잊었지 않니? 네가 분란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분란이요?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이었어요. 과민반응한 것은 당신이에요!
리카이가 컵을 개수대에 던져넣었다. 차가 조금 우러난 설탕물이 튀었다.
용서받으러 왔어요? 네, 용서해줄게요. 됐나요? 이제 갈건가요?
용서는 내가 너에게 베풀어야하는 것 아니니?
새벽제비는 식탁을 내려쳤다. 어떻게 해도 파도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마을은 바닷가에 있다. 지금은 풍랑이 심하다. 마치 리쩐이 죽던 그 때 처럼. 그 때도 거친 파도가 방파제를 때렸고, 새벽제비는 목숨이 두렵지 않았기에 테트라포드 위에 서있었다. 바다는 그를 적셨다. 새벽제비는 하늘을 보았다. 목울대가 따가웠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은 많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리카이를 잘 타이르고 잘못을 빌고 마을을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를 열 몇 명이나 키웠다. 그래, 그런 일은 많이 있었다. 리카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마음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등 뒤로 불빛이 비쳤다. 새벽제비는 놀라 눈물도 닦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열 살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엄마, 아빠, 새벽제비, 날 버리면-!
위험해, 거기서 멈춰라!
새벽제비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새벽제비와 리카이는 그 이후로 몇 분 더 다퉜다. 극적인 타협도, 용서도 아무것도 없이 감정만 소모하고 끝난 전쟁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정으로 이 밤중에 쫓아내진 않을게요. 곧 비도 올 것 같고.
리카이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이 이층을 쓰시면 돼요. 이부자리도 그대로 있으니 알아서 내리시던가요. 되도록이면 내일 이 마을에서 사라져줬음 하네요.
새벽제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리카이는 거친 발소리와 함께 부엌을 나갔다. 잠시 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새벽제비는 리카이에 대한 항의로 밤을 새워 식탁 앞에 앉아있고 싶었지만, 그는 이 섬나라의 저쪽 끝에서 왔다. 그 일대를 다스리는 이에 대항하려고 저쪽 끝의 마을에서 은밀히 서신을 보내왔고, 이 마을 사람들은 침묵을 택했다. 새벽제비는 지팡이에 기대 꾸벅거리며 졸다 결국 이층으로 올라갔다.
위험해, 거기서 멈춰라!
새벽제비는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쩐은 테트라포드 사이로 빠지고 말았다. 새벽제비는 비명을 지르며 리쩐이 있던 곳으로 겅중겅중 달려갔고 랜턴을 들고 리쩐을 뒤쫓던 마을 사람들도 합세했다. 새벽제비는 삼 일을 방파제에서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하나 둘 집으로 갔고, 새벽제비는 방파제 위에서 리쩐의 이름만 외치다가 그를 안쓰럽게 여기던 한 사람이 억지로 마을로 데려갔다. 잠도 못 자고 울부짖기만 해 기력이 쇠한 새벽제비를 맞이한 것은 열 세 살 먹은 리카이였다. 새벽제비는 이층 창문을 열었다. 짠 물 냄새가 훅 끼쳐들어왔다. 그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밖으로 뺐다.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에 맞춰 멀리서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리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득 아래를 보았다. 한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웬 사람이 남의 집에 기대 웅크려 흐느끼고 있다니. 인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고서야 새벽제비는 그 사람이 리카이임을 알았다.
알고 있어.
새벽제비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리카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리카이와 리쩐은 세 살 차이가 나는 아이였는데, 부모가 두 아이를 버리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마을 사람들에게 빚을 잔뜩 지고선, 아이들을 보증처럼 두고, 그렇게 도망쳤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일꾼처럼 대했고 새벽제비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 아이들에겐 이름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빠도 엄마도 남자도 여자도 다 될 수 있는거에요?
동생이 하이옌에게 물었다. 하이옌은 애매하게 틀린 그 말을 어떻게 고쳐줘야할지 곰곰히 생각했다. 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름 하나면 충분할텐데.
앗, 그럼 우리가 이름을 붙여줄테니, 엄빠가 우리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세요.
먼저 아이들의 이름을 붙이는게 우선이었다. 하이옌은 동생과 언니의 원래 이름을 변형해 각각 리쩐과 리카이라 불렀다.
거지같은 이름, 이제 그걸로 불릴 일이 없겠네.
리카이가 중얼거렸다. 리카이는 꽃반지를 만들고 있었다. 하이옌은 험한 말을 지적하며 아이에게 핀잔을 줬다. 리카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리쩐은 달랐다.
언니는 버려도, 저는 착하니까 버리면 안돼요.
리쩐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새벽제비를 졸랐다. 리쩐은……. 항상 그랬다. 새벽제비는 리카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십가지의 감정이 휘몰아쳤고,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때, 왜 네 단짝 친구를 괴롭히고 따돌린거니?
아침이 되고, 새벽제비가 리카이에게 물었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요. 아이들은 다 내 편을 들어주었죠. 난 덩치도 크고, 재미있고, 나무도 잘 타는 아이였으니까.
리카이가 낮게 웃었다.
이제야 그걸 물어보시네요.
그렇다. 물어볼 때를 놓쳤다. 새벽제비는 리카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입을 열면 모두가 실망할 것 같았다. 좀 더 잘 타일러야했다. 다시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게.
진정 좀 하고 오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새벽제비는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 마을을 벗어났다. 리카이는 그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울먹이며 서있었다. 새벽제비는 걸었다. 비틀거리지도 않고 올곧고 정하게 걸었다. 눈물이 맨발 위로 떨어졌다.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희게 굳었다.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 바다는 그를 적셨다. 지는 해가 보였다.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그의 등 뒤로 랜턴 불빛이 비쳤고, 뒤를 돌아보자 작은 아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안돼.
새벽제비,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때, 기억해요? 제발 그것만은 기억해줘요.
리카이가 새벽제비의 손을 잡았다. 새벽제비는 목이 메여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무도 그 때를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파국에선 그 기억이 가장 행복한 것이었다.
너희는 리카이와 리쩐이라고 부르자. 언니가 리카이고, 동생이 리쩐이야.
거지같은 이름, 이제 그걸로 불릴 일은 없겠네.
그런 말은 쓰지 말렴, 리카이. 나랑 살면서는 험한 말은 금지다.
리쩐이 하이옌의 케이프를 팔랑거렸다.
언니는 버려도 전 버리면 안돼요!
둘 다 안 버려.
그럼 우리 차례다. 나는 하이옌을 제비라고 부를래요.
리카이는 꽃반지를 다 만들고 자신의 약지에 끼웠다. 노란색 민들레가 예쁘게 빛났다.
제비라고만 부르면 하이옌과 뜻이 같잖아. 둘 다 제비.
하이옌은 바다제비랬어, 언니.
그거나 그거나.
언니, 나도 꽃반지.
리쩐이 이름짓기에 흥미가 식었는지 언니의 등에 메달려 반지를 달라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이옌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을 이해해줄거라 생각하며 리카이 대신 꽃을 뜯어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슈는 무슨 뜻이에요?
리카이가 물었다. 하이옌은 고개를 들고 리카이를 보았다. 의외라는 듯이.
무슨 뜻이냐구요.
새벽.
제비새벽이 좋아요, 새벽제비가 좋아요?
하이옌은 고개를 숙였다. 리쩐이 소리쳤다.
새벽제비가 좋아!
넌 제비새벽이 더 좋았니, 새벽제비가 더 좋았니?
새벽제비가 물었다. 리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제비는 리카이의 손 위에 자신의 남은 손을 올렸다. 그들은 새벽제비의 아이였다.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새벽제비의 고통을 직시했다. 그 이름은 얼마나 끔찍한가. 철조망으로 자신을 칭칭감은 채 새벽제비가 물었다.
마을을 떠나는걸 도와주마.
그러면 안 됐어요.
미안하다.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새벽제비…….
여인이 힘없이 무너졌다. 새벽제비는 텅 빈 옷가지를 쳐다보았다. 어깨에 걸치던 숄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메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혹은 새벽제비였다. 그래서 그는 무너질 수 없었다. 숄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그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한동안 서있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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