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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관] 만년필에 대한 단상

유해님캐빌려줘서감사합니다우왕

에녹이 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까마귀겠거니 싶어서 돌아보지 않았다. 상대방도 조용히 그를 지나쳐 찬장을 보고 있었다. 방 하나짜리 작은 집이었다. 죽은 사람은 해적, 세 번째 희생자이다. 두 번째 희생자와 똑같이 식탁에 엎어진 채 죽었고, 시신 앞에는 검은 잉크를 탄 물이 담긴 컵이 있었다. 그 옆에는 만년필이. 이번엔 세 자루. 그 만년필 때문에 에녹은 수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까마귀가 아니다. 에녹은 스페이드 에이스에 손을 올리고 뒤돌아봤다. 프레가였다. 그는 찬장을 열어 함부로 술병 라벨이 잘 보이게 정리하고 있었다.

총 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을겁니다.

에녹은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프레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당신은 유력 용의자입니다, 프레가.

죽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제법 잘 아나봅니다. 당신이 죽여서 그런건가요?

봐라, 에녹. 이 술병들,

그제서야 프레가는 자리를 비키고 에녹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놀아나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에 곁눈질로 찬장을 쳐다보았다.

,모두 고급 장교들이나 살 수 있는 것들이야.

고급 장교요? 이 사람은 일개 해적입니다.

내가 고급 장교가 살 수 있는 주종은 훤히 꿰고 있지.

어떻게?

나도 들락거릴 수 있었거든, 뭐, 그만한 지위였으니까.

에녹은 눈썹을 들어보였다. 놀랍지 않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봐봐!

프레가가 과장된 몸짓으로 식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도 술병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와인이었다.

열려있군요. 마시려고 했다는 듯이.

바닥에 코르크가 떨어져있었다. 에녹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와인은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싸구려 와인이야. 고급 술들을 놔두고 싸구려 와인을 마실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이 코르크......

에녹이 코르크를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확실한 분석을 위해 고스트를 부르고 싶었지만, 상대는 프레가였다. 고스트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코르크 따개가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코르크의 탁한 냄새 뿐이었다.

와인이 묻어있지 않군요. 완전 새 코르크에요, 코르크 따개로 훼손은 했지만.......

에녹은 문득 프레가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와인은, 무슨 의미죠?

글쎄. 적어도 저 시신이 마시려고 둔 것은 아닐걸.

잠깐, 프레가!

말리지 마. 이거 때문에 온거야.

에녹은 황급히 일어났다. 약간의 어지럼증을 참으며 프레가의 손목을 낚아챘다. 프레가는 시신 옆에 놓인 세 자루의 만년필 중 한 자루를 분해하고 있었다.

놔!

프레가가 으르렁거렸다.

이 만년필 중에 내 것이 있다고?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을 죽였다고? 내 동포를?

당신은 동포를 이미 배신한 전적이 있잖습니까.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엉뚱한 죄목까지 뒤집어쓰고싶진 않아!

프레가는 에녹의 손을 뿌리쳤다.

만년필은 총 다섯 자루, 내가 내 만년필의 구조는 잘 알아, 누구보다 잘.

프레가가 중얼거리면서 빠르게 만년필을 분해했다. 닙. 카트리지. 바디. 프레가는 보기 좋게 부속품들을 정렬했다. 그리고 에녹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증거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봐봐, 멍청아. 간단히 설명할게. 이 만년필들은 장교들에게 배급되는 만년필 중 하나야.

.......그래서요.

근데 내가 배급받은 것은 너도 알다시피 독약을 숨길 수 있는 트릭이 숨겨져있어. 이빨로 닙을 깨물면 독약이 나오는 구조지.

그러려면 특수한 부품이 추가로 들어가지 않겠어? 프레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녹은 다시 만년필 부속품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만년필에 대해 썩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부속품들이 평범한 것들이라는건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 자루 모두 동일했다. 똑같은 부속품들 뿐이었다. 프레가가 말한 특수한 부품이 달려있는 만년필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잉크 물은 뭐죠?

카트리지를 봐봐.

프레가가 하나를 집어들었다.

잉크가 없네. 그런데 잉크가 들어있었던 흔적도 없어. 의심이 되면 물에다 넣고 헹궈봐.

그럼 잉크 물에 들어있는 잉크도?

지문을 채취해봐.

만약에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그 만년필들 처럼 지문이 없을겁니다.

프레가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에녹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설명했다. 만년필. 살인자가 남기고 떠난 물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인자는 만년필에 지문을 하나도 안 남겼다. 강박적으로 닦아낸 것 처럼. 똑같이, 살인자의 손길이 닿은 물품, 대표적으로 잉크를 탄 물이 담긴 컵에도 지문은 남아있지 않았다. 프레가는 그 말을 듣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잉크 물이 그럼, 독약이 담긴 잉크를 푼 물이라고 생각한거야?

리프 측 수사관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프레가의 표정이 굳었다.

리프? 근데 왜 현장엔 선봉대의 수호자가 있는거지?

까마귀의 부탁입니다.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자, 까마귀가 찾아왔다. 만년필 두 자루와 두 번째 희생자. 아직 첫 번째 만년필과 첫 번째 희생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만년필이 단서인 것 같은데.

까마귀가 한쪽 팔을 감쌌다.

네가 저번에 만년필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나?

까마귀들에게 배급된 만년필에 대한 것이었다. 에녹의 기억에는 없던 잔인한 배급품이었다. 그리고 그 잔인한 배급품은....... 프레가가 말해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갑자기 나타나 건들거리며 말했다.

이봐, 너도 그 만년필을 받았나?

에녹은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다.

대선배님. 제 말 씹으십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으음, 그래, 아마 너 정도 됐으면 독약이 든 만년필을 받았었겠지.

뭐요?

프레가는 의외라는 듯 자세를 바로하고 자신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아니, 잠깐. 이게 어디로 갔지.

그래서 실물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까마귀에게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게 계기가 되었을 줄이야. 에녹은 이마를 짚었다.

네가 얘기한 그 만년필과 똑같은 만년필들이야....... 프레가가 만년필을 잃어버렸다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까마귀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 안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그가 인형처럼 보였다.

리프 측에서 수호자 한 명을 추천해달라더군.

당신은?

난 리프에 너무 익숙해. 그래서 참여할 수 없다.

용의자는?

에녹은 그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 올슨, 통칭 프레가.

프레가는 에녹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는 미쳐 날뛰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무언가를 유심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잉크 물이 독이 아니면, 이들은 무엇때문에 죽고 말았단 말입니까?

사인도 리프의 수사관에게서 받았나?

그렇습니다.

지금 해적이 죽은 이유가 중요한게 아니야. 리프가 널, 더 나아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지.

프레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에 대한 통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신을 쫓고 있던 해적들이었고, 둘 다 죽었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사에 도움을 줬다 해도 당신은 용의자입니다. 그러니 이쯤 하시고 나가십시오. 리프와 저 사이를 이간질하지 말고.

프레가는 항변하려했지만, 에녹은 프레가의 몸짓을 흉내내 문을 가리켰다.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녹이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집 안에는 프레가가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프레가는 한 덩어리의 질감으로 서있었다. 에녹은 스페이드 에이스를 뽑아들었다. 프레가는 베스티안 왕조를 겨누었다.

상처입은 짐승.

에녹이 노리쇠를 당겼다.

그걸 나로 해석했더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프레가는 왼 손에 든 무기 말고도, 오른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설치했습니까?

프레가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째지는 목소리로 웃어댔다. 오른 손을 들어 그것이 무엇인지 흔들어보였다. 만년필. 요 며칠 동안 지긋지긋하게 봐온 것과 동일한 모습의 만년필.

그걸 당신이 왜 가지고 있습니까?

왜? 그건 내가 물어야지. 왜 네가 이걸 가지고 있는거지?

뭔.......

나에게 익명으로 메시지가 왔더군, 네게서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프레가는 총을 고쳐쥐었다.

해명하면 총을 내리겠다.

해명할 것 없습니다. 그 제보는 거짓이고, 그 만년필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반대로 물읍시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벨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두 사람 누구도 총구를 돌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았을 때 문 틈으로 종이 두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에녹과 프레가는 종이를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총을 먼저 내린 것은 프레가였다.

봐. 그리고 나도 알려줘.

프레가가 베스티안 왕조를 총집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서야 에녹은 움직였다. 종이는....... 편지였다. 유려한 필체로 적힌 편지에는. 에녹은 편지에서 눈을 떼고 서둘러 집 안 불을 켰다. 환한 전등 아래서 그는 꼼꼼히 편지를 읽었다. 프레가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거...... 망명을 청하는 서신입니다.

누가?

에녹은 프레가를 쳐다보았다. 프레가는 그대로 굳었다. 세 번째 희생자와, 두 번째 희생자.

왜...... 당신을....... 쫓는데 망명을 신청합니까?

상처입은 짐승.

프레가가 속삭였다.

그 문장이 포함된 메시지들이, 그러니까 나를 쫓기 위해 서로 정보를 교환한 것 자체가, 리프 측에서 조작한것이라면?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리프에서 중요한 정보를 지닌 자가 빠져나가려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알잖아?

에녹은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역시 까마귀였다.

당신이 죽였다고 해야 리프는 두 건의 살인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거고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남아있어.

프레가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이 편지를 가져왔냐는거지.

에녹도 프레가의 옆에 섰다. 그렇게 멍하게 밖을 본다 해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고, 만년필은 프레가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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