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찾은 희망
파판14 타로카드 합작 참여 글 / 제로 / 13. 죽음
- FF14 메인 스토리 6.3까지의 내용 포함 (스포일러 주의) -
- FF14 '사베네어 섬', '라자한' 지역의 서브 퀘스트 내용 일부 포함 (한섭 기준) -
- CP 요소 없음, 처음부터 끝까지 제로의 이야기 + 창작인물 등장 -
첫 죽음의 기억은 끝없는 갈증 속에서 빠져드는 꿈과도 같았다. 어지러이 흔들리던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진다. 무엇이든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삼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일부분이나마 남은 인간이 외쳤다. 짐승이 되고 싶지 않아. 그의 마지막 남은 고집이자 순수였다. 차라리…….
멀어지던 의식이 돌아왔다. 깜빡 잠들었다 깨어난 걸까? 정신이 지나치게 맑았고, 절망적인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씩 꺼져가던 감각들과 조용한 공포는 모두 그저 악몽이었다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와 달은 굳어 비틀어진 지 오래라 그가 잠시 쓰러진 사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빈틈을 노리고 달려든 적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정상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어쩌면 또 다른 예외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확한 이유를 규명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하나라도 더 찾아야 한다. 살아남은 인간을. 세계의 가능성을 위해서.
똑같은 경험을 몇 번 더 하고서야 그는 깨달았다. 잠들었다 깨어난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순환조차 그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를 망가뜨린 어둠이 그를 포함한 모두에게서 혼의 안식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죽음보다 끔찍한 영원이 시작된다. 그는 영원히 굶주린다. 그는 영원히 방랑한다. 끊어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는 무엇도 찾지 못하고, 소원과 희망은 살아날 때마다 부질없이 깎여나간다.
누군가, 이제는 그만, 끝을 내주면 좋겠어.
…….
빛?
몽롱한 시야로 낯선 풍경이 비친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 푹신한 침대에서 그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보인다. 그 아래의 오색빛깔로 칠해진 건물들과 활기 넘치는 사람들. 온통 자연스럽지 않다. 온몸이 깨어나는 감각이 어느 때보다도 현실감이 넘치지만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어디까지 꿈이었나. 무슨 꿈을 꾸고 있었나. 그는 황급히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그래, 숙소겠지. 여행 도중에 쓰러졌나 보군.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싸우러 가야 하는데….
“어머, 깨어났구나?”
직후 그가 지른 비명은 지난 만 년 가량의 세월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
바르바리차의 영역에서 쓰러지는 순간에 제로가 예상한 다음 상황은 두 가지였다. 눈을 영영 뜰 수 없게 되거나, 누구도 남아있지 않은 빈 영역에서 부활하거나. 에테르를 포함한 몸 상태가 초기화되는 ‘죽음-부활’의 과정과는 달리 ‘기절-깨어남’의 과정에서는 그 무엇도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제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허기도, 지친 몸도, 혼미한 정신도 그대로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낯선 세계에서 낯선 인간들을 따라다니고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티 나지 않게 회복하는 일에 먼저 집중했다. 그러느라 이들 일행에게 제대로 휘말렸다는 자각은 뒤늦게 찾아왔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딱히 위협이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죽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졌다면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틈을 타서 먹겠다고 달려들 요마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곳이 바로 ‘보이드’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기묘한 일행들이 자신을 지켜주는 일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쓰러져있던 동안 비밀스러운 강제 계약이라도 맺은 것은 아닌지 꼼꼼히 확인했지만,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왜? 어째서? 묻고 따지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녔지만, 일단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믿을 것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수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재차 확인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할수록 마음 한편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있다면, 뜨겁고 간질간질한 그것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면, 기억해 낼 수 없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 그를 살려낸 본능적인 지혜가 속삭였다.
일단 에테르부터 보충하자.
“어서 오세요, 메리드의 주막입니다! 오늘은 어떤 걸 드시겠어요?”
종업원 미릴은 제로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제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라자한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특이한 손님이었다. 태수님의 귀빈으로서 모든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지만 거만하지도,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적당한 양의 음식을 시키고 조용히 먹어 치운 다음 깔끔하게 정리까지 하고 나간다는 점에서 웬만한 단골보다도 더 반가운 존재였다. 어차피 음식값은 태수님이 넉넉하게 챙겨주시니까. 손님이 먹는 양에 비해 보조금이 너무 넘쳐나서 오히려 난처할 지경이었다. 더 먹고 싶은 건 없냐고 물어봐도 ‘과한 빚을 지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일관하며 거절하니 그 이상으로 권할 수도 없었다.
“어제 먹은 식사 그대로 주문하겠다.”
“주문받았습니다~ 곧 가져다드릴게요!”
미릴이 멀어지자, 제로는 고개를 돌려 주막 바깥의 풍경을 응시했다. 일렬로 트인 창문마다 푸른 하늘이 큼지막하게 잘려 담겨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태양 주위로 뭉친 구름을 옆으로 걷어내고, 한층 더 찬란해진 빛이 모든 창문을 채우고도 남아 주막 안까지 쏟아지는 동안, 제로는 오감을 확장해 세계를 음미하고 있었다. 짙은 환경 에테르가 숨결마다 스며들었다. 아직 그가 전부 구분해 낼 수 없는 수많은 음식의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따스하게 데워진 갑주에서 전해져오는 은은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종업원들의 바쁜 발걸음 사이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로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하나… 미릴의 것은 아니었다. 곧 작은 목소리가 주막의 소음을 간신히 뚫고 제로에게 닿았다.
“저기,”
라자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옷을 입은 휴런 여자아이였다. 소녀는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지만, 도망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떤 부탁인지 듣고 판단하겠다. 말해 봐.”
“제 동생을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제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전에 이 꼬마를 만난 적이 있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아이와 관련된 의뢰라도 받은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짚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뜻이지?”
“죽음의 신 아니에요? 검은 갑옷에, 검은 낫에, 무시무시한……”
소녀는 말끝을 흐리며 몸을 움츠리고 눈치를 살폈다. 제로가 조용히 바라볼 뿐 화내지 않자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이기를,
“머리가 해골은 아니긴 한데, 므리가 신들도 머리를 인간의 것으로 바꿔 달았댔어요.”
이 지역 사람들이 믿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라면 제로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로는 자신이 강제로 요마에 더 가까워졌을 때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 모습이라면 ‘해골’까지 포함해서 확실히 이 어린 인간이 묘사하는 특징과 일치한다. 라자한으로 넘어온 후로는 한 번도 그렇게 변한 적이 없으니 소녀가 그것을 알고 묻는 것일 리는 없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 특징을 가진 자가 죽음의 신이라고 하던가?”
“…딸꾹. 마니샤 할머니가 말해줬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아무튼 잘못 짚었다.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이 내 본업은 아니야. 낫으로 생물을 죽이는 건 맞지만.”
“히익, 딸꾹.”
제로가 솔직하게 대답한 덕분에 소녀는 더욱 사색이 되었다. 때맞춰 미릴이 음식을 들고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를 만큼 겁에 질려버린 소녀는 얼른 미릴 뒤로 숨어 옷자락을 꼭 쥐고 덜덜 떨었다.
“제발 동생을 살려주세요…….”
“…제로 씨,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은 미릴이 아이를 살살 달래가며 자초지종을 듣고 또 그저 평범한 손님이라고 애써 좋게 좋게 설명하는 동안, 제로는 식사를 잠시 미루고 팔짱을 낀 채로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소녀의 이름은 아샤. 라자한의 카마 구역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고, 사신 이야기를 들려줬다던 마니샤 할머니는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인 모양이었다. 동생이 큰 병을 앓고 있는데, 죽음의 신이 숨을 거둘 사람을 미리 마중 나와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말을 듣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묘사와 비슷하게 생긴 제로를 발견하고 동생을 위해 용기를 낸 듯했다. 그 용기란 것이 ‘죽음의 신’을 ‘말로 설득해 돌려보낸다’라는 발상이라는 점이, 제로의 입장에서는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로는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무지에서 오는 돌발 행동 같은 것들을 아주 오래 잊고 있었기에.
“그럼, 제 동생은 안전한 거예요?”
“…….”
미릴은 웃음 뒤로 난감한 표정을 숨겼다. 들러야 할 테이블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기서만 시간을 오래 끌고 있을 수 없는데, 단순한 말 몇 마디로 꼬마 손님에게 상황을 모두 이해시킬 자신은 없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눈을 굴리던 와중 제로와 미릴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착하고 고요한 눈빛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좀 특이한 사람이긴 해도, 별일 없겠지.
“자아, 언니는 바쁘니까,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제로 씨, 부탁해요!”
“어, 네?”
“그렇다는군.”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던 미릴이 쌩하니 자리를 비우자 아샤는 당황했으나 제로 쪽을 힐끔거리는 모양새가 좀 전보다는 많이 안정된 듯 보였다. 공포나 두려움이 희석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호기심인가?
“저 이거 먹어도 돼요?”
혹은 그저 테이블 위의 빵이 탐났던 걸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샤는 식사를 조금 나누어주었다고 금세 경계심이 풀어져선, 테이블 위를 싹 비우고도 돌아가지 않고 제로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로가 이곳이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이라는 것을 알고서부턴 눈에 띄게 활기를 찾아갔다. 의아해하던 제로는 아이의 말속에서 금방 이유를 찾아냈다.
“저 오늘 시간 많아요! 같이 도시 구경할래요?”
“필요 없,”
“정말 안 돼요? 맛있는 걸 주셨으니까 보답하고 싶어요.”
속내는 그게 아니라 단지 심심하니 놀아달라는 것 같은데. 그러나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거절하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아이를 외면하긴 어려웠다.
라자한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아샤는 손까지 꼭 잡고 제로를 놔주지 않으려 했다. 제로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단순한 말 몇 마디로도 아이는 금세 겁먹거나 기죽어 버릴 것을 아는데도, 오히려 알기 때문에 얌전히 끌려다녔다. 불편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약하고 여린 작은 인간의 반짝임을 구경하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롭기까지 했다.
“와! 여기 과일들 정말 맛있는데, 제로는 먹어봤어요?”
“저쪽에 있는 과일은 못 먹어본 것 같군.”
“그러면 하나만 먹어봐요! 제가 살까요?”
“아니, 내가 사지.”
최근 제로는 메리드의 주막에 들릴 때마다 마물 수배서를 챙기고 있었다. 수배서의 마물들은 대부분 목숨을 걸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고, 낫이 무뎌지지 않을 만큼은 싸울 수 있는 적당한 상대도 제법 있었으므로 제로에게는 나쁘지 않은 소일거리가 되어주었다. 브리트라에게, 나아가 라자한에 필요 이상으로 빚지고 싶지 않아서 시작했지만, 마물 토벌 보상으로 얻는 이쪽 세계 인간들의 재화도 생각보다 제법 쓸 곳이 많았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주막이 아닌 곳에서 간식을 사 먹는다던가.
“붉은 상자에 담긴 걸로 하나…… 아니, 두 개를 사고 싶은데.”
제로는 아샤쪽을 힐끔 바라보고 주문을 수정했다. 소녀는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로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쥐여 준 과일을 소녀는 야무지게도 먹어 치웠다. 제로도 천천히 베어 물며 맛을 가늠했다. 원초 세계에 도착한 첫날 먹었던 사과처럼 꼭꼭 씹어 삼켰다. 여전히 선명하지 않은 감각이지만, 이제는 음식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조금씩은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세계의 방식에.
“맛있죠?”
“잘 모르겠어.”
“에이, 정말로?”
“……하지만 다른 가게보다 훨씬 신선하다는 것은 알겠다.”
“맞아요! 주인아주머니가 정말 좋은 과일들만 골라서 팔거든요!”
아이의 해맑은 웃음이 터져 나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러자 태양을 오래 쳐다보았을 때처럼 눈이 아린 것도 같았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마자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또 어쩌면, 한순간 타올랐던 가슴 속의 그 불꽃처럼 정말로 그가 느낀 감각일 수도 있다. 제로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애꿎은 과일만 빤히 바라보았다.
“아, 해가 지네요. 엄마가 걱정하겠다.”
“카마 구역에 산다고 했었지.”
“네, 저쪽으로 가면 돼요! 집 구경할래요?”
“사양하지. 하지만 그 앞까지는 데려다주겠다.”
딱히 아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 어린 소녀가 무사히 도착한다고 그에게 굉장한 보상을 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스스럼없이 호의를 베풀게 되는 건, 그냥 돕고 싶어서였다. 알리제가 갈레말의 사람들을 도왔듯이.
…그렇다면 이 한껏 노려보는 시선도 알리제 일행이 그랬듯, 감내해야 하는 몫일까.
“누구시죠?”
아샤가 말한 목적지에 다다르자,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여성이 제로를 보고 흠칫 놀랐다가 곧 경계하며 아샤에게 손짓했다. 사실 제로에겐 이쪽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면 익숙한 태도였다. 아샤는 제로의 손을 놓고 얼른 달려가 자신과 똑 닮은 여성에게 안겼다.
“엄마, 오늘 나랑 놀아준 언니야! 무섭게 생겼지? 근데 맛있는 것도 사줬어! 엄청 착해!”
엄마라 불린 자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덤덤하게 모녀를 지켜보던 제로는 아이의 장난스러운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지는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만 숙소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중에 검게 가려진 시야 너머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희미하고 곧 끊어질 듯 약한 에테르의 기척. 아마도 아샤가 말했던 동생의 에테르일 것이다. 저 상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아샤가 절박하게 죽음의 신을 찾아다녔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무언갈 말하려 조금 벌어지던 제로의 입이 닫혔다. 모르는 게 더 낫겠지.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 제로는 메가두타 궁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아샤가 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같이 놀아요!”
이번엔 웃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다음을 너무 쉽게 기약하는 경향이 있었다.
○●○
조합 마물 게시판을 둘러보다 보면 온갖 종류의 마물 수배서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기상천외한 의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수배서도 다수 존재했는데, 그렇게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 혹은 가져갈 수 없는 ― 수배서들은 주기적으로 영웅, 혹은 빛의 전사라고도 불리는 사람이 싹 가져가서 해치운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제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제로는 그처럼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기에 대부분 현실적이고 무난한 마물 위주로 골라잡았다.
오늘도 그러려던 참이었다. 적당한 전투 상대가 되어줄 수 있으면서 보상도 나쁘지 않은 마물을 찾아 게시판의 수배서를 뒤적이는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당신이 제로인가요?”
돌아보니 나이 지긋한 노인이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노인은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다가 제로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제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샤라는 아이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키는 이만하고, 하늘색 눈에 푸른 단발머리를 한 휴런 여자아이예요.”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샤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아요. 워낙에 자주 사라지고 멋대로 돌아다니는 아이긴 하지만, 오늘은 꼭 집에 있어야 하는데……. 최근에 아이가 당신의 이야기를 자주 하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아는 바가 있을까 하고 물어봤지요.”
“오늘은 만난 적 없어.”
“그럼 혹시나 돌아다니다가 아이를 만난다면 마니샤 할머니가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탁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 아이는 엄마보다도 저를 더 신뢰하곤 하니까요.”
“아, 당신이 그 사람이었군.”
제로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노인은 조금 당황했으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흔들릴지언정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에서 제로는 아샤가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역으로 제로의 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마니샤는 제로에게 악의도 적의도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샤의 말대로 섬뜩한 구석이 있으나, 세월이 쌓아 올린 혜안은 그 안에 잠든 마음을 어렴풋이 읽어냈다. 믿어볼 법했다.
“만약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제대로 사례하지요.”
“기억해 두지.”
노인이 돌아가고 나서 제로는 마저 수배서를 간추려 챙겼다. 도시를 가로질러 라자한 밖으로 나갈 때까지 거리 구석구석을 신경 써서 살폈지만 아샤는 보이지 않았다. 진안문에 다다를 때까지 아이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제로는 잠시 멈춰서서 망설이다가, 금방 몸을 돌려 라자한 밖으로 나섰다. 계획했던 것보다 사냥을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낫을 고쳐 쥐는 제로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토라나 관문을 나가서 아래쪽 길로 접어들면 바로 숲의 초입부였다. 현지 사람들이 승가의 숲이라고 부르는 이 울창한 밀림은 다른 지역과 공기부터가 확연하게 달랐다.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도시 안과는 달리 숲은 야성적인 생명력이 넘실거렸다. 말소리 대신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화려한 건물의 기둥 대신 거대한 나무가 팔을 뻗어 하늘을 가렸다. 원래는 수호자들이 곳곳의 유적을 관리하며 순찰을 다녔지만, 종말 이후로 많은 수호자가 다치거나 죽으면서 인적이 더 드물어졌다. 숲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팔라카 마을 부근에서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을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평범한 사람이 지나다니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제로는 언제나처럼,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인다.”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허공을 박차고 뛰어오른 검은 인영은 마물이 무언가를 눈치채기도 전에 낫으로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제로가 가볍게 착지해서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쓰는 동안, 마물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돌아봤을 땐 이미 마물을 구성하고 있던 에테르가 흩어지고 있었다. 육체는 사라지지 않고 대신 썩어서 땅으로 환원될 것이다. 생명의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에서는 당연한 죽음의 풍경이었다. 흐트러졌다가 다시 뭉쳐 부활하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 가는 일시적 죽음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주 먼 과거, 어둠이 범람하기 전 13세계에서도 자연스러운 죽음과 순환하는 흐름이 보였을 텐데. 기억이 너무나 희미했다. ‘보이드’가 아닌 시기가 정말 존재했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물의 시체로 다가간 그는 신속하게 해체를 마치고 필요한 부위를 챙겨서 떠났다.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다른 짐승들과 마물들을 마주쳐봤자 괜히 귀찮기만 하니까. 처음에는 이 일련의 행위도 어색했으나 범람 이전의 그에게는 익숙한 과정이었으므로 다시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로는 계속해서 수배서에 적힌 마물들만을 정해진 개수만큼만 골라서 잡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이 마지막인가…….”
힐끗 바라본 수배서 위쪽에 찍힌 별의 개수가 제법 많았다. 정예 마물이라 했던가, 가져온 수배서 중에서는 가장 어려운 녀석이니 신중하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수배 대상인 ‘바즈라쿠마라’는 처음 잡아보는 마물이었지만 생김새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설명을 듣기로는 바즈라랑굴라라는 이름의 마물 중에서도 특히 크고 힘이 넘치는 개체를 두고 바즈라쿠마라라고 부르는 듯했다. 바즈라랑굴라라면 제로도 이전에 몇 번 사냥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봐 둔 특징을 생각하며 공략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크시로다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찬찬히 주위를 살피던 제로는 팔라카 마을 북쪽, 토라나 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목표를 발견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보통의 바즈라랑굴라보다는 확실히 크기가 컸다. 바즈라랑굴라는 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꼬리를 사용해 아므라 열매를 단단히 잡고 구애 활동에 이용한다고 했다. 수배서에는 바즈라쿠마라의 꼬리를 특히 신경 써서 가져와달라고 적혀 있었는데, 큰 개체라서 그런지 꼬리에 잡혀 있는 열매 또한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문득 며칠 전 아샤와 발샨 시장에서 과일을 사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가게에 있던 대형 아므라 열매도 저것보다는 작았던 것 같은데.
…사냥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제로는 차분히 숨을 내쉬며 잡념을 털어냈다.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신경은 목표 쪽으로 집중시켰다. 등껍질이 워낙 단단하니 뒤에서 기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면에서 접근해 큰 타격을 입힐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마물의 약점을 찾기 위해 감각을 확장하던 중에 근처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에테르의 기척. 그리고 여기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도와… 주세요……. 살려…… 누구……”
꺼질 듯 희미한,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짜내고 있는 신음이었다.
“설마,”
생각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커다란 뱀 형태의 마물, 부잠가들이 주로 서식하는 강 너머 어느 지점에 수상할 정도로 많은 수가 몰려 있었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 서로를 견제하는 모양새였다. 쉭쉭 거리며 움직이는 긴 몸통들 사이로 눈에 익은 푸른 단발이 보였다. 제로는 이를 악물었다. 뛰면 늦는다. 바로 왼손을 치켜들고 마력을 모아 뭉친 후, 부잠가들 쪽으로 힘껏 던졌다. 어두운 초록빛의 구가 아슬아슬하게 닿아 크게 터지며 동시에 마물들의 비명이 숲을 울렸다.
“이쪽이다!”
일부는 놀라 흩어졌고, 나머지는 극도로 화난 상태로 제로에게 달려들었다. 부잠가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웅크려 덜덜 떨고 있던 아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제로를 발견하고서야 표정이 활짝 피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에 질려있던 어린아이가 현명한 판단을 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다음 행동은 제로도 예상하지 못한 종류였다. 벌떡 일어나 제로에게로 달려오려 했던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소녀는 금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파서 금방이라도 울 듯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아샤에게 제로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기다려.’
다행히 알아본 모양인지 아샤가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는 안심하고 아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아이가 휩쓸리지 않을 만큼 멀어져서 싸울 생각이었다. 도망가지 않고 따라붙는 부잠가는 모두 다섯. 너무 멀리 가면 다시 아샤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사방에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 부잠가들을 향해 제로는 침착하게 낫을 겨누었다.
혼자 대치하고 있자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빵 하나를 받고 목숨을 걸었던 일. 심지어 이번 싸움에는 먼저 받은 대가조차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에 해보고 싶었다. 예전의 제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제로가 아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이는 제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뭐라 입을 뻐끔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멀어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응원인 듯 보였다. …‘응원’이라니. 제로에게는 한없이 낯설고,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말보다도 더 그리웠던 종류의 호의였다. 이것이라면 충분한 이유가 되어줄 수 있을까? 제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상대를 가늠하던 다섯 마리의 부잠가가 제로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순간 어떤 인영들이 겹쳐 보였다. 아주 먼 과거, 한없이 오만하고 비열한 눈빛을 흘리던 메모리아술사들. 힘을 가지고도 약탈만을 일삼던 배신자들이 뱀의 모습 위로 일렁였다. 그들로부터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싸우던, 그러나 힘이 모자라서 울분에 찬 채로 바닥을 긁어야만 했던 과거의 제로가 만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작은 소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면 이 싸움은 변화의 결과인 동시에 성장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너무 느리군.”
빙글 돌아 거세게 베어가는 낫의 궤도가 부잠가의 몸통을 스칠 때마다 검은 피가 튀어 올랐다. 제로를 노리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독들도 제법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힘든 기색 없이 그 사이로 적당히 몸을 틀거나 마법으로 만들어 낸 공중의 발판을 밟아가며 싸우는 제로는 마치 유려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음악 대신 흥분한 마물들의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숲을 울렸다. 박수갈채는 없었지만 제로를 공격하려던 부잠가들이 엉켜 부딪히는 소리가 그것을 대신했다. 그의 호흡은 숲에 부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다만 일정한 기합 소리만이 그가 전투에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싸우는 내내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낫을 재차 휘둘렀다. 오래 지나지 않아 힘을 잃은 마물들의 몸뚱이가 하나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지막 부잠가의 목을 날려 버리고 사뿐히 땅에 발을 디딘 제로는 낫에 묻은 살점들을 털어내자마자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하러 달려갔다.
“물린 곳이 있나?”
“없어요.”
“다친 곳은?”
“넘어져서 긁혔어요. 그리고, 음, 아까 발목을 삔 것 같아요.”
“다른 이상은 없나.”
“어…… 다리에 뱀들이 토한 초록색 액체가 조금 튀긴 했는데.”
제로의 표정이 굳었다. 아샤는 제로의 질문에 전부 또박또박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갈수록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고 말이 어눌해지자 점점 울상이 되었다.
“답답해요. 너무 어지러워요…….”
그래도 의식이 유지되고 있다면 당장 위험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제로는 먼저 침착하게 부잠가들의 시체에서 피와 독을 빼내어 챙겼다. 정확히 어떤 독에 당했는지 샘플을 제시할 수 있다면 담당의가 누가 되어도 치료 과정이 훨씬 원활해질 테니까. 최대한 서둘렀는데도 아이는 벌써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로는 아샤를 가볍게 안아 들고 라자한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태수님의 손님’이라는 신분은 제로의 생각보다 더 굉장한 자격을 부여하는 듯했다. 일반 의사가 아니라 알키미야 제약당의 최고의 연금술사들이 아이를 맡아 치료하게 되었다.
“아이는 해독을 마치고 잠들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군.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
“챙겨오신 피와 독의 상태가 훌륭하던걸요. 아이의 치료에도 도움이 됐지만, 재료로서의 가치로도 최상급이에요. 제로 씨가 괜찮다면 저희가 매입해도 될까요?”
이어서 연금술사가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부잠가의 독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잘 다루면 마취제나 치료 약의 재료로서도 훌륭한 효과를 발휘하는 연금재라고 했다. 원리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적을 죽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생명을 구하는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제법 흥미로웠다. 다음에 마물 토벌을 나갈 땐 여유 되는 선에서 마물의 독도 함께 채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난 따로 쓸 일도 없으니.”
“잘됐네요! 그러면,”
“치료비도 그걸로 대신하면 되겠군.”
“앗? 비용은 태수님께서 처리하시기로……”
“아이 덕분에 얻은 전리품이기도 하고. 곤란하다면 비밀로 해라.”
연금술사가 뭐라 말하며 말렸지만, 제로는 제대로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제약당을 나와버렸다. 메리드의 주막에서 얻어먹고 있는 양도 충분히 많았다. 알키미야 제약당에서까지 빚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에테라이트 광장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발샨 시장 옆의 긴 계단을 올랐다. 모퉁이를 몇 번 돌고, 다리를 건너면 카마 구역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아샤의 집 앞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샤의 어머니와 기다렸다는 듯 제로를 차분히 응시하는 노인, 마니샤가 있었다.
“오셨군요. 아샤는 찾으셨나요?”
“팔라카 마을 북쪽 숲에서 발견했다. 부상이 있어서 제약당에 맡기고 오는 길이다.”
“아샤! 어쩌다가 그 위험한 곳에!”
아샤의 어머니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는 반면 마니샤는 침착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노인은 제로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한 사례를 해야겠군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나요?”
소녀의 응원에 이어 할머니의 감사라. 기대하지 않은 반응을 재차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난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는 못했다. 받을 자격이 없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아이를 하루에 둘이나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샤라도 목숨을 구한 것은 분명 당신 덕분입니다.”
둘? 듣자마자 짚이는 것이 있었다. 노인과 여성의 뒤편, 아샤의 집 안으로 감각을 집중시키니 전에 느꼈던 희미한 에테르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의 이야기인가?”
“네, 오늘 하늘로 떠났습니다. 아샤가 이야기하던가요?”
“날 보자마자 사신이냐고 묻더군.”
노인은 이해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쪽이야말로 안타깝게 됐어.”
“마지막은 편안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누나를 간절히 찾았는데.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고개를 떨군 노인의 모습을 제로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아샤의 어머니 쪽도 눈이 부어 있었다. 아샤 또한 이 자리에 있었다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픈 동생을 그렇게 아끼던 아샤가 왜 자리를 비우고 한참 떨어진 숲에 있었던 걸까.
“아무튼, 은인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굳이 받아야만 한다면, 의뢰의 보수가 아니라 목숨값을 본인에게 직접 받겠다.”
“…그렇다면 이것이라도 받아주세요. 어미로서 일부나마, 보증금을 대신한다 생각해 주시고.”
아샤의 어머니는 여전히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표정은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해 보였다. 그녀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투명한 보석이 박힌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집어 건넸다.
“얘야, 그건…….”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찮은 것을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외부에서 오신 손님이라 들었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소원을 담아서 보석을 선물하는 것은 라자한의 풍습 중 하나지요. 방금 드린 장신구에는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것만은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제로의 손바닥 위로 놓인 펜던트는 햇빛을 반사하며 찬란하게 빛났다. 그냥 보기에도 평범한 보석이 아닌 듯하여 제로도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품에 넣었다. 정말로 일개 보석이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미심쩍었지만, 아니라고 해도 그 가치가 바래지는 않는 법이다.
“잘 간직하겠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또 다음을 기약한다. 무언가 끝이 나도,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하기에 가능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망설이던 제로가 중얼거리듯 말하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래, 다음 만남까지 건강히 살아있길 바라지.”
눈앞의 인간들은 ‘다음’이라는 단어가, ‘만남’이라는 약속이,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이 13세계 출신의 반요에게 얼마나 어렵고도 모순적인지 알까. 알 리 없는 여인과 노인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
원초 세계에 와서도 명상은 그만두지 않았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깊이 잠겨 들며 헤아리는 기억은 차원의 틈에서 본 광경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점멸하는 시간 사이로 파편 같은 흐릿한 장면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제로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하면서 가만히 숫자를 세었다. 처음은 굶어서 죽었다. 두 번째는 떨어져 죽었다. 그다음엔, 그리고 또 그 이후엔…… 열두 번을 세고서 멈췄다. 열세 번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열세 번째 죽음이 될 수 있었던 순간마다 빛의 전사와 그의 동료들이 끼어들어 그를 건져 갔다. 바르바리차의 영역에서 한 번, 갈레말의 설원에서 또 한 번.
바르바리차의 영역에서 기절했다 깨어났을 땐 보이드가 아니라 원초 세계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눈을 떴다. 갈레말의 설원에서 잠시 잃었던 의식을 되찾았을 땐 새로운 감정이 눈을 떴다. 그것은 뒤집으면 과거의 낡은 자신이, 보이드에서 홀로 길게 방황하던 그가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까. 제로라는, 시작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그는 새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 되짚어 보면 손익에 집착하고 에테르를 갈망하는 자신도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열세 번째 죽음은 무엇인가.
답이 한 번에 나오지 않으니, 이번에도 에테르 보급을 먼저 하러 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도달한 메리드의 주막에서 제로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샤였다. 조르르 달려와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묻기에 제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해 보이는군.”
“덕분에요! 정말 고마워요. 진짜 감사해요!”
궁금한 게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나, 무엇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제로가 먼저 묻지 않아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았다.
“저번에요, 숲에서 만났을 때! 솔직히 엄청나게 놀랐어요. 꼼짝없이 먹힐 것 같아서 죽음의 신이 마중 나온 줄 알았는데, 제로랑 똑같이 생긴 거예요! 그러고는 그 낫으로 슉슉, 이렇게, 엄청 멋있게 뱀들을 다 죽여버렸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아니라 뱀들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이었구나!”
“그 난리통에서 의식을 유지한 게 신기했다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티고 있었군.”
“헤헤. 그리고 동생 때문에… 사실은 그날, 엄마도 할머니도 자리를 잠깐 비웠는데 동생이 너무 아프다고 해서 급한 대로 제가 아는 약초를 캐러 간 거였어요. 그러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뱀들에게 들켜버렸고요.”
“그러다 죽을 뻔했고.”
“제로가 달려와서 구해줬죠!”
“애초에 널 구하려고 거기 있었던 게 아니다.”
제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으나 아샤는 개의치 않고 밝은 웃음을 재차 터뜨렸다.
“엄마가 펜던트를 드렸다고 하셨어요. 그거 원래 동생 거였는데.”
“꽤 비싼 보석이라 들었다. 지금이라도 돌려받길 원하나?”
“아뇨? 이제 제로 거잖아요! 그리고, 이것도요.”
아이는 품을 뒤적이더니 알록달록한 색깔의 매듭 끈을 꺼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끈들이 이리저리 엮인 모습이 조금 엉성하기는 했지만 단번에 풀리지 않을 만큼은 짜임새가 있었다.
“하나만 고를 수가 없어서 좋아 보이는 색깔을 다 넣었어요! 제가 직접 만든 신연의 끈이에요.”
“신연의 끈?”
“인간과 신들 사이에 연을 맺어주고, 나쁜 운명을 물리치는 가호를 내리는 부적이래요. 예쁘게 완성하는 것보다 마음을 담는 게 더 중요하대서 할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열심히 엮었어요.”
아샤는 매듭 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비록 제 약초는 너무 늦어서 동생을 살리지 못했지만……. 엄마의 펜던트랑 제가 만든 신연의 끈이 제로만큼은 꼭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아샤의 목소리에 울먹거림이 더해졌다.
“신수님의 가르침 중에 이런 말이 있대요. ‘삶이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며 죽음이란 삶으로 향하는 길이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떠나는 자를 비탄으로 붙잡아서는 아니 된다. 고통을 견디면서도 계속 걸어 나가다 보면 길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라.”
“네, 어제 엄청 많이 울었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말해주셔서 기다려 보기로 했어요.”
“동생을?”
“아마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치만.”
훌쩍거리던 아샤는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닦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대를 괴롭히는 고통은 이윽고 그대를 강하게 하리라. 하나하나가 달궈진 쇠를 내리치는 망치가 되어, 그대를 강한 검으로 만들리라.”
“그것도 신수님의 가르침인가.”
“맞아요. 다시 만났을 때, 강한 검이 되어서 제가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로처럼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강한 검이 아니다.”
“앗, 맞아요. 강한 낫이죠!”
“그게 아니라…….”
한숨을 푹 내쉬는 제로의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샤는 싱긋거리며 제로에게 매듭 끈을 쥐여주었다.
“저, 아직 어리고, 돈도 없어요. 그치만 열심히 노력해서 목숨값은 꼭 갚을게요. 제로는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죠?”
“…노력은 해보지.”
“와아!”
이곳의 인간들은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고,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만큼 약하다. 그런데도 눈부신 강인함을 지녔다. 꿈과 희망은 절망 앞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마음을 성장시킨다. 그렇게 자라난 마음이 자신과 타인을 지킨다. 부러울 정도였다.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정말로 귀중한 것은 그 가르침을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브리트라는 인간들의 이런 반짝임에 매료된 것일까. 그렇게 사랑에 빠져서 그와 같은 종족이 아님에도 라자한의 백성들을 아낌없이 돌보는 걸까.
한참 재잘거리던 아샤는 뒤늦게 심부름을 위해 메리드의 주막에 들렀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남겨진 제로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방금의 대화를 곱씹다가, 미릴을 불러 평소와 같은 식사를 주문했다. 여전히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맛있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교훈을 얻을 만큼 굉장한 일이 늘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의 기준으로는 평범한 것에 가까운 일상들이, 제로의 기준으로는 낯선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그가 듣고 느끼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시간은 거대한 흐름으로 그를 이끌 것이다.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으리라. 그것은 분명한 이익, 혹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의 열세 번째 죽음은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둘은 공존할 수 있다. 깨달음은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과도 같았다. 얼어붙은 마음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희망이 속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찾아 헤매던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모자를 푹 눌러쓰는 대신, 살짝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제로가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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