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음의 기억
파이브는 죽었다. 이유도 어이가 없었다. 추운 겨울밤 밖에 나가 담배를 피기 싫었던 한 사람 때문에 그날 밤이 통째로 불타올랐다. 다행히 곤한 잠을 자는 도중이었기에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미래가 사라졌을 뿐이지.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평화로우니까. 구름이 잔뜩 쌓여 뭉쳐진 것 같은 바닥은 부드러워서 눕기 딱 좋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잔잔한 노랫소리는 듣기 괜찮았다. 사후 세계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된 편 아닐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같은 처지가 된 아파트 주민들이 넋을 놓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눈이 띄었다. 아직 어린데 안타깝게 되었다.
"헤에. 뭔 사람이 이렇게 많다냐."
"그 뭐냐 아파트? 거기에서 불 났다잖아."
이질적인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온통 민트색인, 비니를 쓴 남자와 검은 날개를 달고 있는 남자. 딱 봐도 인간은 아니게 생겼는데. 둘은 사람 수를 세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곤 사람들에게 작은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줬다. 누구는 빨강, 누구는 노랑, 누구는 파랑, 또 누군가는 하양.
파이브는 제 손에 쥐여진 하얀색 티켓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뒷면에 크게 써진 [환생]. 이게 뭔 소리야. 죽자마자 환생인가 싶었던 것도 한순간.
"이동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눈부신 빛이 사람들을 감쌌고,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진짜 이상해. 사후세계는 다 이런가. 슬슬 잠잠해진 것 같아 눈을 떴을 때는 학교처럼 생긴 건물의 정문이었다. 첫 감상은 넓다, 정도. 아니, 죽어서까지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안녕~ 신입생이네. 여기는 이후에 환생을 할 영혼들을 위한 학교야. 나는 네 룸메이트 겸 안내를 도와줄,"
"플래그?"
어떻게 이름을 알았냐며 멋쩍게 웃는 모습은 분명한 플래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야.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
플래그는 친절했다. 그것도 과도하게. 과거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진심으로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늘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은 이젠 너무 질려 징그러울 수준이었다. 과거를 잊지 못해 환생을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떠보고 새로운 인연들에게도 물어봤지만 플래그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함은 확실했다. 주워 들은 바로는 전생에 관심이 없어질수록 기억이 흐려지고, 그대로 시간이 계속 지난다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고는 하는데.
학교-대기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멋이 없어보여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에는 기억이 있는 사람이 30%, 없는 사람이 70% 정도 된다고는 했지만, 파이브는 플래그가 잊음을 택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또 나만 기억하고 걱정했지.
"많이 복잡해 보이네. 뭔 걱정이라도 있어?"
너요 너. 너 때문에 복잡하다고. 하지만 알 리가 없는 플래그는 그저 순수한 눈을 빛내며 파이브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눈치만 참 없어 보이는 걸 빼면 다 좋을 텐데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3개월 정도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사실 포기할 때가 되긴 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던 게 죽은 시점 기준으로 1년하고도 3개월이 지났었다. 그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를 노릇이고, 잊을 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잊은 것이겠지 싶었지만.
"진짜 치사하다...."
"또 뭐가?"
파이브는 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들판 위에 드러누웠다. 이곳의 장점 중 하나는 우주가 정말 잘 보인다는 것. 새까만 바탕에 촘촘히 박혀있는 광원들은 24시간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적이면 꼭 친구들이랑 이런 식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밝다. 조금은, 현재의 플래그의 맑은 눈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파이브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환생을 하게 된다면 과거의 기억을 잃는다고 하니까, 날 기억을 멋하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건 너무 지치고 미련한 일이다. 아쉽다면 아쉽긴 하지만, 상대가 과거를 잊고 나아가는 마당에 혼자 과거에 매여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평소와 같이 침대에 드러누워 할 일 없이 뒹굴거리고만 있을 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건.
플래그는 환생을 안 하나?
학교는 환생을 위한 대기 장소라고 했고, 파이브가 만났던 영혼들은 대부분 3개월에서 4개월 내에 환생을 했다. 그런데 본인이 말하길 6개월 이상은 족히 이곳에 있었던 플래그는 여전히 환생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못한 건지 안한 건지. 전생을 다 잊은 마당에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있는가 싶다가도 가끔 저 혼자 서서 공허한 표정을 지었기에 괜히 또 신경쓰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플래그에게 이에 관해 물어보려 했건만, 먼저 선수를 친 플래그 탓에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파이브, 너 환생할 날짜가 잡혔대."
환생까지 남은 기간은 일주일. 일상은 변하는 것이 없었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도 전혀 없었다. 느리면 느렸지. 정규 수업이나 함께 하던 활동들도 전부 끝이 나버려서 운동장에서 다른 영혼들(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거나 들판에 누워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이런 건 이틀 정도면 다 질려버려서 침대에만 누워있을까 하다가도 여전히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그곳에 있었기에 쉬이 발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그냥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환생을 앞둔 영혼에게 허락된 공간은 넓었다. 어느 날은 동쪽으로, 어느 날은 서쪽으로 무작정 걸어보았다. 여러 영혼들과 사후세계를 운영하는 이들이 바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도 만날 수 있었다.
"많이 심심해 보이네?"
"행크~ 안 바빠?"
사후세계에 온 첫날 스치듯 보았던, 검은 날개의 사신 행크. 주로 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 분류하기고 가끔은 땡땡이치고 싶을 때 파이브 옆에 와서 밍기적거리다가 사라지곤 한다. 자기 딴에는 특별해 보인다나 뭐라나. 파이브의 심심함을 달래줄 수 있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친해졌던 영혼들은 다 환생해버렸고 모 룸메이트는 마음을 놓았다 하더라도 괜히 신경만 쓰였다.
"5개월 만인가? 오래 걸렸네… 내가 일하던 기간 중에서는 네가 제일 오래 있었어."
옆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던 파이브의 다리가 멈췄다. 차가운 바람에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행크. 플래그는 환생 안 해? 8개월 가까이 된 걸로 아는데."
차마 당사자에게는 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그에게는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무언가 답을 내게 주지 않을까 하며 툭 내뱉었다.
"그거는…"
행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파이브는 한참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보내는 밤이었다. 그날은 플래그가 들어오지 않았다.
*
파이브는 환생을 앞두고 환생 포털 앞에 섰다. 관리인은 이 포털에 들어가면 과거는 무의식에 묻어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고, 파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는 학교에서 한동안 함께 지냈던 몇몇 영혼들과 행크가 배웅을 해주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빨간 깃발.
"플래그. 진짜 나 몰라?"
충동적이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노라 하면 거짓말이고, 기대를 했노라 하면 또 그건 애매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로 미련이 없냐고. 과거를 잊을 준비가 되었냐고.
플래그는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5개월동안 같은 방에서 지냈는데 모를 리가 있겠냐? 조심히 가."
그 대답 이후 파이브는 과거와의 작별을 고했다. 한 점의 미련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 과거에 넣어놓은 채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있잖아 파이브. 사실은 말이야. 나 기억력 진짜 좋다?
지은 죄가 많아 이곳에 묶여 있지만, 이제는 추억 한 켠에 밀려나 그저 존재만 하고 먼지가 쌓일 뿐인 기억이겠지만, 네가 새로운 삶을 얻고 우리 둘의 기억을 잃는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에서 모든 것을 다 끌어안고 미련하게, 또 미련하게 너를 지켜보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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