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의외로 쉽게 죽지 않는다.
도원괴이담8
천도량이 처음부터 몸을 움직이는 모든 일체를 거부한 이는 아니었다. 사람 좋아한다고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체력이 없어뵈지는 않는다. 다만 그또한 물으면 흥미가 있으니 몸이 절로 움직인다 답할 뿐이다. 종내 천도량이 지독한 흥미본위로 일을 처리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습관의 원류를 거슬러 오르면 학습된 결과가 나온다. 무武하면 빠지지 않는 청랑의 천씨 가문. 그 가문의 종손이 무예를 익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청랑인이라면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 그야 사생아의 소문이 도는 반푼이에 불과했으므로. 밤에 보는 폭포와도 같이 덮쳐온다하여 흑단黑湍이라 이름 붙은 특유의 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실로 배울 의지도 없을 뿐더러 익힌다하여도 재능의 한계에 가로막혔으리라 짐작한다. 짐작한다고 말한 까닭은 아직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여겨서다. 적어도 천도량은 그리 생각했다. 어정쩡한 재능을 갈고닦느니, 차라리 관심없는 척 하는 편이 생명연장에는 용이한 도구였으리라. 도량의 어미도 알았다. 아직 한품에 안길 정도로 작은 자식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빛깔하나를 제한다면 천씨의 핏줄이 틀림없음을. 소설이라면 이쯤에서 아이가 무술에 재능을 드러낼 시기고, 어미는 괴로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천도량과 어미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재능은 있으나 흥미가 없다. 굳이 개발해야할 재능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재능을 드러낼 연유가 없었다. 어미와 천도량의 행복한 한때는 이러한 순수한 계략을 디딤삼아 이루어졌다.
해마다 손가락 하나씩 접어 아홉이 될 때까지도 마찬가지다. 다섯해 더 지나서 복숭아꽃 내음 가득할 앞날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복숭아 향기 아래 4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도 여전했다. 실내 취미는 솔직히 집에 있을 무렵 대부분 섭렵했다. 별당에서 나가면 득달같이 달려와 눈총보내니 본인의 의지 반,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 반으로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업적에 의거하여 이런저런 살림차리다 보면 지평은 확장된다. 돈이 돈을 불러온다는 이치에 따라 취미도 취미를 불러왔다. 사실 벗의 취미를 즐기다 빠져들곤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많은 취미 중에서 정녕 흥미 한 톨 보이지 않고 냉큼 도망친 취미는 몸쓰는 전반의 것이었다. 체술선생도 포기한 인간. 천도량은 이를 마치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녔다. 사실 자랑스럽진 않았으나 변명삼다보면 그런 어조로 말하지 않곤 베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근 4년간 변화없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시작은 틈에서 요괴가 불려나온 것이었다. 대련도 하고 벗도 사귀고. 천도량은 그 중 전자는 일체 버리고 후자를 택했다. 물론 교류의 도구로서 흥미를 보여 한 두어번 했다. 역시 적성에 맞진 않았다. 그리 여기고 있다가 결국 들키고 만다. 무엇을 얼마만큼. 몸뚱이가 얼마나 연약한지. 진호란의 염려섞인 시선은 괜히 천도량을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얼렁뚱땅 넘어간 저변에는 그런 이유가 도사렸다. 운명이란 신묘해서 복합적인 이유로 기이한 수련이 시작됐는데, 한가지를 더 꼽자면 연이랑의 제안과 악귀의 출몰이다. 악귀, 악귀. 구슬픈 그 이름 말만 들었지.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었다. 청랑의 수도는 안전한 축이었고 청랑의 열가문의 집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가문에서 보호라고 말하는 감시와 홀대를 겪은 것은 적어도 악귀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했다. 이런 이유로 천도량은 악귀를 두려워하되, 능력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확히는 도사에 대한 신뢰가 한 몫했다. 학당을 졸업하면 악귀를 상대할 수 있으리란 근거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깨진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으나, 휘명제와 부상의 이유로 미뤄두었던 수련 첫장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천도량은 어찌하면 자연스러운 이유로 도망칠지 고민하던 수련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이랬다. 자축인묘진- 용을 뜻하는 바로 그 진시에 천도량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무려 수련장에. 차라리 죽여! 등은 고사하고 몇 각이 지나면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거꾸러진다. 왜 이렇게 됐지?
'할 거라면 내가 있는 도원에서 바로 내일부터 시작하라고.'
이 물음에 소위 내일의 나에게 떠넘긴 것이 첫번째 화근이고
'혹 선생이 필요하거든 내게 가르침을 받아볼 테냐?'
는 물음에 이미 약속을 정해버린 진호란과 함께 받겠다고 생떼부린 것이 두번째 화근이었다. 둘과 함께 듣는다면 호란과 이랑의 시선이 서로에게 분산되리라 대책을 강구한 덕이다. 잘나신 머리 덕분에 도량은 결국 두 서무인 가운데에 끼어 수련장을 돌고, 팔을 굽혔다 펴길 몇번 반복했고... 또 그 후로 기억이 날아갔다. 귓가로 아스라이 목소리가 들렸던 기억은 가지고 있으니 뭔가를 더 수행하긴 했을테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도량아, 중간에 멈추면 더 힘들어. 이왕 시작했으니 한 번, 아니 딱 두 번만 더하자."
말은 단호하지만 행동은 다정한 요괴와 말은 다정하지만 행동은 단호한 벗이 만나니 상호보완의 굴레 속에서 끝없이 고통받을 날이 앞으로도 생생했다. 서무인 둘에게서 살아남은 청랑인이 되어보겠다 호언장담했던 스스로의 주둥이를 한 대 쳐야만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사람은 수련을 하면 폭력성이 증가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친절한 벗의 기이하던 눈빛과 가르침은 전문이라는 이가 안타깝게 봤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천도량의 깨달음은 주인을 닮아 천성이 게을러 부단히 움직이는 날이 드물었다. 그만큼 늦게 찾아왔으니, 항상 알고나면 늦었다.
"설마 하지도 못할 일을 시키겠어? 다 할 수 있다니까."
"호란이의 말이 맞다. 수련장을 돌고 나서도 생각보다 쌩쌩하지 않았더냐."
그때는 그거 하나만 했잖아! 부상의 여파까지 계산했다는 그 엄한 다정한 아래 마지막 숫자는 생애 가장 긴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천도량은 정녕 이 수련을 혼절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허나 하늘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역극으로만 두기 아까워 날조하여 올려봅니다. 편히 스루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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