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해바라기가 햇빛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건 다 자라지 않았을 때에만 그렇다.

소녀는 때때로 어린 해바라기와 같았다. 밝고 환한 곳을 향해 걸음 하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들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꽉 찬 사람들과의 한 때, 누군가와 닿는 온기들이 실재함을 알게 되면 자라날까 봐. 다시금 먼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봐. 그때 소녀의 눈은 많은 것들을 담아 눌렀기에 가득 찬 해바라기 씨앗과도 같았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다 자라난 불길한 금빛으로 변모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울 터인 황금은 기시감의 베일 아래에서, 위화감을 뿜어내며 자라난다. 해바라기는 모두 성장하면 더 이상 해를 따라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햇빛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그저 고개를 가만히.

신들의 사랑을 받아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이 땅에서는 눈 색이 바뀐 것 정도로는 이변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마법이라는 수단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의 의복을 바꾸는 것이나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다. 눈 색이 바뀌는 것 역시, 누군가의 의아한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들 의심 받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게 해바라기를 자처하고 있으니. 아니 어쩌면, 그것도 언젠가의 찰나에는 해바라기였기에 누구보다 그 모습을 본뜨는 것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 노을이 내리쬐어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해바라기밭의 절벽 뒤에는, 아직 덜자란 해바라기가 짓눌려 가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못다 핀 해바라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종종 절벽 아래로도 햇빛을 보낸다. 화사하고 화려한 황금의 큰 꽃 보다, 햇빛을 쫓아 열심히 발길질을 해서 올라오는 해바라기를 위해. 또한, 그 해바라기가 발길질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도. 시선이 거두어지고, 뒤따라오는 말을 거는 이들이 없으면 고독감이 쉽게 몰려오기 마련이다. 절벽 위의 해바라기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어린 해바라기가 고독감에 뿌리를 잃고, 언젠가 줄기 마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때, 절벽보다 아래로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이윽고 햇빛이 오로지 자신만을 비췄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도 화려한 황금빛을 빛내고 있다. 그 위광에 현혹되지 않고 절벽 아래에도 볕이 들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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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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