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3화

카리타스에게 편지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바빴던 넉 달간의 기록


“니옌 자매.”

잔뜩 쌓인 고서들 사이에서 고개를 든 시도폰이 창백한 얼굴의 니옌을 맞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나?”

“제 걱정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단장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제가 멀쩡한 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시도폰은 니옌에게 시작의 땅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니옌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학문적 호기심이야 당연히 있지요. 하지만 그게 기사단이 안위와 집행자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크진 않습니다.”

“계속 이런 고서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만족이 된다고 받아들여도 되나?”

그답지 않은 도발적인 어조에 니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도폰은 가장자리가 삭고 변색한 고서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다 읽어봤네. 도서관에서 발췌했던 내용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어. 초대 집행자인 요한께서 시작의 땅 지하에 강력한 악마들을 거두었다는 내용 외에 알 수 있는 게 없었네. 제망과 관련된 기록은, 자네도 알다시피 제망이 멸망하면서 전부 사라졌고,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선 찾을 수 없겠지.”

고서의 뒤쪽엔 니옌이 시도폰에게 주었던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이만한 자료라도 모아둔 것에 경의를 표하지만, 결국 전부 옛 지식일 뿐이야. 지금 당장 시작의 땅에 제대로 악마가 갇혀있는지는 알 수 없고, 아르카눔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예상할 수 없네.”

아르카눔이라는 단어에 니옌이 살짝 몸을 떨었다.

“정 가시겠다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그걸 제안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죠?”

그제야 시도폰도 눈썹에 주던 힘을 풀었다. 평소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니옌이 그를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무리했다고 말했고, 니옌은 이마를 짚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명령했다면 기꺼이 따랐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강제로 끌고 가는 걸 원하지 않아. 다들 자발적으로 자기 일을 해주길 바라.”

“그거 좋은 말씀인 거 같습니다. 그럼 이것부터 처리해주시죠.”

불쑥 끼어든 목소리는 솔라의 것이었다. 그는 서류를 잔뜩 들고 있었고, 그의 뒤엔 크로마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시도폰의 접객용 테이블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시도폰은 순식간에 쌓인 서류의 산을 보고 도대체 저게 다 뭐냐고 물었고, 솔라는 태연한 얼굴로 ‘오순절 동안 밀린 것과 앞으로의 진격에 관한 계획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솔라의 뒤에서 크로마가 명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것 때문에 두 부대장께서 며칠 동안 고민하셨어요. 훈련 지도부터 본부 및 마을 관리, 진격 계획 같은 거 다 짜두셨다고 하니 검토할 게 많으실 것 같네요.”

무슨 사형 선고 같은 말을 그렇게 해맑게 하냐는 표정으로 시도폰이 말없이 크로마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크로마가 슬금슬금 솔라의 뒤로 숨었고, 니옌 사제는 본인의 준비를 하겠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꼼짝없이 서류와 부관에게 잡혀버린 시도폰은 카리타스에게 어떤 일인지 설명해야겠다는 다짐을 미뤄두고 펜을 잡았다.

“먼저, 진격 경로부터 봐야 할 거 같습니다. 현재 브리오소 북서부의 기사단 본부에서부터 북동부의 ‘경계’까지 가는 길은 이미 익숙하실 테니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경계’는 아르모리크 산맥과 보즈 산맥을 따라 형성되어있고, 저희는 이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그 산맥을 따라서 성벽을 건설해두었으니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겠나?”

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초적인 설명은 굳이 할 필요 없었다.

“그런데 아르모리크 산맥이라면 몰라도, 보즈 산맥 쪽으로 넘어가면 그 뒤의 아르덴느 산맥이 있어서 아르모리크 쪽으로 진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이 되어있고….”

시도폰은 솔라를 통해 계획서를 한 번 훑은 뒤 그걸 검토하다가 부대장들을 불러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베론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다. 훈련 계획은 딱히 시도폰이 수정할 게 없어서 그대로 통과되었고, 부대장들은 그 계획에 따라 기사들을 굴리느라 바빴다.

당연히 그들의 부관들도 자잘한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누구도 남부에 이 계획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슈바헨은 저녁 식사에서 시도폰에게 남부의 의견은 어땠는지 물었다.

“….”

시도폰은 포크로 집었던 소시지를 떨궜다. 다행히 바닥이 아니라 접시로 떨어진 소시지는 데굴데굴 굴러가 접시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쳤고, 식사 자리엔 정적이 흘렀다.

베론이 의아한 얼굴로 단장을 바라보았고, 식은땀을 흘리던 시도폰은 보내는 걸 잊었다고 답했다. 곧바로 슈바헨의 꾸지람이 들려올 것을 예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했지만, 의외로 슈바헨은 그를 혼내지 않았다.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군요. 오히려 다행입니다. 사실… 진격 직전까지 알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애써 침착한 척 목소리를 낮춘 시도폰이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분명 중대한 일이니 남부에 알려야 한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슈바헨이 말했다.

“중대한 일이고 알려야 하는 일도 맞습니다. 하지만 미리 알리신다면 출발 직전까지 남부에 이번 작전의 필요성을 증명해야 할 텐데, 그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실지요?”

시도폰은 지난 오순절 연회 이후 열렸던 회의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칼만 들지 않았지 전쟁터가 따로 없었던 회의실에서, 서류 더미에 영혼을 뺏긴 것 같은 사제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시도폰이 고개를 저었다.

묵묵히 식사하던 베론도 슈바헨의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 같다며 시도폰에게 작전에 대해 함구할 것을 권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성녀께도 발설하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네….”

시도폰은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채워야 하나 고민했지만, 곧 그 고민은 쓸모없게 되었다. 일이 너무 바빴던 것이었다. 카리타스의 편지를 읽고 나서 바로 답장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를 쳐다보는 솔라의 눈이 얼른 일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서 그는 잠깐도 이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카리타스에게도, 교황에게도 시작의 땅으로 진격할 거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도폰이 마침내 출격 이 주를 남기고 피데이스에게 그의 서신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부럽군. 남부에 가서도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자주 연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바빠서 자주 확인을 못 할 테니까. 별일 없기를 바라.”

“명심하겠습니다. 이런 대업에 참여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저보다 뛰어난 이들이 있으니 분명 수월하게 해내실 겁니다.”

피데이스는 시도폰의 옆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솔라를 데려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짐을 챙기고 훌쩍 떠났다. 어제 그를 보내는 송별회를 열었을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두코는 두통을 호소했고, 프라이에는 그런 두코를 억지로 깨워서 함께 피데이스를 배웅했다.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왜 정도를 모르고 그렇게 들이붓고 그러는 거야.”

“잘못했어….”

화를 내는 것 같은 말과는 다르게 프라이에가 두코를 보는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런 두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시도폰은 출발 전까지 점검해야 할 게 많다며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갔고, 크로마와 이디스는 제 상관들을 따라 각자의 구역으로 향했다.

솔라가 시도폰의 집무실에서 지도를 펼치며 다시 한번 계획을 정리했다.

‘경계에 도착하고 나서 아르모리크 산맥을 넘어서 옛 공국의 영역까지 간 다음, 제망의 남부를 통해 시작의 땅까지 진격한다. 악마들의 공격에 고립되지 않도록 철저히 주위의 악마들을 소탕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악마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 중간중간 기사들과 잡역부를 동원해서 간이 성벽을 짓고, 주변 정화도 해야지.’

이번 한 번의 진격으로 시작의 땅까지 갈 거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브리오소의 영역이지만 거대한 세 산맥에 가려져 있어서, 국왕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친족을 보내어 다스렸던 옛 공국까지만 가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도폰은 물자 목록이 적힌 서류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창고로 가지. 식량을 제외하고는 전부 실어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부터 미리 점검을 해봐야겠네.”

돌아선 솔라는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들고 그를 따라 창고로 향했다. 다행히 물자에 오차는 없었지만, 출발 직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시도폰은 창고지기에게 잘 감시해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그는 중간에 훈련장에 들렀다가 두코의 부대원들이 크로마에게 지시를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시도폰이 한숨을 쉬며 조용히 훈련장 문을 닫았다.

“두코는 앞으로 술을 좀 못 먹게 해야겠네.”

“동감합니다. 크로마에게 전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솔라도 시도폰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시도폰은 잡역부들이 성벽을 만들 때 사용할 도구들이 멀쩡한지 점검하고, 기사단 산하의 마을에 무슨 일은 없는지 직접 확인하러 내려갔다. 솔라는 그를 따라 다니며 빠뜨린 것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렇게 또 2주가 흘러 마침내 출전하는 날이 되었고, 시도폰은 긴장한 얼굴을 투구로 가린 채 말 위에 올라탔다. 루카는 시도폰의 망토가 제대로 펼쳐져 있는지, 갑옷에 얼룩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폈고, 아무 문제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은 남부로 가는 여정이 아니었으니 루카도 동행하기로 했다. 그는 솔라의 뒤에 서서 뻣뻣한 웃음을 지었다.

“긴장했습니까?”

솔라의 질문에 루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설레기도 하네요. 이런 걸 직접 보게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함께하는 느낌도 들고요.”

시원하고 건조한 공기가 맑은 하늘 아래에서 살랑거리며 기사단을 맞았다. 기사단 중에서 마을의 치안을 담당할 서른 명을 남겨두고 대부분이 출정했으니 인원을 확인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잡역부 인원과 식량의 개수까지 전부 점검한 뒤, 시도폰이 출정을 명령했다. 그들은 먼저 ‘경계’로 향했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보초들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황량한 대지가 펼쳐졌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국이었던 곳에, 사람의 흔적이라곤 무너진 건물밖에 없었다. 시도폰이 무리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그들을 이끌었다.

프라이에와 이디스, 베론이 그 뒤를 따랐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두코와 크로마는 무리의 중간쯤에 있었다. 한참을 이동하던 기사단은 한 곳에 멈춰섰다.

“여기에도 교회가 있었군.”

시도폰이 중얼거렸다. 집행자들이 그려져 있었을 그림은 다 녹거나 부서져 없어졌고, 누군가를 조각했던 동상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런데 저 그림만 멀쩡하군요.”

프라이에가 가리킨 곳은 성화 시리즈를 그릴 때 어떤 교회든 간에 빼먹어서는 안 되는 그림이 그려진 곳이었다. 신께서 세계를 만드실 때를 묘사한 그림으로, 감히 신의 얼굴을 인간이 함부로 그릴 순 없었으니 그 부분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너른 대지에 산만 한 손 두 개를 얹어둔 이가 하얀 얼굴로 그 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목구비가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림을 본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법하게 그려내는 것이 화공의 의무였다.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그 그림만 찬란한 하얀색을 뽐내고 있었기에, 프라이에가 그쪽을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저쪽도 봐주십시오.”

이번엔 두코였다. 그가 가리킨 그림에서 신은 광휘로 등장했다. 집행자에게 그의 운명을 알려줄 때의 모습이었다. 그 둘 외에는 멀쩡한 그림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악마한테 당한 거로 보이는 시신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동상에 놓였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악마도 사실 신을 숭배하는 거라든가.’

두코는 옛날 캐서린 사건 때 이디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겠냐며 고개를 저은 두코가 말없이 두 그림을 보고 있는 시도폰에게 다가갔다.

“괜히 이런 데 시간 빼앗길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높게 걸려있는 그림이니 부수는 것도 귀찮다고 판단하고 가버린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지금 당장 이걸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어차피 이 주위엔 살펴보려던 것도 없었으니 빨리 가던 길이나 가는 게 좋겠군.”

찜찜한 마음을 안고 시도폰이 진군을 명령했다. 기사단은 교회를 지나 말라버린 호수, 쓰러진 나무들로 가득한 숲, 기괴한 색으로 물든 언덕을 넘어 마을에 도착했다. 정확하게는 마을의 흔적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살았던 곳이었다.

“오는 내내 악마를 본 적이 없네요.”

이디스의 말에 두코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입 앞으로 검지를 들어 올렸다.

“쉿, 꼭 그런 말 하면 튀어나온다고.”

놀란 이디스가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다행히 악마의 곡성이나 기사의 비명 따위는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둘 사이에 끼어서 앉아있던 시도폰은 이대로 악마들이 시작의 땅까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두코의 경고에 ‘이런 생각도 하면 안 되는 건가?’라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프라이에가 다가와 진지 구축이 끝났다고 전했다.

“수고했네. 어차피 내일 다시 출발해야 하니 가볍게 지으라고 했는데… 다들 그렇게 한 것 같군.”

“네. 날씨도 그렇고 이런 곳을 적절한 때에 발견한 것도 그렇고, 초반부터 운이 좋네요.”

그런 식으로 3일은 무탈한 여정이 이어졌다. 악마들이 집행자의 기운을 느끼고 먼저 도망친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악마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위험한 지대도 나오지 않았다.

크로마가 말 위에서 지도를 펼쳤다. 솔라는 그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지만, 크로마는 괜찮다고 답하며 다시 지도를 접었다.

“브리오소에 속한 공국이라 지도가 상세해서 다행이에요. 이대로 가면 금방 국경선이었던 곳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옛 기록에 따르면 도버 강은 매우 넓어서 양국이 자연스럽게 그걸 국경으로 삼았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 강일지 기대되는군.”

시도폰이 눈을 빛냈다. 답답하다며 투구는 벗어서 루카에게 벗긴 지 오래였다. 솔직히 말하면 갑옷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얌전히 입고 있는 것이었다.

프라이에는 진정하라고 말하면서도 흥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뒤에서 그 둘을 지켜보던 크로마는 이 두 사람이 호수 외의 커다란 물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일행은 커다란 다리 앞에 도착했다. 브리오소와 제망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처음 공국 쪽의 지도를 받아본 시도폰이 도대체 국경선에 왜 둘을 잇는 다리가 있는 거냐며 놀랐던 그 다리였다. 대부분의 교역은 배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도저히 뱃삯을 마련할 수 없는 상인들을 위해 두 나라에서 공동 지출하여 지었던 다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리가 멀쩡한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다리를 장식했던 조각상들은 깨지거나 풍화되어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두 나라의 양식을 반반씩 담은 다리는 군데군데 갈라진 것 같았다. 무리의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저걸 건너는 거라고요?”

“건너다가 무너지는 거 아닌지 몰라….”

“요새도 짓기 전에 관부터 짜야 하려나.”

기사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잡역부들이 한껏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기사들이라고 해서 그런 다리의 상태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은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술렁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잠깐 귀를 기울인 프라이에가 시도폰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건너는 거면 몰라도 수레는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것도 위험 요소가 될 것 같고요.”

“그래, 불안하니까 빨리 가고 싶다고 서둘렀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네.”

그는 이디스를 불렀다.

“자네 신성력으로 다리를 보수해볼 수 있겠나? 다른 기사들의 힘은 다 파괴와 관련된 것들이라서 쓰기 힘들 것 같네.”

이디스는 균열을 유심히 보더니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평소에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던 다른 사제들을 데려온 이디스가 그들에게 구역을 지정해주고 시도폰의 지시대로 다리를 보수했다. 옛 사람들이 돌을 쌓아서 만든 다리에 신성력이 냇물처럼 스며들었고, 시도폰을 필두로 기사들이 먼저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다 건너고 나서야 잡역부들이 안심하고 다리를 건넜고, 마지막으로는 이디스와 사제들이 건너왔다. 다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쏟았던 이디스가 무사히 반대편 땅에 착지했다. 그는 숙였던 허리를 곱게 펴고 사람들의 박수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살짝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도폰은 그들의 환호를 갈무리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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