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2화

기사단이 떠나고 난 뒤, 남부

카리타스는 기사단을 배웅하고 난 후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루한 서류, 지루한 기도를 반복하며 하루를 다 보냈을 무렵, 메릭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시만요, 이것까지만 보고 하죠.”

손을 들어 메릭의 말을 멈추게 한 카리타스가 서류 하나를 붙들고 끙끙거리다가 한참 후에 내려놓았다. 지친 표정으로 미간을 짚은 그는 메릭을 돌아보지도 않고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는… 당신께서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카리타스는 질문의 의도를 추측할 수 없었다. 가장 무난한 대답이라고 하면 호위 기사라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게 궁금했을까?

‘호위 기사인데 왜 그렇게 멀리 두냐고 따지려는 건가?’

“당신은 제 호위 기사죠. 자격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나요?”

“아뇨, 그런 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는 태도에 카리타스가 일어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카리타스는 일그러진 표정을 마주하고 살짝 물러섰다. 그런 반응에 메릭도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대답을 독촉하는 듯, 그의 눈은 카리타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당신께선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카리타스는 손으로 뒤의 책상을 짚었다.

나는 메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모두가 나를 감시하는 상황에서 홀로 나를 자유롭게 두었다. 거짓으로 교황의 눈과 귀를 속이고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나는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그는 언제나 나를 같은 눈으로 보고, 웃는다.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누군가가 생각나는 따스함이었고, 이제는 붙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린 그와는 다르게 메릭의 온기는 바로 옆에 있었다. 기대려면 언제든 기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지 않으니 그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답답했을 것이다.

솔직히, 메릭과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의 눈은 나와는 다르게 너무 뜨거운 애정으로 가득했으니까. 나는 그만한 마음을 당신에게 두지 않았는데, 내 마음의 대부분은 북부에 두고 왔고 이곳에 들고 온 것이라고는 죄책감과 원망, 분노뿐인데.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보고 웃을까? 왜 버림받은 개처럼 나에게 당신의 의미를 물을까?

바로 답변할 수 없었던 카리타스는 메릭에게 왜 그런 걸 묻냐고 되물었다.

“제가 먼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답해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요?”

유치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정말로 메릭에게 너를 시도폰만큼이나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애정에 보답할 수 없으리란 것도.

주먹을 굳게 쥔 메릭이 말했다.

“당신께서 집행자께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함께 했던 것도, 각성 이후로 북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느라 자주 대면으로든 편지로든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도. 전부요.”

카리타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속상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이 이어졌다.

“저는 당신의 호위로 있으면서 누구보다 당신을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습니다. 세쿠리스 사제 건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당신께서 저를 믿고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요. …다른 사제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편한 얼굴로 저를 대하실 땐 정말 기뻤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맑은 하늘과 다르게 두 사람이 있는 방은 어두침침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서 저를 많이 의지하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건 틀리지 않았어요. 제가 평소에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진심이었다. 카리타스는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북부 기사단이 도착하고 나서 그건 전부 제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당신께서 집행자를 볼 때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 눈빛이 한 번도 저를 향한 적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목에서 뭔가 올라온 것처럼 메릭이 입을 닫았다. 카리타스는 당황했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서운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메릭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카리타스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었지. 그리고 내가 시도폰을 보는 것과 다른 눈으로 자길 봐서 서운했다고 말했고.’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옛날부터 나는 시도폰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시도폰은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내가 말하기 곤란해한다는 걸 이해하고 넘어갔다. 이런 걸 물어볼 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 아이는 시선으로, 때로는 문장으로 걱정스러움을 드러내기만 했다. 그마저도 이젠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으니 조심스럽게 행했다.

하지만 지금 메릭은 자신이 무슨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운하다고 표현하고, 나에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시도폰조차 묻지 않는 걸 당신이 뭔데 그렇게 당당하게 물어봐?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당신뿐이라고 해도 다른 감정은 별개잖아.

대답을 정한 카리타스가 책상을 꼭 잡았다.

“제가 왜 집행자를 당신과 같은 눈으로 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제 호위 기사고 그분은 아니잖습니까. 후방의 한 사람을 지키는 이와 최전방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키는 이를 평등하게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요?”

메릭이 말한, 집행자를 보는 눈이라고 하면 사랑이 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의도적으로 그걸 존경으로 곡해해서 대답했다. 마치 정말 존경하는 사람을 보았던 것처럼.

먹힐 거로 생각하지 않은 궤변이었으니 카리타스는 자기가 말하고도 못났다고 이를 갈았지만, 메릭은 아리송한 표정을 한 채 반박 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망설이던 카리타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요. 저는…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 둘만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당신이 날 도울 거라는 확신도 있어요.”

어느새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메릭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카리타스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정말 거기서 끝이었다. 메릭의 눈에서 차츰차츰 빛이 사라져갔다.

“당신이 기대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안해요. 하지만 다른 건 더 생각이 나지 않아서….”

카리타스가 모르는 척 쐐기를 박았다. 그는 메릭에게 잠시 쉬다 와도 괜찮다며 그를 내보냈고, 울상으로 밖을 향하는 그를 지켜보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카리타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사랑한다고 했으면 내가 그 사람의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은 둘째 치더라도 돌려줄 수 있어? 그리고 아예 거절하는 건… 만약 그렇게 말해서 호위 기사가 교체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손해니까. 그래,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지, 그냥 내가 편하려고 그렇게 말한 거잖아. 정당화하지 마. 확실하게 말했어야지. 그래야 저 사람도 다른 선택을 할 거 아니야. 나를 기다리는 미련한 짓 같은 거 안 할 거 아냐….’

한참 후에 돌아온 메릭은 평소보다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카리타스는 쿡쿡 찔려오는 양심을 애써 무시하며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책을 읽었고, 메릭은 여느 때처럼 묵묵히 그 뒤를 지켰다. 자기 전, 메릭이 카리타스의 방문을 닫으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무엇을 노력하겠다는 건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카리타스는 그를 응원할 수도, 단념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 달 후, 카리타스에게 도착한 시도폰의 편지엔 북부가 한참 준비할 게 있어서 당분간은 편지가 뜸할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순절 행사도 끝났으니 앞으로 몇 달간은 큰 행사가 없을 예정이었으니 카리타스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밝히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잘 되길 바란다는 답장을 썼다.

3주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자 카리타스는 편지를 보냈다. 바쁘다던 일은 잘 되고 있는지, 몸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았기에 답장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한 달 후에야 겨우 카리타스에게 도착했다. 바빠서 답장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북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9월이 다 되어가는 8월의 마지막 주가 되어서였다.

 

“시작의 땅까지 진격하실 거라는 게 사실입니까?”

“예, 집행자께서 자필로 작성하신 편지에 그렇게 쓰여있었습니다.”

교회의 회의실은 미묘한 흥분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침묵했다. 악마가 등장하고 제망이 멸망한 뒤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경계선이었다. 그걸 각성한 지 고작 6년밖에 되지 않은 집행자가 밀고 올라가겠다는 선언이었으니 믿기 힘들만 했다.

한 사제는 악마들이 괜히 자극받아 더 발광하지 않을지 걱정했고, 다른 사제는 드디어 인간들이 악마를 이겨내기 시작했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조용히 침묵하던 오토 대주교가 손을 들었다.

“성하께 질문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시작의 땅까지 가야 하는 이유를 집행자께서 밝히셨습니까?”

교황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것이 궁금한데 편지에 적혀있지 않더군요. 딱히 목적이라고 할 것이 없다면 시작의 땅까지라는 명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마찬가지로 듣고만 있던 카리타스가 의견을 밝혔다.

“시작의 땅은 중간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대륙에서 악마를 전부 몰아내겠다는 계획은 아무리 그분이라고 하셔도 함부로 말씀하실 수 없을 테니까요.”

“허허,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기왕이면 본인이 살아있을 때 악마들이 이 대륙에서 전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편지를 가지고 온 장본인이자, 피에르를 대신해 남부에 신설될 이단 심문관의 훈련을 지휘할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진군 목표는 집행자께서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승께도 말하지 못하는 목표라니… 점점 더 기대되는군요.”

난감한 미소를 짓고는 피데이스가 다른 곳을 보았다. 그는 빨리 이 의제가 지나가고 자신이 맡을 이단 심문관 집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문서실을 맡은 얀입니다. 재무 담당관님을 대신하여 재무 관련 서류 발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남부의 재무 담당관은 북부로 더 많은 자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받고 기절해버려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피데이스는 한동안 그를 피해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어지는 회의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의제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신설될 이단 심문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7년 전 쿠나블라에서 발생한 이단 단체는 자신들을 진실을 깨달은 자, 세상에 대한 거짓을 벗겨내려는 자 등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저런 자들이 감히….”

“하여, 저희는 이 자들을 창시자인 스페스 (Spes)의 이름을 따, 스페스 파라고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기존에 있던 이단 심문관만으로는 스페스 파를 개종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새로운 이단 심문관들을 선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을 이끌어줄 분으로 북부에서 와주신 피데이스 형제님께선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길 바랍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피데이스는 저렇게 젊은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냐는 듯한 불신의 눈빛을 받았으나, 그런 시선들이야 집행자의 스승이라는 설명이 이어지자 누가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중요한 자리를 제게 맡긴다고 하셔서 처음엔 너무 과분한 자리라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단 집단에서 태어나거나 자라서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기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제들이 손뼉을 쳤고,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피데이스는 신설 이단 심문 단체의 명단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인원들을 데리고 직접 브리오소 남부부터, 필요하다면 바다를 건너 쿠나블라까지 가야 한다니.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았던 피데이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곳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주는 집행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그를 보면서 피데이스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야 했는지를 되새김질했다.

‘여길 바꾸려고 온 거였잖아. 초장부터 절망할 순 없지. 북부는 솔라에게 맡겨두기도 했고, 집행자께선 권력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으니 그쪽은 걱정할 게 없어.’

회의실을 나가며 우연히 카리타스와 눈이 마주친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지나쳤다. 교황의 직속이라고 볼 수 있는 성녀와는 최대한 접촉을 피해야 했다.

‘집행자께서 신뢰하시는 분이니 인간적으론 괜찮은 분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지내기엔 저분은 교황과 너무 가까워. 오히려 내가 정보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아직 이 신설 이단 심문관들을 뭐라고 지칭할지 정하지도 않았다. 피데이스가 이것을 담당한 사제에게 묻자, 그조차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성하께서 정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피데이스의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면 저는 이들을 진실로 이끄는 자라는 뜻으로 비르 베리(vir veri)라고 칭하겠습니다. 성하껜 그렇게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혹시 방은 안내를 받으셨습니까?”

“개인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 이단 심문관, 크흠, 비르 베리를 위한 특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전략 회의와 각종 활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런 곳까지 마련해주셨다니. 이거 참, 나중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네요.”

하하 호호 웃은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고 돌아섰다. 피데이스는 특실에 도착해 문을 걸어 잠그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셨을 줄이야. 그것도 내 의견은 하나도 듣지 않고.’

그는 제망부터 브리오소를 거쳐, 쿠나블라의 수도까지 그려져 있는 지도를 올려다보았다. 브리오소와 쿠나블라 사이의 해협 중 한 곳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고 그곳과 인접한 쿠나블라의 한 마을엔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저곳을 통해 쿠나블라로 들어가라는 뜻이겠지. 별표는 스페스 파의 발원지일 테고. 경로도 정해져 있어. 나에겐 정말 군사 훈련만 시킬 생각이었나 본데. 그런데 이런 것까지 정해뒀으면서 심문관 집단을 명명할 이름을 정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상해.’

손에 들고 있던 명단을 다시 유심히 살펴본 피데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낯선 이름들인 데다가 하나 같이 성이 적혀있지 않았다.

‘출신을 중시할 남부 교회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 평민만 등용할 리 없어.’

뭔가 있다. 그렇게 판단하고 그가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자 뻗었던 손을 거둔 피데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십니까?”

“교황 성하의 말씀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피했더니 직접 오셨군.’

모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카리타스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낮인데도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낯이었다.

“특실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땐 비르 베리의 구성원들을 만날 자리를 마련해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되면 시종을 보내 모시러 오시겠다 하셨고요.”

‘그 이름을 지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성하께 들어간 거지?’

“안 그래도 제 대원들과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친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 전까지는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겁니까?”

카리타스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질문이 없으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그의 말에, 피데이스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그를 배웅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어가는 뒷모습에 피데이스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쳐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살기엔 북부가 좋군. 여길 북부처럼 바꾸기 전엔 편하게 자는 것도 힘들겠어.’

험난한 길을 예상하며 그는 시도폰이 기사단장으로 임명받기 전, 니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시작의 땅이 궁금하다고 하셨다고요, 아르카눔 때문에?”

주위를 살핀 니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캐서린과 아르카눔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게 2년 전이었는데 어느새 두 사람 다 아르카눔을 잊고 있었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본 피데이스가 말했다.

“당시엔 캐서린이 인간형 악마고 이미 계약을 끝낸 뒤 사라졌으며 아르카눔은 강력한 계약자일 것이다. 정도로 결론이 났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집행자께서 이번에 그 얘기를 하셨을 때 놀랐어요. 곧 오순절 행사 때문에 떠나셔야 할 분이 그것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것도 해결이 안 되었는데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이 임명식 때문에 빠져나가는 게 불안하셨나 봅니다.”

“….”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임명식을 끝내고 북부로 돌아오는 길에도 시도폰은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마침내 기사단 본부로 도착하자마자 시작의 땅으로 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그 결단력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피데이스는 이 기회에 남부로 가서 제 계획을 실행해보기로 했다.

시도폰이 직접 전투에 나가고 기사단이 최전방에서 악마를 막고 있다면 후방에선 할 일이 별로 없었고, 보호소도 나름 체계가 잡혀 피데이스 외에도 다른 담당자들이 몇 명 있었으니 그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가 남부 파견 건에 지원하자 시도폰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피데이스가 더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하자 아닌 척, 기뻐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주었고, 피데이스가 지원했다는 소식에 다른 지원자가 없어서 그대로 그가 남부로 오게 되었다. 그는 오기 전, 솔라에게 북부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했으나 그것은 으레 하듯 하는 말이었다.

‘그 애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

지금 누굴 걱정할 만 한때가 아니었다. 피데이스는 명단에 적힌 낯선 이들이 제 말에 잘 따라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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