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1화

이단자는 누구?

베론은 회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유해졌다고 말했고, 피데이스는 집행자께 사제들이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단의 자금줄이 어디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고 이야기하며 창문을 슬쩍 보았다. 사제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평일이라 그런지 귀족들은 드물게 보였다. 기사단 숙소에 근접한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피데이스가 말했다.

“사실 다들 말 안 했다뿐이지 자금줄로 의심되는 건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프라이에는 ‘설마?’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디스가 첫날 입성하면서 받았던 리본을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그 리본엔 아페의 소매에 있었던 것과 같은 백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죠. 근데 왜 하필이면 바다 너머에 있는 곳에다가 지원하고 계신 걸까요? 근처에 두는 게 통제하기도 쉽고, 여차하면 부르기도 더 쉬울 텐데요.”

질문에 답한 건 두코였다.

“반대야. 일부러 거기다가 둔 거겠지. 우리가, 그러니까 교회와 기사단이 악마들을 막지 못했을 때 그쪽으로 도망칠 심산이었을 거야.”

“비행형 악마가 있으니 그래 봤자 몇 년 더 버티는 정도일 텐데….”

“사병들을 거기서 버티게 하고 더 남단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오래 앉아있느라 뻐근한 허리를 두드린 시도폰이, 의심해봤자 당장 이단을 처단하러 갈 순 없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자리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솔라가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아페 저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순진한 얼굴로 제게 춤 신청을 했던 이를 떠올리며 시도폰이 이마를 짚었다. 왕족 출신인 사제들이 북부 기사단에 수련하러 오는 일이야 드물지 않았고, 그중에서는 정말로 기사단에 입단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아마도 3년 뒤가 될 아페의 입단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왕실 혹은 반-교회 파 귀족들이 이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추측이 맞는다면 그의 입단은 조금 더 고려를 해봐야 한다.

시도폰은 아직 시간은 있으니 자신이 직접 이야기해보겠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해산했고, 시도폰은 아페를 아무 사제나 붙잡고 아페가 어디있는지 아냐고 물었다.

대부분은 모르는 눈치였는데, 다행히 한 사제가 아페는 지금 막 국왕과의 면담을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문제는 시도폰이 그의 방 위치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집행자께서 아페 저하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카리타스는 시도폰이 돌아보자 따라오라며 어딘가로 향했고, 묵묵히 길 안내만 할 뿐 무슨 용건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복도에 다다르자 시도폰이 조심스레 카리타스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회의에서 말인데, 원래 그렇게… 의견을 말하는 것보단 듣는 편이야?”

솔직히, 시도폰은 그에게 회의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회의에선 가만히 듣기만 하는 편일 수도 있으니, 먼저 그것부터 물어본 것이었다. 카리타스는 그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뒤에서 카리타스를 따라서 걷던 시도폰이 어느새 그의 옆에 있었다.

“의제에 따라 달라. 이번 건 내가 딱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 보여서 말을 아낀 것뿐이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니?”

“기사단이 왔으니 북부에 대한 의제는 내가 끼어들 필요가 없었고, 이단 문제는 바다 건너 일이니 여길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담당할 게 아니었어. 다른 것들도 내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고.”

담담하게 이야기한 카리타스는 어느 방 앞에서 멈췄다. 구름을 비집고 나타난 오후의 태양이 복도로 점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카리타스는 방으로 다과와 차를 보내겠다고 말하고 시도폰을 지나쳤다. 그제와는 너무 다른 태도에 시도폰이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대답했다.

‘아페 저하와 이야기가 끝나면 카리타스한테도 가봐야겠다. 피곤해 보여서 걱정되네. 다들 놀고먹는 연회 기간인데 어째 카리타스는 더 바쁜 것 같단 말이지.’

본 목적을 떠올린 시도폰은 아페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 후에 안에선 잠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십니까?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무례하시네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순간, 깜짝 놀란 아페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더니 짧게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시도폰이 실례지만 문을 열어도 되겠냐고 묻자 아페는 절대 안 된다며 새된 소리로 답했다. 문손잡이를 놓은 시도폰은 부산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고, 마침내 손수 문을 연 아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들어오시라고 이야기했다.

카리타스가 보낸 다과와 차를 든 시종이 때마침 도착해 시도폰을 따라서 들어갔고, 그가 테이블에 그것들을 먹기 좋게 배치하는 동안 아페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도폰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아페가 이렇게 당황할 줄 모르고 장난을 쳤던 시도폰도 미안한 마음에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간신히 진정한 아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와주셨나요?”

“아…. 딱히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연회에서 짧게 이야기한 뒤로는 뵌 적이 없어서 와본 거예요. 북부로 오기 전까지 남부에서 즐길 수 있는 건 잘 즐기고 있으십니까?”

집행자가 별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보러 왔다고 말하는데 아페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을까? 본 목적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더니 양심이 찔려오는 시도폰이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물어볼 만한 화제가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대화는 잘 이어졌다. 하지만 시도폰이 원하는 정보는 도저히 나오지 않았고 시간만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찻잔도, 주전자도 비어버려서 아페는 시종을 부르려고 일어섰다.

“잠깐,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제가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저는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지?’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힘주어 말아쥔 시도폰이 결심을 굳혔다. 아페를 기사들에게 오해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실 수 있느냐’는 원망을 듣는 게 나았다.

“저하, 북부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아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받았더니 놀랍진 않네요. 저는 정말 북부에서 수행하고 싶은 건데 다들 제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더라고요.”

처음 북부에 갔던 날은 두코에게, 2년 전은 카리타스에게, 그리고 오늘은 시도폰에게. 아페는 이제 이 질문이 질렸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시도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도폰은 짧게 숨을 몰아쉬고 본래 하려던 질문으로 넘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국왕 폐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전부터 그러했는지, 지금도 그러시는지, 앞으로도 그러실 것인지…, 말입니다.”

아페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고, 시도폰이 그걸 알아채고 손을 뻗어 제지하려고 하자 그 손을 내쳤다. 당연히 시도폰에게 방해가 될 만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었고 아페는 천천히 한 글자씩 토해내듯 말을 뱉어냈다.

“제가… 연회에 왕족의 옷을 입고 참여했으니 그런, 그런 오해를 하실 줄은 알았어요. 하지만 그건 전부 보여주기 용이었어요. 제가 다른 형제들과 같이 있는 걸 보셨나요? 국왕 폐하와는 안부 인사 외에는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했어요.”

시도폰이 벌을 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페는 몸을 떨었다. 당황한 시도폰을 두고, 아페의 말은 형편없이 떨리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아시잖아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신전으로 보내졌다는 걸. 제 입으로 말하기 정말 부끄럽지만, 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식이에요, 이미 남아있는 나라도 얼마 없어서 정략결혼으로도 보내버리지 못하니 신전으로 떠넘겨진 수페르피키에스라고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위로는 해주실 필요 없어요. 저는 제 주제를 잘 아니까. 하하, 그래도 교회에 와서 신성력을 인정받고 성녀님의 바로 다음 자리에 앉았을 땐 좋았어요. 여기가 제가 있을 수 있는, 저를 내치지 않을 곳이라고 믿게 되었으니까요.”

시도폰은 침묵했다. 저보다 세 살 어린 왕녀가 이렇게 외로워하고 상처받았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으니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아페의 말은 이제 거의 흐느낌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여기도 저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더라고요. 언제든지 왕실과 접촉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예 먼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출신과 엮이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

“그게 제가 북부 기사단에 지원한 이유에요. 알고 나니 속이 시원하신가요?”

아페는 그 말을 끝으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도폰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아페는, 제 얼굴에 닿은 손수건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저하께서 오해를 받는 것보단 제가 당신께 원망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깊은 상처가 있으실 거라곤 예상을 못 했습니다. 아, 아직 덜 닦였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버둥거리는 아페의 어깨를 살짝 힘주어 잡은 시도폰이 마저 눈물을 닦아냈다. 잠시 후, 진정한 아페에게 시도폰은 미안했다고 다시 한번 사과한 뒤, 다기와 접시를 들고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에게 그것들을 넘겨주고 하늘을 올려다본 시도폰은 아이를 울렸다는 자괴감에 바로 카리타스에게 가지 못하고 복도를 서성였다.

‘오늘은 뭔가 안 되는 날인가? 어제 일찍 잤는데도 이러네.’

“집행자께선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지나가던 사제의 물음에 시도폰은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돌아다닐 뿐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봤다가, 제게 말을 걸려는 얼굴들을 잔뜩 발견하고 서둘러 카리타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왜 이러지? 엄청 부담스럽네.’

하지만 그를 반긴 것은 닫힌 문과 난감한 기사의 얼굴이었다.

“집행자께서 도착하시기 직전에 정원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내를….”

“괜찮네. 어느 정원에 갔는지는 짐작이 되니까. 알려줘서 고맙네.”

빠르게 대답한 시도폰은 길을 안내하려던 기사를 두고 카리타스가 있을 정원으로 향했다. 몇 걸음 가지 않은 것 같은데, 꽃이 만발한 정원이 나타났고 시도폰의 예상대로 카리타스는 호위 기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소문대로네, 호위를 저렇게 멀리 둬도 되나? 아무리 신전 안이라고 하지만.’

시도폰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카리타스가 그를 발견했다. 먼저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시도폰은 성큼 카리타스에게 다가왔고, 카리타스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업무만 아니라면 아무 때나 찾아와도 돼. 아페 저하와는 잘 이야기했어?”

차마 그걸 좋은 대화라고 할 수 없었던 시도폰은 작은 목소리로 겨우 ‘응’이라고 대답했다. 카리타스는 ‘그렇구나, 다행이네.’라고 말할 뿐 그 내용이 어땠는지는 묻지 않았다

‘회의 때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표정이 다 비슷하게 안 좋네.’

시도폰이 회의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자 입을 뗐다가 벙긋거리기만 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물어본다고 카리타스가 그걸 알려줄까?’

아페는 화를 내다시피 하면서도 솔직하게 제 심정을 전했다. 그 전에도 아페는 제게 딱히 무언가를 숨기려고 든 적이 없었기에 폰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어렸을 때부터 시도폰은 카리타스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카리타스는 시도폰에게조차 온전히 솔직해지지 못했다.

각성 이후로 시도폰은 고위 사제들을 빈번하게 마주하면서 카리타스가 왜 그렇게 말을 아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해와 감정은 아무래도 따로 노는 것이라, 시도폰은 그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속상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시도폰이 결론을 내렸다. 때로는 말보다 다른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 법이다.

“춤, 같이 춰줄래?”

“여기서?”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정원은 카리타스가 자주 산책하는 곳이니 세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고, 공간도 꽤 넓었다.

“조금 당황스러운데, 여긴 악기도 없고 당장 악단을 부를 수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리타스는 시도폰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메릭에게서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준 시도폰이 카리타스를 제 쪽으로 당기며 웃었다.

“내가 부르면 돼. 북부에선 사람들이 악기까지 들고 오기 힘들다고 다들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더라고.”

뭐라고 카리타스가 말하기도 전에 시도폰은 북부 사투리로 된 가사를 읊으며 발을 뗐다. 자연스레 그의 움직임을 따르던 카리타스의 몸이 공중에 살짝 떴다가 땅에 닿았고, 그는 생각보다 빠른 춤에 당황하며 시도폰의 손을 꽉 잡았다.

“춤이 생각보다 빠르네. 조금 놀랐어.”

“아, 미안. 이 지방이 추우니까 춤으로 몸을 덥히기도 했다고 하더라고. 천천히 할게.”

“아냐, 빠른 게 더 좋은 거 같아.”

카리타스가 보일 듯 말듯 미소를 지었다. 순간 시도폰은 세차게 뛴 심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이어갔고, 살짝 삐끗했던 음정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노래 틀린 거 맞지?”

“…눈부셔서 그랬어.”

아페와 대화하기 전부터 늘어지던 그림자가 이제는 석양을 받아 복도를 뒤덮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잔디를 밟았고, 시도폰은 지친 기색 없이 노래를 부르며 카리타스를 이끌었다. 굳어있던 카리타스의 얼굴도 슬며시 풀렸다.

“연회 때 내가 준 리본, 하고 나온 거 봤어.”

노래를 멈춘 시도폰이 용케 그걸 봤냐고 감탄하자, 카리타스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해준 건 고맙지만, 정말로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거든. 자수가 엉망이었잖아, 보자마자 아 저거 내가 만든 건데, 싶었지.”

“네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사람이 뭐든 잘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자수가 엉망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 시도폰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반복되는 음과 가사에 카리타스는 슬쩍 그를 따라 몇 마디 흥얼거렸고, 그걸 들어보고 싶었던 시도폰이 제 목소리를 낮췄다.

“내 목소리가 더 큰 거 같은데, 혹시 지쳤어?”

“그럴 리가?”

태연하게 대답한 시도폰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후, 시도폰은 어느 한 자리에 멈추고 카리타스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으레 귀족들이 하던 것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춤을 끝냈다. 바로 고개를 든 카리타스는 더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시도폰은 손을 내저으며 더 했다간 목이 쉬고 말 거라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시도폰은 전장에서 몇 번이고 고함을 질러도 목이 쉬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는 발갛게 달아올라 앞머리 사이로 땀이 맺힌 카리타스를 봐버렸다. 그런 사람에게 계속 춤 상대가 되어달라고 할 순 없었다. 카리타스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깐 분위기에 휩쓸려서 못 물어봤는데, 무슨 일로 찾아왔었던 거야? 중요한 일 아니었어?”

“중요한 일 맞았어. 근데 방금 해결됐고.”

“응?”

의아해하는 카리타스에게 시도폰이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기분이 나아지는 걸 보고 싶었거든. 그게 다야.”

바람이 불어 시도폰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노을이 그를 황금빛으로 물들이자 그는 눈을 찡그렸지만, 여전히 입꼬리는 올리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선 카리타스의 그림자가 시도폰의 근처에서 어른거렸고, 그 모양은 꼭, 그가 시도폰의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선 것처럼 보였다. 무심코 한 발자국 다가선 카리타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그림자에서 시선을 떼며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남부는 해가 늦게 져서 적응이 잘 안 된단 말이야.”

“북부 사람 다 됐네. 기사단이 내일 출발해야 하니까 오늘 저녁은 특별히 더 신경 썼다고 들었어.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드물게 드러난 감정에 시도폰이 마찬가지로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춤 때문에 잡았던 카리타스의 손을 놓았다. 순간 텅 비어버린 손안으로 바람이 흘러들어오자 카리타스는 그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손을 말아쥐었다.


그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정말 호화로웠다. 기사단을 대접하기 위한 식비의 반이 투입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음식들에, 기사들은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어.”

그런 모습이 꽤 부끄러웠던 시도폰이 중얼거리자, 옆자리의 카리타스가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어서 좋은데 왜.’라며 웃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거리가 가까운 두 부대장을 보던 시도폰의 시선이 그 옆으로 흘러갔다.

‘아페 저하는 오셨나? 응, 다행이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저하께서 북부에 오실까?”

“… 가실 거야.”

그렇게 믿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카리타스가 식사를 이어갔다. 이날 밤, 기사단의 숙소는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크로마는 내일부터 며칠은 먹어야 하는 식량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확인했고, 이디스는 직물의 개수가 명부에 적힌 것과 같은지 비교했다. 기사들은 밖에 나가 말과 마차가 어디 이상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각자 짐은 다 챙겼습니까?”

솔라의 물음에 방 앞에 선 기사들이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점호가 끝나고, 기사들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며 다음날 이른 아침, 남부를 떠났다. 그들은 매년 하듯이 워프 게이트를 뛰어넘고, 언덕과 다리를 건너 북부로 돌아왔고, 시도폰은 눈으로 덮이지 않은, 하지만 남부보다 서늘한 그의 마을에 도착했다.

남부처럼 환영 인사로 꽃비가 내리지도 않았고, 색색의 천으로 장식된 거리도 없었지만, 그는 ‘돌아왔다.’라고 느꼈다. 북부의 입구가 열리자 말이 느린 속도로 마을에 들어섰다.

‘신기해, 기사단장으로서 여길 돌아오니까 느낌이 달라. 평소보다 뭔가 애틋하고 반가운 느낌이 들어.’

“…단장님? 듣고 계십니까?”

프라이에의 물음에 시도폰이 눈을 깜빡였다.

“아, 미안. 뭐라고 말했지? 못 들었네. 다시 말해줄 수 있겠나?”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그걸 생각하고 있던 시도폰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으며 다른 손으로는 턱을 쓸었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프라이에가 너무 구체적인 것까지 궁금했던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밖으로 나갈 생각이네.”

엄청난 말을 한 것치곤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두코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시도폰에게 물었고, 같은 답을 듣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못할 것도 없죠. 당신이 계실 때나 인간이 경계를 넘을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적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준비하실 겁니까?”

시도폰은 기사단 본부에 도착해 말에서 뛰어내리며 오늘부터라고 답했다. 본부 정문에 앉아있던 슈바헨은 그를 맞이하면서 뭐가 오늘부터냐고 의아해했고, 단장의 당찬 포부를 듣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악마에게 점령당한 땅을 수복할 겁니다. 브리오소의 국경선이었던 곳은 물론이고 시작의 땅이 있는 제망까지는 밀고 나가볼 겁니다.”

정적이 한참 흐르고 나서, 슈바헨이 겨우 입을 열었다.

“취지 자체야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도폰은 당황스러움에 허공을 방황하는 슈바헨의 손을 잡았다.

“이곳이 최전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작의 땅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당장은 말씀드릴 순 없겠지만, 가 볼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오늘부터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여름이 지나가고 나면 바로 경계를 향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초가을에 출병할 예정이라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단장의 선언 후에 기사들은 재빨리 짐을 풀었고, 이들은 넉 달 후에 있을 진격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브리오소랑 제망이 뭐였더라 싶으시겠죠. 브리오소는 시도폰과 카리타스가 속한 국가의 이름이고, 제망은 그 위쪽 지방에 있던 나라입니다. 옛날에 망해버린 제망에는 초대 집행자인 요한이 악마를 봉인했다는 ‘시작의 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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