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0화

어두운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마침내 북부 기사단 본부에 도착한 수행단은 기숙관에 들러 짐을 풀고 본관에 집합했다. 넓은 공간의 벽엔 각종 무기와 연습용 짚 인형이 걸려있었고 돌로 된 벽 사이로는 바람 한 점 새어들지 않았다.

황량한 느낌에 아이들은 들어가길 꺼렸지만, 베론은 자주 오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며 먼저 들어가 버렸다.

“어서 와라! 예비 사제님과 기사님들. 오느라 많이 지쳤으리라 생각하지만, 일정과 규칙을 전달해야 해서 불렀다.”

다짜고짜 반말로 수행단을 맞은 헤일로는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우직한 얼굴을 하고는 본관이 쩌렁쩌렁 울리게 말했다. 성가대 출신인가 싶을 정도의 성량에 투덜거리던 몇 명의 입이 조용히 닫혔고 일순 집중된 이목에 헤일로가 목소리를 골랐다.

“소개부터 하지. 나는 북부 성기사단의 기사단장 헤일로다. 수행단이 두 달의 수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훌륭한 사제와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귀관들도 잘 따라주길 바란다.”

헤일로가 경계 탐사와 마을 방문, 봉사활동 등의 일정을 이야기하는 동안 베론은 헤일로 뒤에 서 있던 안경 낀 사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기숙관에선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화로 해결할 것. 북부에서 분열은 곧 죽음이다. 악마와 대적해야 할 힘을 내부로 돌렸다간 모두가 궤멸한다는 걸 잊지 말고 행동하도록.”

어느 순간 폰이 베론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싸늘한 얼굴로 헤일로의 뒤통수만 쏘아보고 있었다. 프라이에도 목격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일이지?’라고 중얼거렸지만, 베론은 헤일로가 규칙을 다 설명할 때까지 침묵했다.

“이상! 전달할 내용은 다 말했으니 질문을 받겠다.”

헤일로의 풍부한 성량과 이동의 여파로 수행단 인원들은 질문 하나 하지 못했고 예상했던 일이라며 베론은 다른 사제를 시켜 그들을 기숙관으로 안내했다. 베론이 본관 자물쇠를 걸고 헤일로와 함께 사무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수행단은 짐을 풀었고 폰은 카리타스 옆 침대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어라, 스키피는?”

카리타스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스키피가 보이지 않자 폰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두코는 지나가면서 ‘우리랑 같은 방이야.’라고 알려주었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폰은 침구를 정리했지만, ‘잠깐만, 스키피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카리도 아쉬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불을 펴는 속도가 느려졌다.

“있지 카리, 이거 정리 끝나면 두코 쪽으로 놀러 갈까? 스키피도 그쪽에 있으니까.”

“응? 아냐 괜찮아.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자고 싶어.”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에 되레 놀란 건 폰이었고 카리타스는 말한 대로 자기 침대 한쪽에 누웠다. 머쓱하게 ‘잘자’라고 인사한 폰이 뒤를 돌아 자기 자리로 갔지만, 베개는 언제 사라졌는지 침대 위엔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내 베개….”

폰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큼.”

뒤에서 들린 헛기침 소리에 폰이 고개를 돌리자 카리의 품에 안겨있는 베개가 보였다. 폰이 이리 내놓으라며 손을 뻗어 베개를 잡았지만, 가져오기는커녕 카리타스가 끌어당기는 힘에 버틸 생각도 못 하고 이불 속으로 빨려 들어간 폰이었다.

이불 속에선 웅얼거리는 소리로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라는 변명이 흘러나왔고 카리타스는, 당기면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며 키득거렸다.

“거기, 비어있는 침대는 누구 거지?”

“여, 여기 있습니다!”

점호를 맡은 사제가 문을 열고 묻자 이불을 걷어 젖힌 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별로 엄격한 성격은 아닌지, 그는 장난 그만 치고 자라며 다시 문을 닫을 뿐이었다.

이번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며 폰은 카리타스를 등지고 누워서 밤을 보냈지만, 다음날엔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났기에 카리타스는 다시는 베개를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삼 일간, 아이들은 그동안 하지 못 했던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 등 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섭렵했다. 수행단 인원의 대다수는 다 같이 어울려서 놀았으나 몇 명의 예비 사제들은 눈 때문에 옷이 젖었다며 툴툴거리다가 아이들이 던진 눈덩이에 더 많이 맞기도 했다.

“오늘은 첫날 말했던 대로 마을 조사가 있는 날이다. 경계와는 가깝지 않은 곳이지만, 구호 물품 전달과 축성을 위해 파견되었던 사제들의 부상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본관에 모인 수행단과 북부 기사단 및 사제들 앞에 선 헤일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헤일로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지만 아무도 웃지 못한 채로 그의 외침에 집중했다.

“해당 사제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공격당해서 쫓겨났다고 하더군. 다행히 피해는 적었지만, 마을이 집단으로 사제를 거부하는 일은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수행단은 행렬의 뒤쪽에 잘 붙어있고 혼자 함부로 나서지 말도록.”

베론은 헤일로와 사람들을 배웅하고 성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폰이 왜 베론은 같이 가지 않느냐고 물었고, 베론은 대장이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게 돌아올 곳을 지키는 게 부관의 일이라고 답했다.

“멋있다. 나도 저런 말, 해보고 싶어.”

감동한 얼굴의 폰이 마차로 돌아오자 카리타스는 자리를 내어주며 입을 열었다.

“폰은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폰은 ‘기사… 기사라고.’라며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직접 보니까 되고 싶어졌어. 나는 누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되기 전에 지키고 싶어. 안 다치는 게 제일 좋은 거잖아?”

옆에서 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뿌듯하게 어깨를 편 폰과 다르게 카리타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당연하게도 지켜주는 사람의 희생을 동반한다. 폰이 누군가를 지키려고 앞으로 나서면 뒤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은 안전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의 안전은?

“그런데, 그러다가 네가 다치면 어떡해?”

“내가 다치면…, 아냐 난 안 다칠 것 같아.”

특유의 자신감이 폰의 말을 뒷받침하는 듯했지만, 아직 정식 기사도 아닌 아이이기에 만용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필이면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카리타스의 머릿속에선 검붉게 물든 대지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어떻게 안 다칠 수 있겠어. 아무리 네가 대단해도 인간인 이상 그런 건 불가능해. 그리고, 너 여태까지 내 앞에서 몇 번이나 다쳤는데 그런 말을 해?”

말하면서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카리타스에 폰이 당황하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소 태평한 어조로 낭만적인 말을 하는 바람에 되려 카리타스의 혈압이 오를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럼, 네가 치료해주면 괜찮지 않을까? 매번 내가 다칠 때마다 해줬으니까.”

“항상 내가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마차는 일순 조용해졌고 말을 뱉은 카리타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만해, 너무 흥분했어. 나중에 폰이 정식사제가 되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아직 제대로 훈련 시작도 안 했으니까 해보고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어? 폰도 아직 뭘 모르니까 일단 말하고 보는 거겠지.”

프라이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고 두코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카리타스가 왜 저렇게 화가 났지?’

다만 당사자인 폰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터라, 제대로 사과를 주고받는 건 불가능했다. 다치면 치료해준다. 물론 아프겠지만 어차피 낫는 상처고, 기왕 치료해준다면 카리타스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폰의 생각이었다.

‘다칠 거면 카리타스나 코지처럼 약한 애들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무언가 떨떠름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폰이 카리타스를 바라보자 그 생각을 읽은 듯 카리타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낌새를 알아챈 두코가 아예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앉아버렸고 마차는 침묵 속에서 출발했다.

마을에 거의 도착할 때쯤엔 분위기가 풀려서 다들 조잘거리고 있었지만, 카리타스만은 예외여서 여전히 폰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악마에게 오염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경계의 성벽이 아예 보이지 않는 마을이었다. 일행의 가장 앞에 서 있던 헤일로가 신호를 보내자 마차가 멈추어 섰고 다른 기사와 사제들도 하나둘 말에서 하차했다.

조심히 내려오라며 폰이 먼저 내려가 카리타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카리타스는 못 이기는 척 손을 잡았다. 말과 마차는 마을 입구에 매어둔 일행은 인원수를 점검했고 프라이에는 거주관 대표로 아이들이 전부 있다고 알렸다.

“무슨 마을이 이렇게 조용하냐….”

두코가 마을 입구를 둘러보며 중얼거렸고 다른 사람들도 옆 사람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건물은 파손된 부분 없이 멀쩡한 모양이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 길에서 사는 동물들만 지나갈 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사람이 사는 게 맞기는 하냐는 말까지 나왔고 헤일로는 묵묵히 걸을 뿐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주지 않았다.

마을 공동 화단으로 보이는 곳엔 말라붙은 식물의 흔적과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작은 인형만 쓸쓸하게 남아있었고 맑은 하늘에 어울리지 않게 음울한 공기가 마을 전반을 둘러쌌다.

“사람이다!”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좁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는 시도폰 또래 나잇대로 보였지만 그 나잇대 아이들이 눈빛과 현저히 다른 눈을 하고 기사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당장 마을에서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사특한 것들이 감히!”

헤일로를 향해 돌을 던진 아이는 바로 몸을 돌려 골목으로 뛰어갔고 던져진 돌은 금방 방패에 막혀 땅으로 처박혔다. 방패를 내린 헤일로가 그 뒤를 따라가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만 외쳤다.

“아이를 쫓는다. 너희 두 명은 남아서 수행단을 데리고 오고 나머진 나와 같이 먼저 출발한다. 다른 사람들이 마을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도록.”

“네!”

지목된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기사와 사제들은 빠른 속도로 헤일로의 뒤를 이어 아이를 추적했다. 헤일로가 가리킨 둘 중 키가 큰 쪽이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카리타스에게 다가오자 카리타스는 자연스럽게 폰과 잡았던 손을 놓고 일행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우리에게 단 한 번의 가호를 내리시어 몸을 보존할 수 있게 하시옵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카리타스의 기도가 끝나자 그를 중심으로 얇은 금색의 원이 그려져 수행단과 기사단을 감싸며 반구형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황금색, 반투명한 장막은 일렁거리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신성한 기운은 가시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변을 경계하며 전도자들을 따라간다. 막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옆 사람이 잘 있는지 수시로 살피는 것이 기본이다.”

장막은 보이지 않지만, 바닥에 남은 경계는 보였기 때문에 빛에 놀라 뒷걸음질 쳤던 아이들이 살며시 원 내부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일행은 앞선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마을의 중간에 도착했다.

교회로 사용되었을 건물은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벽과 지붕 때문에 흉물스러워 보였고 의무적으로 교회에 설치되어야 하는 분수대도 바짝 말라 있었다. 전반적으로 황량하고 흙빛으로 보이는 마을이었지만 교회까지 이런 꼴이었을 줄은 몰랐다며 다들 충격으로 멈춰섰을 때 건물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위쪽! 사람들이 보입니다.”

“무언가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 뒤로 물러나세요.”

한 기사가 소리치며 2층의 창문을 가리켰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창문 하나마다 둘 셋씩 서서 기사단을 내려다보았고 모두의 시선이 창문으로 쏠린 그때, 교회 정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사단을 향해 무언가 날아들기 시작했고 창문도 거의 동시에 열려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댔다. 헤일로가 그들에게 진정하라고 큰소리로 외쳤지만, 주민 중 아무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괴성을 지르는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헤일로는 어쩔 수 없이 방패를 들었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전혀 들을 생각이 없군. 하지만 보호가 우선이다. 양쪽 다 다치게 해선 안 돼!”

“네!”

헤일로의 명령대로 기사단은 방어에 집중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던져지는 농기구와 돌의 세례에 당황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무서워! 왜 저러는 거지?”

“악마에 쓰였나? 그게 아니라면 저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 자체가 처음인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며 기사단이 몸으로 만든 방어진 뒤에 몸을 수그리고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당하게 몸을 곧추세우고 걷던 예비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카리타스는 무섭지도 않은지 꼿꼿하게 일행의 중간에 서서 계속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그런 카리타스에게 누군가 달려들까 불안해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도폰이 그 옆에 서 있었다.

“폰, 너도 저쪽 뒤로 가 있어. 위험하잖아.”

“싫어. 여기 있을 거야.”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말려본 카리타스였지만 폰은 자리를 지켰고 뒤이어 정신을 차린 프라이에와 두코가 그 옆에 섰다.

날아드는 물체들은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지만, 고성은 날카롭게 수행단을 찔러댔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라이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며 혹시 악마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근데 난 애초에 신성력이 적어서…, 두코는 어때?”

“이상하게 들릴 것 같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전혀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아. 경계 주변을 순찰할 때 느꼈던 오싹함은 전혀 없어.”

“…맞아, 아마 기사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 당황하는 거겠지.”

악마가 소환되든, 인간에게 빙의하든 그 흔적과 기운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 마을에선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근처의 예비 사제들도 중얼거렸고 그러던 와중, 방어막이 뚫려버리는 바람에 사람들 사이로 돌이 한두 개씩 날아들었다.

“얘들아! 일어서서 피해! 돌 날아온다.”

프라이에가 외치는 동시에 헤일로가 공격을 허용했다. 당연하게도 기사를 상대로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 주민의 공격이 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하나둘 제압되어 무기를 빼앗기거나 자신들이 쏟아져나왔던 건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다!”

급하게 걸어 잠근 문이 금방 도끼에 부서지고 톱밥 가루가 흩날리는 너머로 교회 내부가 드러났다. 하지만 길이 트였음에도 기사단은 안으로 섣불리 진입할 수 없었다.

“저게 무슨….”

입구에서 건물 맨 끝의 재단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신성한 아치는 여전히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사람들이 정갈한 마음으로 앉아, 정결한 기도를 올렸을 의자들은 뒤집히거나 부서진 채로 바닥에 널려있었고 기둥에는 어린아이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복도 끝 제단에 멀쩡하게 서 있는 악마 조각상과 그 아래에 깔린 십자가였다. 헤일로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분노한 기사 몇이 진입해서 조각상을 부수려 달려들었고 이를 제지하려던 주민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부수지 마라! 이들이 우리를 진정한 구원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너희들은 진정한 신의 제자가 아니야. 우리가 진짜다!”

마지막까지 기사들 앞에 선 주민들이 외치는 이야기가 그제 서야 수행단의 아이들에게도 들렸다.

저게 무슨 말이냐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던 아이들은 헛소리에 선동당하지 말라며 사제에게 혼쭐이 났지만, 악마 숭배자를 처음 본 아이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돌을 피하느라 앉아있던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진 못해도 상황을 살피려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저게 악마의 형상이라고?”

“정확하게는 악마를 신처럼 따르는 이들이 상상하는 악마의 모습인 거지.”

“머리와 하반신은 염소고 상반신만 인간에, 하늘로 나팔을 불고 있는 꼴이라니. 무섭지도 않고 웃기게 생겼는데.”

“난 좀 오싹해.”

폰이 제기한 의문에 카리타스가 답해주자 스키피는 무섭다고 몸을 움츠리며 은근히 카리타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폰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조각상과 그 주변의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보이지 않았던 작은 뼈들이 조각상 앞의 제단에 모여있었는데 그 중에선 두개골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설마, 어린 애들을 제물로 바친 건가?”

“폰, 너 뭘 보고 있는 거야?”

프라이에가 놀라서 묻자 폰은 제단 쪽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제 눈으로 끔찍한 사실을 확인한 프라이에는 다급히 기둥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자 아주 작은 숨소리가 색색거리며 들렸고 프라이에는 아이를 가볍게 안아 올려 재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주민과 기사가 싸우는 동안 양쪽 다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는데 너무 말랐어. 제단에 바쳐진 아이보단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일단 얘네들한테 뭐라도 먹이는 게 먼저야. 이 상황에서 그런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두코는 제 품에서 수통을 꺼내 아이의 입에 기울였고 물을 받아마신 아이는 잔기침을 조금 하더니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뒤이어 프라이에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느냐 물었을 땐 고개를 저을 뿐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도 늦은 건 아니니 아이들을 구해오자고 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야지! 애는 내가 들어서 옮길 테니까 주위 엄호를 부탁할게.”

“고마워. 프라이에, 넌 갈 거야?”

“가야지. 스키피는 무서운 거 같으니까 여기서 이 애를 좀 살펴줘.”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스키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하라고 외치는 스키피는 아이에게 제 겉옷을 벗어서 걸쳐주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세 사람과는 상반되게, 고귀한 혈통의 예비 사제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다녀올게, 카리타스. 우리가 나갔다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서 방어막을 조절해줄 수 있겠어?”

“가능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사람들을 중앙으로 조금 모아줘. 그리고 한 명씩 나한테 손 내밀어봐. 한 번밖에 발동이 안 되겠지만, 인간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까.”

한 명씩 차례로 보호의 축복을 걸어준 카리타스는 방어막을 조금 작게 전개하여 세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면서 내부의 인원을 보호했다.

혹여 이 일로 카리타스가 징계를 받거나 할까 봐 걱정하는 폰이었지만, 거주관 아이들을 말리던 사제도 다쳐오는 기사를 치료하거나 다른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는지 정신이 없어 보였고 그 틈에 셋은 무사히 모든 아이를 구해올 수 있었다.

폰은 주민 한 명에게 잡힐 뻔했지만 잽싸게 피해서 도망쳤다.

“카리타스가 걸어준 가호 덕분인가? 순간적으로 몸이 가뿐해졌어.”

“그럴지도 몰라. 어쨌든 애들은 다 구해서 다행인데 저쪽이 문제네.”

두코가 바라본 곳엔 기절하거나 신체 일부의 부상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주민들과 조각상에 가까이 다가간 기사들이 있었다. 반항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음 비슷한 말을 욕설 내뱉듯이 격하게 뱉어댔지만, 승기는 이미 그들의 반대편에 들려있었다.

기사단이 제단에 거의 도달했을 즘, 한 노파가 악마 조각상을 부수려는 기사를 가로막았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원시 부족의 주술과도 같이 음산하게, 하지만 잔잔하게 울렸고 창을 치들었던 기사가 그대로 멈추었다.

그의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읊조림이 끝나기도 전에 노파는 엄청난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 피에 잔뜩 적셔진 기사는 자신이 들고 있던 피 묻은 창을 떨구며 주저앉았다.

“뭘 멍하니 있어! 사제들은 당장 저 노파를 치료해!”

헤일로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지만, 노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피는 제단과 그곳에 이어진 계단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며 피비린내를 뿌렸고 그 진한 냄새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할머니?”

두코의 품에서 물을 받아먹고 깨어난 아이가 재단 쪽을 바라보며 읊은 말이었다. 아이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 방어막을 넘고, 부러진 의자를 뛰어넘고, 기사를 지나쳐 달렸다.

피가 맨발과 옷에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파에게 달려간 아이는 그의 몸을 잡고 흔들었지만, 힘이 풀린 몸은 무겁게 흔들릴 뿐 되살아나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쉬어버린 목에선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참담한 모습에 주민들은 항복하고 기사들도 무기를 집어넣었다. 주저앉았던 기사는 다른 사제들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고 악마 조각상은 조용히 끌어 내려졌다.


이후, 아이가 털어놓은 마을의 진실은 이러했다.

경계에서 그다지 가깝지 않은 평화로운 마을에서 어느 날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현재의 신은 악신이고 진정한 신은 악으로 취급받으며 인간들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증거로 올해 농사가 흉작일 것이며 만약 계속 현재의 신을 숭배한다면 영원히 토지가 비옥해질 일은 없을 것이라며 누군가가 마을 술집에서 떠들어댔다. 다른 어른들을 추궁한 결과, 그 말을 떠벌리고 다닌 남자는 외지인이라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다 그 말대로 마을 전체 농가가 형편없는 추수 결과를 들고 오자, 마을을 담당한 귀족은 소문이 진실이었다며 교회 건물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교회 제단에는 악마 조각상이 올려지고 사람들은 굶어서 병들거나 죽은 아이를 제단에 바치며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런 일상이 한 달째 되던 날,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사제와 기사들을 마을 사람들이 무력으로 내쫓는 사건이 발생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 들어와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결론이 나다니.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폰은 카리타스의 노트에 사건을 기록하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걸 왜 제 노트에 쓰냐고 하던 카리타스는 폰의 자기 글씨를 남겨두고 싶었다는 말에 노트를 내어준 지 오래였다. 코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편지로 써봤자 검열당할 것 같다는 생각도 일치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마을 사람들을 모았던 귀족을 신문하여 알아낸 진실은 허접하고 비루한 한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귀족에게 악마 조각상을 팔았던 상인의 아들이 그 외지인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현실과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 때문에 그런 소문을 냈다고, 잡혀서 이송된 남자가 힘겹게 진술했다. 마을이 흉작 사건을 겪은 건 그가 밤에 돌아다니며 밭에 튼 물길을 막거나 독극물이 든 물을 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카리타스, 너 정말로 그때 악마의 기운이 안 느껴졌어?”

“그 사람들 표정을 보면 악마한테 씌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는데 실습 때 봤던 악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어. 인간들 스스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나도 안 믿기지만….”

“응. 그게 무서웠어.”

베개로 얼굴을 파묻으며 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일이 끝나고 교회를 빠져나가며 폰은 뒤돌아서, 마을을 전체적으로 눈에 담았다. 적막한 공기와 건조한 흙색의 마을에서 모든 집의 문이 굳게 닫혀있는데, 그 중심에 우뚝 선 교회의 모습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천천히 교회의 문이 닫히고, 거기에 묵직한 걸쇠가 걸리는 동안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밧줄에 묶여 수행단 뒤쪽에 줄을 서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악마가 유혹하지 않아도 아이들을 바치고, 악마를 신처럼 숭배하고, 사제들을 때렸다는 거지?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해서 신을 배신한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응? 아, 아니 아까 잡혀간 사람들 말이야. 자기가 원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엔 많을까?”

폰의 뒤를 이어 노트를 쓰고 있던 카리타스는 쓸 만한 내용은 다 썼는지 펜을 내려놓고 침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카리타스의 대답은 신전에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으니 폰이 생각하는 악행과는 달랐지만 구태여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신에 대한 진실은 저만 알고 있으면 되었다.

“우리가 못 보는 것뿐, 나는 꽤 많을 거로 생각해.”

“….”

“사람들한테 실망했어?”

폰의 뒤통수가 끄덕거렸다. 곧이어 얼굴이 베개에 잔뜩 눌린 폰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천장을 보고 누웠다.

“얼마 전에 북부 오는 길에 베론 님이 그러셨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느냐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래서 신성력이 얼마가 있든 간에 중요한 건 신의 뜻을 따르는 거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잖아, 도와주려던 사제들도 그 사람들한테 맞았고 아이들도 배를 곯았어.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하지만 헤일로 단장은 그 사람들도 공격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솔직히 말해서, 물론 내 능력이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저런 사람들까지 지켜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까딱이던 카리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반응에 폰이 뒤늦게 수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카리타스가 한발 빨랐다.

“이번 일에 실망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분명 평소에 겪는 갈등보다 훨씬 참담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 누군가를 외면한다고 해도 네 양심에 찔려서 견디지 못할 거야.”

어느새 베개를 안고 카리타스 쪽으로 돌아누운 폰은 카리타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넌 사람들이 위험하면 구하러 갈 거 아냐? 내가 봐왔던 넌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내가 이번 작전에서 먼저 나선 건 맞지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그 말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카리타스가 대답했다.

“그야, 처음 만난 날부터 쭉 그랬으니까.”

시도폰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을 거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나간다고 하질 않나, 복도에서 누가 무거운 걸 들고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도와주겠다고 나서질 않나.

하지만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날 저에게도 손수건을 건네준 것이다. 폰은 경전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거기 나오는 박애주의자들과 폰은 닮았다.

누구의 고통도 외면하지 못하는 탓에 오늘처럼 상처받는 날도 있을 테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카리타스는 웃어 보였다. 폰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건 반칙이야….’라며 베개로 얼굴을 가렸지만, 고민은 해결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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