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찾았다
2017. 1. 8. 작성 | 공백 미포함 2,994자 | 영화 '너의 이름은' 엔딩 이후 망상
혜성이 떨어졌다. 거짓말처럼 정확히 우리 마을을 향해서. 귀를 찢는듯한 폭음과 눈이 녹아내릴 것 같은 빛에 마을 사람들 모두 눈과 귀를 막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엔 이미 우리 마을은 사라진 뒤였다. 모두가 굳어있을 때 아빠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따져물으셨다. 그에 나는 딱 한 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알려줬어요."
그게 대체 누구냐는 질문엔 눈물이 났다. 그 누가 누구인지는 내가 가장 알고 싶었다. 할머니께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는 나를 달래주시며 말씀하셨다.
"꿈에서 깼구나, 미츠하."
꿈. 꿈인걸까. 꿈이라 하기엔 너무나 애달프고, 현실이라 하기엔 아득하다.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섰다. 그리고 꿈 속 경치처럼 아름다운 하늘과 그와 정반대로 참혹한 마을과 어째서인지 손바닥에 써져있는 「좋아해」를 그저 한없이 바라보았다.
"미츠하씨, 같이 이토모리에 가지 않을래요?"
타키의 말에 계단 난간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나는 차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타키는 말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곧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기... 타키씨,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이토모리는..."
"알고 있어요. 8년 전, 혜성때문에 사라진 마을이죠? 그리고... 미츠하씨의 고향이고요."
"그걸 어떻게..."
타키는 갑자기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제법 두께가 있는 파일철이었다. 이걸 주는 의도를 몰라 타키를 바라보니 그는 얼른 열어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천천히 파일철을 연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내가 살던 곳, 내가 봤던 곳, 이토모리가 종이 위에 펼쳐져있었다. 연필로 그려져 번진 곳도 드문드문 보였지만 틀림없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단순히 잃어버린 고향을 그림으로나마 보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무언가 더... 찾아야할 것이 있는 듯한 공허한 느낌... 혹여나 그림에 떨어질까 눈물을 훔치고 계속하여 그림을 넘겼다. 그림 하나 하나 꼼꼼히 살펴보던 와중 한 그림에서 손이 멈췄다. 대답을 찾듯 내 시선이 타키에게로 향했다.
"그 그림 속의 장소. 미야미즈 가문의 신지(神地), 맞죠?"
"맞아요... 그렇지만 여긴 우리 가문 이외의 사람은 모르는 곳인데 어떻게 안 거예요?"
그는 생각에 잠긴듯 시선을 깔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이토모리의 모든 풍경이 기억 속에 남아있었어요. 그래서였는지 어째서인지 5년 전에 거길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어요. 그 이후 정신이 나간 듯이 그 혜성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혜성..."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그 날에 날아갔는데. 마을도, 기억도. 그랬다. 나는 그 날 마을을 잃고, 무언가를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오늘 운명처럼 '무언가'를 찾았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타키는 아직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무언가도 찾을 수 있을까.
"좋아요. 같이 가요, 타키씨."
타키. 어쩐지 그리운 울림을 입에 담으며 나는 미소지었다.
"하아... 하아..."
"미츠하씨 괜찮으세요?"
"괜, 찮아요. 후우... 오랜만에 올라오니 힘드네요."
한 발자국 더 내딛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도쿄보다 공기가 더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8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그대로였다. 마을 호수와 이어진 크레이터엔 물이 한 가득 고여있었고, 다시 돌아서면 푸르른 녹음 한 가운데에 신전이 있었다. 바람이 나부낀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타키가 내 뒤를 따라왔다. 이슬에 젖은 풀을 밟으니 눅눅한 소리가 났다. 둘이서 말없이 걷기를 몇 분, 잔잔한 물소리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강물 너머 신전이 올 테면 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세상..."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타키였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타키가 그린 그림을 보아서인지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이곳에 타키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타키와 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선 동시에 강물에 발을 담갔다. 물이 제법 차 소름이 돋았다. 물살을 헤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타키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척이나 넓고 듬직한 등이 조금은 낯설어 흘낏 흘낏 쳐다보았다. 새삼스레 성인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타키의 손을 살짝 잡고 강물에서 나와 드디어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안이 어두워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최대한 조심스레 걸어갔다. 몇 걸음 채 되지 않아 신주가 나타났고,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한 나는 타키를 제치고 신주에 다가갔다. 휴대폰을 살짝 바닥에 내려놓고 이끼로 뒤덮인 술병을 감싸들었다. 마개가 없는 술병에서 술인지 이슬인지 모를 것이 아슬아슬하게 병끝까지 차올라있었다.
"이게 왜 안닫혀있지? 분명 단단히 막아놨었는데."
"아, 그거. 아무래도 제가 5년 전에 마셨던 것 같아요."
"에엑?!"
표정관리도 못한 채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놀라 흠칫 몸을 떠는 타키의 모습에도 나는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 마셨다니! 이게 뭔지 알고나 있어요?!"
"쿠, 쿠치카미자케, 잖아요. 미츠하씨의─"
"─아아악!! 타키씨 변태예요?!"
"변태라니..."
"맞잖아요! 가슴 막 만지기도 하...고..."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에 말끝을 흐렸다. 타키도 나와 똑같은지 표정이 미묘했다. 얽힌 시선을 타고 잃어버린 무언가가, 그래 잊어버린 기억이 돌아온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제부터인가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도, 강물도 신경쓰지 않고 신지 꼭대기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구름과 이른 저녁달을 제치고 지나간 그곳에선 지면이 해를 삼키고 있었다. 아아, 황혼이다. 낮의 붉은 빛과 밤의 검은 어둠이 하늘에서 만나고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풍경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기억과 감정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드디어 찾았다. 겨우 다 찾았다. 그동안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외쳤다.
"타키군!!!"
"미츠하!!!"
옆에서 터진 목소리에 타키를 보았다. 타키는 나와 똑같은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뭐가 그리 웃긴지 둘이서 웃어대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눈물을 훔치고, 숨을 고른 후 나는 머리에 묶어둔 매듭끈을 풀어냈다. 몇년동안 쭉 나와 함께 한 매듭끈.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건만 가끔씩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기도 했다. 그건 너였구나, 타키군. 나는 매듭끈을 타키군에게 내밀었다. 타키군은 망설이다가 끝부분을 살짝 쥐었다.
"내가 5년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제 타키군 줄게."
"뭐야, 그게. 이거 원래 네 거였잖아. 이걸 어떻게 돌려준 건데."
"으응. 이젠 타키군 차례인걸."
나는 기어이 타키군의 손에 매듭끈을 쥐어주었다. 타키군은 곤란한듯 웃었지만 도로 돌려주진 않았다.
"아, 그리고 타키군말이야. 역시 멍청이지?"
"하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름쓰자고 한 건 자기면서 이상한 걸 써가지고 네 이름을 알 수 없게 되버렸었잖아. 정말이지..."
"이, 이상한 거라니! 그게 뭐 어때서!"
나는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5년이 지났지만 타키군은 타키군이다. 내 기억 속 타키군이 맞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만이 고요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하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나는 그 날 시간이 다 되어 미쳐 쓰지 못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타키군, 좋아해."
타키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더니 서서히 미소지었다. 타키군도 여전히 그때와,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구나. 우리는 손을 맞잡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간이 많다. 엇갈리지도 않는다. 잃어버린 것도 없다. 나는 그와 함께할 시간들을 그리며 몇 번이고 불렀다. 너의 이름을. 타키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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