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포레스트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시원한 바람이 머리끝과 피부를 어루만져주고는 지나간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긋한 풀 냄새에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나는 푸른 들판 위에 누워있었다. 약간 몽롱한 머리를 부여잡고 상황 판단을 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이 생각보다 훨씬 넓은 들판이란 것을 깨달았다. 대체 내가 여기 왜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려고 하는 무렵, 나 이외의 인물을 발견하곤 눈이 커졌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와 똑같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한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흰 원피스를 바람에 살랑거리며 어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어딘가 신비로워 보였지만, 아픈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동자는 어쩐지 쓸쓸하고 서글프게 느껴져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다.
엄마였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가 돌아가셔서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에 본 사진에서 그대로 나오신 듯한 모습이었기에. 동시에 이게 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종종 있는 일이다. 아빠에게서 엄마에 관한 얘기를 들은 날이면 늘 엄마가 나오는 꿈을 꿨고, 그때마다 꿈이라는 걸 깨닫곤 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들 하던데, 아마 엄마 얘길 듣고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엄마 꿈을 꾼 게 언제더라. 능력을 얻고, 독립하고 나선 꾼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치카』
드디어 엄마가 나를 보고는 이름을 불러주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날 부르시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입 모양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사진으로밖에 만나지 못한 엄마의 목소리를 내가 알 리가 없으니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할 수밖에. 그런 걸 전혀 모르시는 꿈속의 엄마께선 뭔가를 더 말씀하셨지만, 내가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이대로 계속 듣고 있는 척하고 있는 건 상당히 머쓱하기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예전에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이건 내 꿈속, 즉 자각몽이기에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손가락을 튕기면 엄마는 사라진다」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엄마가 사라지는 거다. 그다음에는 꿈의 흐름에 그대로 몸을 맡기며 잠시 후에 깨어나면 된다. 그냥 꿈속을 즐겨도 상관없지만, 엄마를 만난 후의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져서... 그렇게 생각하고 손가락을 튕기려는 순간─
「이치카」
뒤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엔 아까의 엄마처럼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빠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계셨다. 꿈인데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오는 느낌이 생생히 다가왔다.
「이치카... 미안하다.」
"아... 아빠?"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 살아줘서, 잘 지내고 있어서.」
"이게 대체 무슨..."
「하지만 잊지 마라.」
갑자기 검은 선들이 무수히 나타나 아빠 주위를 감싸더니 이내 완전히 아빠를 검게 만들어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꿈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아빠에게 뛰어가자 검게 변한 아빠의 실루엣이 모습을 바꾸어 완전히 다른 형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 알아차리곤 숨을 들이마시자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두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것은 다 계집, 너의 선택이란 것을.」
"하아... 하아..."
다시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천장에 얽히고설킨 파이프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구들이었다. 여긴 아지트... 그럼 꿈에서 깬 건가...
"아까 그건... 대체 무슨 꿈인 거야..."
손으로 눈을 감싸니 액체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 감촉은 볼을 타고 서서히 내려가다 이내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시라키, 이것도 좀 부탁한다."
"응, 알겠어."
"키도가 스스로 부엌에 누군가를 들이다니 별일이네."
"그러게 말임다. 우리가 갔다간 한 대 맞기 일쑤인데 말이죠."
"시라키는 너희랑 다르게 도움이 되니까."
"하하..."
어제저녁 준비를 도왔던 게 키도 맘에 들었는지, 씻고 언제나처럼 붉은 끈으로 반 묶음하고 나오니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와달란 제안을 받았다.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신세도 많이 졌고, 어차피 나도 아침 먹어야 하니까 별말 없이 거들어 준 건데 저런 반응이 올 줄은 몰랐다. 키도 요리할 때는 평소보다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으니 둘 다 그동안 쌓인 게 제법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기에 두 사람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키도가 썰어놓은 야채들을 냄비에 투하했다. 아지트 내부에 퍼져 나가던 맛있는 냄새는 어느새 향이 제법 짙어졌고, 아침 준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음~ 맛있는 냄새! 단장님 아침 다 됐나요?"
"아직. 기다려. 그런데 키사라기, 너희 오빠의 상태는 어때?"
"음... 지금마리쨩이 간호하고 있지만... 아직 눈 뜨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도?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됐을 텐데..."
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지금까지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조금 신경 쓰인다. 물론 몸 상태에는 별 이상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얼마나 체력이 약했던 거야, 저 사람. 에네 말로는 2년 차 히키코모리라서 몸을 움직이는 건 화장실이나 욕실에 갈 때뿐이고, 평소에는 야한 동영상이나 보며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저러는 거라고는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까여진 키사라기씨에게 잠시 묵념을. 아무튼,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깨우기라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 어디야!!!"
"히에에에에!!!"
"아, 일어났나 보다."
아지트 안쪽, 마리의 방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외치는 소리에 아침 준비하던 것을 멈추고 모두 마리의 방 쪽으로 향했다. 모모를 선두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평범한 히키니트 키사라기 신타로(18세)는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들을 보고 놀라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건 의자 뒤에 숨은 마리도 마찬가지지만, 그건 키사라기씨 목소리 때문이었고, 막상 당사자가 더 놀랐으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는 얼굴인 모모와에네가 있어 경계심은 조금 덜한 듯 보였지만 「백화점에서 테러리스트 습격 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장소에 있었고 백화점에서 만난 이들이 나타났다」라는 조금 복잡하고 당황스러운 전개에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듯했다. 그런 키사라기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해주지 않은 채 우리의 단장님은 우린 메카쿠시단이라며 더 이해 안 될 소개를 해버렸고, 바톤을 이어받듯 카노가 우리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나는 '이쪽의 단정한 소녀는 투시 능력자인 NO.11 시라키 이치카'라는 말로 소개되었다. 아무래도 난 진짜로 No.11로 확정된 모양이다.
나보다는 더 큰 문제는 일어나자마자 얼떨결에 메카쿠시단의 비밀을 들어버린 이 불쌍한 어린 양이었다. 비밀을 들어버렸으니 돌려보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메카쿠시단 NO.7 키사라기 신타로가 되어야만 했으니. 어찌 보면 모모보다 더 불운 체질인 건 이 사람이 아닐까. 2년 만의 외출에 백화점 테러, 그리고 그다음이 이런 수상한 단체에 가입이라니. 게다가 우리와 달리 능력도 붉은 눈도 없을 텐데 말이다. 혹시 알고 보면 불운 체질은 유전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일까?
뭐, 물론 당사자는 이걸 순순히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당연한 거겠지만.
밤새 의식을 잃었던 자신을 병간호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은 이런 단체에 소속되고픈 마음이 없다. 이 단체에 대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할 마음 또한 없다. 솔직히 이런 얘길 해봤자 자신만 미친 사람 취급 받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각종 논리적인 반박을 늘어놓던 키사라기씨였지만 '그렇다면 주인님의 비밀 폴더를 인터넷에 유포하죠, 뭐.'라는 에네의 간단하고도 말 한마디가 더 강했다. 결국 키사라기씨는 더 이상의 반항도 못 하고 그대로 메카쿠시단에 입단해버렸다.
그러니 앞에 했던 말을 정정하도록 하겠다.
이 사람 모모보다 더한 불운 체질이다. 암, 그렇고말고.
덕분에 신체적으론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정신적으로 크리티컬 히트를 맞아버린 키사라기씨를 겨우 달래고 달래 일단 아침 식사에 돌입했다. 아침 식사 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키도의 밥은 여전히 맛있었고, 분위기도 제법 화기애애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거라면 바로 옆에서 「이 상황이 제발 꿈이라고 말해줘 오오라」를 풍기며 밥을 먹는 키사라기씨때문에 입맛이 떨어졌다는 거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풀 죽는 모습이 모모랑 똑같다. 지금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옆에 있는데 표정 관리는 좀 해줬으면 좋겠다.
"주인!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유원지예요!"
"하? 너 아직도 유원지 가고 싶은 거냐?"
"당연하죠! 유원지에서 같이 놀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가지 않으면 주인의 비밀 폴더를─"
"아아아!!! 당연히 가야지! 뭐랄까, 지금 엄청나게 유원지가 가고 싶어졌어!"
말과 다르게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는데요, 키사라기씨. 에네가 말하는 그 비밀 폴더라는 것은 키사라기씨가 애지중지하는 동영상 폴더부터 낯간지러운 가사를 모아둔 폴더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라 한다. 아, 이것도 어제에네가 말해준 것이다.
저 사람은 초면인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테니 저렇게 급급하게 막는 거겠지. 만약 안다고 해도 우리한테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 유포시킬 테니 막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나라면 아예 그런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주의했을 텐데.
한편, 다른 애들은 잔뜩 울상이 된 키사라기씨는 신경도 안 쓰고, 유원지에 가는 거냐며 한껏 들떠있었다. 솔직히 나로선 왜 유원지에 간다는 거로 저렇게 들뜰 수가 있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나에게 유원지는 그저 가고 싶지 않은 곳 TOP 3에 드는 곳이라서. 그래도 분위기를 망치긴 싫어 말없이 그냥 젓가락만 움직이니 어느새 하얀 쌀밥이 사라지고 밥그릇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아침을 먹고 유원지에 가도록 할까."
"와아~! 유원지래요, 주인!"
"유원지... 기대돼!"
"진짜로 가게? 오늘?"
"뭐,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말이 있으니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점장님 못지않은 행동력이네. 분위기를 보니 밥 먹고 바로 유원지에 가는 것은 거의 확정인 듯하다. 마침 오늘은 알바도 쉬기로 했고, 이 애들과 노는 것 자체는 싫지 않지만... 나는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아빠의 기일인데 나 몰라라하고 애들과 시시덕거리며 노는 건 싫다. 게다가 간다는 곳도 다른 데도 아닌 유원지. 가봤자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나한테는 그런 건 돈 낭비에 시간 낭비다. 뭔가 유원지 가기 싫어 자기합리화하는 것 같아 기분은 썩 좋진 않지만, 아무튼 거절해야겠다.
"미안, 난 오늘 가야 할 데가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에!? 가야 할 데라니 오늘 꼭 가야 하는 거야?"
"응, 꼭 가야 해. 미안, 다음에 놀자."
"우으... 이치카쨩이랑 머리띠 같은 거 쓰고 놀고 싶었는데...."
아니, 만약 간다고 해도 머리띠 같은 건 안 쓸 거야. 싫으니까. 본심은 고이 집어넣고 최대한 미안하다는 뜻을 담은 표정을 지어보았다. 이 정도까지 하니 다들 어쩔 수 없다며 나를 빼고 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걸로 일단 목숨은 건진 셈이다. 휴...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어느샌가 이 도시 외곽 쪽에 있는 유원지에 가기로 정해져 있었다. 어제 나와 모모와 키사라기씨가 집에 안 간 것을 고려해 잠시 각자 집에서 갈 준비를 하고, 날 제외한 단원 모두 유원지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단장인 키도는 나만 빼놓고 간다는 게 좀 걸렸는지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나는 가볍게 넘겨주었다. 딱히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고.
비워진 그릇들을 치우고 나서 대충 나갈 준비가 된 우리 세 사람은 잠깐 들릴 데가 있다는 카노, 키도와 함께 아지트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과는 얼마 못 가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고 말았지만, 우연히도 우리 집과 모모네는 집 방향이 같아 한동안은 함께 걸을 수가 있었다. 만약 모모가 아이돌로 바쁘지 않았다면 같이 등하교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 아니 에네 포함 세 사람과 적당히 수다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오봉 휴가로 들떠있는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나를 염천 속으로 보내고선 검은 매연과 함께 멀리 사라져 간다. 휭하니 가버리는 버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수십 개의 비석을 향해 발을 뻗는다. 오봉이라 그런지 나와 같이 내린 사람들 말고도 곳곳에서 애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묵묵히 비석을 닦는 사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아무렇지도 않은지 다른 사람과 태평하게 얘기하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다. 단 하나 공통점이라 할 것은 그 사람들 앞의 비석에는 꼭 꽃이 놓여있다는 거다. 종류도 색상도 다양하지만, 각자의 마음을 담은 꽃이. 나 역시 오는 길에 산 흰 국화를 품속에 가득 안고서 수십 개의 비석과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 두 개의 비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라키 하나코」「시라키 타이치」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의 이름에 옛날에 들었던 내 이름의 유래가 생각나 슬쩍 웃었다. 어렸을 때 아빠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내게 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그중 하나가 내 이름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엄마가 나를 임신하고 계셨을 때, 엄마 쪽에서 먼저 아이의 이름을 짓자고 제안하셨다고 했다. 그때는 출산 예정일이 몇 달 안 남았던 시기라 태어나지도 않은 내가 여자인 걸 알고 계셨고, 그래서 가장 예쁜 이름을 짓기 위해 두 분이 머리를 맞대었다고 덧붙이셨다.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기에 정말로 예쁜 이름을 지을 거라며 의욕 만만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며 웃는 아빠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 나온 이름이 단 하나의 꽃이라는 뜻을 지닌 이치카(一化), 현재 내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치카라는 이름 자체가 어감도 뜻도 예쁜 편이고, 아빠의 이름인 타이치(太一)와 엄마의 이름 하나코(花子)가 합쳐진 것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지은 이름을 엄마는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차가운 비석에 쓰여 있는 두 이름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파져 온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 내릴 것 같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햇빛에 비하면 훨씬 시원한 공기가 폐 속에 가득 채워진다. 부디 이 공기가 텅 빈 것 같은 마음까지 메워주길 바란다. 마음 한쪽을 누르는 듯한 무언가를 내려놓는 대신, 품 안에 있던 흰 국화 다발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이네요. 엄마, 아빠."
이 말을 하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 따위 흘리고 싶지 않다. 한편으로는 어느새 두 분의 죽음에 조금 담담해진 건가 싶어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뭐, 아직도 부모님 꿈을 꾸는 걸 보면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지만.
대체 그 꿈은 왜 꾼 걸까. 중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 한 번도 꾼 적이 없는데 참 뜬금없다. 혹시 그거 때문인가? 어제 모모랑 모모 어머니의 통화를 들어서일까?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그리워 한 걸까? 아마 그런 거라고 멋대로 치부해놓고는 가방 안쪽에서 물과 수건을 꺼냈다. 이 생각은 그리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비석 위를 한 번 쓱 닦아보니 먼지가 묻어나오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아침인데도 벌써 비석이 데워진 건가. 오후엔 얼마나 더워지려고... 수건을 물에 적시고선 미끄러지듯 엄마의 비석부터 닦아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알바 쉬기로 했으니 오랜만에 집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한가하게 보내볼까.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결국 노트북 못 샀네. 하긴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 덕분에 그 애들을 만나긴 했지만 두 번은 절대 사양이야. 으음... 그 백화점은 어제 일 때문에 영업 안 할 테고, 어디 노트북 살만한 데 없나?"
듣는 이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듣는 이가 없어서일까 평소엔 혼자 독백할 내용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막 내보내고 있었다. 문득 그걸 깨닫고 입을 닫아버리자 비석을 닦던 손도 함께 멈춰버렸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수건은 다닥다닥 붙은 먼지에 회색으로 변해 비석과 흡사한 색깔이 되어 있었다. 수건을 오른쪽으로 치우자 가려져 있었던 글자가 깨끗해진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라키 하나코」
"...그때 대체 뭘 말씀하신 건가요, 엄마."
묵묵부답.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당연하지. 돌아가신 분이 뭔가를 말씀하실 리가 없으니. 애초에 그건 현실이 아닌 꿈속이었는 걸. 그때의 엄마는 그저 무의식중에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아빠도.
고개를 약간 돌리자 깨끗해진 엄마 이름과 달리 아빠 이름은 먼지에 의해 짙은 회색을 보이며 내가 닦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엄마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빠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 꿈속의 아빠는 그때처럼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말도 함께 하셨다. 살아줘서, 잘 지내고 있어 줘서 고맙다고...
"나는 아빠한테 딱히 고맙지 않아요. 나만 두고, 아니 나만 보냈으니까."
역시 묵묵부답.
솔직히 이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듣는 것도 별로 바라지 않는다. 분명 속상해하실 테니까. 난 왜 쓸데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버리고 다시 비석을 닦는 것에 집중했다. 아까 말하면서도 열심히 닦긴 했던 모양인지 몇 번 닦고 나자 엄마 쪽은 완전히 깨끗해져서 아빠 쪽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한쪽 면이 완전히 회색이 되어버린 수건을 반대로 접고 비석의 직선에 따라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단순히 반복적인 행동만 하다 보니 나의 뇌는 지루해졌던 모양인지 기껏 날려 보냈던 생각을 다시금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번에 떠올린 것은 맨 마지막에 나타난 여성이었다. 아니,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여성이라기보단 소녀 쪽이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나보다 연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대체 누굴까.
내가 죽은 그날에도, 오늘의 꿈속에도 나타난 그 검은 여성. 나에게 새 목숨과 이 붉은 눈을 준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꿈처럼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푸른 하늘과 높은 건물, 조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공간, 아빠와 그녀의 대화 이후 눈이 마주친 강렬한 붉은 눈, 그리고 이내 날 집어삼킨 커다란 입...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나 자신이, 그리고 그 여성의 눈과 같은 내 붉은 눈이 그날의 기억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잊을 수 없는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왔다. 그날의 기억 전부 다. 어쩌면 아빠는 아직도 그 텅 빈 곳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게 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열심히 닦고 있는 이 비석 아래 아빠의 시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아지트에 가면 메카쿠시단 전원을 모아놓고 이 이야기를 해주자. 그러면 조금이라도 그날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응. 꼭 그렇게 하자.
어느새 다 닦여진 두 비석에서 두 발자국 정도 물러서 부모님의 이름을 바라봤다. 그저 칙칙하기만 했던 회색은 어느새 내 등 뒤의 태양 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아, 어쩌지. 이제 와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뭐야. 전혀 담담해지지 않았잖아."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바로 후드를 뒤집어썼다. 능력이 제어 안 될 때 붉은 눈을 가리기 위해 입고 다니는 것이라 얼굴의 반 정도를 가볍게 가려주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울고 싶지 않긴 했지만, 막상 눈물이 나오니 딱히 울음을 멈추고 싶지도 않아 그저 가만히 눈물만 흘려보냈다. 울고 있으면서 소리 한 번 안 내는 것은 쓸데없는 옛 버릇 때문이겠지. 어쨌든 마음 한쪽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이 눈물과 함께 사라져버리길 기대해본다.
...쓸데없는 바람일까?
"시라키?"
옆에서 들려오는 약간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에 눈물도, 몸도 일시 정지된 듯 멈춰버렸다. 이 목소리는 분명... 환청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좋은 능력을 풀기라도 한 모양인지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고개는커녕 시선조차 그쪽으로 향할 수 없었다. 대신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에 난 눈물 자국을 타고 떨어졌을 뿐이었다.
왜 네가 여기에... 그보다 왜 하필 지금이야?
아니,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다. 급히 눈물을 닦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뒤를 돌아봤다. 이미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울었던 것을 숨기기 위해 후드는 여전히 뒤집어쓴 상태였다. 덕분에 눈이 가려지긴 했지만, 능력을 사용하면 키도를 보는 데에는 별문제 없다. 뺨에 난 눈물 자국이라든가 그런 거까지는 후드로 가릴 순 없지만..
"아, 키도구나. 유원지엔 아직 안 간 거야?"
"어? 어.. 아는 사람 기일이라서."
키도는 예상과 다르게 너무 담담한 내 모습에 약간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지만 역시 단장이란 것인지 표정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만 잘한다면 지금 상황을 내 페이스로 끌고 와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키도는 보기와 다르게 여린 구석도 있고, 내가 울었다는 것을 함부로 누설할 성격도 아닌 듯하니 그 점에 대해선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꼭 가야 할 데가 여기였던 건가."
"나도 누구 기일이라서. 오봉이기도 하고. 이제 슬슬 돌아가려던 참이야."
꼭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미처 넣지 못한 수건을 가방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젖은 상태를 비닐에 넣지도 않고 그냥 가방에 넣는다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그럴 겨를은 없었다. 키도의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으니까. 키도가 나를 향해 뭐라 말을 건네려는 순간 빠르게 입을 열어 말을 낚아챘다.
"그럼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가볼게. 안녕."
후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싱긋 미소지으며 가방을 부여잡고 키도의 뒤쪽으로 걸어간다.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여기서 더 할 만한 말도 없고, 해봤자 변명이나 얼버무림이 될 것만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키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볼 뿐 나를 잡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행이다.
"여어~ 키도!"
아니, 큰일 난 건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서 있는 곳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카노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으니까. 바로 이런 걸 두고 진퇴양난이라 하던가. 뒤로는 키도, 앞으로는 카노라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의 타이밍인지 모르겠다. 키도를 향해 손을 흔들던 카노는 나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움찔거리며 오른발은 뒤로 뻗었지만 이대로 뒤돌아 회피했다간 이번에는 키도에게 잡힐지도 모른다. 어쩌지...
"와, 시라키쨩 이런 데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놀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설마 유원지에 가겠다는 애들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아하하, 맞는 말이네. 아, 맞다. 키도 방금 세토한테서 문자가 왔는데 이제 곧 출발할 거래."
"그럼 우리도 이만 가봐야겠군. 아, 그렇지."
잠깐만, 키도. 그다음은 말하지 말아줘. 무슨 말 할 건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시라키, 너도 같이 갈래?"
말했다...
아까 먼저 가겠다고 말한 주제에 같이 안 가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같이 갔다간 유원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빠져나왔다고 소문이 날까.
"그래. 같이 가자, 시라키쨩. 이 이후로 일정 없으면 모두랑 유원지에서 놀고."
"안 그래도 혼자만 안 간다는 게 신경 쓰였었는데 잘됐군."
"아니, 난 알바가 있어서..."
내 경험상 어떤 스케줄에서 빠져나올 때 알바만큼 효과 있는 핑곗거리는 없었다. 게다가 이 둘은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걸 봤었으니 믿어줄 것이다.
"알바라면 편의점 말하는 건가?"
"응."
"오봉인 데다가 부모님 기일인데 알바라니 너무하네. 오늘은 쉬어도 되지 않아?"
...저 무덤의 이름은 또 언제 본 거래. 혹시 속이고 있었던 건가?
"그... 휴일이라서 사람이 더 몰려들 테니까..."
"그렇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부모님 기일이잖아? 그런데도 일을 시킨다고? 나쁜 점장님이네~"
"그런 분 아냐!"
그동안 신세 졌던 분이 악담을 당하자 순간 울컥해버렸다. 아차 싶어 급히 입을 막았지만 그렇다고 내뱉어진 말이 입속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하이톤으로 나간 내 말이 두 사람에겐 상당히 놀랄 일이었던 건지 네 개의 눈은 크게 뜬 채로 곧바로 내게 향해왔다.
그 시선에 한 가지 깨달았다. 오늘은 정말로 일진이 안 좋다는 것을. 혹시 모모와 키사라기씨의 불운이 내게로 옮겨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혼자 사느라 돈이 궁핍해서 알바를 늘린 거라고 말해볼까? 아니. 이런 말 하면 동정받을 게 분명하잖아. 여기서 무슨 말을 해봤자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솔직히 말하고 그냥 두 사람을 따라가는 것.
'하아...'
차마 내뱉지 못할 깊은 한숨이 두 개의 폐 속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이제 정말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 이렇게 자포자기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시라키."
"왜?"
"아까 그 무덤 말인데... 정말로 너희 부모님의 무덤인 건가?"
"...응. 맞아."
"그럼 시라키쨩은 지금 혼자 살고 있는 거야?"
"어... 뭐, 그렇지."
"이야. 혼자서 힘들겠네."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군... 그럼 너도..."
"응?"
"...이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이런 버스 안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 대신, 그때가 온다면 너의 이야기도 들려주길 바라."
"...응. 알겠어."
버스의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문이 갈라지며 내부의 공기와 사람들을 빠르게 내보낸다. 버스 안에 에어컨이 틀어져 있긴 했지만, 사람들 때문에 그리 시원하지도 않다며 속으로 투정한 나를 책망하듯 햇볕은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 손으로 그늘을 만드는 사이, 키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그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따라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유원지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 누구의 시야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사각지대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 단장님! 여기예요!"
혹시라도 들킬까 전전긍긍해 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모모가 그늘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굳이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아도 눈에 띄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아직 100%로 능력제어가 되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용케 어제 같은 큰 문제 없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제 한 일명 「키사라기쨩을 위한 능력 제어 교실!!」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하루 사이에 이 정도라면 모모 혼자 당당히 돌아다닐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불안정하니 키도가 옆에 꼭 붙어 다녀야겠지만.
"어? 시라키는 아까 못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오는 길에 만나서 데리고 왔어."
"우와! 그럼 같이 놀 수 있겠네! 재밌게 놀자, 이치카쨩!"
"으응."
떨떠름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유원지에서 재미있게 놀기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무식할 정도로 크게 지어진 입구 위로 뻗어 올라온 레일과 관람차, 자이로드롭의 기둥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 눈앞이 캄캄해져 온다. 저것들은, 아니 높이 올라가는 것 들은 스릴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전부 다, 절대로 타지 않을 테다! 아무리 자포자기를 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절대 포기 못 하겠다. 난 이런 데서 죽고 싶은 맘은 전혀 없다고. 눈에 띄게 안 좋아진 내 안색은 모모와 다른 사람들에겐 기대감에 가려져 버렸는지 겁이 날 만큼 즐거운 표정으로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이 유원지를 추천한 카노도 삼림 공원을 그대로 유원지로 만들어둔 느낌이라 설명했기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실제로 입구에서 보이던 것은 높이 있는 놀이기구 몇 개와 나무들뿐이었기도 하고.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휴가철의 인구 밀도를 거뜬히 수용하는 데다가 멀리 있는 사람들은 마치 점처럼 보일 정도로 규모가 거대해 깜짝 놀랐다. 실제 숲에 유원지를 만들었기에 카노의 설명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입구에 들어올 때 챙겨온 팸플릿을 보니 기본적인 놀이기구들 외에도 이곳만의 놀이기구 몇몇을 나무 사이사이 빼곡하게 배치해놓은 형태였다. 자연미가 가득한 나무들 사이에 끼어 들은 인공미가 넘치는 놀이기구라니 상당히 매치가 안 될 듯하면서도 은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설마 놀이기구 타는데 나무에 얼굴 부딪히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유원지라니 엄청 오랜만이에요! 뭐부터 탈까요?"
아까 입구에서도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막상 들어오자 더 실감이 나는 것인지 모모는 아까보다 더 하이텐션으로 빙글빙글 돌며 우리에게 물었다. 뭐부터라... 처음이니까 웬만하면 부담이 크지 않은 걸 타는 게 좋지 않으려나.
"제, 제트코스터 타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구나. 응. 시작부터 유원지의 꽃이자 내가 타지 못하는 놀이기구 TOP 3 안에 드는 녀석을 타겠다는 의견을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스릴 넘치는 건 못 탈 것 같은 마리의 의견이라니. 상당히 의외였지만 마리의 표정은 두려움 하나 없이 호기심으로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타본 적이 없어서 저렇게 당당한 걸까? 아니,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제트코스터인데? 나한테는 무리, 절대로 무리. 빠져나가야겠다.
"그럼 다들 타고 와."
"오, 그렇구나. 그럼 난 벤치에 앉아있을 테니까..."
"에... 처음이니 다 같이 타자!"
"아, 아니 난 스릴 있는 건 좀..."
"괜찮다니까! 타면 분명히 즐거울 거야! 결정이네!"
모모의 말이 신호가 된 것인지 다들 군말 없이 곡선을 그리는 레일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나랑 키사라기씨의 의견은 이대로 묵살되고 마는 것인가. 확실한 건 저걸 탔다간 내가 죽고 말 것이다. 죽어. 너희들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분명 죽는다고. 말하자.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여기서 체면이니 이미지니 챙길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어차피 내 주변은 거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어라? 이치카쨩, 갑자기 왜 멈추는 거야?
"...미안. 나는 역시 못 타겠어. 너희들끼리 타고 와."
"에에?! 왜?!"
"혹시 시라키쨩 스릴 있는 놀이기구에 약한 거야? 의외네."
"그렇다기보다는 높이에 약해. 고소공포증이 있거든."
"그, 그래도 처음이니까 타면 안 될까? 응?"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분홍색 눈이 마음을 찌르고 파고든다. 왠지 타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만 같은 이 근거 없는 느낌은 대체 뭘까. 처음이니까... 그래, 어쩌다 보니 온 거긴 하지만 나도 유원지는 상당히 오랜만이고, 이 애들과 노는 건 처음인데 빠지는 건 좀 그렇지... 안전장치도 있는 제트 코스터 한 번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고.... 마음이 거의 타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지만 역시 불안하긴 해서 고개를 들고 허공에 쭉쭉 이어져 있는 레일들을 바라봤다. 부드럽고 다이나믹하게 곡선을 그리는 레일. 그리고 그 레일 위를 빠르게 질주해서...
"꺄아아!!!"
...그대로 추락하는 제트코스터.
"이치카?"
때마침 떨어지는 여러 비명에 정신이 번뜩 돌아온다. 뭐가 한 번 정도는 괜찮은 지도 모른다는 거야. 한 번 탔다간 두 번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생겼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10M를 훌쩍 넘기고 있는데 저기 위에 있는 거로도 모자라 빠른 속도로 추락한다니... 좋지 않은 기억이 서서히 떠올라 온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눈앞이 아늑해지고 정신이 아찔해진다. 볼 순 없지만 지금 내 얼굴 상당히 창백하겠지.
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리.
기울어졌던 마음은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와 다급하게 빨간 경보를 머리에 울리고 있다.
"...미안. 고소공포증이 꽤 심한 편이라 안 되겠어. 미안해, 마리."
"아, 아냐. 나야말로 미안해..."
"고소공포증이니 어쩔 수 없슴다. 그럼 벤치에 가서 쉬고 있어요."
"오! 그럼 이 녀석 혼자 있기 뻘쭘할 테니까 나도 아래에 남을─"
"주인님! 어제 저랑 왔다 갔다 하는 거 다음에 제트코스터 타기로 약속했잖아요!!! 순서 바뀌는 건 상관없으니까 타세요! 안 그러면 주인님의 비장 폴더를!"
"우와아앗! 알겠어. 타면 되잖아, 타면! 그러니까 그 폴더 얘기 좀 작작 해!"
나와 달리 완벽하게 의견이 묵살되고 만 키사라기씨가 모두와 함께 제트코스터로 가는 모습에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빠져나오지 못한 키사라기씨에게 잠시 묵념. 혼자 남아 그렇게 독백하고는 혼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의 빨간 경보도 이젠 초록빛으로 돌아와 안정적으로 되었다. 그러고 보니 키도의 안색도 썩 좋지 않았는데 괜찮으려나. 음, 키사라기씨 못지않게 괜찮지 않을 것 같다. 그럼 두 사람에게 묵념을...
"자아, 그럼 이제 뭘 할까."
제트코스터와 그리 멀지 않은 벤치를 향해 걸어가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세토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일단은 기다릴 생각이다. 애초에 이 넓은 유원지에서 높이 때문에 마땅히 탈 만한 놀이기구도 없는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애들이 놀이기구를 즐길 때, 이렇게 나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슬쩍 모두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제트코스터 자체의 탑승 시간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휴일의 제트코스터의 줄은 꽤 길어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듯싶었다. 저런 걸 타려고 이런 땡볕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 대체 레일 위를 빠르게 달리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게 뭐가 재밌다는 거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모모는 '정말 정말 재밌어! 너도 타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는 철부지 소녀다.
어쩌다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 거니? 모모.
나도...저 애들도.
아, 그만두자. 기껏 유원지에 왔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싫다. 그렇지만 기다리느라 여기서 움직일 순 없는 상황이니 적당히 핸드폰 게임이나 소설보기나 하며─
"어?"
하얀 잠금화면 위 상태 바에 부재중 통화를 알리는 수화기 표시가 나타나 있었다. 평소 시끄러운 벨 소리가 싫어서 매너모드로 해놓은 탓에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봉에 나에게 전화할 사람이라면... 빠르고 막힘 없이 패턴을 그리고 나서 그대로 상태 바를 쭉 잡아당기니 예상한 이름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부재중 통화 2건 큰어머니」
역시...
저 네 글자에 텐션이 확 내려가고 만다. 나쁘신 분은 아니시긴 하지만 역시 마주하기 꺼려지는 상대다. 그래도 전화해야겠지...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거리다 가볍게 그 네 글자를 터치했다. 휴대폰 화면이 바뀌면서 가냘프고 매끄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와 귓속으로 들어오지만, 머릿속까진 들어오진 못했다.
왜 전화를 하신 걸까?
아빠 기일이라서 그런 거겠지.
전화 받으시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일단 안부부터 묻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안부 물은 후엔? 어떻게 이야기를 잇지? 그리고 어떻게 끊어?
그건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보자.
그다지 유용하진 않은 자문자답을 하는 와중에도 바이올린 소리가 귀속을 간질여 미칠 것 같았다. 바쁘신 건 알고 있지만 좀 빨리 받아주시면 안 되나요, 어머니.
“여보세요?”
"아,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저 이치카예요. 아깐 전화 못 받아서 죄송해요."
“아니, 괜찮단다. 그런 곳에 있으면 못 받을 수도 있지.”
그런 곳? 우리 아빠 무덤은 몇 년 사이에 그런 곳이 되어버린 건가. 나쁜 의미로 쓰인 게 아니란 걸 머릿속으론 이해하고 있지만, 기분이 조금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까 했던 자문자답을 밀어내듯이 머릿속은 그런 곳이란 단어가 서서히 구역을 넓혀가고 있다.
"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께선 올해도 못 오시는 건가요?"
“응... 올해는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지만, 어제 갑자기 일이 터져서 말이지.”
"그런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정말 미안하다, 이치카...”
어머니는 정말로 면목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아마 굳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도, 만약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도 만나기 힘들었겠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우리 부모님과 큰아버지네가 만든 기업은 현재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큰아버지네만이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 역시 당연한 수순인 듯 큰어머니, 큰아버지에게 입양되게 되었다. 사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두 분을 친근하게 대할 수 없어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도 없고, 오지 못하는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도 그렇게 바쁘셨는데, 두 분만이 이끄는 지금은 얼마나 힘들까. 바쁘신데도 날 생각해서 전화 거신 것인데 꺼린 것이 죄송해서, 그리고 괜히 나 때문에 우울해지신 것 같아서 애써 밝은 목소리로 어찌어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에 어머니도 기분이 좀 풀리셨는지 목소리가 한층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변했다.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이치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네?"
“뭐랄까, 표현은 잘 못 하겠지만 그런 분위기라서.”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 쪽은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걸 제외한다면 모두 잘 지내고 있어. 아버지도, 에이토도.”
에이토.
그 석 자를 들은 순간 혀가 전기에 마비된 듯 뻣뻣하게 굳어버려 움직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큰어머니가 그동안의 근황을 간단하게 말씀해주셨지만,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그날의 기억들로 마구 흩뿌려져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카? 이치카!”
"...아, 네?"
“생활비는 모자라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무슨 일 있니?”
"아, 아뇨. 저도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잠깐... 생활비는 전혀 모자라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아, 어쩌죠?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그러면 잘 지내거라.”
"네. 그럼 이만."
이 말을 끝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내니 벌써 통화종료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큰어머니도 일하던 중이셔서 먼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신 듯했다.
"하아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큰어머니나 큰아버지와는 대화만으로도 체력이 너무 소모되고 말아서 큰일이다. 역시 시간이 흘렀어도 대하기 힘들어... 서로 떨어져 지내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같이 지내는 건 싫다. 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만큼은 절대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엉망이 된 머릿속을 어떻게든 비우려 노력했다. 이런 생각 제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제발.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엄청난 비명에 자동으로 제트 코스터 쪽으로 눈길이 돌려졌다. 애들은 줄에 서있지 않는 걸 보면 벌써 탄 건가. 그럼 아까 그 비명소리는... 굳이 보지 않아도 자동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광경에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웃음과 함께 그 생각의 잔여물들이 한순간 비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시끌시끌한 단체야, 메카쿠시단은.
그래, 유원지에 놀러 와서 뭐 하나 즐기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러면 안 되지. 기운 내자, 시라키 이치카. 제트코스터의 속도가 워낙 빨라 이제 곧 있으면 끝날 것처럼 보였다.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 생각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한결 나았기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선 제트 코스터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다음에 애들은 무엇을 타러 갈까? 나도 탈 수 있게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닌 놀이기구에 가자고 부탁해보자. 몇 개밖에 안 되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니 타이밍 좋게 제트 코스터가 마지막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길게 줄 선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내며 출구 앞에 서 있으니 얼마 안 가 16인 정도의 길이의 제트 코스터가 눈앞에 멈춰 섰다.
"흥... 애들 장난인 속도였네..."
"흐응~ 애들 장난이란 말이지?"
"와아~ 정말 재밌었네요. 그쵸, 마리?"
"응! 한 번 더 타고 싶어!"
"아, 이치카쨩!"
"어때? 재밌었어?"
"응! 정말 완전!"
말로는 '그렇구나'라며 살짝 웃어 보였지만 여전히 제트 코스터가 재밌다는 건 이해를 못 하겠다. 다만, 약간 흥분한 모모의 표정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뿐이다. 탄 사람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 거니까.
"저기 신타로, 내리지 않으면 다음 사람이 못 타잖아."
마리의 말에 그제야 키사라기씨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트 코스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속 키사라기씨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게 하는 자세에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러나오자 좋지 않은, 절대 좋을 리가 없는 전개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설마... 키사라기씨 멀미─"
"우웨에에에에엑."
"오빠아아아아?!"
왜 항상 좋지 않은 예감만 맞는 것일까...
한껏 열이 오른 태양은 무시무시한 열과 빛을 우리에게 쏘아 보낸다.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가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심각한 데미지를 입은 사람이 내 옆에 앉아있다. 그래, 뭐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키사라기씨다. 속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낸 후 창피함 때문인지,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건지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키사라기씨때문에 우리들이 대신 직원분께 사과하고 뒷수습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친절한 직원분이 여긴 직원 측에서 치울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었기에 벤치 아래에서 쉴 수 있는 거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제트 코스터를 탄 사람들 사이에서 뭐라 형용하기도 싫고, 다가가기도 싫은 남의 그것을 치워줘야만 했겠지... 그건 정말로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경험이다. 그걸 우리 대신하고 있을 직원분께 조용히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
한편, 이 사건의 발단인 키사라기 신타로(18세)는 토해낼 것을 다 토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땅바닥을 향해 떨구고 있다. 처음부터 키사라기씨를 탓할 생각은 없긴 했지만,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말을 꺼내도 안 될 것만 같다. 초면인 우리들도 모자라서 유원지에 놀러 온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렸으니 이럴 만도 하지... 만약 나였으면 멀리 도망가 버렸을지도.
"신타로씨 괜찮슴까? 정말 다들도 갑자기 너무 들떴어요. 갑자기 제트 코스터에 타겠다니..."
"이야~ 신타로군, 큭큭..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후후..."
"카노, 말과 달리 악의가 너무 가득해."
"시라키 말이 맞슴다. 그거 실례라구요? 멀미에 약한 사람도 있어요. 좀 토한 정도로 바보 취급하면 불쌍하다고요."
"이... 이제 말하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키사라기씨는 여전히 안타까운 모습으로 처절하게 말을 뱉어냈다. 분명 굉장한 창피해하고 있겠지... 키사라기씨에겐 미안하지만, 동정심이 든다. 카노를 보면 자꾸 놀릴 생각인 것 같으니 재빨리 선수를 쳐서 화제를 바꿔야겠다. 이 이상 이 사람을 괴롭히는 건 너무 불쌍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유원지라. 고소공포증 때문에 기회가 있어도 잘 오지 못했었는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임다! 이렇게 다 같이 노는 것도 참 좋네요."
"확실히 생각해보면 이런 거 처음이네. 세토도 알바 때문에 시간 별로 없었고."
"그렇죠. 어제 알바 끝나고 왔을 때 정말 놀랐다고요? 키도한테서 신입 데려오란 문자 받고 시라키를 데려왔었는데 이미 아지트가 바글바글해서."
"단원이 늘어나서 키도도, 마리도 기쁜 듯했고. 정말 잘됐지!"
"동감임다. 메카쿠시단에 가입해줘서 감사함다, 두 사람 모두!"
"아, 응..."
가입해준 게 아니라 가입된 거지만. 특히 키사라기씨는
"그래서 세토가 보기에 키사라기쨩은 어때?"
카노의 말에 어째선지 키사라기씨가 움찔거렸다. 자기 동생 얘기라서 그런 걸까? 투덕투덕해도 서로 사이좋은가 보다.
"정말 예의 바르고 좋은 애임다! 설마 아이돌일 줄은 몰랐지만요."
"그건 키사라기쨩을 데려온 키도도 마찬가지였어. 그때 키도의 그 당황한 얼굴이란... 큭큭, 시라키쨩은?"
"나? 어... 밝고 활기찬 애라고 할까. 그동안 몰랐는데 정말 착하고 좋은 애더라."
"둘이 클래스메이트라며? 학교에선 어떤데?"
"그렇게 물어봐도... 학교에서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솔직히 모모는 일정 때문에 학교에 온 날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와도 학생들 사이에 끼어있어서 대화할 기회는커녕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었다. 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에 모모가 학교에 온 날이면 늘 저 애도 고생이 많지만 시끄럽다고 속으로 꿍얼거렸으니까. 심지어는 모모가 일정 때문에 도중에 학교를 나가면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온통 모모에게 미안한 것들뿐이네. 그땐 모모를 잘 몰라서 그랬던 거고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내면 되겠지.
"흐음, 그래? 그럼 다음은 에네쨩이네! 그 애도 활기차고 좋은 애지."
"응. 너무 활기차서 탈인 것 같지만."
"그런데 그거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요? 살아있는 거 같긴 한데."
"말로만 듣던 AI라는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떻게 만난 건가요, 키사라기씨?"
"나도 몰라. 꽤 전부터 컴퓨터에 정착하고 있다고... 어디서 온 건지 정체도 모르겠고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이제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인지 아까보단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키사라기씨가 말했다. 키사라기씨한테도안 알려줬구나. 하긴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말 사람 같은 AI가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졌다간 파장이 클 테니 쉬쉬하는 거겠지. 왜 만들어준 사람한테서 도망친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하필 키사라기씨인 걸까? 키사라기씨는 집에만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발설될 위험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그냥 놀리기 재미있어서? ...왠지 후자일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렇군. 그렇다는 건 그거네? 신타로군이 개인적인 과거를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에네쨩이 화났다는─"
"아니! 너 내 얘기 듣긴 한 거야?! 지금 이야기에 그런 요소 없었잖아!?"
"자꾸 반응해주지 마세요. 그러니까 더 놀리는 거라고요."
"에에~ 시라키쨩 재미없게 왜 그래. 신타로군의 반응은 되게 재밌단 말이야."
"내가 무슨 장난감이냐!"
아아, 하지 말라니까 또. 결국 키사라기씨는 계속 놀림당할 운명인가.
"자자, 두 사람 다 그만 하세요. 기왕 유원지에 왔으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고요? 신타로씨 뭣하면 저도 같이 갈 테니까 같이 유원지 특훈이라도 어떻슴까!"
"적어도 죽을 때까지 안탈 거야!! 그것보다 너희들 나랑 안 어울려줘도 되니까 어디든 돌고 와라..."
"그렇슴까... 그럼 시라키는 어떻슴까? 고소공포증 나을지도 몰라요."
"낫기는커녕 더 악화할 거 같은데. 나 죽을지도 몰라..."
세토는 나한테까지 거절당할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어쩔 수 없다면서도 아쉬운 티를 팍팍 내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다. 난 높은 놀이기구 같은 거 탔다간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 결코 과장을 보탠 거짓말 따위가 아니다. 나름대로 근거도 있다.
중학생 때 학교 소풍으로 유원지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분위기에 휩쓸려 그만 제트 코스터를 탄 적이 있었다. 타고나서 떨어지기도 전에 높은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 불쌍하게도 비명이 되지 못한 괴상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었다. 그런 나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제트 코스터는 쭉쭉 올라가 레일이 하나도 안 보이고 파란 하늘만 보이더니...
...그리고선 기억이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옥죄던 안전바가 아닌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그곳이 온갖 다양한 놀이기구가 모인 유원지가 아닌 새하얀 천장이 인상적인 병실 안이란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후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제트 코스터가 멈춘 직후 나는 과호흡을 일으키다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유원지로 구급차가 달려오는 기이한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거기에 내가 이송되었다고 생각하니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뒤늦게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말하자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하라고 혼나버렸고,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건 전교에 퍼지고 말았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소문이란 것이 무릇 부풀려지는 것이라 한동안 난 이상한 소문의 주인공으로 있어야만 했다. 그때 그 일은 정말... 아아, 떠올리기도 싫다. 살면서 느낄 창피함이란 창피함은 그때 다 느낀 것만 같다. 빨리 잊으려 노력한 덕분에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 일을 또 당할 수야 없지. 그것도 놀리는 거 좋아하는 카노 앞에선 절대─
"─지금밖에 없어!"
"네?"
한창 생각 중에 바로 옆에 있던 키사라기씨가 벌떡 일어나버리자 그만 크게 움찔해버렸다. 그렇지만 그건 키사라기씨 오른쪽에 있던 카노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깜박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뭐야, 뭐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신타로군. 발작?"
"왜냐고! 아니, 좀 혼자서 어슬렁거리고 오려고 생각해서 말이지! 아, 맞다. 수건 고마웠다. 여기... 어,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키사라기씨는 토한 직후 내가 빌려드렸던 수건 하나를 내게 내밀다 뭔가를 깨닫고 찝찝한 표정으로 다시 걷어들었다. 그 수건엔 키사라기씨의 땀과 그것이 묻어있으니 그대로 돌려주기 미안했던 거겠지. 나 역시 한순간 저걸 어떻게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버렸다. 내 것도 아닌 다른 사람의 그것이 묻은 건.....조금 묻었다고는 해도 역시 받기 싫다. 나중에 깜박하고 못 받을지도 모르지만 하나 정도 없어져도 상관없고 괜히 오늘 일을 건들이 는 것도 좋지 않을 거다. 키사라가씨는 오늘 살면서 느낄 창피함이란 창피함은 다 느꼈을 테니까. 내가 이해해주자.
"어쨌든 미안하지만 따라오지 말아줘! 그럼!"
"가버렸네."
"갔네요."
"큭큭, 정말 재밌다니까."
지금 누구 때문에 키사라기씨가 간 건데 카노는 옆에서 키득키득 웃고만 있다. 지금밖에 없다고 말한 건 카노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그건 키사라기씨의 사정이니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한여름날의 유원지에서 붉은 저지를 입고 수건을 달랑달랑 들고 다니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 그럼 계속 이어서 신타로군은 어때?"
"너한테는 놀리기 좋은 사람이지?"
"아하하, 바로 정곡을 찔러버리네."
부정은 안 하네?
"체력 면에선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좋은 사람같슴다."
"동감이야. 백화점에서도 활약해줬었고. 뭔가 좀 부족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딱히 나쁜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들어."
"오~ 생각보다 평들이 좋네? 에네쨩한테 그런 얘기 들었는데 말이야."
"으음..."
불현듯 어제 에네가 해주었던 주인님의 비밀 폴더 맛보기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목 몇 개만 쭉 읊어주는 것뿐이었지만 그 제목이란게 꽤 적나라해서... 결국 모모에 의해 제재당했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서 묻어두고 있었는데 카노때문에 다시 생각나 버렸다. 슬쩍 카노를 보니 키사라기씨가 없어서 그런지 아주 대놓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문득 키사라기씨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슴까?"
"뭐어, 그렇긴 하지. 헤에~ 혹시 세토도 그런 거 보는 거야?"
"넷?! 아, 아니 그... 저..."
숨김없이 당황한 얼굴. 얼마나 당황한 건지 귀까지 빨개졌다. ...보긴 봤구나, 세토도. 뭐, 세토 말대로 사춘기의 남자라면 당연한 거라고들 하니까 범죄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런데 왜 내 눈치를 살피는 걸까. 세토는 차마 나와 눈은 마주치진 못하고 틈틈이 곁눈질로 내 눈치를 보며 자기변호에 나섰다. 그에 카노도 지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맞받아치고, 그럼 세토도 나름 열심히 반박하고... 그렇게 다시 처음부터 반복. 끼어들기도 참 애매한 주제라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목이 조금 타는 것 같아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 냉기를 유지한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가자 속이 조금 시원해졌지만, 이 상황은 시원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유원지에 와서 이런 주제로 말다툼을 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뜬금없지만 조금 궁금해졌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언제까지고 이러고 앉아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할까. 지금 와서 세토 변호해주는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렇다고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적당히 떠오르고 효과도 좋을 만 한 건 화제 바꾸기지만 대체 무슨 화제여야 이 두 사람의 관심을 그쪽으로 끌 수 있을까.
고민은 의외로 간단히 끝이 났다.
"결국은 보긴 봤다는 거잖아. 에? 어디가, 시라키쨩?"
"나도 슬슬 혼자 돌아다녀 볼까 하고."
"혼자 가는 검까?"
"응. 어차피 나는 제대로 탈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 나랑 같이 다녀도 별로 재미있지는 않을 거야."
"난 같이 다녀도 상관없는데~"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리고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순서대로라면 이제 내 차례잖아? 신입 평가."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네요."
"난 안 듣고 빠질 테니까 마음껏 말해. 그럼."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고선 아무렇게나 발을 뻗어 아무 데로나 걸어갔다. 뒤에서 두 개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려면 어때. 그 뒤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아까 한 고민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상황이 이상하게 돼서 불편하긴 하지만 내가 이 상황을 끝내야 할 의무는 없다. 애초에 두 사람의 문제니 둘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고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서 여기서 벗어나도록 하자. 가면서 새로운 얘깃거리 하나 정도는 던져줘도 괜찮고. 간단히 말하자면 회피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늦게 떠올린 걸까.
자, 그럼. 거기서 벗어난 건 좋지만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애들 분위기로는 해가 지기 전까지는 신나게 놀 기세다. 휴대폰을 꺼낸 확인한 시간은 12시 30분 무렵. 벌써 점심 때인 건가. 그렇지만 배는 별로 고프지 않다. 점심은 나중에 허기지면 먹도록 할까.
그럼 진짜 뭘 해야 하지? 돌연 발길을 멈추니 내 주변의 상황, 모습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느덧 뜨거워진 태양, 다들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습을 흐리게 만드는 아지랑이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 무엇을 하든 상관없으니까 어딘가로 피신을 하고 싶다. 다시 느긋하게 발길을 옮기며 이번에는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눈으로 쭉 훑어보지만 대부분 높이가 있는 것들뿐.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긴 하지만 이미 탈 나이가 지났다.
"...유령의 집이라도 가볼까."
별로 유령이나 좀비나 호러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갈만한 곳 중 그나마 제일 나았다. 이런 곳의 유령의 집이 그렇게 무서울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지? 무엇보다 이 염천 아래에서 해지기 전까지 돌아다니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좋아, 가보자. 정하고 나자 느긋했던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뜨거운 염천 아래, 흔들리는 아지랑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왠지 몇백 년은 된 것 같은 서양식 건물은 주로 검은색과 보라색으로 되어있는 데다가, 풍화된 흔적들로 가득해 섬뜩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왔다. 건물 근처는 묘석이라던가 도끼, 썩은 나뭇가지 등 갖가지 호러 아이템들로 장식되어있어 건물의 분위기를 더욱 선명히 해주고 있었다. 그건 안쪽도 마찬가지인지 가끔 들려오는 손님의 비명으로 이 유령의 집의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금색 테두리에 감싸진 검은 색 간판에 적혀진 '괴기-망령 인형의 관'이 이 유령의 집의 정식 이름인 듯했다.
"그런데 이런 법이 어딨어..."
위쪽 간판에 향해있던 내 시선은 그대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조금 틀어져 간판과 같은 분위기의 안내문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나갔다.
※주의사항※
ㆍ심장이 약하신 분, 노약자나 임산부는 이용을 삼가십시오.
ㆍ직원의 안내에 따라 차례대로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ㆍ본 어트랙션의 이용 시간은 약 10분 정도입니다.
ㆍ2인 1조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아도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1~3번까지는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뻔한 내용이지만 문제는 4번째. 2인 1조라니. 이건 혼자 온 손님을 무시하는 처세임이 분명하다. 유령의 집은 커플들만의 소유물은 아니잖아. 그런데 왜 혼자면 안 되는 거지? 가령 호러 마니아인 사람이 진지하게 이 유령의 집을 보고 평가해보고 싶어서 혼자 찾아왔다든가 하는 상황이...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혼자서 유원지를 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 경우에는 단체로 왔다가 개인행동을 하는 거지만 어찌 되었든 혼자는 혼자니. 그럼 결국 이 더위 속을 집합 전까지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건가. 아아, 그건 좀 봐줬으면 좋겠다. 다시 팸플릿을 꺼내 갈 만한 데를 찾아보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대부분 2인 이상이 기본일 듯 하다. 그럼 나 혼자 가봤자 소용없단 얘기.
갑자기 의욕도 기분도 팍 꺼진다. 난 대체 뭐를 위해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거지? 물론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아니, 그럼 들인 돈이 너무 아깝다. 무엇보다 혼자 온 것도 아니니까.
아, 그래. 혼자온게 아니었지.
왜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분명 태양 빛에 피어난 아지랑이 탓일 거라며 엉뚱한 변명을 붙여본다. 어쨌든 나에겐 같이 놀 상대가 있다. 멀리 있어봤자 유원지 안이고 제트 코스터 다음으로 유원지에서 사랑받는 아트랙션이니 거절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아니, 있을지도. 뭐, 그 사람은 제외하고. 세토랑 카노도 방금 막 헤어져서 바로 만나긴 좀 그러니까 제외. 그럼 남은 사람 중에서 바로 올 사람은...
"이치카쨩!"
"와앗! 까, 깜짝이야. 뭐야, 모모랑 키도였구나."
"헤헤, 많이 놀랐어?"
"응.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모모를 살짝 밀어내며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자 모모는 헤헤거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로 놀랐다. 딴생각을 하던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 가까이 온 사람의 기척을 눈치 못 챈 일은 거의 없었는데. 또 다른 생각으로 빠지려던 중 키도의 존재를 눈치채고 바로 그만두었다. 키도의 능력은 「눈을 숨기는 능력」 즉,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이었으니까 눈치 못 챌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지?"
"아, 유령의 집에 들어갈까 하고. 그런데 2인 1조라서 못 들어가고 있었어."
"와아~ 유령의 집이라니 재밌겠다! 우리 들어가요, 단장님!"
"유, 유령의 집... 말이지..."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는 키도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한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려는 입은 안타깝게도 경련이 일어났고 눈은 아예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아니 내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키도가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유원지의 즐거움에 취해있는 모모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 키도를 질질 끌고서 제법 긴 줄에 다가가 섰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움찔거리던 키도는 그 소리를 회피하듯 하얀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음악 소리를 키웠다. 이건 영어... 팝송을 듣는 모양이다. 바로 옆이라고는 하나 가사까지 들릴 정도로 키우다니 그렇게나 무서운 걸까. 그럼 아까 나처럼 양해를 구하고 빠지면 될 텐데. 아, 모모 때문에 안 되겠구나. 그렇다고 싫은 사람을 억지로 하게 하는 취미 따윈 없다. 키도의 어깨를 몇 번 톡톡 건들자 여전히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한 키도가 고개를 돌려주었다.
"아... 왜, 왜 그러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그냥 다른 데 갈래?"
"무, 무슨! 이런 애들 장난 같은 게 무서울 리가..."
"하지만 안색이 안 좋아."
"더워서 그런 것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 찮다."
말하면서도 비명에 반응하고 있으면서 무슨... 백화점에서 워낙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몰랐는데 아까 제트코스터도 그렇고 은근 겁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그걸 티 내는 건 또 싫어하고. 단장이라서 그런 걸까? 그래도 이런 상태로 유령의 집에 들어갔다간 기절이라도 할 기세다. 조금 방향을 틀어볼까.
"그런데 이거 2인 1조잖아. 우린 세 사람인데 들어갈 수 있나?"
"내 능력으로 한 사람의 기척을 완전히 지우면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한테는 다행이 아닌 것 같아. 줄의 길이와 키도의 창백함은 반비례하는 것인지 줄이 짧아질수록 키도의 얼굴이 점점 더 새하얘져 갔다. 이 이상 말려봤자 소용없겠지. 계속 괜찮다고 할 테니까. 사실 괜찮지도 않으면서.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하겠다는 사람 억지로 안 하게 하는 취미도 없다. 본인이 말로는 들어가겠다고 하고, 모모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고, 나도 이 곳 말곤 딱히 갈 데도 없으니 들어가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 세 사람은 괴기-망령 인형의 관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들어가게 된 유령의 집 내부는 이름에 걸맞은 섬뜩한 서양 인형이나 피를 한가득 뒤집어쓴 온갖 골동품들로 가득 차 있어 외부보다도 한층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대한 문이 닫히자 바깥 햇빛과 완전히 차단되어버려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분포해있는 가녀린 양초 불빛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모 옆에서 얼어붙은 키도를 끌고 천천히 나아갔다. 냉방 겸 공포 효과로 생각되는 서늘한 공기가 발목 아래에서 넘실거리고 있고, 그 아래에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령의 집 BGM과 어우러져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유원지라 얕보고 있었는데 이거 생각 이상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공포감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온다.
그렇다고 해도 나름대로 공포나 호러에 강하기 때문에 키도는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 목 없는 사람의 초상화나 의미불명으로 매달린 낫 등을 하나하나 보고 지나친다.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장식품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람 초상화의 눈이 움직이는 정도? 원래 유령의 집에서 맨 처음 들어가고 뭐가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는 이 시점이 제일 무섭긴 하다. 그래도 시작의 시작인데 키도는 벌써 허리를 반쯤 숙이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이러다가 키도가 기절해버려서 나랑 모모 둘이서 들고나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설마 기절할 때 능력이 풀리는 건 아니겠지?
"우와아아... 이거 꽤 무섭네요. 그쵸 단장... 단장님?"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걸어가. 키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아무래도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에... 응. 그렇네. 아! 저 인형 귀엽다!"
모모가 귀엽다고 말한 그 인형은 마구 난도질당한 검은 중절모와 정장을 입은 인형이었다. 복장도 복장이지만 입은 귀까지 길게 찢어져 있는 데다 두 눈은 큰 단추로 어설프게 꿰매져 있어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이 생겼다. 누가 봐도 섬뜩하고 기분 나쁜 인형이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모모의 취향은 호러인가. 그건 상당히 의외인걸. 그 순간 그냥 굴러가던 인형이 갑자기 역회전해서 우리 앞에 딱 멈추더니 목을 긁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저택의 주인은 예전에 인형 수집가였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돌변해, 손님을 불러서는 차례차례로 인형으로 바꿔버리는 살인귀가 됐다. 너희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나! 힛힛힛...」
"까아아아!!!"
목을 90도로 돌리며 기분 나쁘게 웃는 모습은 소름을 돋게 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이 인형에게 귀염성이라곤 전혀 없다. 그런데 이 인형보다 솔직히 키도의 비명에 더 깜짝 놀라버렸다. 바로 옆에서 하이톤의 비명을 들은 적이 있는가. 정말로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소리조차 내지 못했네. 키도 목청 좋구나.
뭐, 어쨌든 아까부터 살인의 흔적이랑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더니 다 이런 설정이라서 그랬던 거구나.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인형 수집가가 살인귀가 되어버리는 건데.
"뭐, 뭐야, 저 인형! 귀여운 외모를 했는데 저런 목소리를 내다니 완전히 속아버렸어!"
"아니, 저 모습에 저 목소리는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고 키도 괜찮아?"
"헉... 괜, 괜찮..."
"이, 이치카쨩 저기 뭔가 있어..."
모모는 조금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니 흔들리는 촛불에 몇 명의 인영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실루엣, 행동, 아까의 설명이 합쳐지자 그것들의 정체, 정확히는 유원지 직원분들의 분장 컨셉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좀비.
그것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몇 m로 좁혀지자 그것은 사실로 다가왔다. 살구색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녹 빛의 썩어 문드러진 피부는 마치 염산에 녹여진 듯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기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들엔 붉은 피가 묻어져 있었고 얼굴도 눈이 없거나 튀어나왔거나, 코가 완전히 주저앉아있다던 가의 괴기한 생김새를 하고 있어 징그러웠다. 이 양관 주인 살인귀가 돼서 손님들을 인형으로 바꾼다더니 인형이 좀비였던 건가. 아니면 그냥 설정은 둘째치고 무서워지라고 넣은 요소? 확실히 모습은 제법 그로테스크하지만, 상대는 좀비, 따라오는 속도가 빠르진 않고 어차피 직원분들이니까 그리 위협적이진 않─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악! 다, 단장님?!!"
아, 실수. 누군가에겐 존재 그 자체로도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잠깐, 지금 이런 태평한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모모 빨리 따라가자! 키도랑 떨어지면 네 능력이 억제가 안 되잖아!"
"아, 맞다! 같이 가요, 단장님!"
뒤쪽의 좀비들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키도 뒤를 쫓아 길고 긴 복도를 뛰어갔다. 설마 이런 곳에서 추격전 아닌 추격전을 벌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좀비가 아니라 키도랑. 그렇다고는 해도 이쪽은 진짜 중대한 문제이다. 이곳은 오봉 휴가를 맞아 가족 단위 손님으로 가득 찬 유원지. 이런 곳에서 모모의 능력이 발동되기라도 했다간 분명 어제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대소동이 되어버리겠지. 어우...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힘껏 달려가 벽에서 튀어나오는 손들을 지나 코너에서 왼쪽으로 꺾자 잠시 멈춘 채 숨을 고르고 있는 키도가 보였다.
"키도!"
"단장님!"
"아... 시라키하고 키사라기.."
"갑자기 뛰어가시면 어떡해요..."
"아아... 미안하다. 잠깐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이지. 그래도 이젠 괜찮다."
오늘 아침에 급하게 정해진 유원지의 평범한 유령의 집안에서 겁에 질린 키도가 해야 할 급한 일이란 게 뭔지 심히 궁금하다. 하아... 무서우면 괜히 폼 잡지 말고 솔직히 무섭다고 하지. 아니면 아예 들어오기 전에 내가 기회를 줬을 때 다른 데로 갔어야지...
안 되겠다. 유령의 집에서 키도에게 의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인 것 같다. 보니까 키도 만큼은 아니지만, 모모도 제법 무서워하는 것 같고. 나라도 키도를 잘 챙기지 않으면...
"뭐, 어찌 됐든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야."
"그러게. 자, 그럼 계속해서 앞으로 가요!"
"그, 그러지─?!"
"우케케케켁!!"
"꺄아악!!"
겨우 키도가 진정되었다 싶을 때 쯤 앞에서 만났던 설명 인형만큼이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리니 아마 처녀 귀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기분 나쁜 인형이 공중에 매달려 삐걱거리는 몸을 열심히 흔들며 웃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그것도 바로 뒤에서 나타났기에 이건 나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키도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잠깐, 키도! 어디 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금까지 뛰어왔던 길로 역주행해서 달아나 버렸다. 나 역시 놀란 상태였기에 키도를 그대로 놓쳐버렸고, 뒤늦게라도 키도를 따라간다고 해도 다른 손님들과 마주칠 확률이 너무나 높다. 아까 생각한 것처럼 여긴 무수한 손님들로 가득한 유원지. 거기에 모모를 알아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 키도를 따라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키도가 없으면 여기서 나갈 수가 없는데...
"어, 어떡하지?! 단장님이 가버렸어!"
"...일단 진정해. 우선 사람들이랑 마주치면 큰일이니까 어디 숨어있자. 능력도 어제 배운 대로 최대한 억제해보고. 알았지?"
"응!"
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모에게 한 번 싱긋 웃어준 뒤 구석에 한가득 쌓여있는 관 뒤쪽으로 향했다. 여긴 그나마 있는 촛불들로도 비치지 않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야가 잘 닿지 않는 사각지대이니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키도에게 얼른 오라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인가.
"저기... 미안해, 이치카짱..."
"미안하다니 뭐가?"
"괜히 나 때문에 이치카짱까지 이런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모모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엔 한치의 가식도 없었다. 능력을 써서 봐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아냐."
"어?"
"애초에 여기 들어오자고 한 건 나인걸. 그리고 멋대로 가버린 키도한테도 잘못이 있고, 이런 것도 꽤 재미있으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그래도 나 어제부터 이치카쨩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나 끼치고 있는걸..."
"나도 능력제어가 안 될 때 주변에 민폐 많이 끼쳤었어. 그리고 어제는 오히려 모모 덕분에 모두가 살았잖아. 새삼스럽지만 어젠 정말 고마워."
"어? 아, 으응... 천만에!"
모모는 조금 쑥스럽게 웃으며 얼굴을 긁적거렸다.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걸까. 나도 모모를 마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이렇게 가식 없이 진실한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본다. 어쩌다가 이런 착하고 평범한 모모가 이런 능력에 휘말려 버린 건지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도 어차피 생겨버린 능력, 나처럼 자책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능력 제어도 얼른 마스터하면 좋겠고.
"아! 이것 봐, 이치카쨩! 여기 도끼랑 피랑 뭔가 잔뜩 있어!"
"분장 소품들인가... 여기서 몰래 분장하기도 하나 보네."
"우리 이걸로 한번 분장해볼까?"
"아니, 됐어. 언제 키도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분장했다간 상황이 더 악화할지도 몰라."
키도가 분장한 우릴 보고 겁먹고 또 달아난다거나 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 피해야 한다. 응. 그건 그렇고 키도는 언제쯤 돌아오는 걸까. 꽤 늦는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거니 줄을 처음부터 서야 하니 늦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런데 여기 2인 1조인데 키도 혼자서 어떻게 들어오지? 자신의 능력으로 존재감 완전히 감춰 혼자 들어올 수는 있지만, 겁쟁이인 키도가 혼자서 들어올 수 있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최악의 경우엔 집합 시간이 돼서야 여기 나갈 수 있을지도... 아아, 그건 정말로 싫다. 키도 만큼 겁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런 우중충하고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곳에 오래 있고 싶진 않다. 부디 키도가 빨리 누군가를 발견해서 같이 들어오길 기도하는 수밖에.
"단장님 언제 오시려나..."
"잠깐만... 아, 저기 있다. 키사라기씨랑 같이 있는데?"
"정말? 어디?"
"바깥에서 줄 서 있어. 저 길이면 좀 더 기다려야겠다."
"우아아, 그 능력 진짜 편하다! 나도 그런 능력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모모 능력도 대단하잖아."
"내 능력은 불편하기만 한걸... 우으..."
내 능력은 제어 안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힘들어지는걸.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선 딱히 모모의 말을 부정 못 하겠다. 설마 유원지에서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확실히 위치를 알 수 있어 편하긴 하다. 어차피 여기선 사람들한테 들킬 위험도 적기에 아예 능력을 쓰고 있기로 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후드를 뒤집어썼다. 눈을 가릴 정도까지 내리면... 좋아, 이걸로 문제없다.
내가 보지도 않은 사이 몇몇 커플이 우리 앞을 지나가고, 드디어 키도와 키사라기씨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키사라기씨도 키도 못지않게 겁 많아 보이던데 괜찮을까.... 내 걱정은 정말 보란 듯이 잘 맞아 들었다. 여동생인 모모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다른 의미로 카노나 에네한텐 말해선 안 될 추한 모습들이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키도는 아까 한번 들어와 봤기에 상대적으로 덜 했지만 겁먹은 모습은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들려오는 비명도 지금까지 들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데시벨이 크다. 이 정도 소리라면 자동차 경적은 가뿐히 넘길지도. 저 겁쟁이 두 명이 각각 메카쿠시단의 단장과 메카쿠시단의 최연장자라니 믿고 싶지 않다.
"안 되겠다."
"왜 그래, 이치카쨩?"
"모모 미안하지만 난 저 두 사람 마중 갈 테니까 여기 잠깐만 혼자 있어 줘."
"알겠어! 걱정 말고 다녀와."
"응. 금방 다녀올게."
후드를 더욱더 깊게 뒤집어쓰고 어두운 유령의 집을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설마 유령의 집을 역주행하는 기이하고 남들은 하지도 않을 짓을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곤 꿈속에서도 몰랐는데. 어째선지 최근 전혀 생각조차 못 한 경험을 연달아서 하고 있다. 이건 메카쿠시단 애들을 만나서 그런 걸까.
어쨌든 우선은 저 겁쟁이 두 사람을 모모 쪽으로 데려오는 게 우선이다. 두 사람은 현재 코너를 꺾어서 말하는 정장 인형이 튀어나오는 곳 부근에 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좀비들이 나오기 전후쯤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위치를 대강 파악한 후 능력을 풀고 거침없이 발을 내뻗었다. 온갖 장식물이 난무하는 유령의 집에서 능력을 계속 썼다간 어딘가에 부딪히고 걸리고 치이기 마련이니까. 모모는 이 능력이 편하다며 칭찬해주었지만 사실 엄청 불편하다. 너머에 있는 건 볼 수 있어도 정작 눈앞에 있는 걸 볼 수 없으니... 이걸 말해도 모모는 자신의 능력이 더 불편하다고 할 게 뻔하지만. 계속 걸어가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돈 후, 깜깜한 실내 탓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찾아 한 번 더 능력을─
"으아아아아아!!!!"
─사용할 필요 없었다. 붉지 않은 내 눈에도 누군가의 실루엣이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것 정도는 볼 수 있다. 서로 거리 차가 좀 있는 것 같지만 틀림없이 키도랑 키사라기씨겠지... 두 번 다신 저 두 사람하고는 공포나 호러를 즐기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아..."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걸어가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키도! 키사라기씨!"
"우아앗!!!"
"잠깐, 놀라지 마. 나야, 나. 시라키 이치카."
"아아... 시라키였나. 거기서 튀어나오다니 놀랐잖아."
딱히 튀어나오거나 한 건 아닌데.
"야, 키도! 나만 두고 도망가지 말라고! 겁나 무서웠잖─어, 너는..."
"어쨌든 두 사람을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네요. 얼른 가죠. 저쪽에 모모가 기다리고 있어요."
"오, 오우..."
키도는 뒤늦게 폼을 잡으면서, 키사라기씨는 뭔가 수치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온다. 어쩌다 보니 내가 책임져야 할 짐이, 아니, 사람이 두 배로 늘어나 버렸지만 열심히 해보자. 응. 그래도 모모가 있는 곳까지 나타나는 것들은 다 파악하고 있다. 그 뒤로는 능력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하면 이 두 사람이라도 아까처럼 도망가거나 하진 않겠지. 한 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은 절대 사양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이성을 놓아버리고 전력으로 두 사람을 붙잡아 화낼지도 모른다. 내가 화내는 모습은 무섭다고 다들 그랬지... 나 자신도 화를 내는 모습은 별로 보이고 싶지 않기에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모모가 있을 코너가 보이는 부근까지 왔을 때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어깨에서 내렸다. 그에 바로 뒤에 따라오던 키도가 나와 부딪히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뭐야. 왜 갑자기 멈추는 거야?"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키사라기씨의 말은 가볍게 넘겨 흘리고 들고 있던 가방을 거리가 가까워진 두 벽 사이에 던져버렸다. 가방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마치 벌레라도 들어온 식충 식물처럼 두 벽에서 무수한 손들이 나와 허우적거렸다. 그걸 본 키사라기상은 뜨악한 표정으로 손들을 바라봤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달은 손들은 몇십초도 안 되어 벽 너머로 사라졌다. 열심히 이 트릭을 만드신 분, 반칙 쓰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저는 얼른 이곳을 나가고 싶답니다. 물론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오... 꽤 능숙하게 트릭을 피하네."
"이런 건 센서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위치나 보통 바닥 쪽에 무게를 감지해서 발동되기 마련이니까요. 이번은 무게라서 다행이었네요."
"그럼 계속 갈까. 키사라기는 어디있지?"
"코너를 돌아서 쌓여있는 관들 뒤에 숨어있어. 안내할게."
처녀 귀신이 튀어나왔던 곳은 절대로 밟지 않도록 유의하며 복도 구석 관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모모는 우릴 보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와 마치 몇 년간 못 만난 사람을 본 것처럼 무척 반가워했다. 모모 앞에서 키도는 하나도 겁먹지 않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나간 것 뿐이라는 듯이 폼을 잡았지만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하나의 개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도는 보이쉬하고 어른스러운 단장 이미지였는데 좀 깨졌달까... 아, 그렇다고 싫어진 건 아니다. 조금 귀찮아졌을 뿐. 좋게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매력이다.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더라... 갭(Gap)?
어쨌든 이걸로 드디어 유령의 집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곳은 지긋지긋하다. 키도가 자신과 모모의 기척을 완전히 없애 들어갈 땐 둘이었는데 나갈 때는 넷이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막았다. 나는 나대로 또다시 키도가 뛰쳐나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내가 능력을 사용한 채 앞장서 앞에 뭐가 나오는지 미리 알려주기로 했다. 이에 키도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말렸지만 그런 거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물론 미리 알려주면 재미가 없긴 하겠지만 여기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해버렸는걸. 아아, 딱히 키도 네 탓이란 건 아니야. 고의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빨리 나가지 않으면 얼마 더 놀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이제 슬슬 모두랑 만나지 않으면... 카노나 세토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리는 휴대폰도 없고 낯도 상당히 가리니까 걱정돼. 그러니까 일단 빨리 나가는 거에만 집중하자. 어차피 이런 유령의 집 같은 거 애들 장난이니까 별로 볼 것도 없잖아. 그치?"
그렇게 말하자 키도는 간단히 넘어왔다. 양심도 한 번 찔려주고, 단장으로써 책임감도 한 번 들쳐주고, 무엇보다 자존심을 지켜주려 했으니 거절할 리가 없지. 뭐랄까, 손이 많이 가는 단장님이네, 키도는. 의외로 다루기도 쉽고.
"정말이지... 오빠가 겁이 많은 탓에 이게 뭐야. 유령의 집도 만끽 못 하고 이치카쨩한테 폐나 끼치고."
"뭐?! 애초에 이건 키도 저 녀석이 유령의 집을 뛰쳐나와서!"
"단장님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런 거라고 했잖아! 단장님 탓으로 몰지 마!"
"하아? 이런 유령의 집에서 무슨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어!"
"난 정말 개인적인 사정으로..."
유령의 집을 만끽 못 한다는 게 모모는 꽤 아쉬웠는지 그걸 키사라기씨에게 풀기 시작했다. 그에 키사라기씨도 지지 않고 나름대로 반박하고 나서는데 겁이 많다는 걸 자신도 인정하는 모양인지 조금씩 모모한테 밀린다. 그래도 오빠인데 사정없이 당하네... 이래저래 키사라기씨는 당하는 타입이구나. 덕분에 무서운 분위기가 싹 사라져서 키도조차도 겁먹지 않고 있긴 하지만 조금 시끄러워졌다. 음, 그래도 비명보다 덜 시끄러우니 잘 된 걸지도.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싫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투덕거리고 있으니─
"...사이좋네."
─라는 생각도 들고.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고.
"에? 사이좋다니?"
"아, 혹시 나 말로 했어?"
"말로 제대로 나왔다고. 그건 그렇고 이게 사이좋아 보이다니..."
"그렇게 티격태격한다는 게 사이좋다는 증거예요. 대화는커녕 눈도 안 마주치려는 남매도 있으니까."
머릿속에 떠올라지는 한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와 달리 진갈색 머리에 총명한 눈동자. 머리색만 빼면 나와 외모가 많이 닮아 처음 보는 사람들을 우리를 친남매라고 착각하기도 했었다. 나 또한 그 사람을 동경하면서 잘 따랐고, 그 사람도 날 제법 귀여워해 줬었는데... 지금은 진짜 남매가 된 동시에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지.
좋지 않은 생각들을 떨쳐내려 눈을 꽉 감았다. 후드에 가려 보이진 않겠지만 내 표정이 나빠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린다. 그 시선들 속에는 기분 나쁘다든가, 꺼림칙하다든가, 괴물 취급하는 시선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나에 대한 걱정만이 담겨있을 뿐. 그 시선들이 고마워서 찌푸려졌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며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데워진다.
"혹시 남동생이나 오빠라도 있는 거야?"
"...오빠가 한 명 있긴 있어요. 아, 출구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여름 기온이 확 올라오며 태양의 뜨거운 빛이 우릴 감싸주었다. 새삼 유령의 집 내부가 시원하고 상당히 어두웠던 것을 깨닫는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자동으로 찌푸려지고, 작은 소동 때문에 피곤해졌지만, 막상 나오니 상쾌한 기분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터널 속을 드디어 빠져나왔다는 느낌.
더이상 내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기에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빨간색을 벗고 원래의 검푸른 색으로 돌아온 내 두 눈은 내 곁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작게 한숨을 쉬고 있는 키도, 기지개를 피는 모모, 어느샌가 휴대폰에 돌아온에네를 보고 놀라는 키사라기씨. 내가 보통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봐주지 않는 사람들.
이 애들이라면. 메카쿠시단이라면 내 얘기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나조차도 꺼내 보지 않는 그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이 붉은 눈을... 어쩌면 그날의 전말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글쎄, 지금으로선 그것까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지금은─
"자, 그럼 다음은 어디 갈까?"
"일단 다른 애들이랑 만나도록 하지. 키사라기, 세토한테 전화해볼래? 난 카노한테 해볼 테니까."
"네, 단장님!"
"그런데 마리는 어디 있을까..."
"마리라면 여기 오기 전에 얼음 대미궁에서 봤었어."
"음... 여기 오기 전이라면 이미 그 근처에는 없겠네요. 그냥 돌아보는 수밖에 없나."
"걱정하지 마, 이치카쨩! 세토씨랑 같이 있다는 모양이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전했습니다, 단장님!"
"응. 카노도 이쪽으로 온대. 좀 기다려보자."
"알았어."
그냥 지금은 모두와 이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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