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닻 / Pale hero
‘드디어 집에 왔어….’
안도와 불안이 섞인 숨이 밤공기에 섞여 사라졌다.점점 커지는 고동은 곧 만날 하나뿐인 소중한 자매에 대한 기대인지, 혹은 이제 마주해야만 하는 이기심의 전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샛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영웅이 되었을 때 닻별이 선물로 준 회중시계였다. 장미 무늬가 새겨진 은빛 표면은 반들반들한 재질에 더해, 닻별을 생각할 때마다 쉴 새 없이 닦다 보니 언제나 새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그 속에는 자정을 넘긴 밤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불 켜진 곳 없이 어둑한 창문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달과 별을. 시계 뚜껑을 열자 12시 13분을 가리키고 있는 뾰족한 바늘이 더욱 샛별의 마음을 찔렀다. 샛별은 화풀이하듯 뚜껑을 탁 덮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낸 인사는 오히려 스산하게 들렸다. 불이 꺼진 집 안에 샛별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샛별은 흙으로 더러워진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이것 또한 닻별과 같은 것으로 맞추었다. “추억이 또 하나 늘었네”라며 수줍게 슬리퍼를 끌어안던 닻별의 미소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슬리퍼는 샛별은 소리도 없이 부엌으로 이끌어 주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샛별은 자신의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닻별이 없었으면 했다. 2인용 침대의 커다랗고 푹신한 이불을 덮고, 꿈속 어딘가 슬픔이 없는 곳을 거닐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엌에 들어섰을 때, 샛별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작은 등이었다. 언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샛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닻별의 옆에 앉았다. 닻별은 식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샛별은 마법으로 거실의 담요를 끌어와 닻별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초여름이어도 아직은 해가 지면 서늘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부엌에서 잠들면 감기에 걸릴 것이 뻔했다. 방으로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만, 아직은 닻별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닻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닻별의 머리맡에는 하얀 머그잔이 있었다. 바닥에 말라붙은 코코아 자국은 닻별이 잠든 지 오래되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은은하게 남아있는 달콤한 향은 샛별의 허기진 위장을 자극했다. 하지만 냉장고를 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앉아서 닻별을 바라보고 싶었다. 창으로 들이친 창백한 달을 피해 새까만 그늘 속에 숨어서.
‘내 마음은 너만이 알아.’
샛별은 입 속으로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쌍둥이인 만큼 생각이 겹치는 일도 많았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잦았다.
가볍게 손을 들어 샛별은 닻별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 소중한 것은 닿는 것조차 두렵다. 잠시 손을 허공에 멈추고서는, 샛별은 다시금 손을 뻗어 닻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연분홍색 파도가 부드럽게 감겼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따듯한 뺨.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샛별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시곗바늘은 12시를 넘은 지 오래였다. 6월 2일의 12시를. 그만큼 샛별은 6월 1일로부터 멀어졌다.
냉장고에는 특별히 닻별이 어제를 위해 구운 케이크가 있을 것이다. 찬장에는 티타임을 위해 준비한 찻잔과 새로운 테이블보가 있고, 장미 정원에는 정성껏 가꾼 연분홍색 장미들이 만개해 있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가면 닻별이 준비한 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샛별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마법을 걸고 싶었다.
다시 어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샛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곤함에 쿡쿡 쑤시는 눈은 어제 일을 끄집어냈다. 으레 새벽은 억지로 자신의 연약함을 들춰 눈앞에 들이미는 법이다.
원래 복귀는 어제여야만 했다. 어제, 6월 1일에.
이번에는 장장 두 달에 걸친 순찰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다른 마을까지 순회하다 뜻하지 않게 일정이 늦어졌다. 습격받은 사람들을 돕고 치료하며 마물을 토벌했다. 그렇게 봄이 모두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벚꽃이 지고 장미도 하나씩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법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마법사는 한 명의 독립된 개인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나 마을의 영웅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샛별은 보리마을의 영웅이었다. 마을에 일어나는 모두 샛별이 책임져야 했다. 샛별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타인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마법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렇기에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조하는 일부터, 다른 지역까지 지원을 나가 싸우는 위험한 임무까지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닻별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면, 영웅만이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샛별은 닻별처럼 두 팔을 포개어 식탁 위에 엎드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닻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닻별은 샛별이라는 바다의 닻이었다. 지난 두 달간 그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어깨가 쿡쿡 쑤셨다. 영웅의 상징인 푸른 케이프 아래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위에 달린 견장도 거추장스럽고 무거울 뿐이었다. 이대로 전부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마지막은 닻별의 영웅으로 있고 싶었다. 적어도 마지막만은.
“닻별아, 내 마음은…….”
네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샛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끝맺지 못한 속삭임이었다. 설령 혼잣말이라도 들켜서는 안 된다. 그 어떤 평화도 너와 함께하는 시간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샛별은 닻별이 없는 시간 동안 깨달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죽어가고 도움 청하며 울부짖고 있어도, 닻별과 장미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서로를 마주 보고 푸른 눈동자에 잠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샛별이 되고 싶은 것은 보리마을의 영웅이 아닌, 닻별의 영웅이었다. 그러니 이 결단은 너에게 돌아가는 당연한 귀로였다.
다음날, 샛별은 영웅을 그만둔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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