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카이진 / Life must go on

XX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방 같은 것은 창작물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형편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지, 본인 몰래 방으로 옮기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납치는 엄연한 범죄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유우기는 ‘나올 수 없는 방’이라는 설정을 현실과 동떨어진 ‘드립’으로만 수용해왔다. 유튜브나 트위터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체인이 너무 쩔어서 이마 치다가 거북목 치료됐다”라거나 “가둬놓고 듀얼만 시키고 싶음” 같은 말들과 동일한 선상에 있었다는 말이다.

카이바 세토라면 몰라도 무토 유우기는 인터넷과 SNS에 친숙했다. 팔로우 수는 고작 서른도 되지 않았으나 몇십만에 달하는 팔로워 덕분에 인터넷 밈에도 정통했다. 개중에 독특한 문장이 있으면 친구인 죠노우치에게 공유해 같이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말을 생각해내지? 대단하다, 라면서.

하지만 장본인이 되고 싶다는 뜻은 결단코, 맹세코, 절대로 아니었다.

유우기는 이게 꿈이라면 얼른 깨길 바라는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만이 겨우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고, 두 사람 앞으로는 거대하고 새까만 바다가 눈길 닿는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떠밀려 온 파도는 둔탁하고 음울한 소리를 내며 발을 적셨다. 그 차가운 온도가 생생한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나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

유우기가 암담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옆에서 카이바가 평소보다 한 톤 더 낮은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대놓고 유우기를 꾸짖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카이바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역시나 화면은 본 적도 없는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꺼지지도 않고 켜지지도 않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카이바는 짜증을 내며 휴대전화를 다시 코트 안쪽 주머니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GPS가 먹통이니 KC에서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유우기는 알 수 있었다. 카이바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플라나의 힘으로 이동된 다른 차원이니까.

가장 최초의 과실이 카이바에게 있는지 유우기에게 있는지는 인제 와서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자석도 N극과 S극이 각각 따로 있으면 소용이 없듯이 이 상황 역시 두 사람의 힘이 충돌했기에 생긴 일이므로.

유우기는 자신 안에 존재하던 플라나의 기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따금 예감이라는 형태로 미래의 흐름이 느껴졌고, 드물게는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이바도 명계에 다녀온 이후 종종 거리감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며, 집중할 때나 피곤할 땐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바 또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둘은 같이 있을 때, 특히 말다툼을 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을 때면, 멀쩡한 형광등이 깜빡거리거나 전화가 걸려 오지도 않았는데 벨 소리가 울리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다. 유우기는 이제야 후회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심하게 언성을 높이다가 당최 어딘지도 모를 바닷가에 떨어지게 될 줄 알았더라면.

심지어 여기에서 탈출해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서로에게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인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물론 이곳에는 ‘진솔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쓰인 팻말도 슬로건도 없다. 하지만 유우기가 “모쿠바 군이 걱정할지도 모르겠네”라고 말했을 때 분명히 두 사람은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쿠바가 두 사람을 보고 놀라 달려들던 찰나에 다시 이 망할 바닷가에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 뒤로도 두어 번 정도 아주 잠깐 현실에 되돌아갈 수 있었고, 유우기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일치하고 또 서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때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유우기는 이것이 마치 거대한 XX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의 설정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래도 동인 창작에서처럼 야한 행위가 아닌 게 어디인가, 라는 사실만이 한 줌의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뭘 말하면 되는 거지?”

카이바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유우기도 힘이 빠져 모래사장 위에 대충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 아래에서 모래가 부드럽게 무너지는 결이 느껴졌다.

“뭐든 좋아. 되도록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면 더 좋고.”

말은 쉽게 했지만, 유우기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것,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대를 온전히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게 간단히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온통 러브 앤드 피스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게다가 당장 유우기마저 무엇을 이야기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제 처음 마셨던 체리 맛 콜라가 맛있었다는 것도, 다음 주에 있을 죠노우치 군의 대회가 신경 쓰인다는 것도, 요즘 들어 잠이 잘 오지 않아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도, 그 전부가 유우기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카이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역시, 네 녀석이 이젠 블랙 매지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초구부터 꽉 찬 직구였다. 아니, 어쩌면 데드볼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끔하게 정전기가 일어난 듯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이 너무나 썼다. 유우기는 일부러 카이바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수평선에 시선이 못 박힌 척했다. 카이바는 그런 유우기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당황하지도 화내지도 않는 태도는 답답함에 부채질을 할 뿐이었지만, 카이바는 신경질을 억누르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 세상에 블랙 매지션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녀석 하나뿐인 줄로만 아는 건가? 정말 우습기 짝이 없군. 네 녀석이 그런 몬스터를 사용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과거에 사로잡혀 봤자 네 전술의 깊이만 얕아질 뿐이다.”

카이바가 하는 말은 비록 말투는 거칠어도 전부 타당했다. 최근 몇 년간은 덱에서 블랙 매지션을 빼고 사용했고, 그마저도 듀얼을 몇 번 하지도 않았다.

그를 잊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떠올리면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를 추억할 때마다 유우기는 옛날 앨범을 감상하듯이 즐겁고 그리웠으며, 그만큼 외로워졌고 또 공허해지곤 했다. 한꺼번에 떠오르는 상반된 감정은 너무나도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유우기에겐 그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했다. 친숙하고 어색했다. 허무하고 충만했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형태를 한 슬픔이 투명한 창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은 소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고.

유우기는 무릎을 세우고 팔꿈치를 받쳐 턱을 괴었다. 카이바가 입을 다물자 귓가에는 스산한 물결 소리만이 가득 찼다. 바통은 유우기에게로 넘어왔다. 진솔한 대답을 해야만 했다. 괜찮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다정함으로 거르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어쩔 수 없는걸. 심란해지니까.”

유우기는 애써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이게 다 카이바 군 때문이라는 거 알아?”

그 질문에 카이바가 인상을 찌푸리며 유우기를 내려다보았다. 유우기는 후, 하고 한숨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바 군이 그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줬잖아. 그때 말이야, 나는 카이바 군이 미웠어. 싫었고, 부러웠어.”

듀얼 디멘션 시스템으로 그를 만나러 명계에 간다. 유우기는 카이바의 행동에 경악한 한편, 미약한 동경 또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불확실한 여행이었고,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현세의 소중한 것을 두고 떠날 정도로 강렬한 신념과 감정,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력까지도 유우기에게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모쿠바가 유우기에게 디멘션 시스템을 써보겠느냐고 물어봤을 때, 유우기는 차마 그 자리에서 곧장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자신의 다정함을 지키기 위해 유우기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카이바 군은 과거도 현실도, 좇아가고 있는 상대의 추억 속의 자신마저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카이바 세토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유우기는 원망했고 선망했다.

카이바는 표정을 풀고는 유우기의 눈길을 따라 바다로 시선을 향했다. 잿빛 바다는 누군가가 자꾸만 흔들고 있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마음만으로 충분한데도.

“그건 결국 네 놈이 그 녀석에게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이라는 거겠지. 나와는 달리 직접 네 손으로 그 녀석을 묻었으면서 말이다.”

카이바는 팔짱을 끼고는 약간 누그러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카이바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탈력적이고 느슨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녀석을 생애의 라이벌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녀석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싸움의 의식에도 부르지 않았지만, 그 이전에도 듀얼을 신청하면 친구를 구해야 한다거나 증오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제대로 마주해주지 않았다. 디바와의 듀얼에서도 유우기가 쓰러졌을 때에야 겨우 강림하지 않았던가.

카이바에게 패배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도 죽음의 체감을 안겨준 그의 심장에 칼을 꽂을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양부에게 그러했듯 언젠가는 판을 뒤집고 자신이 이길 것이며, 그를 정복하는 것으로 새로운 생을 부여받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막상 카이바는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제 삶을 난도질하고 무너뜨린 사람에게서 철저하게 주변인으로 밀려난 인생, 태양의 가호가 미치지 못하는 그늘의 삶이란 얼마나 너절하고 비참한가. 그 현실을 받아들여 버리면 그동안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서슴지 않고 저질렀던 행위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진실 역시 인정해야만 했다. 카이바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제 인생을 통째로 부정해버리면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유우기와의 듀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소 무모한 여정이었지만, 그와의 감정에도 매듭을 짓고 또 다른 운명의 실을 찾으러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동생과 충실한 부하, 이제는 친구가 될 수 있을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후훗, 카이바 군답네.”

카이바가 덧붙인 말에 유우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예전 같았더라면 카이바는 자신을 비웃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장난 정도는 가볍게 넘기는 여유를 갖추었다. 유우기도 마찬가지였다. 복받치는 눈물 없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기억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은 그가 없는 미래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손잡이 없는 문, 대본이 사라진 무대, 텅 빈 자리. 결여된 곳을 인식할 때마다 카이바도 유우기도 겁이 났고 두려워졌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겨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삶은 너무나 길고 그 외에도 고통스러운 일은 끊임없이 쏟아져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하게 버텨내는지 시험할 것이다. 차라리 빈 곳을 끌어안고 눈물이 고갈될 때까지 한탄하며 울다 쓰러지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감하지 못해도 서로를 많이 닮았고,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어도 비슷한 곳을 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카이바 군은 나랑 꽤 닮았구나. 그래서 항상 싸울 수밖에 없었나 봐.”

“그럴지도 모르겠군.”

두 사람은 어째서 그들이 이곳에 보내졌는지 알았다.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고 끝없이 흔들리는 파도만이 있는 이곳에. 메마른 풍경에서 눈을 떼고 유우기는 카이바를 바라보았고 카이바는 고개를 숙여 유우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순간 강하게 현기증이 일며 눈앞에서 새하얗게 빛이 번졌다.

“형님! 유우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눈을 뜨자, 안개도 바다도 온데간데없이 KC의 사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일정하게 빛을 내리고 있는 형광등, 정확하고 빠르게 신호가 잡히는 휴대전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쿠바까지.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카이바와 유우기는 멀뚱히 눈을 마주하고는,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라지기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고 모쿠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겠지만, 쑥스럽고 바보 같으니 당분간은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다녀왔어.”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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