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슈/피트] Merry Christmas
시니어슈슈가 있지만 커플성 글은 아님
"아빠!"
동그란 털공이 달린 모자를 쓴 아이가 남자에게 달려갔다. 내리는 눈을 피하기 위해 경찰모에 비닐을 쓴 순경은 영 못 미덥다는듯이 말했다.
"아버지 되십니까?"
곱슬머리에 흰 안대를 찬 남자는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남자의 다리에 바짝 붙자 남자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뻣뻣하기 그지 없는 동작에 경찰의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추위로 코가 빨개진 그의 파트너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크리스마스라서 안 그래도 복잡한데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게 두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불편해서 빨리 쫓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는 오른손목을 뚝 떼어냈다. "손이 이래서 넘어지면 크게 다칠수도 있으니까요." 질문한 경찰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파트너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둘이라는 것은 이래서 좋다.
"신분증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트 안 쪽에서 가죽 지갑을 꺼내들어 펼치더니 아이에게 신분증을 뽑아 달라고 내밀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경찰들은 더 확인할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남자와 아이는 경찰 둘의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멀어져갔다. 경잘들이 원래 크기에서 반절이 될때까지 멀어지자 남자가 말했다.
"난 클라우스라고 한다."
"저는 피트에요."
둘은 잡은 손을 살짝 흔드는 것으로 악수를 대신했다.
늦은 밤 다이너에 종이 찰랑하고 울렸다. 가게 안은 찰랑거리는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부직포 사슴뿔을 단 종업원이 손님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이스크림 플로트요!"
피트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동작인데 왠지 눈길을 떼기 어려웠다. 최근에서야 어려운 단어를 배우기 시작한 피트는 그 모습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고민하며 카운터로 향하던 피트는 클라우스에게 제지당했다.
"거긴 높아서 않기 어렵잖니."
자기 키만한 의자를 보더니 피트는 작게 아하더니 돌아섰다. 대신 창가 쪽 테이블로 달려갔다.
"아빠, 빨리 와요!"
클라우스 뒤쪽에서 누군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자 클라우스는 아까부터 궁금한것을 물어봤다.
"그래 아들아. 내가 어떻게 아버지가 된거니?"
"아빠였던 적 없어요. 이래야 다들 뭐라고 안하잖아요."
발랄한 말투에 비해 내용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클라우스의 왼손 검지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에도 이런 적 있니?"
"한 번이요. 그때 아저씨는 제가 길을 잃은 줄 알고 경찰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좋은 분을 만났구나. 다음부터는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된다."
"네, 아빠."
한마디도 질줄 모르네. 클라우스가 한숨을 쉬는 사이에 커피와 아이스크림 플로트가 나왔다. 사슴뿔을 달고 있는 종업원이 크리스마스 서비스라며 빨간 체리를 얹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명랑하게 인사하고 전투적으로 빨대를 꽂았다. 커피를 마시던 클라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저 나이때 아이들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집이 어디니? 데려다 줄게."
"저 집 없는데요?"
클라우스는 피트의 얼굴과 옷가지를 살폈다. 머리카락이 조금 길긴했지만 깔끔한 옷에 괜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거짓말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실거야."
"저보다 어린애들도 산타 안 믿어요. 아저씨."
"경찰서에 데려갈수도 있어."
"그러면 변태아저씨가 날 잡아간다고 소리 지를거야."
클라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단단히 잘못 걸려들었다. 그는 이 작은 혹을 어찌해야하나 고민했다. 아이에게 분명 문제가 있어보이긴 하지만 클라우스에게 그걸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그냥 아이를 두고 일어나도 되었지만 이 밤 중에 어린애를 길에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클라우스에게 없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짧은 바늘이 10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피트."
"왜요?"
"난 오늘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있단다. 네가 원한다면 같이 가도 되지만….."
"네 갈게요."
"........같이 가도 되지만 그 동안 약속 해줄 게 있어."
"뭔데요?"
"내가 묻는 말에 거짓말은 하지 말렴."
피트는 영 싫은지 몸을 배배꼬다가 입술을 축 떨어트리더니 손가락 세개를 접고 무명지를 내밀었다. 클라우스는 슬며시 웃으며 검지를 아이의 무명지에 걸었다.
피트가 아이스크림 플로트를 비우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라우스는 음식값을 치르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물었다. 피트는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알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 좀 더 오래 밖에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클라우스가 길치이길 바랬지만 그는 평균 이상의 방향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종업원의 짧은 말 몇마디로 금새 버스정류장을 찾아냈다. 클라우스는 정류장 근처 신문 가판대에서 관광객용 지도를 구입했다. 네모 반듯하게 접힌 지도를 펼치고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뭐 찾아요?"
"네 집."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클라우스는 그 말을 모른척 하며 시내버스표를 구입했다. 버스가 오길 기다리며 서 있는데 피트가 클라우스의 바짓단을 잡아 당겼다.
"우리 게임해요."
"놀고 싶으면 집에 가렴."
"집 없다니까, 내가 하나 물어보면 아저씨도 하나 물어봐요. 다 말해줄게요."
"그럼 네 집 어디있니?"
"아저씨는 왜 도망치고 있어요?"
허. 클라우스는 피트의 볼을 문질렀다. 요 맹랑한 것 봐라.
피트가 경찰에게 붙들린 거리는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루미네이션으로 일렁거리는 곳이었다. 광장 한 가운데는 건물만큼 키가 큰 트리에는 세상에 예쁘고 귀엽다는 것은 다 걸려 있었다. 클라우스는 아주 오랫동안 그 트리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떨어진 곁길에 세워진 차안에서 담배 연기 두개가 피어올랐다. 남자 둘은 클라우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매일 밤 몰래 심야 추리극을 봤던 피트의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느와르가 펼쳐졌다. 마피아의 돈을 훔지고 달아난걸지도 몰라. 저 눈도 그래서 다친거일거야. 약점이 있으면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란 판단에 피트는 클라우스에게 달려가 안겼다. 다행스럽게도 클라우스는 피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었고 둘은 같이 버스를 타게 되었다.
"아저씨 이름은 뭐에요?"
"클라우스. 네 이름은?"
"피트, 아저씨 마피아에요?"
"아니, 너는 가출한거니?"
"전 집 없어요. 안대한 거 진짜 다쳤어요?"
평소라면 대꾸 안 했을 물음에 클라우스는 안대를 살짝 까서 보여주는 것으로 답했다. 푹 꺼진 눈가에 피트는 저도 모르게 우와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진짜 마피아인가봐. 피트가 오해를 쌓는 동안 클라우스는 다른 사람의 흉터를 보고 그러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어가자 둘은 자리에서 출렁거렸다.
"이제 그만하자."
"재밌는데 왜요?"
"넌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게 없잖아."
아이는 입술을 쭉 빼고 바람을 불었다. 푸흐흐하며 침이 튀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장갑 낀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네 부모님이 걱정하실거야."
"그 사람들은 우리 엄마 아빠가 아니야."
토라져서 투정부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낮추자 피트는 창가에 고개를 박았다.
"피트?"
"그냥….그냥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야.…..나도 내 집이 있으면 좋을텐데."
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달래줄텐데. 클라우스는 짙은 갈색 뒷통수를 한참 바라볼뿐이었다.
클라우스가 꼭 가봐야 한다고 했던 곳은 어느 성당이었다. 성당 안에는 미사가 끝난지 한참이었지만 드문드문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클라우스는 유리장식장 옆에 비치된 함에 1달러를 넣고 컵에 든 초를 꺼내었다.
"피트, 이리오렴."
끊임없이 조잘거리던 피트는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진듯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클라우스의 곁으로 왔다. 클라우스는 피트에게 초를 건네주고 왼손 장갑을 벗었다. 세 손가락이 남은 손을 내밀자 피트는 뭉툭하게 잘린 자리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의 흉터를 그렇게 보면 안되지."
"미안해요."
피트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클라우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에 제단으로 향했다. 십자가에 다다르자 클라우스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피트는 그 모습을 보며 엉거주춤 따라했다. 클라우스가 미소지었다.
"꼭 따라할 필요는 없어."
그는 한 쪽에 촛불이 잔뜩 켜진 곳으로 피트를 이끌었다. 푸른 띠를 두르고 왕관을 쓴 성모마리아의 발치는 클라우스가 가져온 것과 같은 초가 가득했다. 피트가 초를 내려놓자 클라우스는 긴 나무 막대에 불을 붙여 건네주었다.
"네가 붙여보렴."
피트가 초를 키자 클라우스는 나무 막대에 붙은 불을 불어껐다. 둘은 한참을 조용히 촛불들을 바라보았다.
"별이 내려온 것 같아요."
"그러네."
피트가 클라우스에게 몸을 기대었다. 클라우스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네 말이 맞아."
"뭐가요?"
"난 도망치고 있어. 하지만 이제 곧 잡힐거야."
"잡히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무일도. 한 번 더 도망간 것 뿐이지."
그는 아주 지친 얼굴로 안대를 벗었다. 푹 꺼진 왼쪽 눈이 일그러진 것 처럼 보였다. 피트는 클라우스가 쓰러질까봐 걱정되었다. 의자에 앉자고 말하자 그는 가만히 아이의 손길을 따랐다. 클라우스는 옆에 앉은 피트를 끌어당겨 안았다.
"너에게 집이 생기길 기도할게. 밤 늦게 돌아가지 않으면 널 찾아 헤멜 그런 집을."
성모의 촛불 아래 길 잃은 두 어린 양은 눈을 감았다.
클라우스가 눈을 떴을때는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언뜻 드리우는 창밖의 불빛에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카잔스키 소장."
"왠일인지 깨질 않더군."
"피곤했나보지. 같이 있던 애는?"
"집으로 보냈다."
주소를 말했어? 클라우스는 왜인지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하더니 애들이란. 카잔스키 소장은 쉬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문을 열다 말고 클라우스를 돌아보았다. 카잔스키는 복도에서 쏟아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이가 네게 말을 남겼다."
"무슨 말을?"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고, 도망치지 않을 집을 주시라 기도한다 말했다."
클라우스는 얼굴을 보일까 두려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불을 켜지 않았지만 카잔스키가 제 얼굴을 훤히 들여다볼거라 믿었다.
"좋은 밤 되시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얼굴없는 목소리가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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