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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amh & Co.

“너 서점 물려받아 볼 생각 없느냐?”

“예?”

이게 무슨 오밤중에 자다 깨서 고양이랑 키스하는 소리야? 책장을 정리하던 니므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 데클런 영감을 돌아봤다. 영감, 벌써 노망났소? 아니면 이 서점 압류라도 당했어? 가을과 겨울의 경계. 수요일, 오후. 창밖에선 폭우 중. 니므가 호그와트를 졸업한 지 몇 달이 지난 날, 그리고 홀로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지 딱 보름이 된 날의 일이었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저거. 둘 다 아니니까 웃기지 말아라. 내가 저게 뭐 예쁘다고 이딴 소리를….”

데클런 영감에게선 익숙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데클런, 지난주에 알피 부인이랑 싸운 건 아는데, 그럼 먼저 연락을 해야지 나한테 이런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니므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책장을 마저 채웠다. 구석에 쌓이려는 먼지를 털어내고, 반듯이 이어지는 책등을 쓸어본다. 끔찍하고도 익숙한, 평화롭고도 평범한 날이었다. 서점이라, 서점…. 내가 주인이라고? 그건 귀찮아서 싫은데. 지금처럼 적당히 월급이나 받어먹고 책임은 되도록 적게 지는 입장이 제일 마음 편하지.

“끝까지 들어보기나 해라, 이놈아. 내 아들놈이 스코틀랜드에 산다는 건 너도 알지?”

“음…. 그랬어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남한테 관심 좀 가지라는 잔소리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처먹겠지만, 이 정도는 좀 기억하고 살아라. 너 그러다 어디 가서 크게 데이는 수가 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스코틀랜드가 뭐요?”

“거기서 내 아들이 고서점을 운영한다고 했었…지만 너는 기억도 못 하겠지. 아무튼 그놈이 그랬는데, 손주놈 학교 때문에 런던으로 이사할 작정이란다. 게다가 그놈은 일을 새로 구했다는데—”

평소답지 않게 길게 이어진 데클런 영감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고서점의 성지와 다름없는 스코틀랜드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아들이 자식 교육을 이유로 이사를 하게 됐고, 주인 잃은 서점을 물려받을 이를 찾고 있다는 것. 에든버러에 있는 서점인데, 여느 서점이 다 그렇듯 매출은 그리 좋지 못해도 나름 역사가 있는 공간인데다 희귀한 고서적을 다루는 곳이라나 뭐라나.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라…. 게다가 서점 주인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가 살면서 생각해 본 일의 수가 뭐 얼마가 됐겠냐만은. 대가 없이 서점을 물려받을 기회는 흔치 않다는 둥, 뒤따르는 데클런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짧게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온가족이 런던으로 이사한다고? 어디로 이사할 생각이려나. 호그와트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는 한 번도 다시 가본 적 없는데, 많이 변했겠지. 런던, 런던이라…. …조금 부러울지도 모르겠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려는 니므를 현실로 끌어올린 건 데클런 영감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주 속물적인 단어들이었다. 잠깐, 데클런. 방금 뭐라했어요? 서점 건물을 그대로 주는 건데, 그 위에 플랫이 딸려 있다고요?

“그래, 이놈아. 내가 너 애답지 않은 거야 진작 알았지만, 자가니 건물이니 하는 단어에 냉큼 반응하는 걸 보니 이렇게 싹수 노란 놈이었나 싶다.”

“지금은 영감이 무슨 매도를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 얘기나 자세히 해봐요. 그러니까, 서점 위에 있는 플랫에서 내가 살 수 있다고요? 심지어 두 개나 있어서 하나는 세를 놓아줄 수도 있고?”

“이 정신빠진놈. 낡았고, 넓진 않아도 있긴 있다. 어린애 하나를 키우는 세 가족이 살만큼은 됐어.”

자가, 그리고 독립! 이렇게 달콤한 울림이 또 어디 있던가? 니므의 눈빛이 드물게 총기를 띄었고, 무표정한 얼굴이 생기를 뿜었다. 열여덟에 건물주가 되고, 자가를 마련하고, 자기 사업체를 가진데다 세입자를 둔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 이보다 더 화려한 수식이 있을 수 있을까?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지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은 익숙했다. 어차피 스코틀랜드라 해 봐야 영국이고, 니므는 마녀였다. 장거리 이동 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다가 앞으로의 계획이 없던 와중 타인이 잘 짜인 계획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 없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니므의 N.E.W.T.s 성적은 우수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니므는 그 어떤 취업 활동도 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머글 사회의 아일랜드로 돌아가길 택한 바 있었다. 그야 ‘마녀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로 하고 싶은 일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문제라면 ‘프라이머리 스쿨 이후 아무런 행적이 없는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 또한 머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 정도일까. 데클런 영감의 제안은 망할 현실 속에서 나타난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니므는 냉큼 승낙의 말을 입에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다. 활기찬 긍정이 혀 끝에서 튀어나가기 직전, 답지 않게 진중한 데클런 영감의 목소리가 니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게도 아일랜드보다는 스코틀랜드가 낫겠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데클런?

“나이도 어린 놈이 벌써 가는 귀를 처먹었냐? 말 그대로다.”

데클런 영감은 자세를 다시 잡고, 니므와 시선을 맞췄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외면하던 아주 중요한 것을, 또 한 번 타인이 강제로 끄집어내 제 앞에 놓아두고, 함께 바라볼 것이라는 직감이 찾아왔다. 당장 도망쳐, 아니 도망치지 마. 너도 알고 있잖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니브.”

아니요, 알고 있어요. 사실 알지 못 해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네가 ‘보통’과 다르다는 것 쯤은 안다. 그딴 얼빠진 표정 짓지 마.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살다보면 세상은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니까. 이래서 사람은 적당히 살고 일찍 뒈져 나자빠지는 게 마음 편하다니까. 쯧, 아무튼. 너 같은 애가 컬리지를 가지 않게, 사정이 있는 거겠지. 동물우리나 다름 없는 너희 집에서 키우는 그 이상한 고양이나, 부엉이들도 괜히 키우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안다. 멍청하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게냐? 여기는 아일랜드다. 내가 젊을 때만 해도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메로우가 해변으로 올라와 어부 청년이랑 결혼을 했어.”

“영감, 말 끊어서 미안한데 그거 예이츠가 기록한 민담이잖아요. 영감이 그 꼴을 보게, 뭐 300년은 살았어요?”

“시끄러워, 이놈아. 잠자코 들어. 네가 런던 출신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넌 아일랜드에 있을 애가 아니다. 더 큰 세상이 어울린다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헛소리를 하려는 것도 아니야. 네가 어디로든 떠나면 죽상을 하는 일이 줄어들 게 뻔해서 하는 소리다. 네가 아일랜드를 싫어하지 않는 것쯤은 안다. 네가 아일랜드를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머리카락을 그 바보같은 색으로 물들이는 일도, 이제는 다 잊혀져서 쓰지도 않는 말을 배우겠다고 기를 쓰지도 않았겠지. 단지, 아직은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닐 뿐이다. 집이 있다고, 다른 사람이 정해줬다고,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라 해서 그 땅이 네가 있을 곳이 되는 건 아니야.”

무어라 답했는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정답은 알고 있었다. 직면하지 않을뿐. 아니, 사실은 모르는 것일지도.

니므는 결국 스코틀랜드 행을 택했다. 니므가 스코틀랜드로 떠나는 날, 데클런 영감은 나와보지도 않았다. 전날 손수 작성한 두툼한 서점 운영 지침서를 넘겨주고 빨리 꺼지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부모님과 차례로 포옹을 하고, 확장 마법과 경량 마법을 건 짐가방을 손에 든 니므는 마지막으로 고양이들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지팡이를 휘두르고, 시야가 바뀐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독한 섬에서 물에 뛰어들지 않고 빠져나가는 법. 그 방법이 마녀에게는 있었다. 몹시 간단한 방법이.

*

그렇게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서점.

서점의 꼬라지를 확인한 니므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데클런 영감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댔겠지만 서점에는 아직 전화선이 열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 망할 영감의 혓바닥이 쓸데없이 길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내가 마녀만 아니었어도 데클런 영감, 당신은 말년에 교도소 구경 했을 거예요.

한숨을 푹푹 내쉰 니므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우선은 청소 마법과 정리 마법, 그리고 공간확장 마법부터. 여기에 인식왜곡마법도 좀 걸 필요가 있겠네.

할 일이 많았다. 니므는 높은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몇 번 탁탁 두들겼다. 애쉴린, 애들 데리고 저기 비켜있어. 며칠간 아주 바쁠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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